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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인생은 지나왔으며 앞으로도 나아간다. 과거에 있었던 것이 반복되어지는 경향속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오늘 나온 최신이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새로운 과학과 패션이든지 그것이 색다른 것일지라도 그것의 시발점과 모든것들은 과거에 지배를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과거가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이기도 하지만 과거를 통해 우리는 지적인것들을 담아서 현재의 모순과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우리에게 과거와 지속되는 과정속에서 진리는 그 위치에서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현재는 그것이 남아있지 않고 그것이 다른 새로운것이라는 것 뒤에 숨어버린 모습이다. 배경이 실재가 되고 실재는 배경과 구름이 되어 하늘에 걸린 그림처럼 그저 지나가는 표상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진리가 뒤에 있게 되어 새로운 것이 그것을 혼탁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현대성이다. 현대성을 없애려는 포스트모더니즘도 동일한 속성으로 새로운 것이 과거를 사라지게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대는 그것이 새로운것이고 또 색다르며 현재를 이기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과거의 연속과 그전에 있었던 인간중심적인 것인데도 말이다. 우리에겐 연속과 상응하는 반복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경향성이 있다. 인간은 반복되지 않은 요소들로 가득차서 자신이 새로운것이라고 말하지만 인간 개체 자체는 반복되어지는 경향성에서 자신을 검토하고 해석하고 또 현재를 보고 미래라고 한다. 그럼에도 또 새로운것이라는 것으로 자신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자신을 새롭게 할거라 생각하고 새로운것에 도전하여 절대적인 기준들을 만들고자 한다. 이래서 인간은 반복성속에서 반복하지 않는 요소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진리는 모순이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황폐해진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간들은 그려간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간의 역사와 상황에 부속되어진 모습으로 보기 때문이다. 공상적인 상황이 현재를 대치해서 하나님의 존재도 공상적인 존재처럼 해석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만의 경험과 역사속에서 부속적인 존재로 되어버렸다.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흐름에 하나님의 가치가 부속되어지는 경향이 되어버렸으며, 초월적이시고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균형을 상실해 버렸다. 하나님의 섭리는 뒤에 존재하고 그것은 현재의 공상적인 두려움과 우울함뒤에 머물러 있고 성도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모습을 반영해서 자신의 의욕을 완성해 가는 완전함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되어있지만 인간은 어느덧 그자리에서 자신을 우울하게 만든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호의를 가지는것만이 참된 아름다움인데 인생은 다른 것이 아름답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신에게 주어진 결속력과 어려움들을 파괴하고 자신을 갇아두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결속도 가지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을 파괴하려 둔다. 우린 무엇으로 해결을 해야 할까?왜 하나님은 어려운분이거나 우스운분이거나 시대의 모든상황에 “아, 그분 내가 알지”정도에 머물러 있을까?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인생은 아름답기에 가치를 가져야 한다. 가치를 가지지 않는 인생은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지 못한다. 참된 가치는 참된 아름다움인 하나님과 연합하는 존재만 가능하다. 우린 다시 회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는 존재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나온 시절의 위대했던 신학자이며 목사이며 성도인 사람들의 글들과 삶들을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청교도 서적을 읽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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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서적을 읽을때마다 거의 매번 주위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목회자도 아닌 사람이, 신학생도 아닌 사람이, 평신도가... 이런 말들을 내게 하고 있는 것 같으므로 절로 음지로 숨어드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이 제일이다', '영적 계시가 우선이다'하며 나와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다. 모처럼 양지로 나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교회의 독서모임이 생긴 것이다. 목사님의 추천으로 데이비드 웰스 시리즈 3권인 [윤리 실종]을 구입하여 몇 페이지를 넘기다 정말 무릎을 칠만한 내용에 경도되어 마침 발족한 모임에 책에 관한 의견을 내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좋은 기회이니 1권부터 독파해보라는 격려까지 해주셔서 '감히' 평신도 모임에서 웰스의 책을 펼치게 된 것이다. 우선 1권 [신학 실종]은 책의 상황적 한계인 미국 중심의 서술로 상당한 이질감이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데다 수준이하의 번역이 눈에 거슬려 책장 넘기기에 급급했다. 독서의 가속도뿐 아니라 내용의 감동은 바로 2권 [거룩하신 하나님]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1권이 말하고 있는 미국 교회의 상황이 결국은 그 모델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우리나라 교회의 현실과 매우 흡사한 것을 알게 되었고, 장이 거듭될수록 저자의 저술 의도가 더욱 분명해지는 까닭이었다. 번역도 일관성이 있었다. 1권에서 '현대성'에 물든 복음주의 교회의 실상에 대한 저자의 냉철한 분석과 신랄한 비판은 2권에서도 이어진다.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 기법으로 운영되는 현대 교회의 상황은 온갖 인간적 기법의 종교 행위만 넘쳐나게 하고, 이런 현상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식까지도 변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나는 현대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에 대해 변증하는 6장 '외부에 계신 하나님:하나님의 초월성'과 7장 '내부에 계신 하나님:하나님의 내재성'을 읽으면서 우리의 종교적 인식이 얼마나 자의적인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깊이 알 수 있었다. 특히 온지구의 모든 것을 털어넣어도 설명이 되지 않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란 개념에 다시 한번 눈을 뜨게 되는 귀한 계기를 얻었다. 위의 두가지 개념만 제대로 인식해도 우리의 어두운 눈이 밝은 빛을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포스트모던 문화속에서 허우적대는 복음주의적 교회의 개혁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교회는 우선 그리스도와 문화가 대조를 이룬다는 인식을 회복한 다음, 그 대조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하며, 결국 교회가 이 대조를 밝힘으로써 자발적으로 단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교회가 실제로 지향하는 바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는 자유를 단념해야 하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일을 기꺼이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런 생각은 신약 성경만큼이나 오래되었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느껴진다. 진리는 시간과는 무관하게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모르는 경배와 예배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해본다. 세상에 있지만 구별되지 않고, 교회에 있지만 거룩하지 않은 '종교인'이 아닌, 세상을 변화시켜가며 온전한 예배를 회복해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이땅에 넘쳐 흐르기를 소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