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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성적적(惺惺寂寂)이란 표현이 있다.(惺: 영리할 성, 깨달을 성, 寂: 고요할 적) 깨어 있는 가운데의 고요한 경지를 이르는 불교의 용어이다. 얼핏 하나가 다른 하나를 희생시킬 법한 두 가지 개념이 떠올리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바닷가 절 한 채‘라는 책이다. 이유는 그 제목이 서로 상충할 법한 바닷가와 수행처로서의 사찰을 하나로 묶은 제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이란 그 절들을 찾는 나그네의 의식에 비친 개념일 뿐 수행처의 구성원들인 스님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개념임이 분명하다. 오히려 스님들에게는 바닷가의 절들은 지극한 수행처일 뿐이다. 통영 오곡도에 명상수련원을 개설한 장휘옥 원장은 이런 말을 했다. 오곡도 명상 수련원이 자신들에게는 행복을 주는 수행처였지만 한가로이 농사나 짓고 수행을 하면서 사는 곳쯤으로 여기며 들어온 사람에게 그곳은 갈수록 처음의 낭만적 기대와 달리 무료하고 불편한 외진 섬이 되었다는.(’새처럼 자유롭게 사자처럼 거침 없이‘ 참고) 신춘문예로 시인 등단을 한 저자 역시 암자와 절간을 기행하는 이들의 글들은 대개 아름다움을 찾는 미학에 집중한다며 절을 두고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말한다. ’바닷가 절 한 채‘는 강화 정수사, 서산 간월암, 남해 보리암, 강릉 등명락가사, 통영 용화사 등 수려한 바닷가에 자리한 열네 곳의 사찰을 여행한 뒤 써내려간 책이다. 송정 해동 용궁사편에서 저자는 무적(無寂: 고요조차 없는 고요)과 모종(暮鐘: 저물녘 종소리), 그리고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에 더해 관음(觀音)이라는 다섯 번째 소리를 이야기한다. 지난 해 여름 강화 고려산 인근에 들렀다가 이웃한 적석사에 올라 바라본 서해가 최근 가본 바다의 전부인 나에게 바다, 그것도 절을 병풍처럼 감싼 바다는 저자의 주의(注意)에도 불구하고 가보고 싶은 아름다운 곳일 뿐이다. 저자는 절을 속세와 진계(眞界)의 경계로 비유하고(27 페이지) 적막한 연꽃에 비유하고(35 페이지) 허무와 희열을 동시에 안겨주는 곳이라 설명한다.(178 페이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번 꼴로 절을 찾았다는 저자는 그렇게 수많은 절간을 드나드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말한다. 저자는 글을 쓰는 일에 있어 단순한 알음알이의 의식에 그치는 글쟁이들을 미워한다고 말한다.(80 페이지) 문장은 늘 진행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암자와 절간을 기행(紀行)하는 글들은 대개 아름다움을 찾는 미학에 치중한다며 중요한 것은 절이 지닌 고유한 정신과 수양의 깊은 뜻이라고 말하지만 ’바닷가 절 한 채‘는 정신과 수양에 대한 것들을 담았음에도 아름다움에 더 마음을 집중하게 한다. 수행의 여정이 아닌 기행의 여정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한계가 아닐지 싶다. 저자는 대개 여행자들은 절의 아름다움만을 취하기 위해 절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을 만들기 위해 절로 가는 마음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모든 번뇌와 모든 사념의 흔적을 버리고 아련하게 절로 가는 마음을 키워낸다는 것이다.(185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절이 기도처로 전락해버렸다고 우려한다. 강화 보문사편에서 저자는 도원 스님과 저어새가 많은 불음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저자가 “그곳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묻자 스님은 “민통선 지역이라 가기 힘든데요. 왜요?”라고 말한다. 나는 민통선은 내가 사는 경기도 최북단의 郡인 연천군에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이역의 소식에서 민통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이상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뭐라고 민통선이라고, 란 생각을 했다. 김제 망해사편에서 저자가 말했듯 절은 앞마당이 없이 쪽빛 바다가 모두 절마당이라 할 수 있다. 바닷가에 자리한 수행처는 사찰이든 교회이든 성당이든 모두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의미는 다 다르지 싶다. 절 자체를 많이 다녀보지 못한 나에게 바닷가 절은 보통의 절보다 더한 동경의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태동의 ’천년 사찰 천년 숲길‘에 ’바닷가 절 한 채‘에 소개된 절들이 몇 곳 들어 있다는 것이다. 동백 숲길로 유명한 곳으로 소개된 강진 백련사, 해송 숲길이 아름다운 양양 낙산사, 느티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강화 정수사 등이다. 절 역시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이다. 이성복 시인이 말한 남해 금산 보리암처럼 시인이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고 강진 백련사처럼 다산 정약용 같은 역사적 인물들과의 사연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닷가 사찰들 가운데서도 통영 용화사처럼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을 시로 읊을 수도 있지만 본령은 마음의 정화와 수행에 있다. 지난 해 찾았던 강화의 절을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지? 강화의 절도 전등사, 정수사, 보문사 등 여럿이니 내게는 어쩌면 강화 자체가 절을 둘러싼 큰 바다라 할 수 있다. 방랑심에 근거한 시심으로 생각을 일깨운 저자에게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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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 여행기를 몰아서 읽고 있는데, 이 저자는 글쓰기와 감정을 토로하는 방식이 매우 어설프다. 전업작가가 쓴 글임에도 문장이 졸렬하다. 저자는 사찰기행문이 지나치게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면 본인은 인생에 대한 통찰이나 불교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전달하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흑백사진이 멋있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최근 여행서가 많이 나오면서 틈새 주제로 사찰기행 책들도 자주 나오는 편인데 지나치게 천편일률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