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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 작가로는 오스카 와일드를 무척 좋아하고 제임스 조이스는 그럭저럭 좋아한다. 그리고 이제 이 작품으로 2005년에 부커상을 수상한 존 반빌을 막 읽었다. 오스카 와일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들이 날카로우면서도 유머가 있고, 냉철하면서도 지적인 우아함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도 그 자체로서 흥미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으로는 세심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필체로 소외당한 계층을 잘 그린 <더블린 사람들>이 있다. 그에 비해 존 반빌은 무덤덤하고 잔잔하다. 인물들도 있는 듯 없는 듯,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도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그리는 것도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평온한 바닷가를 연상시키듯 하다. 그렇다고 햇살이 비추는 것은 꼭 아니지만.
이 작품은 주인공이 병으로 아내를 잃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닷가로 되돌아와 현재와 과거, 즉 어린 시절의 먼 과거, 최근에 아내를 잃은 과거 그리고 현재 자신이 머무는 곳에 대한 이야기를 엇갈려가며 그리고 있다. 둑음을 선고받고 함께 힘든 시절을 보낸 아내를 떠나보내는 괴로움이 억눌린 감정으로 잘 표현되어있고,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만난 그레이스 부인에 대해 느꼈던 첫 감정, 그리고 곧 그녀의 또래 딸과 하는 풋풋한 첫 사랑도 아련한 느낌을 주고, 쌍둥이 아이들의 격렬한 자기들만의 정신적, 육체적 소통은 그에게 알 수 없는 경외감과 소외감을 준다. 나른하게 섹시한 여자 어른을 바라만 보다, 감정 표현이나 태도가 당당하고 담대했던 또래 어린 소녀를 만나면서 주인공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장한다. 물론 결론에서 드러나는 이야기로 보아 그 상황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쉬운 것만은 아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를 잃고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남자, 어쩌면 그녀의 둑음이 어린 시절 사라졌던 둑음을 다시 불러일으킨 게 아닐까. 어린아이가 상상하는 어른들의 세계는 어른이 된 다음에도 또 다른 놀라움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짐작할 수 있는 어른들의 세상은 실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일 수도 있으니까.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잔잔하고 평온한 필체로 처음부터 시종일관 이야기가 전개되는 바람에 읽기가 좀 지루했다. 과거의 인물이나 상황, 그리고 현재의 상황과 인물 묘사 등이 큰 관심을 끌지 못한 채, 너무 길었다고나 할까. 과거와 현재 사이의 괴리감도 그 연결감이 떨어져 틈이 느껴졌고. 아무튼 평탄한 스토리에 비해 읽기가 그리 수월한 책은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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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로 인한 대체로 괴로운 결과들 가운데는 내가 사기꾼이라는 사실 때문에 생기는 수줍음도 있다. (아내) 애너가 죽은 뒤 나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떠받들어 주고, 공경해 주었으며, 특별한 배려의 대상이 되었다. 상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내 주위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결국 나도 엄숙하고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곧 경련이 일어나고 말았다. 무덤 구덩이 너머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부드러운 표정을 나를 바라보던지. 식이 끝나자 얼마나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게 내 팔을 잡던지, 마치 내가 기절해서 쓰러지거나 머리부터 그 구덩이로 곤두박질치기라도 할 것처럼. 여자들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동정하는 태도로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괴로움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품에 여주인공의 주검을 안고 무대에서 비틀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구식의 비극 여배우들이 보여 주는 녹아버리는 돌덩이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발을 멈추고 손을 들어 올리며 이 사람들에게, 나는 그들의 경의 -나는 그것을 경의라고 느꼈다 - 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죽는 일은 애너가 했고, 나는 방관자였을 뿐이라고, 단역이었을 뿐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기질이 참 비슷하다고 하지요. 그래서인지, 아니면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다음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다 이런 것인지, 이 페이지에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죽음과 잊혀 가는 것과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요즘 이런 소설 참 만나기 힘들죠.
*표지는, 독일 베를린 미술관에 있다고 하네요.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작품이랍니다. 표지만 보아도 바다로 가버린 많은 것들이 연상되어서, 계속 바다 쪽으로 갈수록 짙어지는 하늘색과, 너무 많은 것을 담아 검은색이 되어버린 짙은 바다 쪽을 끝없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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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커상 수상 작품이라는 찬사가 이 작품 소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 소설은 작가가 시종일관 유지하는 냉정한 시각으로 인해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암으로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노작가(아마도 미술평론을 하는 듯하다)가 사춘기 초입의 우여곡절의 사연이 깃든 바닷가를 찾아 다시금 회상에 잠기는 것이 주요 줄거리이다. 어릴 적 추억과 함께 이제 막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아내와 마지막 삶의 편린들이 교차하며 등장하는 관계로 주인공이 이야기를 풀어놓는 시점에 얼마간의 혼동과 무질서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읽어나가면서 자연스레 해소된다. 결과적으로 죽음의 문제다. 어찌할 수 없이 누구나 맞게되는 죽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개개인의 특수성, 남은 자들이 안고 가야하는 정신적 짐 혹은 궤적, 그런 것들을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풀어낸다. 무슨 거창한 주장과 판단을 내리지도 않는다. 세세하다고 할 정도로 이어지는 자연과 주변 사물 혹은 배경 등에 대한 묘사 자체가 남은 자의 황량한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작가는 일체의 흥분을 삼가고, 그러다 보니 문장 또한 간결하기 비할 데 없다. 그러므로써 우리에게 냉랭하게 사태를 바라보도록 은근히 강요한다. 그래서 공들여 읽다보니 내용에 빠져들었고, 급기야는 그의 바싹 마른 내면에 성큼 다가서 있었다. 어쩌면 그런 섬뜩한 느낌이야말로 진정 작가가 독자에게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재미나고 아름다운 경험은 아닐지라도 차가운 바람을 실컷 맞은 뒤끝처럼 을씨년스럽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다. 작품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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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존 반빌.
존 반빌의 14번째 작품인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The sea]는 제 37회 부커상 수상작으로, 당시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들 간의 치열한 경합으로 인해 황금의 해라 불리기도 한 2005년도 수상작이다.
처음에 이 책을 집었을 때는 솔직히 겉 표지의 그림이 너무 맘에 와 닿아서 였다. 이 소설의 표지그림은 독일 화가인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의 수도사'라는 작품이다. 신과 수도사, 그리고 바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신과 같은존재, 바다와 같은 존재가 있다. 종교적 의미의 신이나 바다가 아니다. 신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또는 닿을 수 조차 없는 높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바다는 넓은 어머니와 같은 마음, 최후의 안식처, 죽음, 기억 등의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맥스는 암으로 자신의 부인을 잃는다. 그 상실감은 맥스의 기억 속에서 안식처를 필요로 하게 되고 어렸을 적의 그리운 기억 속으로 맥스를 이끈다. 기억 속에서, 현실 속에서 맥스는, 기억하고, 현실을 깨닫는다.
기억과 소멸, 그리고 생성과 죽음.
이 소설의 아름다움은 두가지 측면에서 부각된다. 존 반빌의 시를 쓰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필체. 그리고 아름다운 어린시절을 회상시켜 주는 이야기.
나에게 있어서 신은 누구인가. 바다는 어디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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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제 내게 뭔가를 보여줘..."감동 받을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읽기 시작했다.줄리언 반즈,가즈오 이시구로등을 제치고 2005년 부커상을 탔다는 책. 허겁지겁 읽었다.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부커상을 탔다니 분명 뭔가 있을 거였다.조금 더 있으면 나올거야,조바심을 내며 뭔가 발견하게 되길 기다렸으나 단숨에 끝까지 갔다.아무것도 없었다.혹시나 책을 털어까지 봤지만 역시나였다.어쩜,고도가 끝내 나타나지 않은 것은 탁월한 설정일지 모른다.진짜로 고도가 나타났다면 모두들 실망했을지도 몰라.실망보단 허무가 맞을까?성질 더러운 관객은 속았다면서 뭔가를 던졌을 것이다. 그래도 난 성질 착해주신 독자답게 얌전히 책을 내려 놓았다.
아내를 암으로 잃은 맥스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들은 바닷가 마을을 찾아 온다.아내를 잃은 상실감으로 죽음에 대해 집착하고 있던 그는 어린 시절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마을을 둘러 보다가,오랜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들과 사건들을 회상하게 된다.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좋은 책은 흔하지 않다.그래서 한번이라도 힐끗 보게 되면 놓치게 되지질 않는다.이 책도 좋은 책이라 하기에 손색은 없었다.어눌한 듯하나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문체.문장을 이끌어가는 집요함과 매서움,명상적인 말투,징징대지 않은 어른스러움,삶의 끝자락에 서서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되새겨 보는 자의 체념과 허무함,과장이나 허식,폼 잡는 자세,거만함,인생의 의미에 대해 과대포장하는 가식이 없다는 것이 눈에 뜨인다.하긴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고,자신의 죽음을 앞 둔 마당에 자신을 포장할만한 힘이 남았다면 그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겠지...제목대로 마치 일렁이는 바다 속을 거니는 기분이 들었다.그의 바다는 죽음과 닮아 있어서,따뜻해 보이고 안정적인 동시에 광포한 바다는 그렇게 유혹적이었다.그럼에도,난 이 책이 별로였다.
무엇보다 줄거리가 재미 없었다.어린 시절,눈앞에서 벌어진 이란성 쌍둥이의 자살사건(내겐 동반자살로 보였다.)극적이긴 하지만,신빙성이 없었다.그리고 주인공의 어린시절 역시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고.싸움만 해대다 이혼을 한 부부의 아들,가난을 부끄러워해 상류층을 막연히 동경하는 그에게 자동차를 타고 온 그레이스 가족들.돈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그들을 보면서도 환상을 깨뜨리지 못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오해로 인한 말 전달로 쌍둥이를 사지로 몰아 넣는다.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과거를 반추하면서 당시를 재구성해보고는 그 사건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골자만 두고보면 뭔가 있을 것 같은데,책 속을 헤매다 보면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명확하고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닌 애매하게 흘리는 것이 그의 쓰는 스타일이라고나 할까.....세월이 흐르고 나면 그땐 몰라본 걸작이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걸작이라고 못하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처럼 아련하게 어린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힘을 가졌으며,<작은 것들의 신>(아룬다티 로이작)처럼 쌍둥이들이 나와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비슷했다.그러나 오해는 마시라.두 작품에 비하면 작품의 격은 떨어지니까.원서로 읽으면 언어의 맛이 더 해질지는 모르겠지만,존경하옵는 정영목님이 번역하신 글이다.원서를 읽는다 해도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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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안오지만 장마의 영향 때문인지 뿌연 안개가 도시를 휘감고 있다. 통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바깥세상은 물에 잠긴 느낌이다. 이 공간을 벗어나면 숨이 막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하지만 안개로 뒤덮인 세계가 바다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내가 저 바다로 사라져 버린다해도 잔물결 하나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미미함. 그 미미함 가운데서도 사라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들지 않는다.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답답함과 순간적인 두려움만 들 뿐. 이렇게 뿌연 세상은 사라짐에 있어서도 관능적일 것 같다. 그러나 너무나 화창한 여름의 바다, 잔물결 하나 일지 않던 바다에서 순식간의 파도가 휩쓸고 가버린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꿈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사실이 아닐 거라고? 어릴적 추억이 깃든 바다를 찾은 맥스는 그 답을 얻기 위해서 온게 아니지만 바다로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한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그러나 그에게 남아있는 추억은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부인을 잃고 상실감에 모든 것을 뺏기지 않으려는 맥스에게 있어서는.
맥스는 전혀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은 하숙집 시더스에 머물면서 부인의 투병생활과 바닷가에서 보냈던 어린시절의 추억, 자신의 현실을 모조리 그려낸다. 그런 고백은 몽롱하게, 혼란스럽게, 진부하게 펼쳐지지만 그가 기억하는 그레이스 가족은 특별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추억만으로도 부인을 잃은 상실감을 잠시 잊을 수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책의 마지막에서는 부인의 죽음과 비슷한 잃어버림을 안겨 줄 뿐이다. 분명 그레이스 가족에 대한 추억으로 마음의 상처를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레이스 가족의 결말은 참담했고 어린 맥스와 현재의 맥스는 상처로 뒤범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맥스 자신이 잘 앎에도 다시 이 바닷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인을 잃어버린 상실감속에 그레이스 가족을 덩달아 떠나 보내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낱낱이 꺼냄으로써 모든 것을 드러내려 했을까. 자신의 삶 전부를 탈탈 털어 낸다는 기분으로?
그러나 맥스가 바닷가를 다시 찾은 이유보다 맥스가 꺼내놓는 그 여름과 그레이스 가족에 염두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중점을 뒷받침 해주는 것은 저자의 문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해설가도 말했지만 이 책은 결코 수월하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비교적 보통 양인 260페이지의 책을 얼마나 오랜시간 읽었는지 맥스의 이야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책의 초반에는 너무나 진부해서 정체되어 있는 느낌이 들었고 묘사는 뛰어났지만 읽기는 수월치 않다고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린게 사실이였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읽기에서 뛰어난 묘사를 발견해서인지 지루하다고 팽개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묘하게 나를 자극하는 분위기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자극은 결국 나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저자의 문체와 분위기에 빠져 몰입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묘사가 자아내는 인물들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인물이나 배경이 툭 불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조화를 이루며 그림 같은 풍경과 잔잔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또한 이어질 듯한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것이 단절을 의미한다 생각할 정도로 초반에는 저자의 문체가 낯설었으나 자연스레 적응해 가는 내가 신기했다. 그것은 저자의 의도를 파악했다기 보다는 저자가 그려내는 분위기에 공감을 더해 간다는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분명 맥스를 통해서 과거와 상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분위기에 끌려가다 보니 단순히 그것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미하게나마 맥스에게 부여될 새로운 생활(딸과 사윗감이 될 청년과의 결합된 삶)은 좌절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맥스의 새로운 생활에 무언가를 온전히 기대할 수 없지만 적어도 과거로 인한 상실과 좌절만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분명 아픈 과거이기는 하나 그에겐 소중하고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갔던 재료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재료가 기다리고 있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기쁨과 사랑과 환희가 더 넘치는 삶이 되길 바래본다. 그래서 드 넓은 바다를 보더라도 자책감에, 상실감에 몸부림치지 않고 자신의 존재에 감사함을 갖을 수 있는 마음을 갖길 바란다. 모르지 않는가. 새로운 신들이 다시 돌아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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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반빌의 14번째 작품인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The sea]는 제37회 부커상 수상작으로, 당시 최종 후보에 오른 작가들 간의 치열한 경합으로 인해 황금의 해라 불리기도 한 2005년도 수상작이다.'라는 유혹적인 책 소개글.
바로 이 글이 내가 몇 년 전에 무릎을 치며 읽었던 [설득의 심리학]에서 소개된 '권위의 법칙'에 의거한 것이라면, 나는 간단히 설득당했다. 이 책을 선택했던 다른 이유가 몇 가지 더 있긴 하지만, 아무튼 내가 끌렸던 이유는 부커상과 황금의 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얘기지만, 이왕이면 매우 문학적인 작품이라는 소개를 넣었어야 했다. 그것도 아주 굵은 글씨체로 자세하게 설명하며 강조했어야 했다. 나같은 독자의 취향과 선택권을 조금 더 신중하게 배려했더라면 말이다.
나쁜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정말 문학적이어서(이 단어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으니 안타깝다) 이런 글에 적응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아주 어려운 고전을 읽을 때의 따분함이랄까, 몰이해랄까, 그런 느낌이 든다.
무미건조하다. 케케묵은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같다. 喪妻한지 얼마 안되는 남편의 이야기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무척이나 상세하고 친절한 묘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읽어내기가 힘들다. 또 현재와 과거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어서 이야기를 잘 따라가다가도 한 순간 어느 시제인지를 놓쳐서 헤매기도 한다.
주인공을 포함해 등장인물의 캐릭터 또한 하나같이 아주 독특하고 메마르기 짝이 없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인데도 작가의 묘사가 평범하지 않게 만들어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상적인 것은 '냄새'. 작가가 인물을 묘사할 때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그 인물에게서 나는 냄새인데, 땀냄새나 머리를 감지 않은 냄새같은 체취에서부터 '새끼 사슴 같은 김빠진 듯한 냄새'나 '상점의 텅 빈 비스킷 깡통에서 나는 냄새'같은 기묘함까지, 또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서 나는 냄새의 묘사까지도 기묘한 분위기를 더욱 기묘하게 만드는 재주를 보인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해설에서 이 소설은 바다만큼 넓은 아량과 인내심을 요하는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한 것과 두 번 읽기를 권하는 것 모두 맞는 말이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해진 다음에 다시 읽게 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의미를 드러내며 명료하게 다가온다고 해설한다. 과연 내가 두 번 읽을 수 있을까? 내가 작가 특유의 문체를 잊기 전에 언제고 두 번째로 읽게 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일단 조금 나긋나긋한 책으로 머리 속에 신선한 공기를 좀 넣어주어야 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