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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무예와 비술을 배운 길동. 길동은 무예와 글을 가르쳐준 무학과 백학이 길동 아버지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위처럼 무거운 힘을 기르고, 독사보다 빠른 검술을 배운 길동은 산속에서 산적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흑표를 찾아가 대결을 펼친다. 흑표가 대결에 패함으로 흑표가 거느리던 산적들은 도적질에서 손을 떼고, 열심히 땅을 일구고, 남은 고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성실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흑표는 순순히 두목자리를 길동에게 내줄까? 자신의 제자였던 아이가 어느순간 커서 두목자리를 내어달라고 하는데,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지만, 흑표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때, 길동이 살려줌으로 그런 앙금은 사라진다.
이곳에서 길동은 고전 <홍길동>의 '활빈당'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형제를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함께 살수 있는 마을을 꿈꾸면서 길동은 마을로 내려간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비슷한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삼형제를 만나게 된 길동. 부모없는 삼형제가 학대받는 것을 본후 길동은 아이들과 함께 하려 하는데, 유괴범들의 농간으로 현감 홍삼표는 길동을 잡아들이게 된다. 그당시의 유괴범이라니, 말도 안되지 싶지만, 고우영작가는 인간의 욕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북방 오랑캐들 마을에 전염병이 들었는데, 오랑캐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면서 남쪽지방에 사는 어린아이가 약이라는 얼토당토않는 말을 늘어놓았단다. 그러니 아이를 유괴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부모없는 아이야 오죽 쉬운 표적이었겠는가?
유괴범들과의 한판 승부뒤에 길동이 유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아이들은 맛있는걸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유괴범들을 따른다. 요즘이나 예전이나 '빨간모자'의 진실은 그대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맛있는거 준다는 모른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는 말들을 어쩜 이렇게 듣지 않는지 모른다. 길동은? 신약의 바울의 전도내역을 들은것처럼 볏집으로 분신을 만들어 옥에 두고는 아이들을 찾아나선다. 아이를 어떻하면 찾을 수 있을까? 조직망으로 짜여진 인신매매범들. 길동의 아킬레스가 북소리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계속 움직이는 북을 만들어 내는데, 고우영 작가의 위트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트라우마인 북소리를 어떻게 극복해 낼까 걱정하는 순간, 짠하고 나타나는 스님.
고우영 선생의 <홍길동>은 이게 끝이다. 스님의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사는 곳으로 가는 것으로 말이다. 길동의 아버지는 홍익재는? 살아있다. 무학과 배학이 말을 안했을 뿐이지 역모에서도 풀렸다. 그런데, 길동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활빈당도 율국도도 없다. 어찌보면 길동이 부모때문에 원수를 갚을 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우영 작가는 우리가 꿈꾸던 길동을 통해서 약자가 살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자를 돌볼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2권의 책을 통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전 <홍길동전>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고우영 선생의 특유의 익살과 유머는 또 다른 <홍길동>을 만들어 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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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편과 2편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전인 허균의 <홍길동전>은 홍판서의 서자로 태어난 길동이 호부호형과 입신양명을 못한 한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오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율도국의 왕이 되어 뜻을 이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비석의 <소년 홍길동전>이나 신동우 화백의 <만화 홍길동>도 서자의 한을 품고 출가를 하는 도입부는 유사하다.
그러나 고우영 화백의 <홍길동>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기존의 줄거리와는 다르다. 길동이 신출귀몰한 도술을 부리는 영웅적인 초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동일하나, 이 작품에서는 서자로 나오지 않는다. 청렴결백한 홍판서가 간신의 참소로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히게 되나, 어린 길동만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하여 갖가지 모험을 겪는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원전의 활빈당에 해당되는 도둑의 무리는 있으나 서자의 한을 다룬 원작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분류하자면 홍길동보다는 일지매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할까?
그러면 이 작품의 가치는 무엇인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고우영 화백의 그린 아동 만화라는 것이다. 그의 아동 만화로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둘째, 고우영 화백의 유작에 차남인 고성언 화백이 채색을 입힌 부자 합작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선친을 향한 애정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셋째,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건전한 작품이다. 은파 격랑술, 탈신 비술법 등의 도술과 비술을 통해 아동들은 즐거운 꿈을 꿀 수 있고, 성인들은 향수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아쉬운 점을 두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홍길동의 부친인 홍판서는 뒤에 누명을 벗고 신원이 회복된다. 그래서 길동을 찾으려고 하나 실패하자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낙담한다. 그러나 길동은 부모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부에서는 가족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길동의 가족은 어떻게 된 것일까?
둘째, 이 작품의 내용은 홍길동의 원작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굳이 제목을 '홍길동'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그의 다른 작품인 <아라노와 오가녀>처럼 작가가 새로운 캐릭터의 제목으로 작품을 내는 것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