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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란 책을 읽으면서 영국이란 나라는 변하지 않으면서 멋진 나라란 생각을 했었다 이 영화에선 유지해야 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야하는 고독한 여왕을 보았다
-사람들은 눈물과 감동을 원하지
자동차 고장으로 멈춰 사슴을 보고 조용히 흐느끼던 모습은 격하게 울지 않아 더욱 애잔했고..인상적이었다
아카데미 수상자다운 헬렌 미렌의 연기는 정말 으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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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친척동생들과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요즘에는 거의 컴퓨터로 영화를 즐기기 때문에 간만에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려니까 조금은 적응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영화는 스크린으로 봐야지 제격이라는 것은 동의하게 만드는 것 같다.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역시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면 영화에만 집중을 할 수 있게 만들어서 조그마한 것도 놓치게 되는 일이 적어지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봐도 놓치는 경우가 있지만.
영국의 1997년은 이상하리만큼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그해는 라디오헤드가 록음악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성도 높은 음반인 ok computer를 만들어냈고, 버브는 브릿팝의 마지막 찬송가인 "urban hyms"를 만들었다. 게다가 하나 추가해서 제임스 '스페이스맨' 피어스는 모든 사랑의 아픔을 벗어나기 위해 우주를 유영하는 앨범인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을 만들어냈다. 영화계에서는 영국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폴 몬티"가 영국 영화의 모든 기록들을 깨부시면서 낙오된 노동자들의 애환을 슬프지만 웃으며 자신들의 운명을 노래했다.
그리고, 영국은 지난 20여년의 보수당 집권을 종결시키며 젊은 블레어를 앞세운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게 되었고.... 그리고 다이애나는 프랑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즉으며 충격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당시는 뭔가 폭발하는 시간이었다. 지금은 애완용 푸들로 전락했지만 당시의 블레어의 인기는 대통령되기 직전과 후의 노무현 만큼이나 대단했다. 둘다 지금까지의 만성피로와 노쇠된 사회를 무언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보였다. 그들에게 어떠한 비전이 있을 것 같았고, 삶의 발걸음이 보다 명랑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물론... 꿈을 빨리 깨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말로 그들의 이후 행적을 마무리하도록 하자.
이 영화는 한마디로 하자면... 아마도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는 과정에 관한 영화라고 하고 싶다. 블레어는 애시당초 자신이 그다지 개혁적이거나 진보, 혹은 전복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영화에서는 다루고 있다. 그가 냉정하고 중재와 조율을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못이겨서 그것을 행하거나 성깔있는 어머니를 달래기 바쁜 순진한 큰아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만 있다. 그의 부인이 말하듯이 그는 어차피 크게 뒤집을 능력도 생각도 없었던 인물이었다.
영화가 시작하고 블레어의 시대를 알리는 뉴스가 발표된다. 여왕은 애시당초부터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과 노동당 사람들의 무식함과 천박함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다. 그것은 그녀의 손에 인사를 하는 블레어의 예의에 섬뜻해하며 손을 빼는 모습에서 모든것을 말해준다(괜히 클로즈 업했을 것 같은가?).
영화에서 다뤄지는 다이애나 비의 죽음은 정성일 씨의 말대로 일종의 메다포다. 여기서 그녀의 죽음은 자신의 생전만큼 써먹혀지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단지 블레어와 여왕으로 대변되는 보수와 개혁, 신구세대, 지배와 피지배 계급, 왕실과 국민의 첨예한 갈등을 위한 소재에 불과하다. 꼭 그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죽음은 그것을 보다 극단적으로 만든 일이었기 때문에 사용된 것이다. 아쉽게도 영화는 다이애나에 대한 예의따위는 없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이 예상하지 못했던 여왕의 위치에 10대 시절에 올라서 처칠부터 시작해서 10번의 수상이 교체되는 동안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2차대전을 겪었고, 케인즈의 세계를 경험했고, imf로 붕괴되는 70년대와 대처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와 철의 시대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고집과 예법에 대한 철칙이 어떠했겠는가? 영화는 집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의 고집불통적인 모습을 간간히 보여주며 이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왕정을 붕괴시키는 것이 더 빠르라 생각되는 사람이다.
블레어와 그녀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이며, 약간의 모자관계의 분위기도 있다. 그리고 또한 계급적인 차이도 명백하게 드러낸다. 다이애나의 죽음에 대한 그녀의 동생의 발표에서 한쪽은 격식과 정장으로 식사를 시작하고 다른 쪽은 집에서 대충 입은 조기축구 복장과 콘푸르스트 그리고 정돈된 서재와 인형과 어지럽게 놓여진 방안으로 그들의 신분적인 거리와 계급적 거리, 그리고 지정학적 거리가 느껴지게 만든다. 같은 영국이지만 그 차이는 극단적이고 어느 한쪽이 무릎을 꿇기 전에는 결판이 날 수 없다. 그것이 계급투쟁이라는 것이고 영국이 지난 몇백년간의 계급전쟁을 통해서 깨달은 진실일 것이다.
영화는 다이애나의 죽음과 그에 따른 왕실과 국민간의 시각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그리고 그것을 중재하려는 블레어의 가상한 노력과 그의 앞으로 보여줄 무능함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블레어의 애시당초 없었던 개혁성은 그가 결말 부분에 가서 동료들에게 여왕을 옹호하는 발언을 통해서 까발려지고 그렇다고 그녀가 여왕에게 귀여움 받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며 끝을 맺는다. 그녀는 그의 손을 거부하지만 그렇다고 그와의 관계를 파국으로 이끌어갈 생각은 없다. 그에게 자신보다 앞서갈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곁에서 따라오라고 말한다. 블레어는 웃으며 알았다고 말한다. 그는 집어치라고 말할 능력도 깡도 없는 인간이었다.
여왕의 휴머니즘은 사슴에게 사냥을 피해서 도망가라고 말하고, 사슴의 죽음을 접하고 직접 목따진 사슴을 보기 위해서 친히 발걸음을 옮기지만 자신의 손자의 어머니의 죽음과 장례식에서는 입술을 꾹 다문 모습만을 보여준다. 그리고 어째서 죽은 자에 대해서 모두들 박수를 치고 애도를 표하는지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영화는 왕실에 대한 비판적 칼날도 무디고, 블레어 정부에 대한 비판도 무디다. 양쪽 다 썩 바람직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 딱히 꼬집거나 끄집어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죽은 다이애나를 끝없이 끄집어 내면서 이상한 방식으로 그녀를 다시금 이용한다. 아직도 다이애나는 착취당하고 있다. 그녀는 죽어서도 그리 편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연기진들의 흠잡을 곳이 없는 탄탄한 연기와 적절하게 사용된 자료 화면들은 실제와 영화의 차이를 최대한 좁혀냈고 감독의 시선과 해석에는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혼내기보다는 칭찬하고 싶은 작품이기는 하다.
한가지 더 아쉬움이 남는 것인 영화에서 미디어 권력의 남용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도 없이 넘어가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도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