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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더 중요한 기능은 아마도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묘사일 것입니다. 문학은 도덕적 딜레마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며, 신이 부여한 도덕적 선택에 대한 자유를 구가하게 해줍니다. 어떤 종교도, 정부도, 정치적 운동도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내 주변엔 필리핀 친구들이 꽤 있다. 미국 서부가 동부에 의해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지만 특히 남가주엔 필리핀 사람들이 많이 산다. 만약 당신이 일의 성격상 공무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야 한다던가, 연방 공무원이나 주 공무원이나 시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면 당신의 파트너나 당신의 동료 중 필리핀 사람이 적어도 1-2명은 있을 정도다. 그 밖에 매우 다양한 영역에 필리핀 사람들이 포진되어 있다. 필리핀이 미국의 식민지였고, 교육 과정에서 영어를 배워 미국의 진입 장벽이 타국에 비해 수월하다는 게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 있는 필리핀 사람들은 대개 자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년 여름에 태풍 하이옌으로 필리핀이 크게 피해를 입어 전세계적가 모두 이재민들을 구호하기 위해 힘을 모을 때, 가장 미온적이고 비협조적이었던 게 각국에 있던 필리핀 커뮤니티였다. 그들은 그들의 정부가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 성금이나 구호물품이 이재민들에게까지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국 정부에 대한 그들의 불신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에 사는 대개의 필리핀 사람들(그러니깐 필리핀계 미국인)은 미국에 대한 동경에서 미국으로 이주했거나, 혹은 정치적 이유로 더이상 자기나라에 살 수 없어 자국을 떠난 케이스들이다. 필리핀의 외세 침임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16세기 이후 필리핀의 역사는 외세 침입의 수난사로 점철된다. 마젤란이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아 1521년 필리핀을 발견한 이후 필리핀은 스페인의 무역기지로서 최적의 지역으로 인식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된 스페인의 식민정책은 19세기에 이르러 필리핀의 민족주의가 결집되면서, 1898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자 필리핀은 미국에 양도되었다. 새로운 식민지배 체제하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스페인이 종교(천주교)를 통해 필리핀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처럼, 미국은 영어를 사용하도록 교육 체계를 민족의식을 희석시켰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듬해 7월 4일 필리핀은 4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외세의 시달림에서 드디어 해방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후원을 받은 마르코스가 등장하면서 맹아를 보이던 필리핀의 민주주의는 폐기되었다. 급기야 1972년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게 되고 그 이후 21년간 독재 정치를 지속한다. 이것이 짧게 요약해본 필리핀의 역사이다. 주지하다시피 필리핀은 4세기 동안 스페인과 미국,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해방된 이후에도 마르코스의 독재정치와 군의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혹독한 시기를 겪어야 했다. [i] 『에르미따』는 필리핀이 미국과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던 시기부터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정치 하까지의 격동의 시기를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르미따 로호'의 가계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형성된 부유한 메스티소(스페인계 혼혈) '로호 가문'이다. 로호 가문의 원조이자 에르미따의 증조부인 '호세 로호'는 교육받은 메스티소로서 1896년 필리핀 혁명 때 아기날도 대통령과 뜻을 같이 하고 참여한다. 그러나 그는 1889년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재빨리 미국과 손을 잡는다. 셋째인 콘시타가 낳아 수도원에 유기하다시피 버린 아이가 ‘에르미따’이다. 이렇듯 에르미따는 대부호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유기되고 방기된다. 에르미따는 언어적 재능뿐 아니라 미모를 겸비하였지만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게되자—급기야 그녀가 가족처럼 여기던 아르투로 가족이 저택에서 쫓겨나게 되었다—‘자발적으로’ 고위직들을 상대하는 창녀가 된다. 500쪽 분량의 방대한 이 작품의 대부분은 창녀가 된 에르미따가 고위직 남성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녀는 그녀의 ‘숱한’ 남자들과 함께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을 방문하면서 필리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필리핀 현지에서 만나게 되는 정치인들과 군인들을 통해 자국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필리핀이 정말 위기에 몰려 있나요?” 그녀는 물었다. “필리핀 정부는 곧 마르코스야.” 앤드루 메도스가 말했다. “아무리 부패한 독재자라 해도 이익을 주기만 하면 은행은 무슨 짓이든 해. 당신 나라의 부유층들은 모두 미국 은행한테 이용당하고 있어. 필리핀 사람들은 미국 은행에 엄청나게 돈을 많이 예금하지. 미국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믿으니까. 당신도 알겠지. 그리고 미국 은행은 다시 필리핀 사람들에게 그 돈을 빌려주지. 그런 식의 반복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거야. 필리핀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어. 필리핀의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이야.” (pp.443-444) 이 작품의 저자인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cisco Sionil Jose)는 필리핀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동시에 부정과 부패, 독재에 저항한 필리핀의 대표적 지성이기도 하다. 특히 마르코스 독재 치하에서 소설 판매가 금지되고 연금 생활을 겪으면서도 정열적인 창작 활동과 민주화운동을 펼친 인물로, 그의 많은 소설 작품들이 필리핀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여 암담한 필리핀 현실과 정치적 전망에 대해 일관되게 발언하고 있다고 한다. 『에르미따』도 일관된 그의 작품관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에르미따’는 필리핀을 은유하며 상징하는 존재다. 그는 매우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이지만 ‘자발적으로’ 창녀가 되었다. 그러니까 ‘자발적으로 창녀가 된 존재’라는 개념은 제국주의 강대국인 스페인과 미국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발빠르게 동조하고 협조하며 이익을 구하는 지주계급과 엘리트들을 바라보는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현실 인식이다. 그리고 이후 에르미따의 여정인 필리핀 지식인들의 고민과 고뇌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미국인과 결혼해 뉴욕에 살던 에르미따가 결국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것은 호세의 민족주의자적 성격을 드러낸다. [iii] 이것은 작품 속에서 에르미따가 사랑하던 롤란드 크루즈—에르미따가 메스티사이면서 일본인의 피가 섞인 훌륭한 가문 출신의 여성이었다면, 롤란드 크루즈는 중국계 필리핀인으로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였다가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브로커로 전락하는 인물로 설정되었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과 더불어 매우 상징적이다. “저는 롤라이가 자살했다고 생각해요.” (중략) 그는 다시 아내 곁에 누웠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그는 말했다. “롤라이는 모든 상활을 꿰뚫어보고 있었어. 그는 애국자가 될 생각은 없다고 했어. 애국을 하려면 돈을 벌 수 없으니까. 조국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자살뿐이라고 했어. 아니면 혁명이든가. 나는 포브스 파크에 사는 부자들을 많이 만났지. 손님을 융숭하게 접대하는 친절한 사람들이더군. 하지만 내가 만약 필리핀 사람이라면 난 이미 혁명가가 되었을 거야.” (p.445) 의식적인 지식인들이 정치적으로 부패한 국가를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자살이거나 혁명. 그리고 대부분의 지식인 엘리트들은 정권과 부합하여 사적인 이익을 챙길 따름이다. 이것은 창녀인 어머니에게 태어났으나 학생운동에 투신하는 릴리나 대부호의 운전수인 아버지를 둔 맥아더로 상징되는 기층 민중이나서민층과는 사뭇 대조된다. 이러한 구분은 매우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하는 필리핀의 부유층과 부패한 정치가, 독단에 사로잡힌 군인들의 행태나 양심적 지식인이거나 수탈과 지배를 적극 동조하는 엘리트들, 성실하게 일하거나 운동에 투신하는 기층민들의 대립은 격동의 필리핀 현대사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왜 마닐라도 돌아왔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그녀는 모두가 떠나고 싶어하는 이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었다. 가난이 만연하고 위선과 온갖 사악함이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곳이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허세를 부렸고 지위가 높을수록 낭비벽이 심하고 제 밥그릇을 챙기기에 바빴다. 아무 의미도 없고 실천에 옮길 수도 없는 큰소리를 늘어놓는 게 그들의 습관이었다. 단테스, 안드레스 브라보, 봄빌라 장군까지 모두들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그 무리 속에 다시 끼어들 일이 있을 것인가? (p.465) 그러나 작가의 의도와 달리 미국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온 에르미따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미지수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필리핀계 미국인들, 그러니깐 이미 미국 시민권을 딴 사람들이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이상적으로 보인다. 모두에서 거론한 하이넨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필리핀인들은 정부를 불신한다. 모국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극에 달했다. 그들은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을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미국으로 데려올 생각은 하지만, 그들 스스로 자기 나라를 위해 필리핀에 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지켜본 사람들은 그랬다. 회의나 혐오는 하지만 (자살 쪽에 가까울까?) 혁명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에르미따가 미국인과 이혼하고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간 것은 민족주의자인 호세의 바람일 수는 있겠으나 비현실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아무튼 한국과 매우 유사한 현대사를 공유하고 있고 같은 아시아 국가지만,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들보다 훨씬 먼 나라인 필리핀과 필리핀인들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다. 만약 우리가 필리핀을 지금보다 잘 알 수 있다면 하다 못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가지고도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세 겹 줄은 힘이 세다. 역사적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라도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아시아 각 국에 대한 이해이다. [i]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참조 [ii] ‘에르미따’는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태평양전쟁 이전에 필리핀의 지배계층과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마닐라의 초호화 주택가의 이름이기도 하다. 에르미따가 1945년 미군의 필리핀 탈환 전투 때 심하게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환락가가 된 지역이라는 걸 감안하면 작가가 왜 주인공의 이름을 ‘에르미따’로 작명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iii]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결국 이것이 작가의 정체성이고, 이 작품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정서이다. 저는 먼 곳을 여행했고, 역사의 이면과 다양한 거리의 지리를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결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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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표지가 돋보이는 필리핀 소설 <에르미따>. 같은 아시아 국가이지만 필리핀 문학은 우리에게는 아직도 낯선 영역이다. 필리핀 영화가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제법 사랑 받고 있는 것에 비하면 여전히 느리고 더딘 만남이라 할 수 밖에.
‘에르미따’는 필리핀의 지역명이자 여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다. 한 지역이 역사의 흐름 앞에 어떻게 변모하는지, 한 인물이 주변의 상황과 관계들로 인해 어떤 삶을 영위해 가는지를 이 소설은 책의 묵직한 두께감 만큼의 긴 시간을 두고 들려준다. 세계와 개인을 아우르며 아시아의 현대사를 관통한다. ‘에르미따’는 부유한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 창녀가 되는 여인이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를 복수로 되갚아 주고자 한다. 통속적인 소재라 할 수 있지만 <에르미따>가 ‘에르미따’라는 불행한 창녀의 복수극으로만 읽힐 리는 없다. 소설의 더욱 큰 줄기는 필리핀의 사회현실을 다루는데 쓰여 진다. 필리핀의 식민경험이 관료의 부패, 향락 문화, 다국적 자본주의 등 모순된 근대화 과정으로 이어질 때, 그 모습은 전혀 생소하지 않다. <에르미따>의 한국어 출간에 부쳐 작가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소설일반에 대한 말들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존 업다이크와 존 치버, 줄리안 반즈의 작품들과 소설 <영국인 환자>들에 대한 평가가 야박한 반면 D. H. 로렌스, 찰스 디킨스, 조지프 콘래드의 작품은 높게 평가한다. 작가는 “(작가들은) 언제나 자기 민족을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며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시한다. 이러한 발언을 전적으로 수긍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뜻하는 바에 대해 좀 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옮긴이는 <에르미따>의 번역을 앞두고 필리핀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는데 그 과정이 흥미롭고 유익했다고 전한다. 이는 비단 번역가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문학을 통해 한 나라에 대한 관심이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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