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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의 교회와 세상을 나 나름대로 각각 분석해 본다면 이렇다. 교회는 웰스의 주장과 같이 '신학이 실종' 되었다. 교리, 즉 진리가 외면 받고 있다. 단적인 예로 예배에서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 그분의 거룩하심, 인간의 타락 등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축복, 평안, 화평, 수준 낮은 사랑 등 개인의 안녕과 만족을 위한 내용만 담겨 있다. 설교의 중심이 하나님과 교회에서 개인과 그 자아로 옮겨졌다. 가히 '신학 실종'이라는 표현이 꼭 맞다. 설교는 물론 교회의 교육 프로그램도 진리를 가르치는 대신 인간적인 열심을 부추기는 질 낮은 교육을 제공한다. 세상은 '윤리가 실종' 되었다. 이전 시대에는 인간의 행동과 삶의 방식의 기준이 공동체에 있었다면 지금은 개인에게 있다. 개인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된다. 모든 것은 내 자아의 만족을 위한 부속물이다. 남들보다 나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 내가 남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만족하느냐로 행동이 결정된다. 따라서 나만 만족한다면 남에게 피해를 주든 상관이 없다. 남이 어떤 피해를 입든 상관없다. 내 자아만 만족한다면 남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든 부도덕한 게 아니다. 모든 행동은 만족감을 높이는 방향으로 향해 있다. 교회와 세상은 모두 이전의 기준을 버린 채 표류하고 있다.
'윤리실종'
본서는 데이비드 웰스의 4부작(신학실종, 거룩하신 하나님, 윤리실종, 위대하신 그리스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 웰스는 미국 사회에서 윤리가 어떻게 무너지게 되었는지 살핀다. 그 원인과 과정 및 현상들을 분석하여 밝힌다. 동시에 그러한 일들이 기독교와 어떠한 연관성이 있고, 기독교는 어떠한 해법을 제시해야 하는지 논한다.
웰스는 말한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지속적인 효력을 갖는 해법을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또한 사회에서 효력을 갖는 기독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사회의 현상은 물론이고 기독교 자신의 현상과 당면 과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또한 이해하기 위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기독교는 지금 엉뚱한데 정신이 가 있어 자신의 몸 추스르기에도 벅차 보인다. 따라서 사회에서의 효력을 갖는 것은 요원한 일로 보인다.
"세상성은 특정 시대의 가치 체계로서, 타락한 인간의 사고방식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세계에서 내쫓고 죄를 정상으로 보이게 하고 정의를 비정상으로 보이게 한다.
더욱이 기독교는 지금 세상성에 물들어 있다. 기독교 고유의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사고방식을 수용하고 있다. 세상성의 공격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진리를 기독교에서 내쫓고 죄를 정상으로 여기며 정의를 비정상으로 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가치 체계에 왜곡이 발생하여 혼란을 겪고 있다.
윤리가 중심성을 잃은 현대 사회의 모습을 분석하며 웰스는 "우리가 현대 생활의 많은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어디서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지를 알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가를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을까? 현대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영성을 바탕으로 하여 삶을 위한 기준점을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로 옮겨 놓았다. 세상의 기준은 자기만족에 있다. 자신의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다. 따라서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인격보다 개성"을 중시하고, "본성보다 자의식"에 관심을 갖는다. 삶의 중심이 자아로 옮겨지자 "죄의식은 사라지고, 수치심만 남"았다. 모두가 자아에 집중하는 까닭에 사회 공통의 "윤리가 사라"지고, "방종이 난무"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윤리적 책임에는 둔감"하다. 이에 대해 웰스는 "하나님의 노여움은 사회의 타락을 통해 그 속에 새겨진다. 그와 같은 윤리적인 무질서 가운데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진행 중이다."라고 경종을 울린다. 이러한 "현대인의 도덕적 모순"에 기독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죄가 망각"되고 있는 이 시대에 교회가 "지속적인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웰스는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 교회가 이 시기를 성공적으로 붙잡으려면, 두 가지 중요한 방식에서 윤리적인 비전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첫째, 교회는 포스트모더니즘 세계가 규범으로 받아들이는 많은 것이 실제로는 죄악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해져야 하고, 죄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세대에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배우는 일에 새로운 독창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 둘째, 복음의 위대성이 삶에서 완전히 사소하고 시시하다고 여겨지는 요즘 같은 현실에서, 교회 스스로가 윤리적으로 한결 더 신뢰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용감해져야 한다. 진리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 만연한 죄를 죄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와 목사의 부도덕성이 벌어지고, 적나라하게 고발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교회는 윤리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본서는 미국 사회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정도에 차이가 있지 우리나라도 거의 동일한 현상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즉 이 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고, 그 적용점은 우리가 대안으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따라서 웰스가 제시한 해법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한국 교회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진리의 회복이 아닐까 싶다. 진리와 너무나 멀어진 오늘의 한국 교회는 어서 진리 위에 온전히 서도록 해야 한다. 진리가 아니라 세상성을 추구하고, 그것이 교회 내에 만연되어 있는 지금, 강단에서 온전한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 진리 교육이 시급하다. 그동안 진리에 대한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성도들은 죄 등 진리의 내용을 명확히 모른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진리를 선포 할 수 없는 한 가지 이유다. 그리고 교회 내에 만연한 세상의 때를 다 벗겨 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짓고 있는 죄를 회개하고 거룩함을 회복해야 한다. 이 또한 진리에 대한 무지 혹은 왜곡된 이해가 그 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진리에 대한 앎과 진리에로의 돌아섬이 선결되지 않고서는 세상의 죄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의 위대성을 스스로 훼손시킨 교회는 진리를 온전히 붙들지 않는 이상 사회에 아무런 효력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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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웰스는 고든콘웰 역사신학, 조직신학 교수로써 문화신학을 작성하며 이번책의 그의 시리즈의 세번째 것이다. 그의 특징은 문화속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현실의 일을 교회가 어떻게 흡수해서 성경을 버리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세밀한 분석과 작업은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문화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가능할것이다. 사회의 여러 모습들에서 성경을 통해 분석하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서 내겐 실망스럽지가 않았다.
데이비드 웰스의 세번째 책 윤리실종 드디어 어느 핵심에 선 느낌이 든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완공하기까지 많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다. 데이비드 웰스는 자신의 관점을 지속하며 10년에 걸쳐 그의 글을 완성해가며 그의 글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문화신학시리즈는 전통신학의 순서를 따르고 있으나 그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진행한다. 첫번째, 신학실종이 조직신학의 서론에 해당되고 두번째, 거룩하신 하나님이 신론 세번째, 윤리실종이 인간론에 해당된다. 그러나 인론을 다른 조직신학처럼 썼다면 나는 아마도 많은 실망을 가졌을것이다. 그렇다고 인론의 기본이 되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것은 아니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티의 영향을 받은 현대인의 특성을 감안해서 작성했다. 그리고 윤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것은 조직신학에서 인간의 상태와 창조의 의미를 반드시 언급하는데 여기에도 그 이야기가 들어가는데 윤리적인것의 의미에 대한것을 이해해가면서 성경적인 윤리관을 회복하는것에 핵심을 두고 있다.
루터시대와 현시대를 구분하며 종교개혁시대와 현시대의 차이점과 유사성을 든다. 차이점은 문명의 발전과 자아중심적인 현대와 종교적인 세계였던 루터시대와의 차이성이 있고 자아중심적인 최초의 문명을 만들어낸 현대이다. 유사성은 말씀에 대해 자신이 없고 그리스도만으로 교회를 세울수 없다는 상황에 놓여있는 교회의 모습이다. 복음주의 두가지 영성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전통주의 영성과 포스트모더니즘 영성이다. 이 두가지의 구분이 모호해져가는 양상에 있다. 설교자의 설교가 성경적 개념과 포스트모더니즘 영성 사이에서 단어는 성경의 용어와 신학용어를 사용하고 그 의미와 뜻은 포스트 모더니즘 영성을 사용해서 성경의 진리를 옹호하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자신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경향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런 설교는 tv만 켜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현대의 윤리관의 손상은 노골적이 되었고 덕목이 가치가 되어 명성이란 개념도 윤리를 지키고 도덕적으로 거룩한 개념에서 외모와 스타일 그리고 전문적인 능력에 맞추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윤리관의 문제를 의식하기 보다 자아를 완벽하고 편하게 해주려는 것이 정당화되는 자세이며 그것을 부추키는 것은 해방심리치료와 광고업자들의 자세이다. 웰스가 말하듯 심리치료사와 광고업자가 구원자가 되어버렸다. 상품에 대한 구매는 인간의 허무속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감정을 소모해 버리는 대상이 되기에 잠시 허기진 자신의 감정을 물건으로 대체하여 그 구매속에서 인생의 철학과 삶의 철학을 담아 모든것이 완성된듯 자아속에 머물러 자신을 변신시킨다.
덕목이 사라진것은 덕목이 과거에 사용되던 의미와 현재의 의미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죄의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수치심과 혼동하고 전혀 구분할수 없는 상황에 있다고 보며 수치심에 대한 것도 자아의 해석에 맞추어져 그전에 가졌던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 공동관념이 사라지고 자아안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현상은 교회속에서 들어와 죄의식에 대한 관념이 사라졌고 교회안에서 전혀보일수가 없게되어 로버트 슐러가 설교하는 자존감을 회복하는것이 중요하고 성도를 편안하게 자존감을 갖도록 만들어지는 개념으로 죄의식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 상황이다. 교회에서의 설교에서 죄에 대한 바른 관념으로 설교하는것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복음의 의미와 구원관에 대해 교회가 모르거나 바르게 알지 않거나 알고 싶지 않거나 해서 성공적인 신학에 머물러 자신의 안위를 구하는 교황 레오 10세의 루터시대와 다를게 없다.
데이비드 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인것을 인간의 딜레마속(창조와 죄와의 모순, 과거와 현재의 모순)에서 확인시켜준다.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선포해야 하고 타락으로 인해 죄로 물들어 회복할수 없어 매일 딜레마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해결해야 함을 선포해야 한다고 웰스는 말한다. 그러나 현재는 그 십자가에 다가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자아가 깨어져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태복음 13:15) 현대의 특성이 자아중심성이 사라지면 현대세계의 문화에 뒤쳐지고 그속에서 빠져 나와버린것 같아서 십자가에 다가가서 변화되려 하지 않는다. 이건 교회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변혁을 하려기보단 현대의 문화속에서 벗어나기가 겁내하고 문화를 따라 교회를 이끌어 가려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상태가 손해보고 자신의 가치가 수준낮은 느낌이 들거나 문화에 젖어 전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개혁은 가능하다. 그렇다 왜?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외쳤던 루터의 종교개혁의 숨소리가 여전히 흘러 귓가에 부딛치기 때문이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가슴에 박혀 실존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시기의 힘겨움속에서 복음과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기 위해 외쳤던 선배들의 수고와 손길을 놓치 않아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