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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벌레 이야기-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
"밀양, 벌레 이야기- 인간의 용서와 신의 용서" 내용보기
지난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을 뒤늦게 보고 원작 소설과의 차이점이 궁금해 읽게 되었다. 원제목은 <벌레 이야기>이다. 하필이면 왜 '벌레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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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2007)을 뒤늦게 보고 원작 소설과의 차이점이 궁금해 읽게 되었다. 원제목은 <벌레 이야기>이다. 하필이면 왜 '벌레 이야기'일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아마도 그 같은 절망적 자각은 미물 같은 인간이 절대자 앞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로서 그의 삶 자체를 끝장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섭리의 세계를 함께 부수고 싶은 한계적 욕망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단편소설이 다루는 어린이 유괴 살해사건은 서울의 한 동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소재로 삼았다 한다. 범인이 잡히고 형 집행을 남겨둔 시점에서 한 말은 작가에게 참혹한 사건 그 자체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한다. 범인이 한 말의 요지는 이렇다.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로운 마음으로 떠나가며,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베풀어지길 빌겠다."

 

  이 소설은 남편 화자 시점으로 영화가 보여주는 다양한 곁가지를 빼고 어린 아들의 유괴 사건과 아내의 고통, 죄의 용서와 구원의 문제의식에 충실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 범인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으로 고통 받던 아내는 김집사의 끈질긴 간청으로 교회에 나가며 하나님의 참사랑을 얻고 범인 김도섭을 마음으로 용서하게 된다. 문제는 아내가 자기 마음속의 용서에 대해 범인에게서 증거를 구하고자 교도소 면회를 다녀오면서다.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그만큼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형 집행을 앞두고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고 평화로울 뿐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에게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빌어주는 가해자라니! 다시 한번 절망하는 아내를 두고 믿음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김집사에게 아내는 이렇게 저항한다.

 

-저도 집사님처럼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어요. ... 그러나 막상 그를 만나 보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 그 사람이 너무 뻔뻔스럽게 느껴져서였어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예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가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전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가 나를 용서한다구요? 게다가 주님께선 그를 먼저 용서하시구... 하긴 그게 아마 사실일지도 모르겠어요. ... 하지만 그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요? 당신이 내게서 그를 용서할 기회를 빼앗고, 그를 먼저 용서하여 그로 하여금 나를 용서케 하시고 ... 그것이 과연 주님의 공평한 사랑일까요.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어요. 그걸 정녕 믿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의 저주를 택하겠어요. ...

 

 신의 용서를 받았다 해서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건 종교의 외피를 뒤집어쓴 뻔뻔한 가해자의 논리이자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다. 범인은 피해자인 엄마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사죄했어야 한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의 감정과 조건을 무시한 채 자신의 하나님만을 상대로 살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하늘 위의 종교와 용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땅 위의 종교와 구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a*******5 2019.01.27. 신고 공감 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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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 " 내용보기
얼마 전 유괴사건이 보도되었을 무렵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조카를 만났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고모 입장으로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두서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어보았다. 학교는 누구랑 가니? 혹시 혼자 다닐 때도 있니? 혼자서는 절대로 다니지 마라. 낯선 사람이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도 하지 마라 등등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질문이지만 딴엔 조카가 걱정이 되어 어쩔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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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유괴사건이 보도되었을 무렵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조카를 만났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고모 입장으로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두서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어보았다. 학교는 누구랑 가니? 혹시 혼자 다닐 때도 있니? 혼자서는 절대로 다니지 마라. 낯선 사람이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도 하지 마라 등등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질문이지만 딴엔 조카가 걱정이 되어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어이없는 질문과 권유(?)는 도통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는(세상이 험악하다느니 나쁜 사람들이 많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제 세상 속으로 들어간 아이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빙빙 돌려 말할 수밖에. 당연히 나라도 못 알아들을 말이었다.- -;) 조카의 무관심으로 유야무야 되어버렸지만 모르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조카가 가여울 뿐이다.


벌레 이야기』는 이청준 선생이 198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이다. 십 여 년이 지난 작품인데도 이렇게 공감하는 것을 보면서 이청준 선생의 문체는 둘째로 치고, 강산이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여전하다는 것이 안타깝다. 유괴와 살인,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를 이청준 선생은 특유의 시선과 문체로 풀어냈다. 그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신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무엇인가.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나름대로 그것을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인 것처럼 피해자가 된 엄마가 절대자인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고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어 벌레로 전락하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아이가 실종되고, 차츰 주변의 관심에서 멀어질 무렵, 엄마가 잡을 수 있는 희망은 당연히 모든 종교일 것이다. 부처님께 불공드리고, 예수님께 기도드리고, 그 어떤 힘든 일이라도 엄마니까 당연히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황에서 이웃집 여자인 김 집사의 도움은 절대자인 하느님에게 의지해서 실종된 아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주검으로 발견되고 범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절대자인 하느님에 대한 엄마의 원망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를 찾아내기 위해 기도드리고 하느님을 찾았건만 주검으로 변해 돌아온 아이를 보며, 더구나 범인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아들만 주검으로 돌아온다면 어느 엄마인들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을까. 하지만 범인이 밝혀지고 잡히자 엄마의 마음은 복수로 가득해진다. 내 아들은 죽었는데 범인은 이제 법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보호를 받고 있으니 어찌 엄마의 마음이 편할 것인가. 복수와 원망으로 가득한 엄마에게 이웃집 여자 김 집사는 이젠 ‘용서‘ ’동정‘이란 말로 엄마에게 다가온다. 잡힌 범인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오직 절대자인 하느님만이 심판할 수 있다며 사람에겐 오로지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의무밖에 없다고 설교한다. 결국 김 집사의 간곡한 권유에 엄마는 범인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용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용서를 하러 간 그 자리에서 엄마는 용서 대신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온다. 그 배신감은 곧 엄마를 절망 속에 빠뜨렸고 급기야는 분노하고 만다.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 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내게서 그걸 빼앗아 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p90>                 


이것이야말로 신의 사랑 앞에 사람은 무엇이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내가 엄마였어도 어쩌면 똑같았으리라. 엄마가 아닌 하느님이 용서를 할 생각이었으면 엄마가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든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이 지속되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 줬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 동정해야 한다. 따위의 말로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결국 엄마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벌레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벌레 같은 존재 말이다.


이청준 선생은 이 가슴 아픈 소설에서 용서와 구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철학적으로 무게감 있게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당신 같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하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져 주었다. 나라면? 글쎄….  





이 책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소설에서처럼 영화도 아이를 잃은 엄마의 처절한 마음을 표현한다고 한다. 전도연의 연기가 기대된다.


j****o 2007.05.17. 신고 공감 4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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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책이지만 출판사의 상술로 가치가 낮아지는....
"좋은책이지만 출판사의 상술로 가치가 낮아지는...." 내용보기
원래는 단편모음집에 포함된 하나의 단편이였지만 영화가 뜨면서 단행본으로 시집같은 100페이지의 분량으로 저 정도의 가격을 받다니 상술이 지나치다 싶더군요 그러면서 기존 단편집은 아예 판매를 안해버리더군요 작가가 작가인 만큼 깊이있는 내용을 심도있게 다루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지만 출판사 상술로 인해 원작의 가치 마져 떨어져 보입니다 그리고 책 제목이 밀양이 뭡
"좋은책이지만 출판사의 상술로 가치가 낮아지는...." 내용보기

원래는 단편모음집에 포함된 하나의 단편이였지만 영화가 뜨면서

단행본으로 시집같은 100페이지의 분량으로 저 정도의 가격을 받다니

상술이 지나치다 싶더군요 그러면서 기존 단편집은 아예 판매를 안해버리더군요

작가가 작가인 만큼 깊이있는 내용을 심도있게 다루어 아주 흥미롭게 읽었지만

출판사 상술로 인해 원작의 가치 마져 떨어져 보입니다

그리고 책 제목이 밀양이 뭡니까? 어이가 없습니다

이 책보다는 [벌레이야기]가 포함된 다른 이청준의 단편모음집을 구입하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b****p 2007.07.2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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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원작 - 벌레이야기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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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소설<벌레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영화와 조금 다른 구성이지만 타인에 의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인간적인 마음과 신앙 사이에 갈등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동일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남편의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흐름을 이어간다.  알암이는 내숭스러워 보일만큼 조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도 쉽게 어울려 놀지 않았고 어릴적부터 남달리 유순한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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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의 소설<벌레이야기>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영화와 조금 다른 구성이지만 타인에 의해 자식을 잃은 부모의 인간적인 마음과 신앙 사이에 갈등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동일하게 드러난다. 소설은 남편의 시점에서 사건을 바라보며 흐름을 이어간다.  


알암이는 내숭스러워 보일만큼 조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도 쉽게 어울려 놀지 않았고 어릴적부터 남달리 유순한 아이였다. “집 안에서만 혼자 하얗게 자라”갔다고 설명될 만큼 현실속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존재했던 아이로 표현된다. 하지만 마음속에 자리잡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야 어찌 있는 듯 없는 듯 생각될 수 있으랴-  


얼마 전, 아무것에도 크게 관심을 갖지 않던 아이가 주산에 재미를 느끼게 되었고, 주산 학원에까지 보내놓은 터였다. 열정을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만족해하고 있던 어느 날, 알암이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도 그런일이 없었던 아이인지라 부모는 더욱 걱정이 앞선다.  하루가 지나도 아이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자,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약국 문을 걸어닫고 알암이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게 된다. 


경찰의 수사, 학교 친구들, 주산 학원 원장의 모든 도움에서 아이의 행방은 묘현했고, 시간이 점점 지나자 남편의 마음속에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그런 말을 건넬 수 조차 없었다, 


"아내의 집념과 희망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찾게 되든 못 찾게 되든 아내를 위해서도 그런 기미를 조금이라도 내보여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끝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아이가 주산 학원 근처의 건물 지하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알암이의 참사는 아내에겐 세상이 끝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심정을 그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상상할 수 없지만 작가의 표현대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과 자기 숨이 끊어지는 고통의 순간"들의 연속이라고 어림 짐작할 뿐이다.


아이의 살해범은 주산 학원 원장으로 밝혀지게 되고, 아내는 희망과 기원에서의 의지력이 아닌,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으로 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다시 새롭게 아내를 일으킨 것은 이불 집 김 집사 아주머니의 도움 덕분이었다. 김 집사 아주머니는 아내에게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앞에 나와 짐을 맡기고 위로와 치유를 받으라 권한다. 마음이 움직여 아내는 신앙을 갖게 되지만 그것은 "절간을 찾아가 빌 때 한가지로 아이를 찾고 보자는 기복 행위"에 불과했고, 아이가 주검이 되어 돌아오자 아내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으로 사로잡히게 된다. 


김 집사 아주머니의 끈질긴 권유와 믿음으로 아내는 다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지만, 그것도 본심에서 우러나온 신앙심은 아니었다. 


"아내는 아이의 영혼의 구원으 위해 교회를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소망과 기도가 온통 아이의 내세의 구원에 관한 것뿐이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교회를 나가게된 아내를 남편은 말릴 수 없었고, 그렇게 참신앙이 마음속에 자리잡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남편과 김 집사 아주머니의 바람되로 서서히 아내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그 사랑안에서 점차 자신을 회복해 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살인범을 용서해야 한다는 김 집사 아주머니의 권유에서 부터 다시 시작된다. 용서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살인범, 주산 학원 원장 김도섭을 마음속으로 용서하겠다 마음먹은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를 직접 만나겠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도 께림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남편은 아내를 만류했지만 아내는 좀처럼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사형수 김도섭의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아내는 모든 것이 다시 허사가 되고 말았다. 면회를 다녀온 그날부터 아내는 다시 열병 환자처럼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유인 즉, 사형수 김도섭은 아내가 면회를 간 당시 자신도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한다. 얼굴또한 한없이 평온한 모습이었고, 어떤 원망과 분노도 당연히 자신이 받아야 하며, 또한 용서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주님께 용서받았다는 그 말에, 그 평온함에 아내는 물론 남편조차 조금의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


아내의 절망은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당연한 그 아픔과 절망과 분노와 배신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어야 했다. 김 집사 아주머니의 딱딱한 교리적 지식이 아닌, 참 신앙안에서 사랑으로 그 모습을 받아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러했다면 아내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최악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s********8 2013.02.28. 신고 공감 1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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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함으로써 용서받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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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교리 공부를 시작하여 1년이 지나 세례를 받았다. 첫 미사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전한 ‘루카 22,14-23,56’이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용서를 구하며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혹시나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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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봄부터 천주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교리 공부를 시작하여 1년이 지나 세례를 받았다. 첫 미사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전한 ‘루카 22,14-23,56’이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용서를 구하며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혹시나 우리에게 고통이나 핍박을 준 이들에게 그 이상의 모욕이나 멸시로 되갚음을 한 것은 아닌지 혹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젊은 신부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이 가슴 속으로부터 울컥 올라오는 그 무엇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미사가 끝날 때까지 울고야 말았다.

 

  아이가 여섯 살 때 만취한 대학생의 차에 치어 얼마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마침 사고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이들을 친정에 맡기고 휴가를 내어 지리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 때의 죄책감과 절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고를 내고 달아나려 했던 그를 퇴원하고 얼마 후 우연히 집 근처 대학 축제 무대에서 보았다. 지쳐있던 내 앞에 나타난 그는 너무도 혈기왕성하게 무대를 누비면서 춤추며 쩌렁쩌렁 고함을 질러대는 응원 단장의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사람의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는 아이의 천진스러움이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무대로 뛰어나가는 나를 남편이 뒤에서 부둥켜 잡았고 나의 분노는 축제의 흥겨움 속에 묻혀졌다. 대학 근처에서 마주치는 비슷한 용모의 남자들만 보면 가슴이 텅 하고 내려앉으며 마구 뛰기 시작하고 혹시 그 놈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눈빛은 날카로워졌다. 이웃이 무심코 던진 아이의 안부를 묻는 말에도 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었다.

 

  마음속이 원망과 분노로 가득 찬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잊혀질 일은 아니었다. 항상 가슴 깊은 곳에 무겁게 담아 두었던 그것. 용서.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아이를 두고 잠시 떠나보려 했던 나 자신이었다. 

 

   「밀양」은 우리 시대의 가장 처절하고 아픈 소설, 용서와 신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 서울의 한 동네에서 있었던 유괴사건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사람의 편에서 생각하고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의문을 되새겨본 기록이다.

 

아내는 유괴 살해로 인하여 아이를 무참히 잃은 후 집사의 도움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고  용서를 결심하고 범인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 앞서서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었으며 죽음 앞에서 희생자와 그 가족의 평화와 자비를 기도한다. 작가는 서문에서 말한다. ‘신의 사랑 앞에 인간의 존엄과 권리란 무엇인지! 인간의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그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는 평화 안에 있어도 되는 것일까. 그에게 그럴 권리가 있을까! 또한 절대자의 거룩함 앞에서 용서의 몫조차 빼앗겨버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며 목숨을 끊은 아내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인가.

 

  더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다. 간음한 여자와 창녀를 용서하시고,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새 계명을 주시며 ‘서로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시며 백 마리 양 가운데 잃은 양 한 마리를 뒤쫓아 가서 찾아오듯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

 

  결국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을 파멸로 이끈 여자의 가엾음을 어찌할까. 작가의 신과 인간의 영역에 대한 물음은 첫 장에서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신이 한 것이라면 인간도 그와 같이 하여야한다는 완전성을 추구하는 신앙은 아마도 신을 위한 것도 아니고 용서받는 자의 것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용서하는 자를 위해 마련해 놓으신 자비의 선물이 아닐지. 성 프란체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 중에 용서함으로써 용서받기를 바라는 구절이 놓여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o*****y 2008.05.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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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용서..그 어렵고도 복잡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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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칸 영화제를 통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그리고, 민감한 주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영화 '밀양'.. 원제가 '벌레 이야기'인 이 책을 보게된 이유는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다. 물론 부담 없는 책 두께에 (100 페이지 조금 넘을까..) 그나마 그림과 섞여 있어서 텍스트만 따지면 50 페이지 정도 될까 말까라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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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칸 영화제를 통해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그리고, 민감한 주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영화 '밀양'..

원제가 '벌레 이야기'인 이 책을 보게된 이유는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다.

물론 부담 없는 책 두께에 (100 페이지 조금 넘을까..)

그나마 그림과 섞여 있어서 텍스트만 따지면 50 페이지 정도 될까 말까라서 금방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짧은 단막극 같은 내용에 담겨진 심오한 주제는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깊은 생각에 잠기게 해주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과 용서...
기독교인도 결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그 차이를 인간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라는 알암이 엄마의 절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마음이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에서 반기독교적인 느낌을 받기 보다는,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한번 진지하게 생각에 빠져볼만한 주제를 던저주는 좋은 소설이었다.

 

무엇보다 부담없는 분량의 중편 소설을 통해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도 좋았던 것 같다.

k*****4 2007.12.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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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소설] 벌레이야기(밀양) -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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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란 영화를 만나고 나서 원작이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란 것을 문학전공 교수님께 듣고, 무~척이나 얇은 책을 읽게 되었다. 이청준이란 작가를 꽤나 좋아하기에 기대를 하고 책을 잡게 되었다. 무척이나 짧은 분량이며 칙칙한 분위기의 삽화도 끼어있어 부담스럽지 않게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만난 호의와 절망은 전혀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없었다.  소재는 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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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이란 영화를 만나고 나서 원작이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란 것을 문학전공 교수님께 듣고, 무~척이나 얇은 책을 읽게 되었다. 이청준이란 작가를 꽤나 좋아하기에 기대를 하고 책을 잡게 되었다. 무척이나 짧은 분량이며 칙칙한 분위기의 삽화도 끼어있어 부담스럽지 않게 빠르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만난 호의와 절망은 전혀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없었다. 
 소재는 흔하디 흔한 '실종과 그에 이은 죽음 마주하기'이다. 도저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아내에게 김집사는 종교에 마음을 의탁하여 강하게 마음을 먹을 것을 권한다. 이에 아내는 종교에 몰입하며 자식이 되돌아 오기를 빈다. 그에 따라 아내는 조금씩 활력을 찾으려는 듯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종교에 매달리고 기도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가 마주한 것은 아이의 주검이었다. 그리고 결국 범인이 밝혀지고 범인은 법에 따라 형을 지게 된다. 아내는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결국 잃고서 종교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내에게 김집사는 그럴수록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절대자 뿐'이라며 보다 집요하게 예배와 기도에 참여하기를 권한다. 이에 아내는 조금씩 교회에 나가서 예배와 기도를 하며 범인을 마주하고서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용서를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앙심으로써 범인을 용서할만한 마음이 생긴 아내는 교도서를 찾아가나, 그 곳에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감자, 살인자가 아니라 이미 주님의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온화한 인상의 행복한 자유인만이 있었다. 
 한 인간이 주체적으로 용서와 구원을 주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한 인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책 속의 아내는 수많은 인간, 절대자 아래에 지극히 벌레와 같은 존재임을 느끼게 해준다. 벌레에겐 존엄성이 없다. 벌레는 신에게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죄를 저지른 이는 이미 신에 의해 구원받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지난 시간 자신이 바라던 구원이 피해자(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은 너무나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라 느끼며 쌓아왔던 신앙심에 배신감을 느낀다. 아이를 잃었을 때보다 더 깊은 절망감 속으로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인간 간에 진정한 용서란 가능한 것일까? 죄 속에서 매일을 연명해가는 인간에게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삶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나 모두 누군가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했을 때, 도저히 신을 믿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누구라도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서는 스스로 용서를 빌길 원하거나 자신보다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기를 은연중에 바라게 된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을 아내에겐 사치스러운 말이며, 적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구원은 없다. 용서받는 자는 남을 받아들이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기력한 인간이란 존재는 남이 지은 죄와 형벌의 무게만큼 가슴 속에 불신과 불행의 응어리를 지고 살아가게 된다. 
 신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 했던 아내의 삶은 너무나 무참히 허무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절망. 그 심정을 이해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o****o 2011.06.1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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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인간은 벌레일지 모르나.. - 벌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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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벌레 이야기>는 영화의 원작으로 기억된다. 2년 전 상영되던 <밀양>을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이 참 잔인하다 냉철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뒤 소설을 읽었을 땐 더 소름이 끼쳤다. 영화를 볼 때보다 더 꽉 조여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밀양>에서는 그녀, 신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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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벌레 이야기>는 영화의 원작으로 기억된다. 2년 전 상영되던 <밀양>을 먼저 보고 소설을 읽었는데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소설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영화를 보면서도 감독이 참 잔인하다 냉철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뒤 소설을 읽었을 땐 더 소름이 끼쳤다. 영화를 볼 때보다 더 꽉 조여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밀양>에서는 그녀, 신애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에겐 남편도 없고 가끔 내려오는 친정 식구(남동생)가 있을 뿐이다. 낯선 타향에서 그녀는 홀로 흔들리고 버텨낸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카센터의 종찬이 있지만 종찬은 그녀를 두 발짝쯤 물러서 바라만 볼 뿐이다. 그녀는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이 혼자 쓰러지고 오열하고 소리 질러야 했다. 영화를 볼 땐 그게 신애가 내몰릴 수 있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이 끝이 아닌 걸 알았다.

 

  혼자 버려두고 모든 고통과 시련을 겪게 하는 것보다 남편이라는 존재가 아내의 곁에 있으면서도 그 무엇도 나눌 수 없는 것이 더 잔혹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남편이 묵묵하게 말하는 것이 더욱 소름끼쳤다. <밀양>에서는 살인자의 딸에게 잠시나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기는 것, 더러운 수챗구멍에 햇빛이 비추고 이웃과 신소리나마 나누고 어색하게 돌아서는 것에서 그나마 희망을 봤었다. 하지만 <벌레 이야기>에서는 그 어떤 희망이나 소통의 여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홀로 서 있고 자신의 모든 감정, 고독과 절망 기타 모든 것은 결국 혼자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사형수가 스스로 회개하고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과 아내가 자살해버리는 것은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는 혼자만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아내가 그토록 절망한 것은 자신이 용서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당했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를 빼앗아간 신에 대한 분노 때문임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사형수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음도 그 절망의 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형수의 회개와 그에 따른 용서받음은 신과 사형수만의 영역에서 행해지는 것이지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그 안에 침입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녀에겐 자식을 잃은 것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하나의 절망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혼자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혼자에게만 주어지는 선택이 있다. 절망도 고통도 누구와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다. 그것은 다소 평범해 보일지 몰라도 몹시 냉혹하다. 신조차도 그곳에 손대선 안된다. 그러면 안되는거다. 그것은 절망의 순간을 안기기도 하지만 동시에 숨을 쉬게하는 틈일 수도 있다. <벌레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그 때문에 섬뜩했다. 영화 <밀양> 비평 중에 감독이 배우 전도연에게 너무 큰 시련을 주어 사디스트가 아니냐는 반농담식의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 논리를 따라 이창동이 사디스트로 규정짓는다면, 원작자인 이청준은 사디스트보다 더한 리얼리스트다.

w****0 2009.12.0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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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여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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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옆 문학카페]영화 ‘밀양’의 모티브 <벌레이야기>   전반적인 한국 영화의 불황 속에서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물량공세에 기를 펴지 못하던 우리 영화 가에 모처럼 주름살을 펴주는 낭보가 전해졌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제 60회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수상 소식과 함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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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옆 문학카페]영화 ‘밀양’의 모티브 <벌레이야기>

 

전반적인 한국 영화의 불황 속에서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물량공세에 기를 펴지 못하던 우리 영화 가에 모처럼 주름살을 펴주는 낭보가 전해졌다. 세계 3대 영화제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제 60회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수상 소식과 함께 영화 ‘밀양’이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열림원>에서 그 모티브를 얻었다는 사실 또한 보도를 통해 알았다. 수상을 예감한 때문인지, 영화의 흥행을 어느 정도 예상한 발 빠른 기획 덕분인지는 몰라도, 소설은 문고판보다 조금 더 큰 판형에 판화 같기도 하고 목탄 스케치 같기도 한 삽화까지 곁들여 100여 쪽의 가벼운 제본으로 출간되어 있었다. 책을 살 필요도 없이 서점에서 읽고 나오기에 제격이다.

 

소설이 던지는 질문

 

소설의 내용은 단순하다. 그런 대로 잘되는 약국을 경영 중인 부부에게 알암이라는 외동아들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저는 장애아인 아이는 도무지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평범하고 조용한 아이다.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게임이나 기타 다른 놀거리에도 관심이 없던 내성적인 그 아이가 4학년이 되면서 주산 학원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한다.

 

약사부부는 그것만으로도 고맙다. 아이 스스로 열성인 무엇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비극은 주산 학원장 김도섭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이가 유괴된 것이다. 물론 그 범행이 의심한 대로 원장의 소행으로 밝혀진 것은 나중의 일이지만, 실종 후 두 달 스무 날 여만에 아이는 학원 근처의 지하실에서 부패한 사체로 발견된다.

 

소설은 아이의 유괴를 다룬 것이 아니다. 줄거리는 단순할망정 던지는 질문은 지독하다. 소설은 아이를 잃은 엄마, 아니 자식을 죽인 살인마를 용서할 권리마저 신에게 빼앗긴 한 인간이 무참한 신에게 대들며 부르짖는 인간존엄에 대한 육성 고백이다.

 

“이 이야기는 애초 아이가 희생된 무참스런 사건의 전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어느 무디고 잔인스런 아비가 그 자식의 애처로운 희생을 이런 식으로 머리에 되떠 올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것은 내게서 아이가 또 한 번 죽어나가는 아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알암이에 뒤이은 또 다른 희생자 아내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때문이다.”

 

그렇다. 소설은 아이의 엄마가 자식이 유괴된 후부터 범인이 검거되고 그 살인자를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았다가 얄궂은 신의 개입으로 절망하여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던 사정을 아비의 육성으로 이야기 한다. 어미는 아이가 유괴된 후에는 아이가 살아 돌아올 거라는 “희망과 집념으로” 미칠 것 같은 삶을 버텨낸다.

 

범인이 검거된 후에는 “이번에는 희망과 기원에서가 아니라 원망과 분노와 복수의 집념으로”로 또 한 번 쓰러질 것 같은 삶을 견딘다. 그러나 살아있다기보다는 죽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이 직접 눈깔을 후벼 파고 그의 생간을 내어 씹고 싶은” 심정으로 모진 목숨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이웃 김 집사의 끈질긴 전도에 따라 하나님을 만난다. 냉소적이기만 하던 그녀가 신앙의 힘인지, 시간의 마성 탓인지는 몰라도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김 집사는 이제 용서를 말하고 구원을 부추긴다. 아이의 구원까지도 이제 엄마의 몫이 된다. 납치도 신의 섭리요 비명에 간 어린 목숨도 다 신의 예정이다. 신의 사랑에 감사해야 한다. 그래야 알암이가 천국의 문에 들어설 수 있음으로.

 

이런 제기랄, 여기서 잠깐. 갑자기 기자에게 한 목소리가 들린다. 영화 ‘그놈 목소리’의 그 비열한 음성과 비웃는 듯 한 호흡소리가 쾅하고 들린다. 설경규의 눈물겨운 호소가 절절하게 울린다. 얼마 전 끝내 고물상 땅 속의 사체로 발견된 여아의 주검이 보인다. 용서라니, 그것은 지나가는 개에게나 던져주었음 싶다.

 

“인간에겐 도대체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인간을 마지막으로 심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며, 사람에겐 오직 남을 용서할 의무 밖에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 제기랄, 그런데도 엄마는 용서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래서 엄마는 교도소를 찾고 자식을 죽인 살인마를 만난다. 그런데 그것이 또 하나의 비극, 우발적으로 벌어진 아이의 유괴보다 더 불행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벌레가 될 수 없음으로, 신의 벌레로 사느니 엄마는 인간으로 죽는 쪽을 택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내 자식을 죽인 살인자에요. 살인자가 그 아이의 어미 앞에서 어떻게 그토록 침착하고 평화스런 얼굴을 할 수 있느냔 말이에요. 살인자가 어떻게 성인 같은 모습으로 변할 수가 있느냐 그 말이에요.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에요”

 

그녀가 용서를 위해 그 모진 시간의 고문과 기억의 자해를 얼마나 견디어야 했던가. 산 것도 아니요 죽을 수도 없는 모진 지옥에서 겨우 부지한 목숨인 것을, 그런 그녀에게 가장 자애롭고 편안한 얼굴로 구원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저는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하는 살인자에게 어미의 용서는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한단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영화가 말하는 대답

 

점잖게 말해 신은 얄궂다. 솔직히 말해 자식 죽인 놈보다 더 밉다. 인간의 규약인 법이 사형제를 고집하며 받는 비난은 김 집사의 말처럼 신의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 같이 존엄한 인간이기에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인간애의 발로다. 물론 참회하는 자는 아름답다. 용서하는 영혼은 그가 감내한 고통의 무게가 크기에 더욱 값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것이어야 한다.

 

현세의 죄과가 단 한 번의 고백과 기도로 사면되는 그 구원의 세계에서 도대체 인간의 자리는 어디인가? 성경 몇 구절과 신을 인정하는 고백이면 벌써 천국에 이른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이겨내며 용서에 이른 인간의 처절한 노력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 모진 시간과 기억의 고문을 견디고 증오와 앙심의 비수를 오히려 자신에게 찔러대며 겨우 버틴 어미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하나님에게 이미 용서를 받은 살인자에게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용서라니……. 소설 속의 어미는 신에게 인간은 대체 뭐냐고 대든다. 그 따위 신의 사랑이라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희롱이라며 온 몸으로 절규한다. 인간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인간을 무시하는 하나님, 인간 세상을 희롱하며 위선과도 같은 구원의 내세를 약속하는 신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기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영화가 말해주는 대답은 알지 못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음으로 말이다. 이제 그 답을 찾으러 영화관에 가 볼 참이다.

e******1 2008.12.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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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처절한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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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의 원작 소설이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영화화 되어 전도연이 칸 여우주인공상을 타게 되다니...   용서..모든 종교에서 그렇듯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벌레만한 인간에도 조금의 용서의 권리도 내세우지 못하는것일까? 기독교인들이 밥 먹듯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란 진정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진짜 알암이 엄마와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벌레만도 못한 인간의 처절한 고통" 내용보기

영화 밀양의 원작 소설이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영화화 되어 전도연이 칸 여우주인공상을 타게 되다니...

 

용서..모든 종교에서 그렇듯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벌레만한 인간에도 조금의 용서의 권리도 내세우지 못하는것일까?

기독교인들이 밥 먹듯 말하는 '하나님의 섭리'란 진정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진짜 알암이 엄마와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면 어떻게 했을까??

 

많은 생각을 던져 준 책이다.

 

전병욱 목사님과 하정완 목사님 두분의 설교말씀 찾아 읽어 봤고

기독교사상 7월호 '밀양 특집'도 다 읽어 나름대로의 답을 찾긴 찾았는데 아직 불완전하다.

 

용서라는거,,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전도연이 자동차를 타면서 딴생각을 하다가

사람을 칠뻔한 장면이 나온다. 전도연은 거듭 죄송하다고 사과하지만 행인은 사람 죽여놓고 죄송하다면 다야?? 화를 내며 지나간다.

 

정말 사람 죽여놓고 죄송하다면 다인가??

죄 지어 놓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그 용서만을 믿고 잘못을 거듭하고 죄를 반복한다면, 과연 어느 주춧돌 위에 기독교윤리를 세우고, 어느 기둥 위에 하나님의 의를 떠 받쳐 올릴 수 있겠는가?

죄는 내가 지어놓고 그 죄 값은 항상 예수님이 대신 갚아주신다고 믿는건 가게에서 외상으로 과자를 사 먹으면서 "빚은 우리 엄마가 대신 갚아주실 거에요"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걸 대속신앙이라고 하는데,,

한국 기독교인들이 용서를 너무 값싼은혜로 전락시켜났다는 것이다.

정말 통곡이 있는 회개가 필요한 시점이다....

f*********5 2007.09.29.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