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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처음 ‘어?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이라지 않았나?’ 의아했다. 제 3자가 쓴 듯 무심한 문체. 인간의 가장 큰 벽,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존재와 그것을 너무 일찍 맞닥뜨린 자신의 아이, 그들을 맞은 자신의 감정과 태도까지. 그저 ‘옛날 어디에 이런 일이 있었대’ 남의 얘기 하 듯 쓰여있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묘사된 한 줄 한 줄에 난 오히려 슬펐다. 일상적으로 묘사된 거리, 일과, 심심한 대화, 병상의 일기. 기간을 정해두고 줄어드는 모래시계 같은 아이의 생명줄 앞에 그 무엇 하나 간절하지 않은 건 없었다. 무서운 병에 노출된 후, 아이는 고통스럽고 부모는 괴로웠지만 정작 그것을 의미하는 어떤 단어도 입으로 내뱉지 않았다 아무도. 죽음이란 것이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당연한 멍에이기에 그런 것일까, 아이의 죽음을 앞두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성장의 과정에 당연히 수반되는 성장통처럼(아이의 부모는 처음 폴린의 고통이 성장통일거라 생각했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딸아이가 죽은 긴 해가 자신의 생애 가장 아름다운 해였다 말할 정도로. 그 말을 의심했었다. 혹 인정한 뒤 찾아 올 슬픔의 늪이 두려워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닐까? 아름다웠다니, 아이의 투병에 안타까웠을 부모의 심정이야 익히 짐작이 가는데. 아이의 죽음을 맞은 부모의 가슴이 어찌 미어질지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한데. 하지만 읽으면서 공감했다. 아이가 병상에 있는 동안 아빠인 작가는 최대한으로 아이에게 집중했다. 자의로든, 등을 떠민 불행따위에 의한 타의로든. 그가 그렇게 느끼든 느끼지 않든 그때만큼은 아이를 가장 열심히 관찰(애정이 집중된 최대한의 관심)했음을 안다. 아이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똘똘하고 가엾고 애처로운 다양한 표정과 아이가 좋아했던 이야기, 인형, 한 마디의 말까지 모두 기억하고 추억했다. 죽음에 대한 다양한 감상까지도. 아이가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일 년 동안 열성적으로 하지만 담담하고 표 나지 않게 애정을 쏟았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곁에서 아이와 함께 같은 것을 보고 느끼는 마지막이 죽음이란 것이 기가 막힐 뿐 그들은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불시에 가족을 덮어버린 잔인한 불행의 장막은 그렇게 벗겨졌다. 이 책은 격렬했던 투병의 고난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아이의 죽음에 의한 슬픔에 동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불행이 남기고 간 그림자 마저 멸하기 위한 아빠의 마지막 의식. 또는 짧은 생이었지만 그에게 최고의 한 때를 경험하게 해 준 딸에게 전하는 감사의 인사. 혹은 여전히 널 사랑한다는 러브레터. 작가의 가슴에 언제까지나 자라지도 죽지도 않을 자유로운 영혼 폴린. 아이는 잠들었다. 훌쩍 날아올랐을 피터팬을 닮은 작은 천사에게 명복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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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 토해내듯이 표현할 수 도 있을 것이고, 슬픔을 슬프다고 차마 표현하지 못하고 인정하기까지의 긴 시간을 필요로하는 슬픔도 있을 것이다. 말로 내뱉는 순간 어마어마한 현실적 악몽으로 변하기라도 할 것처럼 부모는 숨을 죽이고 죽음을 앞둔 아이와 행복한 시간을, 추억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렇다. 그 아이는 영원할 것이다. 죽은 아이는 영원하다. 부모의 기억 속에 영원히 결코 자라지 않을 피터 팬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잠이 든 다음에 훌쩍 날아오르면 돼" 라는 용감한 말을 남기고 피터 팬이 기다리는 모험의 섬 네버랜드로 떠난 것이다.
세사람은 휴가차 떠난 곳에서 눈을 기다리며 즐거워한다. 허나 기다리던 눈은 내리지 않고 세살배기 딸은 가끔씩 왼쪽 팔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기는 했지만 그저 자라나는 성장통일 것이라고 가볍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 통증은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고 아이에게는 아주 드문 악성종양인 골육종으로 밝혀지면서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최대한 서로를 사랑하고 제임스 베리의 피터 팬을 읽으며 아프지 않은, 영원히 아이로 남아있는 아이들이 사는 네버랜드를 꿈꾸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폴린의 '달링' 이었던 피터 팬에게로 아이는 날아올랐을 것이다.
'영원한 아이'는 아이를 잃은 경험을 가진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의 글 속에는 지나친 슬픔을 강요하지도 눈물을 쏟아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평온한 마음을 간직한 채 산책을 하고 봄의 싱그러움을, 여름의 햇살을, 가을의 바람을, 겨울의 흰눈을 셋이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할뿐이다. 개인적인 슬픔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승화시킨 주옥같은 그의 글들이 살아 숨쉬는 것 같아 행복하기도 했고 서글프기도 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이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부모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아이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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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아이를 읽고
굉장히 두꺼운 책이 도착을 했다.
책 표지가 약간은 우울한 분위기를 드리운 표지다.
한 아이의 투병생활 그리고 죽음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온다.
성인의 투병생활이나 연세 드신 분들의 투병생활과 죽음보다 이 책에
주인공인 폴린의 이야기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어린아이 그것도 만 세살이 된 아이의 이야기 이다.
그러나 책은 극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아마도 작가의 능력이라 생각한다.
재미로 작성한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울리기 위해 쓰여진 책도 아니다.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읽기에 더없이 편한 책이었다.
많은 분량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이틀이 채 걸리지 않을만큼
이 책은 매력이 있는 책이다.
그렇다고 읽으면서 눈물을 짓지 않은 것도 아니다.
감정이입이 되어서인지 어느샌가 나는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책 제목이.
[영원한 아이]
정말 그렇다.
폴린은 영원한 아이다.
자식을 잃을 위기에 처한 그리고 아픈 자식을 가진 세상의 모든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공영방송에서도 간혹 아픈 아이들의 병상생활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대할때면 내 이야기도 아니고 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다 못해 엉엉 우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책은 어른스러운 아이의 이야기도 있다.
한 아이의 투병생활과 죽음이 그려진 이책을 읽으면서 슬픔이 밀려드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어린 아이의 어른스러운 모습은 더욱 그러했다.
피터팬을 좋아하는 아이었다.
아이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면 더욱 마음이 아려온다.
폴린은 그렇게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누구나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지만 폴린은 영원한 아이로 기억이
되길 원한다.
책이 주는 묘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느낌이다.
세상의 수많은 아이들이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고통이 없이 아픔을 덜 느끼기를 이 책을 통해 기도해본다.
천사와도 같은 아이들에게 늘 웃음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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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사랑하는 아이를 잃는다는 건 경험해보지 않은 부모들이 감히 어떻다고 이야기 할 수 없을 것 같다. 옛말에도 흔히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 걸로 보아 아이를 잃은 부모가 어떠한 상태가 될지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이 뒤지겠냐만 병으로 인한 고통 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있는 그들의 애가 타는 안타까운 사랑에 정상적인 부모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행동하기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을 테지만 폴린의 부모가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행동은 무척이나 바람직해 보인다. 가슴에 플라스틱 관인 카테터를 달고 있는 아이에게 부모는 눈물로 나날을 보내거나 막연한 동정도 보이지 않는다.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아이를 사랑하며 아이에게 몰두하고 아이에게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한 부모를 보며 자신도 또한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듯 더 큰 자신감과 쾌활함으로 어린 계집아이는 부모를 대하며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이렇듯 부모의 행동에 따라 아이의 태도도 달라지는 것인 듯싶다. 머리가 다 빠진 폴린을 부끄러움도 연민도 없이 눈으로만 좇는 세상 사람들에게 폴린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머리를 보일 수 있는 당당함에 내가 미안해진다. 나 또한 폴린의 태연한 마음과 당당함에 감탄의 박수와 함께 나 또한 눈으로만 좇는 그들이지 않았을까 하는 미안한 마음도 실려 보내고 싶다. 하지만 눈 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이 미치도록 사랑한 딸이 죽어간다면... 그것도 골육종으로 세살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아온 아버지의 눈에는 세상을 향해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 같다. 제 3삼자의 시각에서 써 내려가는 듯한 시적 언어와 문구체가 나의 이러한 느낌을 뒷받침해주는 것 같다. 이 글의 작가 포레스트는 브르통이 딸을 품에 안고 있었던 사진을 연상한다든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쓴 배경이 그의 죽은 아들을 자기 삶 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였다는 글 속 내용에서 느껴질 수 있는 게 딸 폴린의 죽음을 그가 인정했던 극작가들과 비교하며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것 같다. 아마 폴린도 피네간의 경야에서의 루시아와 같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부드러운 비밀인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수술 후에 나타난 잠시간의 희망이 새로운 기쁨으로 가득하다 사라지게 되면서도 아버지와 엄마는 폴린에게 최선을 다했다. 충분히 폴린과 시간을 보내며 놀아주고 이야기하며 폴린을 마음속으로 심어놓았기에 그들은 이제는 폴린에게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상 속 부모와 동생을 만들어내는 폴린을 보는 부모는 차라리 폴린의 꿈과 함께 불행으로부터 영원히 보호되길 바랐을 것이다. 폴린과 여행을 하며 책 속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죽음에 대한 말 없는 공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다. 말라메르의 병들어 죽어간 아들이나 위고의 죽어 건 딸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고 있는 부분에서 그 또한 공감하고 자식을 잃고 광기어린 삶을 지탱해 낼 수밖에 없었던 아픔에 대해 위안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픔 속에서 성숙해 버린 폴린은 학교에서도 또래와 똑같이 동화되기가 힘들다. 계속되는 치료의 반복 속에서 크리스마스와 겹친 생일을 맞이하며 죽음을 준비하게 된다. 좋아하는 포카혼타스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결코 해적이 되지 못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피터팬의 웬디가 되는 놀이를 한다. . 세일러문 만화를 좋아하고 피터 팬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아이는 이제 현실서는 만날 수 없지만 그들 사랑 속에서, 아니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가 폴린을 기억할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가 암으로 투병하며 지켜봤던 아버지의 글을 통해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는 남은 이들의 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대단한 필적 감각과 번역이 어르러져 감동 이상의 감정을 맛 볼 수 있었다. 폴린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 부모의 기억 속에 영영 남아 있을 폴린은 영원한 아이로 남게 될 것이다. 폴린과 함께했던 추억을 회상하며 그 꼬마를 가슴 속에 영원한 아이로 붙들어 매었음 하는 바람을 할 따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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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이를 위해 쓴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작은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사실 그 아이를 영원히 종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책속에는 대화가 없는 건조한 글 뿐이지만 아이의 인생과 아이가 정말 좋아할 만한 것은 꼭 담아 두었다. 이야기는 지극히 동화같이 시작된다. 동화같은 모험과 동화같은 말투, 나는 이미 이 아이의 죽음을 알고 있었기에 동화는 얼마 못 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곧 끝도 없는 병은 시작됐다. 길고 긴 병마와의 싸움...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제 2장> 병은 심해지고 아이는 고통 받는다. 병의 급격한 악화.... 아이는 사회의 관심을 받는다. 마치 TV에 나오는 아픈 아이가 관심 받는 것처럼... 그 아이가 누구든 아픈 아이라고 불리는... 소설은 의외로 성공적인 수술을 그렸다. 마치 내가 아이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아이가 죽어버리진 않을까... 비록 끝은 알고 있었지만... <제 3장> 스토리는 이제 아이를 소설로 만드려는 준비를 한다. 갑작스런 글의 구성에 다소 당혹스럽기도 했다. 소설을 설명한다. 소설은 진실이 아니지만 진실없이는 소설도 없다고 한다. 소설은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진실의 경험이란 말을 해둔다.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쓴다. 정말 아이 그대로를 소설로 만들고 있었다.... <제 4장> 언제로 간것인지 모르겠지만 작가와 아이는 자연 속에 가있다. 정원, 아이의 수술이야기는 없고 아이는 건강하지만, 자연 속에서 자연의 순환을 깨닫는다. 아이가 건강할 때... 허구의 공간인지 모르겠지만 아이는 죽음의 문턱을 지나 자연의 순환을 묻고 있었다. 아이는 죽음에 대해 묻는다.... 아이는 죽음에 대해 알까? 작가는 건강해진 아이와 또한번 여행을 떠난다. 아이는 예술을 보고 느낀다. 하지만 아이가 예술을 정말 아는지 모르겠다. 아이는 이제 다시 돌아간다. <제 5장> 많은 문학 작품이 등장하고 작가가 나온다. 물론 그 작가들은 저자의 또다른 일부이다. 처절하고 절학하다... 문학적인 글이고 가장 문학적인 내용이었지만 나의 보잘 것 없는 문학성으로는 채 절반도 공감하지 못했다... 그 작품작품마다의 느낌이 나에게 살아있다면.... 정말 너무 아쉬운 부분이었다. 격이있고 수준있는 독자가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부분이었다. <제 6장> 작가는 만화를 쓰고, 아이는 만화를 본다. 곧 세상은 만화가 되고, 소설도 만화가 된다. 삶과 죽음이 하나의 쇼가 된다고 한다. 만화처럼 가볍게... 만화는 역시 비극적이었다. 아이는 성공적인 수술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파진다. 삶은 만화이고, 만화 속에서 그렇듯이 우리 여주인공은 끝까지 싸운다. <제 7장> 나는 또 조마조마했다. 아이는 또한번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일어난다. 아이는 약하지만 아픈아이는 강했다. 아이는 또다른 여행을 꿈꿨지만 꿈에서 깨기도 전에 또 고비를 맞는다.... 지겹게 슬프다... 이제 아이는 고통스런 결과를 맞게 된다. 아니 아이라기 보단 아이의 주변에서 고통을 느끼고 그 슬픔이 아이에게 전달된다.... 이젠 아이도 알고 있다. <제 8장> 아이는 여행을 간다. 평소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놀이공원에 간다. 이젠 아이인지 작가인지 모르겠다. 소설은 몽상에 빠져 있다가는 현실로 돌아온다. 공원 문은 닫히고, 아이는 이제 무균실로 들어간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날아갈 준비를 한다. 그리고 아이는 “피터팬” 속의 “웬디”가 된다. <제 9장> 이별은 언제나 슬프다. 아이는 떠났지만, 종이가 되어남았다. 흰색은 죽은 아이의 색깔이라 한다. 나도 이제 흰색을 볼 자신이 없다. 나는 가시고기 같은 감동을 기대했지만 소설은 아이 그 자체였다. 나의 부족한 독해력과 모자란 감성으로 소설을 이해하는데 많이 미흡했지만, 내가 어떤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영원한 아이라는 말을 전하리라는 것을 의심치는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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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펼치고 초반 부분을 읽는 내내 지루함을 금치 못했다. 정확히 34페이지 까지는 말이다. 무엇가 이야기 하고 있기는 하지만 문체가 조금 까다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읽을 수록 책에 빠져들었다.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어린 나이에 채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을 부모의 심정이란. 그 어떤 표현으로도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여느 아이들이 겪는 성장통이려니 했다가 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고서 무너지는 가슴을 어떻게 쓸어내렸을까. 차도가 있을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딸 폴리의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만갔다. 의사도 더이상 어찌 하지 못하고 병마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앞부분에서 피터팬 이야기가 왜 등장했을까 의아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점점 이해가 갔다. 폴린은 죽었지만 부모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피터팬처럼 살아 숨쉬는 존재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식이 부모보다 앞서 가면 부모는 그 아이를 가슴으로 뭍는다고 했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폴린을 보낸 부모의 입장으로서 그렇게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낸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격정적인 문제, 슬픔을 담은 표현들이 줄줄이 나와 노래를 해야 하는데 말이다.
먼저 가는 폴린이 마음 편히 갈 수 있게 해주려는 배려심이었을 수도 있고, 영원한 아이로서 아름다웠던 추억과 함께 즐겁게 기억속에 남겨두고 두고두고 생각하려한 것일 수도 있다.
담담하게 표현된 문체에서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이야기 , 그야말로 위대한 작업ㅡ책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ㅡ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직도 병마와 싸우고 있을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어린 아이들이 일찍부터 죽음과 친해지는 모습은 정말 안타깝다. 남겨둘 부모를 생각할 아이들이나, 그만 떠나보내야 할 부모들이나 두려운 것은 매한가지 일테지. 그래도, 한가닥 희망이라도 끝까지 붙잡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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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무엇과도 바꿀수없는 사랑스런 딸이 골육종이라는 병에 걸렸다.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슬픔에 잠긴다. 우리는 과연 그 슬픔을 얼마만큼 이해할수 있을까. 아이를 잃어본 부모들만이 그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해하고 눈물을 흘릴수 있지않을까 싶다. 가슴 찢어지고 숨이 넘어갈듯한 지독히 깊은 그런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사람들, 즉 아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자 불쌍하고 안됐다는 생각을 연민과 동정의 눈빛에 보태어 보내는 사람들과 이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안녕을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 가족에게 위로와 도움보다는 방해만 될 뿐이다.
우주괴물을 물리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세일러 문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소년인 피터팬을 좋아하는 폴린은 병이 발생한지 1년만에 하늘나라로 떠난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인 작가는 이 마지막 일년이 너무 아름다웠노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아이의 치료를 포기하지 않는것이 아이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거라고 말하고 골육종이 유전되는게 아니라면 다른 아이를 낳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정말 너무도 무신경하고 끔찍하고 잔인한 말이 아닐수 없다. 그의 말대로 아이는 대체용품이 아니다. 그리고 아이가 살아있기만 하다면 이대로 몇세기라도 살수있노라고 말한다.
아이가 병에 걸리면 그 순간부터 아이에겐 폴린이라는 예쁜 이름대신 "암에 걸린 아이" 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이 가족은 모든 불행과 어둠에 갇혀 눈물로 하루하루를 산다고 생각한다. 병에 걸렸어도 폴린은 깜찍하고 예쁜 미소를 지을줄 알고 엄마 아빠와 숨박꼭질 하기를 좋아하고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예전 모습 그대로인데 말이다. 또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1초를 1시간같이,1시간을 1년같이 보내고 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말이다.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싸우는 부모들을 그들이 이해할수 없는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고 뽀뽀하기도 짧은 시간인데 말이다.
아이를 잃어버린 작가의 소설 이라고 하면 우리는 눈물부터 흘릴 준비를 하게 된다. 아이의 병상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을 것이고 부모의 고통스런 낙담과 슬픔이 진하게 묻어나올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결말을 흥미진진하게 기대하고 있고 무대에 오른 폴린 가족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슬픈 모습을 보고싶어한다. 하지만 작가는 사람들이 보고싶어하는 연기를 보여주지않는다. 자신들의 슬픔 대신 사랑하는 모습을 그려내고 아이와 함께한 소중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보여준다.
죽은 아이는 영원하다. 사람들은 죽은 이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기억에서 서서히 밀어낼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러기도 한다. 하지만 폴린은 엄마와 아빠에게 결코 잊혀진 아이가 아니고 될수도 없다. 저자는 이렇게 글로 옮김으로써 아이를 영원히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폴린이 좋아하는 피터팬처럼 아이도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의 비통함과 슬픔이 너무도 아름다운 운율속에, 글 속에 담겨져있다. 그리고 글 속에서 폴린은 영원히 기억되고 추억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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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모르고 있었다. 아니면 더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내 삶은 그런 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들, 난 그것들을 보지 못했다. …(11쪽)"
어느 누군들 그런 일을 알고 있을까. 알 수 있을까.
자식을 가슴에 묻고 하늘로 보낸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아이에 대한 기억. 우연히 병을 처음 발견하면서 부터 아이를 품에서 떠나 보낼 때까지의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내어 담담하게 너무나도 담담하게 한자 한자 써내려 갑니다.
아이가 암으로 진단받고 병원 침대에 눕힌 후에도 "… 시트에 핀 축축한 태양을 둘로 가르는 창백한 선 같다.(67쪽)"
팔에서 종양을 제거하는, 팔을 절단할지도 모를 상황에서도 "… 당신은 머릿속에서 아이에게 사라진 팔에 대해 설명해줄 때 사용할 낱말들을 찾는다. 당신은 더는 붙잡지 못할 손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는 당신 자신을 본다. …(150쪽)"
마치 이 불행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제3자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듯이....
사람마다 자신의 감정을, 슬픔을 표현하는 모습이 다 차이가 있습니다. 울며 불며 슬픔을 한없이 쏟아내고 치미는 설움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끌어 오르는 슬픔을 꾹꾹 눌러가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삭여 나가기도 합니다. 이들의 슬픔을 보는 이에게는 쏟아 내어지는 슬픔보다는 억누르러 애쓰는 슬픔에 더 안타깝고 애절함이 일어납니다.
이 '영원한 아이'는 그런 소설입니다. 읽는 이에게 감정이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읽는 이에게 슬픔을 알아 달라지도, 내보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복받치는 슬픔이 새어나가지 않게 이를 꽉 깨물고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쓰고 있는 한 아버지의 모습이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죽음에 대해서, 아이를 먼저 보낸 다는 것에 대해서, 남아 있는 자들의 망각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 일깨워 줍니다.
"소설은 시간의 나무에 패인 홈이다.(164쪽)"
내가 읽은 이 소설은 아이를 먼저 보낸 아버지의 마음에 새겨진 그 아이의 기억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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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 살짝 비친 아이의 모습과 제목에서 느껴지는 긴 여운. 불투명한 색채 위에 날개를 펴고 있는 나비들은 왠지 슬프다. 500여 페이지를 읽으면서 밝은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이지만 그저 실제 이야기를 읽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아픈 아이를 지켜 보아야만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아릴까. 길지 않은 시간 동안의 일을 세밀하게 표현한 저자의 아픔이 전해오는 듯하다. 투병생활 하는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무서운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아이도 힘들지만 옆에 있는 부모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 힘들 것이다. 그런 부모의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결국에는 소리없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만 하는 그 상황이 슬프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게 사람이라지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면 너무 불공평하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아름답게 표현한 저자. 글을 쓰면서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세상에는 여전히 이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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