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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국가의 신화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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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정치적인 세력을 추구하게 되면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책이다. 필자는 닐 퍼거슨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즉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유산으로서 영어의 국제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랄라시아의 영국화, 의회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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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정치적인 세력을 추구하게 되면 교회를 파괴할 수 있다는 내용을 제시하는 책이다. 필자는 닐 퍼거슨의 『제국』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작은 섬나라인 영국이 어떻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즉 거대한 제국이 될 수 있었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그 유산으로서 영어의 국제화,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랄라시아의 영국화, 의회 제도의 수출, 경제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의 승리, 프로테스탄트의 영향력을 들고 있다. 이러한 말에 대해서도 이의를 달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 내용을 읽는 가운데 선교라는 부분을 읽었다. 영국이 제국으로 되는 과정에서 선교가 어떠한 기여를 했는가를 알 수 있었다. 개신교의 선교는 제국의 영토 확장을 따라 들어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제국주의적이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고, 다른 한편 성경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여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함으로 인하여 피지배지역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운데 문명의 발전으로 이해하였고 원주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를 낳았으며 노예장사를 하는 것도 죄라는 생각을 못하는 경우까지 발생하였다. 이렇게 해서 선교는 현지인들에게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이해하게 만들었고 선교는 나쁜 것으로 이해하게 하였다. 물론 그렇게라도 했기 때문에 그들이 선진문화를 접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방법은 정말 없었을까 라는 질문을 해본다.

바울은 선교를 통해 전혀 다른 방법으로 실행했지만 오늘날 그의 노력의 결과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계를 사역지로 이해하게 되었고 아무도 바울을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종의 복음으로 이해하고 박해를 받은 결실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바울 자신이 수많은 고난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고백을 보면 확실히 나타난다.

(고후 4:5-11)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11:23-30) 『[23]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여기서 쟁점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거나 정당화 하는데 있어서 폭력(violence)이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이다. 저자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신화(myth)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오인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이룰 수 없는 즉 기독교와는 전혀 무관한 힘을 사용하여 정당화 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다. 기독교가 본래 주장하는 나라는 십자가의 나라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으로서의 나라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세상 나라 위에 있는 힘(power over)이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의 힘은 하나님 나라 아래 있는 힘(power under)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사자의 힘(lion power)과 어린 양의 힘(lamb power)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두 힘은 대립되는 힘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아래(under) 두고 그들을 섬기며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증진하는 나라이다. 여기서 아래(under) 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동조하는 것이 아니고 상호 작용하여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기독교인의 행동은 세상의 운영방식과 대조되는 것이며 이기적인 욕망이나 자만이 제거된 것이며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으로서 십자가의 나라이다.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랑의 나라이다.

세상 나라는 검(the sword)의 나라이다.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와는 전혀 다른 나라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분명하게 밝힌 나라이다. 즉 예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나라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 검의 나라가 십자가의 나라를 대치하려고 한 것이다. 하나의 대안적 나라처럼 보이게 한 사람들에게 오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세상 나라는 하나님 나라 아래 있는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힘(power)에 관한 한 하나님 나라를 대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세상 나라는 살인의 나라, 복수의 나라, 폭력의 나라, 간음의 나라, 거짓의 나라이다. 특히 사탄의 속임수에 놀아날 수 있는 나라이다.

기독교인은 이러한 세상 나라의 시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이것을 두 왕국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이러한 사실과 내용을 분명하게 밝히고 세상 나라가 하나님 나라를 대치하지 않게 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세상 나라에 속하고는 있지만 십자가의 나라의 시민이며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믿음의 식구들로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르는 나그네(resident aliens)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정복하는 전쟁 영웅(conquering warlord)으로 바뀌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빼앗고 파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자가 미국을 두고 한 말로 이해된다. 저자는 하나님 나라를 다시 확실하게 이해하도록 하고 하나님을 위해 미국을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는 말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교회는 투쟁적이지도 않고 승리를 노리는 집단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러나 교회가 콘스탄틴 대제 이후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예수님을 대적하는 위치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분명한 방향을 보였으나 교회가 박해를 지나 자유롭게 됨으로 인하여 기구화 되고 거대화 되어감에 따라 제도를 만들고 오히려 예수님과 대립하는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내용을 분명히 밝혀서 유혹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미국이 바로 이러한 유혹에 빠졌다는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 기독교 국가로 오인하고 있다. 즉 하나님 아래 있는 나라로 부르면서 그러한 유혹을 받고 있다. 세상 나라 즉 미국의 비전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분명히 다르다. 미국이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워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미국의 독립 기념일은 기독교인의 공휴일이 아니다. 미국이 법과 질서와 정의를 증진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우리 모두가 지지해야 할 일이지만 이러한 것을 빙자하여 원수를 만들고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하고 박해하는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고, 섬기고 봉사하며, 사회에서 거부당한 사람을 받아주고 인종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공유하고 이웃의 짐을 나누어지고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겪는 일 등은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으로서 현실적으로 세상나라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일들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국가도 아니다. 미국에는 하나의 시민종교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시민종교가 하나님 나라를 대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신화로서 시민종교가 하나님 나라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해치는 환상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아래 있는 힘을 위한 기도를 잊어버리고 있다. 저자는 사회적 활동을 하더라도 예수님의 정신으로 하여야 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인들이 세상 나라에서 도덕 지킴이로서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러한 역할을 그만 하라는 것이다. 그럴 시기는 지났다는 것이다. 미국이 하나님 나라를 대신하여 폭력을 사용하는 일을 그만 하라고 하는 것이다. 폭력을 사용하면서 정당전쟁 이론을 더 이상 적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당전쟁 이론(theory of just war)을 쉽게 거부할 수 없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은 잘못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국가를 운영함에 있어서 재판을 해야 하는 합법적 행위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지도 문제이다. 정당전쟁이론에서는 정당방위(self-defence)와 구별하고 있으며, 성전(holy war)과도 구별하고 있다. 또 선행공격(先行功擊)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본서에서 논의하는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도기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과도기에는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는 군복무가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할 수 있다. 또 정당전쟁 이론도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평화를 추구하는 최후적 수단이라는 주장을 어떻게 반대할 수 있을까? 물론 정당전쟁이론이 예수님의 평화 만들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수단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정당전쟁 이론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원칙을 세상나라에 적용하려고 할 때 세상 나라가 생존할 수 있겠는가? 특히 다른 나라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예수님의 평화 론을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선한 싸움을 통해서 또는 사랑의 섬김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는 것도 믿는다. 그러나 군대에 가야 했고 법을 범하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벌을 주도록 지지해야 하고 국가의 안녕을 지켜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주장해야 하는 현실에서 정당전쟁 이론을 거부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물론 미국이 오늘날 벌이고 있는 침략적 행위는 찬성하지 않을 수 있지만 또 세계 제국의 역할을 거부할 수 있지만 지구의 평화 유지를 위해 줄을 서야 하는 현실에서 정당전쟁이론을 어떠한 경우에도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에는 대단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오래 동안 고민한 끝에 예수님을 따른다는 믿음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처럼 평화 론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핵으로 파괴하는 행위의 위협이나 강자의 약자 침략의 행위는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따라서 본서가 그렇게 강력하게 거부하는 폭력을 필자도 거부하지만 정말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세계 평화를 위협할 때 보고만 있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1938년 스위스의 신학자 Karl Barth가 영국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히틀러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한 바 있다. 필자는 그 편지를 읽고 혼란스러웠지만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는 히틀러를 막을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양심의 소리를 Barth가 했을 때 마음속으로 공감한 바 있다. 이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임으로 현실에서 이 세상 나라 안에 속하여 하는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깊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본서는 확실히 기독교인의 양심과 본래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좋은 책이다.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냉정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상기 서평은 원서를 토대로 한 것이며, 국내 번역서는 참고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서평자: 맹용길, 전 장신대 기독교와 문화 교수 및 학장, 현재는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음

h****g 2007.05.1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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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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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보이드, 그와의 인연은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한동안 정치와 권력에 대한 문제들로 씨름하던 중 이 책은 나에게 어둠의 한줄기 광명처럼 다가왔다.그는 천주교인으로 태어났으나 십대를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아갔다. 그러다 1974년 어느날 예수 앞에 무릎을 꾾고 전적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여러가지 의문과 희의를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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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보이드, 그와의 인연은 십자가와 칼이라는 책을 통해서이다. 한동안 정치와 권력에 대한 문제들로 씨름하던 중 이 책은 나에게 어둠의 한줄기 광명처럼 다가왔다.
그는 천주교인으로 태어났으나 십대를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아갔다. 그러다 1974년 어느날 예수 앞에 무릎을 꾾고 전적으로 항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여러가지 의문과 희의를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진정한 복음을 발견하며서 이것들을 변증해야 한다는 중차대한 소명을 받는다. 그 후 보이드 목사는 미네소타대학에서 학사, 예일대에서 석사, 프린스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된다.  그는 베델신학교 교수로 16년을 봉직했으며, 현재는 미네소타주 세인트 홀 소재의 우드랜드 힐스교회의 담임목사로 있다.
 

그의 책인 십자가을 들여다 본다.
이 책은 911테러 이후 급격히 우경화되어가는 조국인 미국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인가를 도전적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와 칼은 저자가 보려주는 참된 신앙인의 생존방식을 일러주고있다. 일찌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선언했으며, 또 다른 곳에서 칼을 가진자는 칼로 망하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는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가 앉는다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리적 힘이나, 강제적으로 되는 곳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스스로 낮아지는 곳이요, 섬기는 곳이요, 헌신하는 곳이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식이다.  
칼빈 이후 개신교 안에는 특히 네덜란드의 칼빈주의 사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일터이며, 모든 직업은 신성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 이원화된 세계관을 하나로 묶는 놀라운 작업을 단행했다. 어떤 면에서 놀라운 혁명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날카로운 비수가 그 신학사상 안에 숨겨져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이세상, 부조리와 부패가 가득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오류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덜란드의 수상이요, 3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곳은 단 한평도 없다고 선언하며 이 세상의 신성화의 신학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소위 하나님 주권사상이라 불리는 이러한 신학사상의 맹점은 교회가 더이상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의 피난처요, 위로자가 아니라 통치자의 입장에서 선다는 것이다. 교회가 정치에 가담하고, 경제를 주도하고, 교육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왜? 모든 곳은 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단척결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기독교회가 그토록 혐호해왔던 세상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게 전복되어 이제는 멋진 천국으로 화한 것이다. 교회는 더이상 섬김의 단체가 아니다. 지배하고, 물리적으로 강제하고, 요구하고, 착취할 수있는 가능성을 무한히 갖게 되었다. 십자가가 아니라 칼을 잡은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대 기독교의 어리석음을 폭로하면서 진정으로 다시 교회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할 것을 도전한다. 만약 교회가 칼을 쥐게 되면 사람을 죽이고 억압하게 되지만, 십자가는 죄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로 돌아가자. 그 높은 고딕건축물을 버리고 낮고 천한 광야의 배회하는 청년으로 돌아가자. 교회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더 이상 멈출수가 없다. 지금 당장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바로 지금...


h****i 2017.03.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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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나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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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칼 』 저 자: 그레고리 A 보이드 출 판: HANEON.COM 발 간: 2007 . 5. 1   오늘 소개하여 주실 책은 어떤 책입니까? A 오늘 소개하여 드릴 책은 < 십자가와 칼 >입니다. 그레고리 A 보이드 이 저자이고요 출판사는 한언이라는 출판사에서 만들었습니다.   Q 본서의 작가가 누군인지 소개하여 주십시오. A 그레고리 a 보이드 은 미국 미네소타 세인트 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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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와 칼 』

저 자: 그레고리 A 보이드

출 판: HANEON.COM

발 간: 2007 . 5. 1

 

오늘 소개하여 주실 책은 어떤 책입니까?

A 오늘 소개하여 드릴 책은 < 십자가와 칼 >입니다. 그레고리 A 보이드 이 저자이고요 출판사는 한언이라는 출판사에서 만들었습니다.

 

Q 본서의 작가가 누군인지 소개하여 주십시오.

A 그레고리 a 보이드 은 미국 미네소타 세인트 폴에 위치한 우드랜드 힐스Woodland Hills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신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16년 동안 베델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베스트셀러인 《어느 무신론자의 편지》를 포함하여 지금까지 15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레고리 A. 보이드는 미네소타 대학에서 철학 학사학위를, 예일대학 신학부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자에 관한 더 많은 정보는 www.gregboyd.org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Q 오늘 소개할 < 십자가와 칼> 책을 전체적으로 소개하여 주십시오.

간단하게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나라에서 살것인지? 아니면 칼의 나라에서 살것인지? 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드 이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이유는 청취자들도 너무나 잘아는 2001년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하였을 때 보이드 은 “ 십자가와 칼 ”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때 그 교회 성도들의 1000명정도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왜 떠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본서에 말하고 있습니다.

 

Q 정말로 궁금합니다. 보이드 의 십자가와 칼의 설교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떠나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본서에서 나오나요?

A 제가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이번주간 다음주간은 한국사회에서는 정치의 계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떤 후보에게든지 한 표를 행사해야 합니다.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지요. 그런데 요즘 보면 너무나 그리스도인들이 이세상의 법칙에만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땅에 살지만 이 땅을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 정의와 진리를 실현할 의무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땅위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욕망은 버려야 합니다. 궁극적 가치는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9.11 테러가 미국에서 일어 났을 때 , 많은 교회들이 미국을 하나님나라라고 착각했지요 그래서 하나님나라 미국을 공격한 반대국인 이슬람세력인 알카이다와 빈라덴을 증오하고 보복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칼의 힘= 총의 힘 권력의 힘을 믿게 된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칼의 힘이 아니라 십자가 즉 고난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를 따라는 자들에게만을 위하여 진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함입니다. 보이드 은 미국이 원수를 갚는 것을 십자가의 믿음으로 거부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결국 인간의 제도이다 주장했지요. 미국은 하나님나라가 아닙니다. 미국역시 인간의 제도입니다. 원수갚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Q 본서에서 칼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칼의 나라는 즉 권력을 의미합니다. 힘의 권력입니다. 총칼의 권력, 전쟁의 권력이지요 권력은 결국 누구를 지배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칼의 나라는 위에 서는 힘입니다. 개인이나 나라를 지배하는 것을 말하지요. 요한복음 18장 36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재, 전체주의 모두 위에 서는 힘에 기초한 상대적인 칼의 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비하면 모두 비슷한 구조입니다.

 

Q. 그러면 이땅(이세상)의 힘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

A 성도들이 혼동하는 것이 하나님은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세상나라에게 칼도 허락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정부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 사회시스템이 어떻게 되었든지 순종하는 것이지요 정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에게 서 받은 지배의 힘을 오직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부의 리더 즉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시장, 도지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뽑은 일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고 국가를 평화롭게 이끌어가도록 마음과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정신으로 투표와 정치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Q 그러면 세상은 선하여 질수 있나요?

A 세상은 일시적으로 좋은 지도자가 나오면 잠시 선하여 질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악하여 집니다. 미국에 9.11 테러이후 서방과 중동의 나라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복수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한국에 국회의원 선거운동기간인데 모든 정당들이 네거티브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빼앗기 위함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상대적 선함입니다. 결국 그들이 하나님나라를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결국 성서의 하나님나라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중에도 많은 분들이 성서의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복지국가, 정의국가를 혼동합니다.

 

Q 이 그러면 십자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A. 성서는 권력의 힘 자체를 포기합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기를 요구합니다. 믿음좋은 신앙인들도 이 말씀에 마음을 닫게 합니다. 그래서 보이드 이 시무했던 교회성도들이 <십자가와 칼> 설교를 듣고 1000명이나 교회를 이탈했습니다. 복수는 복수를 부릅니다. 한쪽이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적으로 피를 가져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속에서 교회가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존재했던 이유는 시대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쫓아서 순종했던 생명과 죽음, 삶의 십자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온몸으로 쫓았던 성도들은 이땅의 나라, 칼의 나라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나라, 하나님나라를 믿음으로 위협, 비판, 죽음, 사회적 압력, 수치심을 이겨내고 견디며, 살았던 것입니다.

 

Q 저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드네요. 과연 한국과 같은 적대국가를 둔 나라의 성도들이 과연 그렇게 살수 있나요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이웃 일본, 중국의 역사왜곡과 국경침범들의 상황속에서 과연 이 책의 보이드 의 주장처럼 될수 있나요?

A 사실 저에게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서를 진지하게 읽고 성서의 말씀데로 충실하게 살려는 성도들의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처럼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겨자씨가 땅에 심기워져 자라기 시작하면 놀라운 일들을 하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어렸다고 포기하면 이 한반도에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거의 계절에 두눈을 부릅뜨고 지도자들의 언행을 살펴야 합니다. 온전하지 않지만 누가 더 성서의 가르침에 한 발이라도 가까이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국회의원후보자들이 말로는 항상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 오직 국민들의 마음을 읽어서 행동하겠다 하지만 결국 국회에 가면 엘리트 의식, 특권의식이 넘쳐흘러서 일반 서민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습니까? 거짓과 모략만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Q. 하나님나라가 어떤 것인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하나요?

A. 예 많이 소개합니다. 전도사님도 아시듯, 제자들이 누가 큰가를 이야기 할 때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라고 했고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잡으려고 하자 베드로가 보호하고자 칼을 사용하여 귀를 잘랐을 때 칼로 승한자 칼로 망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육신을 원수에게 내어주며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착되었다 ”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이야기 합니다.

 

Q 오늘날 한국사회에 갈등이 많습니다. 이념갈등, 빈부갈등, 지역갈등, 남북갈등 이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본서가 주고 있습니까? 있다면 소개하여 주시죠?

a 갈등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peace maker. 즉 갈등의 해결자가 되어야 합니다. 화해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 편을 들기보다 성서의 말씀대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갈등을 해결하는 존재가 아닌 어느 편을 들어서 해결하려고 하는 칼의 힘에 의지할때가 많습니다. 성도들, 교회들이 십자가를 질 때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추구할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방식대로 사는 것은 폭력이 남무할 때 희생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때 담대히 그리스도인들이 희생하여야 합니다. 보복하고자 할 때 용서하고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처럼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해야 합니다.

 

Q 성서의 가르침이 우리들의 일상과 너무 멀리 느낄 때가 있습니다. 피상적 개념으로 들릴때도 많습니다 본서는 아주 구체적입니다. 다음주 국회의원 선거을 해야하는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A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아주 구체적입니다. 하루 하루 성서의 말씀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성도라면 성서의 기준으로, 하나님나라의 기준으로, 십자가의 기준으로 국회의원을 뽑아야 합니다. 특정정당이 아닌, 현재의 구호가 아닌 그 후보자가 진실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아야만 합니다. 헛된 망상의 구호가 우리사회에 빛을 주지 못합니다. 헌정 지난 50년간 시민들을 속이는 지도자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선거때만 되면 구호가, 고약이 난무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지도자들이 평상시에는 그렇게 시민들을 위하여 살지 않다가 갑자기 모두 선한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성도들은 후보의 살아온 과거를 보시고 투표하시길 바랍니다. 후보가 십자가의 길에 한발더 와 있다면 그 분을 뽑으면 됩니다. 칼의 길로 살아왔다면 설사 그 후보가 교회성도라도 뽑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Q  오늘날 한국교회도 정치적 성향을 많이 띠고 있습니다. 종교를 대표하는 정당들도 생겼습니다. 본서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A 난해한 질문입니다. 국민이면 누구나 어떤 형태든지 정치행위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특정종교가 정치행위를 한다는 것은 다종교국가인 한국에서 잘못하면 종교간 갈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자제해야 한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기독교역시, 교회역시 본서 <십자가와 칼 >의 내용처럼 칼을 휘두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중세교회의 모순입니다. 십자가군 전쟁의 참혹함이었습니다. 복음은 져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원수까지 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는 권력을 잡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독교 다워야 합니다. 성서는 위에서는 힘이 아니라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믿습니다.

s******1 2012.12.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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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섬기는 힘에 굴복할수 없는 칼.
"십자가의 섬기는 힘에 굴복할수 없는 칼." 내용보기
십자가와 칼 2011.4.24 그레고리 보이드 / 한언출판사   인간의 사회 구조 가운데 폭력이라는 이름 앞에 서게 되면 대응할 수 있는 본능적인 자세는 회피와 투쟁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공하신 제3의 길은 회피와 투쟁이 아닌 비폭력적 섬김의 정면행동이셨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낯설고 어색하고, 때로 미련해 보이고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에게 저자는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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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칼

2011.4.24

그레고리 보이드 / 한언출판사

 

인간의 사회 구조 가운데 폭력이라는 이름 앞에 서게 되면 대응할 수 있는 본능적인 자세는 회피와 투쟁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공하신 제3의 길은 회피와 투쟁이 아닌 비폭력적 섬김의 정면행동이셨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에게 낯설고 어색하고, 때로 미련해 보이고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우리에게 저자는 위에서 서는 힘을 대항 할수 있는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야 말로 십자가와 결합된 칼이 아닌 제 3의길이요, 수많은 투쟁의 역사를 통해 얻어낸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이며, 악을 반사하지도 않고도 악을 대항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던 저자는 2004년 미국의 대선 전, 수많은 정치적 우파들과 종교 단체들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양 때를 이끄는 목자로써 특정 정당에 지지를 보여줘야 하고 투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인해 저자는 한명의 목회자로써 왜 교회가 우파 정치 활동에 가담해서는 안되는지 성경을 통해 설명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믿음과 정치간의 지나친 유착의 위험성을 폭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와 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반응은 실로 놀라웠다. 수많은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복음주의 공동체 안에서 ‘보수주의 노선에 참여하지 않음’으로 인해 소외당하던 사람들에게 눈물어린 감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강경하고 부정적인 피드백이 훨씬 많았다. 급기야 교회 신도의 20%(1천여명)이 교회를 떠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방종주의자며, 타협을 일삼고, 우유부단하며, 애국심도 없고, 태도를 정하는 것을 두려워 하거나 사탄의 편에 선사람처럼 취급받게 되었다.

 

 

저자는 크게 두 개의 나라와 그 나라 사이의 이해관계, 그리고 하나님과 성도의 바른 태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 두 개의 나라는 바로 칼의 나라와 십자가의 나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두 나라가 이제 뒤섞여 버려 십자가와 칼의 나라로 변질되어 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십자가를 받아드려야 하는 수많은 영혼들이 십자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생겨났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아주 직설적인 문체로 저자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드러내면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세워졌다는 신화로 인해 미국의 시민종교적인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로 오해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이나 십자가와 칼에 뒤섞여버린 나라들이 ‘위에 서는 힘’이라는 빠른 해법의 유혹에 저항하고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라는 희생적이고도 특별한 방식, 예수님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교회를 단결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부흥시키며 마음을 변화 시켜 결국 사회가 하나님의 권세에 한걸음 다가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인의 5가지 딜레마에 답을 하며 ‘위에 서는 힘’이 아닌 ‘위로 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며 세상의 궁극적인 희망은 지금 당장 승리를 얻어내는데 있지 않고, 세상의 궁극적인 희망은 부활의 날, 모든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날이라고 말하고 있다. 계속해서 그때에 비로서 하나님 나라의 사랑이 단 한순간도 헛되지 않았음을 깨닳을 것이며, 우리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우리를 이끌게 될거라고 말하고 있다.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세 가지 문제에 핵심을 좀더 심혈을 기울여 읽어 내려갔다. 저자의 제기한 세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이렇다.

 

 첫 번째는, 저자의 주장은 정치적 우파 뿐만아니라 좌파에 선 기독교 인들에게도 해당한다는 것이다. 또한 둘째는 기독교인들이 세상과 철저히 분리된채 하나님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정치적인 활동에 참여할 때 우리의 신념과 도덕성을 반영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수님의 생애로 드러났던 하나님 나라의 고유하고 명확한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다고 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속에 빼놓을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즉, 복음 그리고 칼 즉, 전쟁이다. 십자가와 칼의 교묘한 어울림은 로마시대부터 시작된다. 특히 로마의 기독교 국교화로인해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잃고 정치의 권력과 군대와 함께 어울러져 급기야 기독교가 ‘위에 서는 힘’이 되어 버렸을 때 그것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러한 십자가와 칼의 교묘한 어울림은 지금까지 계속되는 안타까운 악의 사이클(cycle)이다. 저자는 이런 기독교가 십자가의 이름을 빌려 칼을 사용하여 유럽 전역을 정복하고 그리스도 교인이 되어 침례를 받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며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하고, 수 백만명의 여인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이나 교수형을 시켰다. 저자는 이러한 비극적 역사는 사탄의 위대한 승리이자 악마적 아이러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로마시대 때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 그리고 현재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na)는 이러한 악마적 아이러니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이를 섬기라고 가르치신 분의 이름으로 교회가 복수심을 버리지 못했으며 무자비한 세상 나라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섬김을 받으려 했던 모습. 그리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가르치신 분의 이름으로 교회는 무자비한 박해자가 되곤했다. 십자가를 들라고 가르치신분의 이름으로 교회는 칼을 들고 다른 이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바치겠다는 명목 아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저자의 책과 동일 선상의 주제를 좀더 깊고, 비폭력이라는 차원으로 말하고 있는 월터 윙크는 그의 저서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서 정당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전쟁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할 것이며, 아마도 윤리학자들은 그들의 결정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증언은 작은 어린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즉 우리는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이전의 나의 모습은 매스컴의 한쪽 면의 보도로 인한 정당전쟁이 크게 나쁜것인 것을 알수 없었다. 공격에 있어서 당연히 복수를 해야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느낄뿐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과 월터 윙크의 책들을 읽었을 때 사고의 틀이 깨지며 스펀지처럼 아래에서 섬기는 힘을 빨아들였다.

 

저자는 복음주의 교회가 정치노선을 따라 크게 양분화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님처럼 세상 나라의 갈등에 어느 한쪽 편을 들거나, 세상 나라가 제시하는 제한적인 해결책 중 한 가지를 선택하지 않으셨던 것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요즘의 교회가 온갖 미끼와 낚싯줄을 삼켜 버리며 심지어 보수주의나 자유주의에 상관없이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회, 윤리, 정치적 논쟁에서 공공연히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교회는 어떠한 것에 즉,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학을 입학했을 때 사회와 모든 체제들에 대한 방항과도 같이 나 또한 진보 세력쪽의 모든 관심이 가져있던 것을 고백한다. 그러나 군에 다녀온 뒤 보수 세력만이 이 나라를 적절하게 이끌어 갈수 있다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던 찰나에 이 책은 나에게 균형감각을 주었다. 한국교회를 바라볼때도 사실 현 정권과 기독교는 떨어질수 없는 예민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수많은 목사들이 현 정권의 대통령을 직접적으로 지지했으며, 현 정권은 기독교 종교편향주의로 응답해 주었다. 로마와 미국의 칼의 영광은 기독교와 정치가 손을 잡아 칼이 만들어낸 졸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항상 유의하며, 주시해야 한다.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끊이지 않게 분쟁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한 분쟁 속에서 칼(정당전쟁)을 동원한 억압적 지배체재로 우리의 숨통을 조여들 때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제 3의길이신 섬김으로 대응으로 존엄성을 확보하며, 힘의 상태를 평형상태로 변화 시켜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들은 이것들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한다. 이것은 가르침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 실천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십자가 처형의 섬김으로 죄의 사슬을 끊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p*******6 2011.06.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