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을 쓰는데 있어서 누군가의 눈높이에 맞추어 글을 쓰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소재,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글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누구나 그 의미와 발전가능성을 어렴풋하게나마 가지고 있으며, 누구나 미래에 아주 각광받을 것으로 여겨지는 장르인 '생명공학'! 그 현실적인 문제점과 비판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많이 나왔다. 물론 미래에도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그 막연한 문제점과 아직 우리에게는 영향을 미칠지조차 미지수인 문제점 제시는 그렇게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의 실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충분히 우리가 이해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문제들을 아주 날카롭게 - 조금은 과격할 정도로 - 지적하고 있다. 그 많은 생명공학의 선물(?)들을 누를 소수의 사람이 아닌, 수 많은 불평등을 겪어야 할 다수들의 눈에서 이 책은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한번 생명공학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같이 시민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이 글을 쓴다는 독자의 변이 앞에 나오긴 하지만, 그 시민들을 참여시키기에는 너무 문제잠만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운동을 벌임으로서 얼마만큼의 효과가 있다던지, 아니면 더 포괄적으로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아갈지 하는 내용이 더욱 깊이있게 다뤄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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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자들이 자연법칙을 연구하여 내놓은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일까.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하고, 악한 얼굴로 보일 수 있다. 푸줏간 칼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흉기와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듯이.
푸줏간 칼처럼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이 문제이지, 칼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 생각할 수있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과학기술은 푸줏간 칼을 벼르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유레카'를 외치면서 목욕탕을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이 과학과 기술로 만나는 시대다.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돈과 패권을 위해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시대이다. 그러니 우리 시대 과학기술을 선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본과 패권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 과학기술은 선한 유익을 누려야 할 소비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해버렸기에 선하지 않으며, 오히려 위험하다는 평가를 내린 박병상의 <내일을 거세하는 생명공학>은 과학기술은 우리 미래를 장밋빛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생각을 돌아보게 한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사회적 합리성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라고 주장했듯이, 의사 결정에 소비자가 소외되는 한, 과학기술이 미칠 영향을 시민의 눈높이에서 민주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한, 과학기술은 차라리 위험하다. (7쪽)
자본을 위한 과학기술은 '생명공학'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생명공학마저 뒤쳐지고 만다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처럼 생명공학은 유전자 조작으로 식량을 대량생산할 수 있고, 배아복제와 생명복제를 통하여 의약품을 만들고, 장기를 생산한다면 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21세기는 '생명공학시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21세기 생명공학은 장및빛 미래를 가져다 줄것이라는 이 명제는 차라리 악몽이며, 저주라고 매완호(Mae-Wan Ho) 교수는 말했다. 박병상도 생명공학을 택하는 것은 후손과 이웃과 생태계의 생명을 악마에게 맡기는 '파우스트의 선택'이라 한다.
생명공학의 두 분야인 유전자조작과 생명복제에서 유전자 조작은 '안정성', 생명복제는 '윤리문제'로 접근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안정성과 윤리문제를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이 가져다주는 불평등까지 초래한다.
지역적 단작을 초래했던 녹색혁명에서 세계적 단작을 이끌어가는 유전자 조작 시대로 접어들면, 씨앗부터 자본에 예속되고 말 것이다. 씨앗에 맞는 경작환경과 경작 방법을 돈을 내고 도입해야 하고, 수확한 농작물을 어떻게 가공해야 좋은지에 대한 조언도 자본에게 머 조아리며 구해야할 것이다. (71쪽)
자본의 이익을 위하여 유전자 조작이 이용될 때 우리는 씨앗부터 자본에 예속되고, 내 땅과 제철에 먹던 먹을거리를 문화를 한 순간 빼앗아 가버림으로써 문화까지 자본에 의해 용도 폐기시키는 생명공학은 비윤리적이며, 치명적인 불평등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선조들이 생명과 생태계를 물려 주었듯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사람이 살 수 있는 생명과 생태계를 물려 주어야 한다. 자본이 추구하는 이익 앞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굴복하면 건강해야 할 후손의 생명을 '삭제'해버림으로써 우리 미래 세대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자본 때문에 현재 우리보다 더 악화된 불평등 세상을 물려줄 수밖에 없다.
생명 복제는 어떤가? 난치병과 불치병 치료를 위해 배아복제를 세포조직을 만든다면 과연 인류에게 질병없고, 오래 사는 꿈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생명복제 영역도 자본의 이익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당연히 자본이 이익을 누릴 때 어떤 이는 불이익과 불평등을 경험한다.
자본과 있는 자를 위한 생명공학은 모든 사람을 먹을거리와 질병없는, 오래 사는 것을 인도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착취와 고통, 불평들을 잉태하는 세상이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까지 해한다.
생명 복제 기술은 생명에 여벌을 만드는 기술이라 요약할 수 있으며 그 기술은 지불능력이 충분한 기득권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한 생명 소외 현상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인간 복제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은 이미 태어난 복제 인간도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엄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복제가 전제되는 인간의 생명은 더 이상 존엄할 수 없다.(139쪽)
결국 우리는 다른 길을 택하고 가야한다. 생명복제나 유전조 조작과 같이 현재 자신의 존재마저 부정하는 과학기술이 선동하는 황색 미래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는, 후손의 세대까지 안전하고 안정적인 삶은, 골고루 가난하게 그리고 느리게 살아갈 때 비로소 가까이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면서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적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삶의 방법을 박병상은 제시하고 있다.
생명공학이 편의와 인류 복지로 채색한 화려한 과학기술적 삶이 아니라 전통이 묻어 있는 자연스러운 삶이므로 자식과 노후, 그리고 후손을 위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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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공학과 유전자조작에 관한 것을 후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내용입니다. 제목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작금의 현실로 후손부재를 예견하면서도 그 관점에서 쓴 독특한 형식을 지녔는데요, 이런 식으로 글쓴이의 위트섞인 지적을 날카롭게 읽을 수 있는 재미를 느끼게 합니다. 과학일 때는 현상의 이면에 숨은 원리를 탐구하여 현실에 도움을 주겠지만 과학기술일 때는 자본과, 혹은 권력과 결부되어 이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초래될 불평등에 대해 조목조목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공학과 유전자조작기술의 발달이 결코 우리가 속한 인류복지에 장밋빛 환상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 인성과 모성을 부정하는 사태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고 친척아저씨같은 진심으로 언성높여 주장합니다. 어찌 보면 군데군데의 논리적 비약과 너무나 부정적인 추리에 짐짓 모르고 싶은 사실을 알게 된 마음으로 불편할 수 있겠지만, 조금만 되씹으면 몰랐으면 어쩌나 하는 안도감이 생기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인문학적인 글쓰기가 엿보이고, 일반인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방법론으로 시도된 쉬운 설명과 비유가 제법 괜찮은 속도감을 줍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처지로, 눈에 보이는 것과 아는 것은 피하겠지만 행동으로 나서거나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생기는 불안감은 풀어주지 않습니다. 사족 하나, 가장 중요한 돈에 관련한 것으로 값이 싸고, 가지고 다니며 읽기 편합니다. 사족 둘, 논술공부하는 친구들과 읽었는데 세심하게 살피면 어법에 틀리는 부분이 꽤 있어 민감한 제 눈에는 거슬렸습니다. |
| 저자의 주장은 결국 생명 공학이 그 안에서도 아직 미완이며, 그 바깥의 차원에 의해서도 심히 영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바깥이란 자본의 논리이다. 사실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오랫동안 회의적이었다. 책에서 저자가 누구를 위한 유전자 조작인지를 묻는 것처럼, 과학기술은 정작 인류의 이해득실보다는 몇몇 자본가와 권력자 등 소소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공학에 제한해봐도 아직 유전자를 조작한 음식은 그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으며, 의약품 활용에도 타협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생명 복제의 윤리 문제도 여전히 난제이며, 이로 인한 생태계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더욱이 유전정보 등으로 인해 불평등까지 생길 수 있으니 이래저래 생명공학은 난제들을 가지고 있다. 일전에 휴먼게놈프로젝트(HGP)의 형성에서 사회적 차원들에 대해서 다룬 논문을 읽었었다. 그 글의 결론 역시 HGP가 성립하는 데에는 제도적 기술적 하부구조와 사회문화적 요소들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혹자는 이런 생명공학의 문제는 합의회의와 심의민주주의가 마련되어서 그 속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였다. 그만큼 생명공학은 발전 방향의 여하에 따라서 야누스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 시급히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