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성에게는 밥이 하늘이다"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 앞에 우리의 가장 위대한 군주, 세종대왕이시라면, 어떻게 이들을 구휼하셨을지 이 책에서 배웠습니다.
세종대왕 치세는, 즉 재위기간 32년 내내 태평성대였던 것은 아닙니다. 즉위하자마자 7년의 연이은 가뭄과 대기근, 수도 한양 대규모 방화사건, 유감동 등의 대형 섹스스캔들 등으로 오히려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 더 많았죠.
그 중에서도 가뭄은 특히 백성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시 여기던 세종대왕으로선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계속되는 기근에 하나 둘 스러져가고, 굶주림에 지쳐가자 광화문 사거리에 큰 밥솥을 걸고 죽을 끓이게 합니다. 지나가는 누구라도 하루에 적어도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속수무책 굶어죽어가는 것만은 막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그리곤 직접 그 자리에 나가 백성들이 어떤 모습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시곤, 그 피폐한 모습에 가슴이 아파 돌아오자마자 경회루 옆에 작은 초가집을 지으라 명하십니다. 절대 새 목재를 쓰지말고, 쓰고 남은 목재로 초가집을 지으라고요.
그리곤 백성은 굶주림에 고통받는데, 군왕이 어찌 홀로 편안히 먹고 잘 수 있겠느냐며, 그 초가집으로 거처를 옮기십니다. 먹고 자는 것은 물론 집무도 그곳에서 보십니다.
온 대소신료들과 소헌왕후께서 읍소하며 말렸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활을 장장 2년 7개월 동안이나 하십니다.
제 생각엔 끽해야 한두달 하고 말았겠지 싶었는데, 거의 3년 가까운 시간을 백성의 아픔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가장 낮은 곳에서 생활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군왕이 있었더랬습니다. 그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의 연구를 거듭하십니다. 남들이 자연 현상은 하늘의 뜻이라고 말할 때, 당신은 하늘과 별과 해와 달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명나라에서는 제후국들이 독자적으로 하늘을 관찰하는 일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로 명나라와 갈등이 심화되는 것을 원치않았던 국내 정치인들의 반발 역시 매우 컸습니다.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천문관측은 세종대왕께서 정치인들과의 지난한 논쟁과 설명, 설득과 이해를 통해 이루어낸 소중한 결실입니다.
또 가뭄과 홍수는 하늘이 진노하는 것이라고 믿을 때, 가뭄과 홍수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어떻게 구휼할 것인지, 그 원칙과 방법을 고민하셨습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다음의 백성 구휼 원칙입니다.
인도주의 지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
무엇보다 세종께서 기근을 구제한 방법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우선 기근을 생각하는 방식이 독특했다. “천재(天災)와 재이(災異)는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다만 구휼하는 조치는 사람에 따라 잘할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19/1/12). 가뭄과 홍수 자체는 피할 수 없지만, 그 대응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판중추원사 안순의 제안과, 즉위 초년 황희가 강원도에 행했던 사례를 토대로 해 만든 다음의 구휼 원칙은 그 같은 당신의 생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첫째, 기민(饑民)구휼 장소를 남자와 여자, 환자와 건강한 자를 구분해 설치하라. 기민일수록 더욱 더 체면을 지켜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편히 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둘째,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묻지 말라. 고향을 떠나 돌아다니는 그들의 자취[根脚]를 묻기 시작하면 비록 배가 고파도 올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아전이 아니라 마음 착한 중들에게 음식 나눠주는 일을 맡겨라. 아전에게 맡기면 “구휼한다는 이름만 있고, 그 실상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 구휼과 관련해 포상과 상벌을 시행하라. 그래야 수령과 아전이 기근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찰사에게 그 일을 위임하라. 중앙에서 모든 상황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시의적절한 대응을 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19/1/2). =============================================================================
우리에겐 이렇듯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사람의 인권을 결코 놓치지 않았던 위대한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라면이나 밀가루는 지원할 수 있어도 절대 쌀만은 지원할 수 없다는 지금 정부의 태도가 과연 인도주의 원칙에 맞는 일인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인권과 인도주의의 원칙... 북한 주민들에게 어서 빨리 먹을 수 있는 식량과 평안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
|
세종에게 이런 여러 가지 면이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해준 책이다. 평면적이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부풀리지 않고 사실적으로 썼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또 하나, 읽기 쉽게 되어 있다. 9인의 명사들이 회고하는 세종의 모습은 각각 세종의 일면이다. 때로는 이게 어디 세종만의 모습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역시 주인공은 세종이 분명하다. 요즘은 역사책이 하루가 다르게 진화해 간다. 이 책도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는 첨단에 속한다. 같은 저자가 쓴 <정치가 정조>라는 책도 이 기회에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정조는 워낙 세종을 벤치 마킹하려고 애썼다니 말이다. |
|
박현모 교수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는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9인의 정치가는 태종,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수양대군, 김종서, 신숙주, 정조 등이다. 우리는 세종을 성군(聖君)으로만 알고 그의 재위기는 오직 평탄하기만 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종 재위시에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무리수도 있었고 아픔도 겪었고 임금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불평도 있었다.
세종 재위는 수성(守城)기에 해당한다. 부왕 태종의 작업에 힘입은 바다. 세종은 부왕 태종의 피의 숙청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장인 심온이 숙청당할 때 묵인 내지 승인했다고 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태종이야말로 조선왕조를 국가로 인식한 첫 국왕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태종이 화가위국(化家爲國)이란 말을 이해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운다’는 뜻으로 주로 개국 시조가 사용했다. 물론 태종은 화가위국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에 준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세조는 계유정난을 건국에 버금간다고 여겨 이 말을 사용했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양녕이 주색잡기에 탐닉한 것과 달리 충녕(세종)은 독서를 피난처로 여겼다는 말이다.
태종은 세종이 밥을 먹을 때도 좌우에 책을 펴놓아 염려스러워 했지만 내심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고 평했다. 태종은 무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태조는 자신이 가문을 일으켜 국가를 만들었으나(화가위국; 化家爲國)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무가(武家)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을 했다.
태종은 아버지(태조)는 정치의 세계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영역이라고 보았다고 말한다. 권간(權奸; 권력을 가진 간신) 속에도 충신이 있고 지금 충신으로 보이는 자도 언젠가는 역신(逆臣)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충녕이 예능에도 뛰어났고 형제간에도 독특한 우애를 보여주었으며 음주와 가무도 제법 하는 듯했다고 생각했다.
태종은 고려라는 그림 위에 조선왕조의 무늬를 그려넣으려 한 것이 자신의 방식이었다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조정해 정치적 화음을 이루려는 것이 세종의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태종은 충녕을 양성지(梁誠之; 1415 - 1482)의 자주국방론을 반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사대(事大)외교론자로 평했다.
송파(松坡)라는 호 외에 눌재(訥齋)라는 호도 썼던 양성지는 자주국방론자였고 규장각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다. 태종은 명나라 시조 주원장(朱元璋)의 피의 숙청을 잔인한 것으로 평하는 세론에 반대하며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특히 국왕의 일이라 말했다. 그리고 충녕을 그런 정치관과 정치적 폭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평했다.(44 페이지)
황희는 양녕의 세자 폐위를 반대해 유배에 처해졌었다. 당시 그는 병조판서였었다. 남원에서 4년의 귀양 생활을 하던 황희는 태종의 서거 3개월전 상왕이던 태종의 부름을 받았다. 태종은 황희를 불러 세종에게 중용(重用)할 것을 부탁했지만 세종은 황희를 중용하지 않다가 강원도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황희를 강원도 관찰사로 삼았다.
세종 재위시 많은 여진족들이 귀화해 왔다. 황희는 이를 조선의 어진 정치, 그리고 오랑캐를 변화시켜 백성으로 삼는 세종의 포용 정책 때문이라 생각했다. 왜구, 여진, 명나라, 남만인(南蠻人)들까지 귀화하려 하자 명나라는 요동 지역의 여진족들이 조선에 귀부(歸附)함으로써 조선이 중화의 국가가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황희는 세종께서 자신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의 단점을 아시고도 공적으로 그 허물을 덮을 수 있다며 그렇게 세종께서 시종 보호해주신 덕분에 추문과 허물을 극복하고 청백리로 거듭날 수 있었고 급기야 죽어서 당신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조말생은 황희를 간악한 소인이라 평했다.) 묘정에 배향되었다는 말은 문묘 공신당에 세종대의 공신으로 모셔졌다는 의미다.
최윤덕(崔潤德), 허조(許稠), 신개, 이수(李隨), 이제(양녕대군), 이보(李補; 효령대군) 등이 함께 배향되었다. 허조(許稠)는 하양(河陽) 허씨다. 허조는 유감동(兪甘同; ? ~ ?) 사건을 논했다. 유감동은 조선 전기의 기생, 무희, 시인으로 양반 출신 부녀자였으나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기녀로 생활하며 고관 40여 명과 간통해 처벌 받은 여자다.
세종은 유감동 사건 처벌 대상자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허조는 세종이 여종 덕금이 학대받은 사실을 접하고 마음 아파했다고 평했다. 또한 이런 생각을 가졌기에 세종이 부민고소금지법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고 평했다.(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법제인 부민고소금지법은 세종의 대표적 악법으로 꼽힌다.)
허조는 세종이 후궁보다 낮은 노비 출신의 신빈 김씨를 총애하여 그녀를 후궁 중 최고 자리인 빈으로까지 올린 사실을 언급했다.(신빈은 소헌왕후의 시녀였다.) 그리고 세종이 자신의 즉위 후 초토화된 처가를 생각해 소헌왕후를 극진히 대했다고 평했다.
박연(朴堧)은 세종 즉위 후 악학별좌(樂學別坐)에 임명되어 음악에 관한 일을 맡은 사람이다. 박연은 자신이 문과에 급제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음악의 길을 걸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어떤 계기로 자신이 음악에 관한 주상의 지우(知遇; 인격이나 학식을 남이 알고서 잘 대우함)를 받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박연은 세종이 자신에게 맡긴 첫 번째 임무는 황종(黃鍾; 음악을 이루는 기본음)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
박연이 아악(雅樂) 전용을 주장하자 세종은 반대했다. 세종은 아악은 본래 우리나라 음악이 아니라 중국 음악이라 말했다. 세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아서 향악을 듣고 죽어서 아악을 듣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했다. 박연은 세종의 말에 일리가 있지만 종묘나 사직 제사는 아악으로 국가 행사의 상징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박연은 공자가 계환자가 제나라의 여악(女樂)을 받아들이자 서둘러 노나라를 떠난 공자를 언급하며 세종의 여악 사용 긍정론을 비판했다. 박연은 여악을 쓰면 음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연은 세종이 당대의 정치는 후세인들이 평가하게 하자고 말했다고 말했다. 세종은 그런 생각으로 목조(穆祖)에서 태종까지만 칭송하는 것으로 용비어천가를 구성하게 했다. 박연을 통해 우리는 세종이 최상의 음악정치를 펼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정인지가 본 세종편에서 거론된 인물 가운데 정창손을 빼놓을 수 없다. 정창손은 단종 복위 사건을 세조에게 고변한 사람이거니와 세종에게는 충신, 효자 등이 나오는 것은 자질(資質)의 문제이지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해 파직당했다.(정인지는 술에 취해 세조를 너라고 불렀으며 굳이 어린 조카를 죽였어야 했느냐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정인지는 한글 창제의 최대 수혜자는 사실상 자신이라고 말했다.
수양대군이 본 세종편에서는 세종이 한 이런 말이 나왔다. “작년의 강무(講武)는 참으로 한심했다.” 포천 매장원에서 일어난 집단 동사 사건을 두고 이른 말이었다. 수양대군은 부왕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평소 신료들의 말을 경청하시던 부왕께서는 유독 강무에 대해서만 완강하셨다.“ 세종은 강무란 군국의 중대한 일로서 만일 이를 행하지 않는다면 무비(武備)가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미 이루어놓은 왕법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수양대군은 창업의 시기에는 권도(權道)가 중요하지만 수성(守城)의 시기에는 정도(正道)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풍수학을 강명(講明; 강구하여 밝힘)하는 일은 결코 유자(儒者)의 분수 밖의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또한 비록 주자(朱子)의 말이라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김종서는 우리나라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는 세종의 말을 거론했다. 김종서는 거의 모든 사안을 의논해서 아뢰라는 세종의 정치 방식이 아랫사람들에게 달가운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신하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주상의 의도야 고마운 일이지만 적절하고 타당한 의견을 내놓기 위해서는 늘 맡은 직무를 연구하고 생각하여 정통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종서는 세종이 최윤덕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전하께서는 능력만 있다면 문벌과 신분 고하를 초월해서 인재를 등용하곤 했다고 말했다. 서얼 출신의 황희를 중용하여 국가의 저울추 역할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든가 천출의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비롯한 새로운 기술을 발전시킨 것 등이 그 예라는 것이다.
신숙주는 세종이 성삼문에게 단종을 잘 돌보라고 한 말이 그를 꼭 왕위에 앉혀놓으라는 말씀이었는가 묻는다.
성삼문은 세조가 왜 모반을 했느냐고 묻자 당치 않다고 말하며 ”본 임금을 복위하려는 것이 어찌 반역이란 말이오? 자기 임금을 사랑하는 것은 모반이고, 나으리처럼 남의 나라를 도둑질하여 빼앗는 것이 충성이란 말이오?“라고 덧붙였다. 이에 세조가 ”그러면 처음 선위 받을 때 저지할 일이지, 지금껏 내게 맡겨두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반하는 이유는 뭐냐?”고 묻자 성삼문은 “사세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오. 나으리가 평소 곧잘 주공(周公)을 끌어들였는데, 주공도 이랬습니까?”라고 말했다.
정조는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무모릉; 無模稜)을 문제삼았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 세력인 시파(時派) 신료들의 태도에 한탄했다. 규장각 내에서 누구보다 정조의 개혁의지를 잘 이해하던 정동준은 화성 건설 과정에서 음독 자살했다.
정조는 재위 19년에 이가환과 정약용을 지방에 좌천시킨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가환을 충주목사로, 정약용을 금정찰방으로 파견해 지방의 천주교 확산을 막게 하면 그들에게 씌워진 천주교도라는 오명이 벗겨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남인 내에서 유일하게 학문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아울러 갖춘 두 사람이 떠나자 채제공의 판단력이 흐려졌고 결국 정승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정조는 자신이 즉위했을 때 자당이 아니면 무조건 배척하고 자당은 무조건 감싸는(당동벌이; 黨同伐異) 행태가 종식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말한다. 정조는 나이 오십이 되어서 마흔아홉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백옥을 거론하며 내 나이 오십에 이르러서야 재위 24년 동안에 한 가지 일도 제대로 해놓은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정조는 자신이 재위 19년에 탕평 정국을 이루었다고 운을 뗀 뒤 흥미롭게도 세종에게도 재위 19년이 중요한 해였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장 배우려고 하는 준거군주인 세종께서는 그 해에 정사를 위임하고 기민을 구휼하며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대외 문제를 예방하는 일을 했다고 말했다. 정조는 세종에 비하면 자신은 참으로 부끄럽다고 말했다. |
|
이 책은 9명의 시각으로 한 인물을 바라본다는 특별한 설정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그러면서도 자세히 알지는 못하는 세종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특히 저자의 전문분야가 '정치'인만큼 이 책은 세종의 정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선대의 방대한 사료인 실록을 바탕으로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 태종, 수양대군, 정조, 9명의 인물들이 자신의 입장에서 세종을 바라보며 당대의 정치를 논하고 있다. 이러한 재미있는 설정에 필자는 스키너와 포칵의 말을 빌려 자신이 서술할 방향을 정한다.
"역사가는 추측과 희미한 단서들을 통해서 역사 속 인물들이 암시한 의도를 재구축할 수밖에 없으며" "모름지기 정치적 발언은 정치가 자신도 그 발언의 의미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 그 발언은 여러 수준의 의미를 만들면서 복수의 역사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출발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서술 방식에 있어 1인칭의 시점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이 서술 방법이 새롭기는하나 그 효과면에 있어서는 새롭지 못하다는 아쉬움이다. 허조나 정조의 경우 이 서술 방법이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지만, 다른 인물들의 경우 이 서술 방법이 새로운 효과를 가져왔다는 평을 하기 힘들다. (물론 읽기에 덜 지루하다는 효과는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가 지나치게 현대적이다거나 서술 시점이 애매한 부분 등은 사소한 부분으로 보일지 모르나 새로운 서술 방식을 시도할 경우 분명 고민을 했어야할 부분이었다. 또한 많은 부분 세종에 대한 직접적인 서술이나 화자와의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 만큼, '**가 본 세종'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뭔가 모자란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아쉬움은 필자가 정치를 보는 관점이다. 필자는 분명 스스로 정치란 것이 단순하게 일원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 같다. 여기엔 나도 적극 동감한다. 그런데 에필로그 부분에서 자신의 기본적인 관점에 완전히 벗어나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단적인 예가 세종의 왕위계승실패에 대한 언급이다.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그리고 30대 중반의 호학의 세자 향(나중의 문종)이 있었다 할지라도, 세자의 건강과 수양대군 등의 야심을 알고 있었던 세종이 '잔인함의 미덕'을 발휘했어야 하지 않은가. 즉 태종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과감히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어야 했다. 그것은 '할 수 없었던' 일은 아니었다. 어렵지만 왕의 의지에 따라서 능히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결코 문종 사후의 정치적 혼란은 물론이고, 단종의 비극이 조선 정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막지 않았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만약 그가 단호하게 수양대군에게 전위했더라면, 성삼문이 괴로워하며 "신숙주는 나와 좋은 사이지만 죽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또한 수양대군 역시 위업을 이뤘지만 패륜의 군주라는 이중적 평가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선함'과 '잘함'이 불일치 되고 '도덕'과 '정치'가 균열되는 시점이 조선왕조 역사에 그렇게 빨리 도달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정치'란 바로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개의 진실과 복수의 가치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가 생각'한다는 저자의 말과는 달리 위와 같은 가정은 정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한다. 자신이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자계승을 고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가. 이미 세자가 책봉된 상태에서 수양대군에게 '단호하게' 전위했다고 하더라도 혼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인가. 당대 정치적 안정의 첫째 조건 중의 하나였던 장자계승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정치에 미칠 파장은 어찌할 것인가. 또한 역대 어느 왕조가 '선함'과 '잘함', '도덕'과 '정치'가 일치했었던가.
저자가 본문 중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서술했듯이 세종의 시대도 그것들이 정확히 일치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상충되는 것 같은 세종의 이미지에 대한 설명이 순조롭지 않은 것이다. 결국 척불논쟁 때 지나치게 고집을 피운 것도 그저 세종의 실책으로만 결론이 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느 것이 진짜 세종인가?'라는 최초의 질문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
정치적 언어랑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기 마련이고, 그 말이 다른 장소, 다른 곳에 전달되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특히 국왕과 같은 최고 지도자의 말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정치가의 말은 그 시대의 일정한 '언어 맥락'과 '정치적 문법'의 틀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생각은 말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 몸짓이라는 '침묵의 언어'를 통해서 표출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저자의 관점은 매우 탁월하다. 실록의 기록을 꼼꼼히 읽고 부분부분에 대한 근거를 꼬박꼬박 뒤에 달아 넣은 정성과 노력도 인정할만 하다. 새로운 서술보다는 이러한 '정석'과 같은 부분이 오히려 이 책의 미덕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필자가 시작부분에서 시도하고자 했던 것들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
|
옴니버스 역사소설을 읽듯 했다. 동시에 사실에 충실하여 더욱 실감나는 현장에 다녀온 느낌이다. 당대와 후대의 인물이 현장에서 그리고 기록을 통해 바라본 세종은 분명 실록밖으로 행차하여 지금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는듯 하다.
세종은 주어진 소명(숙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최선을 다한 왕이다. 소명이 주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축복이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찾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죽은 범부들이 부지기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세종은 주어진 사명을 분명히 인식했다. 권력의 정점에서 휘두르고 누려야 할 권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역사적 소임을 분명히 인식한 왕이었다. 이에 반해 양녕은 그 ‘주어진’소명‘의 본분을 이해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한이의 표상이다.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스스로 그 소명을 회피한 것일까? 나에게 주어진 소명의 절실함이 과연 어떠한지를 되물어 볼 일이다. |
|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세종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세종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물어보면 대답은 의외로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한글을 창제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다" 뭐 이정도가 대부분이고 "측우기, 칠정산, 자격루" 와 같은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하고나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다.
그렇다면 현재 국사 교과서에서는 세종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국사 교과서의 구성이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로 나누어져 있다보니. 세종의 이야기도 각 부분에 나누어져 이야기 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세종의 위대한 업적들의 대부분은 교과서 맨 뒤의 문화사부분에서 서술되고있다.
이 책 "세종, 실록밖으로 행차하다"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세종의 정치사적 모습을 국사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까?
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먼저, 궁중 안네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사를 일반관리보도 우대하였다.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윤리가 사회윤리로 자리잡게 하였다.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유교적 민본사상을 실현하려하였다. 유능한 인재를 널리 발굴하였으며, 청백리 재상을 등용하여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 고등학교 국사, p.81~82-
위의 서술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정치사 부분에 나와있는 세종의 이야기 전부이다. 세종이 실시했다는 의정부 서사제에 중점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태종이 실시한 6조 직계제와 비교한다. 그런데 세종이 왜 의정부에 권한을 넘겨주었는지, 왜 유교 윤리를 사회 윤리로 자리잡게 하려했는지, 어떻게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여 등용했는지, 그런 이야기는 나와있지 않다.
왜 세종이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한 모든 대답이 이 책 "세종, 실록밖으로 행차하다"에 있다. 이 책은 일반인이 읽기에도 편안하게 이야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래서 세종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박현모, 푸른역사, 2007)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 보기 드문 책이 한 권 나왔다. 이 책은 세종과 그 시대의 여러 면모를 새롭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수 있지만, 새로운 역사서술을 선보였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 하다. 박현모는 이 책에서 "세종의 '정치'에 접근"하였으며 "사료가 침묵하고 있는 계곡에서는 '상상적 고찰'이라는 다리"를 놓는 "'실험적' 글쓰기"를 선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 한껏 의미를 부여하여 1990년대에 나온 역사서 가운데 ‘역사를 사유할 수 있는 책’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이 주목해야 할 세 가지를 꼽으라면, 1 역사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라면, 그런 맥락에서 몇 가지를 더 부연해보자. 첫째, 이 책은 복수의 시각에서 쓰여졌다. 대체로 역사는 단일한 시각에서 쓰여지기 마련이지만 저자는 이런 주류적 흐름에 반기를 들며 복수의 시각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선왕이면서 살아 생전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본 세종, 신하였던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가 본 세종, 아들이자 비극의 주인공이 된 세조가 본 세종, 그리고 먼 훗날 세종의 시대처럼 성세를 누렸다는 성종이 바라본 세종 등으로 여러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저자의 노력을 결코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 본질적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저자 역시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포기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세종을 바라보았으며 一以貫之는 없다고 하였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저자는 ‘정치가 세종’이라는 시각을 줄 곳 견지하였다. 2 둘째, 이 책에서 세종을 聖君이 아닌 ‘정치가 세종’으로 묘사되었다. 사실 우리는 줄 곳 학교에서 세종을 ‘성군’으로 배웠다. 한국역사에서 ‘聖’이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과 세종이 아마도 대표적일 텐데, 그나마 이순신은 그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일부 있었던 반면, 세종은 비판은 별로 없었다. 물론 트집을 잡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 세종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서 ‘정치’라는 잣대를 들이대면서 聖을 탈색하려고 노력하였다. 저자가 취한 태도는 프롤로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즉 그는 “‘인간’ 세종의 고민으로부터 그의 정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면서 “역사 속에서 덧칠해진 셎오이 아닌 맨얼굴의 세종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저자의 이런 태도는 신선하다는 점에서 <역사학과의 직업역사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태도가 없다면 과학적 진술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서술에서 거둔 효과가 어느 정도였던가 하는 것은 여기서는 유보하고자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 역시 聖君의 기호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시도 자체는 매우 의미가 있었으나, 그의 시도가 실제 서술에서 성공하였다고 흔쾌하게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어쩌면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 셋째, 이 책은 ‘상상적 고찰’을 내세운 ‘실험적’ 글쓰기를 시도하였다. 언제까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쓰는 글을 ‘실험’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러니까 더 이상 역사적 상상력이 실증이라는 말에 밀릴 이유가 없는 데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실험으로 겸양지사를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 책 역시 실험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비록 스스로 한계를 지었으나 이 책에서 제시한 상상적 고찰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실증적인 역사서술을 하였다. 그 자신의 말처럼 “‘가위와 풀’을 가지고 사료를 최대한 재구성”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증이 아니면 무엇이 실증인가. 그러나 저자는 내심 욕심을 낸다. 그것은 실증이 아니라 실증의 일부분이라고. 저자는 정치학과에서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답게 정치를 “‘정치’란 어느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여러 개의 진실과 복수의 가치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계”이며 “큐빅과 같이 여러 개의 국면들이 맞붙어 공존하는 그런 세계”라고 하였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역사학과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역사 역시 ‘실증과 상상력이 맞붙어 공존하는 세계’이다. 저자가 정치란 선과 악이 혼재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이나 악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구의 인식이라고 하였듯이, 역사도 실증과 상상력이 혼재된 것이므로 실증에만 국한한다면 온전한 역사를 서술하기는 힘들다. 물론 저자에게도 아쉬운 점은 없지 않다. 그것은 저자가 상상적 고찰을 <‘사료’=역사, ‘해석’=정치사상>이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역사는 사료과 더불어 시작하지만 사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사료=역사라는 인식은 적절하지 않다. 20세기의 전통적인 역사인식도 <사료+해석=역사>라는 구도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저자의 역사관은 좀 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상상력 고찰의 칼을 배든 것은 의마가 크다 할 것이다.
《정감록》(백승종, 푸른역사, 2006)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어떤 책을 심도 있게 읽으려면 다른 책과 비교해서 읽을 필요가 있을 텐데, 이런 맥락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정감록, 역사사건의 진실게임》이다. 정감록과 읽을 때 세 가지 비교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조선 초기 守成의 시기와 조선 후기 반역의 시기를 대비해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세종을 조선을 ‘국가’로 만든 정치가로 상정하면서 이 시기를 조선이라는 국가의 정치질서를 만든 시기로 규정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정감록의 저자는 조선의 주류적 정치질서인 성리학적 질서에 대항하는 민중의 저항 이데올로기로 정감록을 제시한다. 조선을 세우려는 사람들과 조선을 뒤엎으려는 사람들의 대비가 흥미롭다. 둘째, 지배 엘리트의 시각과 저항 지식인의 시각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지배 엘리트가 역사의 주인공이지만 <정감록>은 전봉준과 같이 지배질서에서 배제된 조선후기 지식인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다. 비교해서 읽는다면 조선을 보다 심층적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것이다. 셋째, 역사의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을 비교해서 읽을 수 있다. <세종>은 세종이라는 주인공을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정감록>은 직접 그 당사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전자는 주인공을 향해 시선이 몰려들었고 후자는 주인공으로부터 시선이 퍼져나갔다. 두 역사책은 모두 1인칭 기법을 사용하였다. 역사서술에서 1인칭 기법은 매우 드문 방식이다. 1인칭은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는 익숙한 방식이지만 객관적 서술에 지배당하는 역사에서는 낯선 방식이다. 그러나 두 책 모두 광범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1인칭 기법을 통해서도 역사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러나 저자의 정치적 시각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한 가지 당혹스러운 것은 저자의 정치관이다. 내가 보기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드러낸 정치의식은 민주화 시대의 그것보다는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가깝다. 이 말이 거슬린다면 지배 엘리트 위주의 서술방식이라고 교정해줄 수는 있다. 아마도 저자는 당대의 시각과 언어로 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우리가 당대의 시각과 언어를 알 수 있겠는가. 물론 기록에 그렇게 남겨져 있는 것을 가위와 풀로 오렸으니 맞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런 문자일 뿐이지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의미는 저자 자신의 말처럼 현재적 시각과 현재의 문법에 있다. 따라서 내가 저자가 왕조시대의 통치의식에 집중되었다고 한 것은 그 시대를 그렇게 반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질서를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세종의 ‘정치’에 방점을 찍었지만 기실은 ‘세종’에 방점을 찍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통치와 국가질서 확립이라는 맥락에서 세종과 지배세력의 정치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하였던 것 같다. |
|
세종, 말로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위대하고 멀게만 느껴지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세종을 만나고 있다. 만원짜리 지폐를 보면서 항상 만난다.
어쩌면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인물이 세종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서 세종이 어떻게 인격을 형성하였으며, 자신이 펼치고자 한 정치 및 조선의 사회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 백성이 편하게 느끼면 그것이 정치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세종이라는 임금의 인간적인 모습,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좌절을 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도 알게 되었다.
세종같은 인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나도 멀리 있는 세종이 아니라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인물, 나와 함께 상대방도 배려하면서 남을 이끌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이 순간 무진장 든다. 잃어버린 나의 꿈을 찾아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
|
대한민국 최고액권 화폐 주인공 '세종' 대한민국 행정수도 명칭 '세종'. 그렇다 세종은 우리에게 그저 어느 과거 한 시대를 통치한 '왕'이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살아있는 존재이다. '대왕'이라는 존칭까지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글창제, 태종의 셋째 아들, 과학, 음악, 농업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고 역사 시간이 엄청 외웠지만 세종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안다고 하지만 눈감고 코끼리 다리 만지는 지식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여기 세종에 대한 조금 색다른 접근을 시도한 책이 있다. 박현모의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이다. 그는 세종은 누구인가. 무슨 업적을 남겼는가? 이런 다분히 사실 역사에 대한 세종을 평가하지 않고, 태종은 아버지로서, 황희, 허조, 박연, 정인지, 김종서, 신숙주는 신하로서, 수양대군은 아들로서, 정조는 조선 후대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서 세종을 어떻게 보았는지 말하고 있다. 위대한 성군도 '사람'이다. 그도 초창기에는 백성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다. "재위 5년 3월 강원도 고성에 사는 이각이라는 사람은 '이 임금이 왕위에 올라서 흉년이 들어 매우 살기가 어려운데, 만약 내가 왕이 된다면 매년 풍년이 들 것'이라는 엄청난 소리를 했고, 그 다음해는 3월에는 청주의 아전 박광과 곽절이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으면 백성들이 자애로운 은덕을 입었을 터인데, 지금 그렇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본문 15쪽 인용) 감히 세종대왕을 아전이라는 자들이 난언을 했다. 당시 백성들의 눈이 정확할 수 있다. 자신들의 배고픔과 개인적 취향에 따라 세종도 별 볼 일 없는 왕이요, 오히려 양녕대군이 왕이었다면 성군으로 존경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백성들이 그를 별 볼일 없는 왕으로 보았지만 아버지 태종을 달랐다. "나는 내 측근인 강상인과 영부사 심온을 다른 '불나방들'의 견제용으로 희생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태도를 유심히 관찰했다. 세종은 자신의 장인인 심온이 국가의 명령은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 혐의로 사사되고 왕비의 가문을 적몰할 것이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 와중에서도 그는 거의 매일 내가 거처하는 수강궁에 문안하고 경연에 나가거나 성균관에 거둥하는 등 일상적인 일을 수행했다." (본문 44쪽 인용)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섬뜩했다. 성군 세종이 아버지를 두려워했기 때문일까? 얼굴 하는 변하지 않고, 사랑하는 중전의 아비가 사사되고 멸문당하는데 중전이 통곡하는데도 그는 일상생활을 했다. 병권을 태종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조선의 왕이다. 충분히 장인과 중전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잔인할 정도로 냉정했던 세종이 성군으로 위대한 반열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황희는 말한다. "인재는 세상 모든 나라의 가장 중요한 보배라고 보았던 상께서는 인재의 천거를 요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재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고 하셨다. 모름지기 한 시대가 부흥하는 것은 반드시 그 시대에 인물이 있기 때문이요, 한 시대가 쇠퇴하는 것은 반드시 세상을 구제할 만큼 유능한 보좌가 없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임금들은 인재를 들여서 쓰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인재를 구별해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본문 78쪽 인용) 세종을 인재를 알아보았고, 구별하는 방법을 알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았다. 세종이 위대하기도 했지만 그때 인재도 많았다. 황희, 허조, 김종서, 맹사성, 박연. 왕은 인재를 만났고, 인재는 왕을 만났던 것이다. 세종이 성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 시대 우리나라에 이런 인재와 지도자가 함께 어울려 나라를 이끌어 갈 능력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고 세종 시대가 부러운 이유이다. 세종은 치열했다. 대신들과 논쟁했고, 토론했다. 어떤 때는 자신의 생각을 거두었지만 확고한 신념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다른 7명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시각을 통하여 세종을 보고자 했고, 세종의 뜻이 자기와 다를 때 어떤 때는 의문을 가졌고, 반박했고, 순응했다. 세종 시대가 진정 성군 시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다. 앞으로도 이런 시도를 한 책들이 자주 나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