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에 나왔던 시인의 첫 시집의 개정판이다. 하지만 그것도 2007년도의 일이니 지금으로부터 보자면 꽤나 먼 과거의 일이다. 하지만 1959년생 시인의 인생으로 따져보자면 서른에 출간했던 시집을 예순에 다시 재출간한 셈이니 이런 저런 소회와 더불어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을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 내가 서른에 이 시집을 읽었다면 미처 공감하지 못했거나 못 보고 지나쳤을 것을, 지금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공감하고 느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새벽 세 시에 깨는, 그런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에 깨어 물을 마시러 조용한 주방에 들어갈 때의 느낌과 분위기와 몸 상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시집의 많은 부분들이 더 깊이 와닿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집의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소위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 즉 방-부엌-마당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생활의 영역과 공간이 그렇게 축소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비수처럼 꽂힌다. 마치 새벽 세 시의 고요한 주방에서 빛나는 식도처럼. |
|
춤 수억의 구더기 떼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알할랄랄라이 랄랄랄하이하이 알할랄랄라이 구더기떼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그런 이미지에 '춤'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어린 여자 아이를 상상해보자. 이 시집의 첫 시인 '춤'은 시집 전체의 이미지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시집을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물'과 '칼'의 이미지다. '집'으로 한정된 어린 아이의 세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주방에 있는 칼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이가 살면서 경험한 가장 무서운 기억은 큰 물이 넘실대는 '장마'였을 수 있겠다. 결국 이 두 이미지에 갇힌 아이라면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되었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 시집은 그 정서와 감정으로 넘실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장마'로 인해 아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아니는 무엇에 눈뜨게 된 것일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지고 심란해진다. 어릴 때 나는 딱 한 번 물난리를 경험한 적이 있다. 처음엔 무릎 정도로 찰랑찰랑하던 물이 거의 허벅지까지 왔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나에게 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지 못한 것은, 집에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집이 안전하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관망'하는 큰 물이라면, 그것은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반대로 집이 전혀 안전한 곳이 아니라면, 그 큰 물이 집까지 범람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기억은 인간의 영혼에 각인되어 평생이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까? 부디 성인이 된 그 아이가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했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