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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을 은근 좋아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접하고 나서 프랑스 작가 라고 하면 그냥 무조건 읽었던 것 같다. 대부분은 만족했지만, 장폴 뒤부아의 책들은 읽기가 힘들었다. 내가 수준이 낮은 건지 내용들이 그냥 어려웠던 것 같다. 그나마 오늘 리뷰하는 '남자 대 남자'는 직관적이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삶에 대한 갈망'을 탁월한 심리묘사로 풀어낸 장폴 뒤부아의 소설. 그때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 읽은 날짜 : 2007년 말 ▼ 당시 리뷰
전혀 상반된 두 남자의 대결을 통해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장 폴 뒤부아의 전작인 [프랑스적인 삶]과 [타네씨, 농담하지마세요]를 읽어봤지만, 사실 나는 그리 즐겁게 읽었던 것 같지 않다. 프랑스식 유머가 어떤건지 잘 몰라서 일까? 그닥 나에게 와닿은 건 아니다. 물론, 작품이란 것이 유머가 전부는 아니기에 계속해서 재미없다고 장 폴 뒤부아의 책은 그만 읽어야지! 이렇게 하진 않고~계속해서 읽어 나가보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에 읽었던 [남자 대 남자]는 집중해서 읽었다. 우선 재미가 있었다. 인물에 대한 심리묘사가 정말 굉장한 것 같다. 완전히 상반된 두 남자의 이야기가 현실감있게 읽힌다. 책의 제목인 남자 대 남자는 (연약한) 남자 대 (강한) 남자 라고 해도 될 것같다는 생각이다.
'안나'라는 여자가 두 남자를 이어주는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그런데 단 한번도 실제로 등장한 적은 없다. 회상이나 글로만 등장) '안나'의 두 남자를 소개하면 이렇다. 한 남자는 원래 남편으로 시한부삶을 살아가는 허약한 아셀방크이고, 전 남편을 떠나간 '안나'의 애인으로 사냥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건강한 패터슨.
곧 죽을지 모르는 아셀방크는 갑자기 떠나간 '안나'를 찾기위해 우편에 찍힌 소인을 단서로 찾아나선다. '안나'의 최후 목격지는 바로 패터슨의 집. 이 두 남자의 운명같은 만남은 그 지방의 거대하고 거센 푹풍우를 만나 사흘간 같이 고립 되면서 미묘한 동거가 시작되고 경쟁하게 된다.
그 사이, 아셀방크는 한 고비의 죽음을 넘기고 '안나'의 행방을 어렴풋이 알아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란 것을...그리고 결코 이 길 수 없을 것같은 아셀방크는 패터슨에 큰 한방을 매긴다.......
두 남자의 미묘한 대결에서의 심리묘사는 폭풍우를 묘사하는것과 맞춰 엄청난 시너지를 낸다.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한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 올리는데 일조한다. 죽음을 앞 둔 한 남자의 삶을 연명하고자하는 갈망이 왜 이렇게 측은하면서도 멋있게 보이는지.. '안나'는 찾을 수 없었지만, 자신이 왜 이렇게 죽음을 담보로 '안나'를 찾아야 했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삶에 대한 갈망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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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뒤부아씨와 만남은 이번으로 두번째였다. 첫 만남인 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에서 약간의 어리둥절함과 약간의 메스꺼움과 다량의 끈기와 인내를 느끼게 해주었고 두번째 만남에서는 역시나 하는 말을 연발하면서 편안히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 고유의 특징인 약간의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 하는 약간의 이질감은 이제는 올것이 왔구나 하는 약간의 기대감으로 변해있었다.
이 책은 아픈 자신을 떠난 아내 안나를 찾아 나선 남자와 안나의 잠시 애인이였던 남자와의 만남으로 본격적인 긴장구도를 가지게 된다. 그 둘은 원하지 않았지만 눈으로 인해 통나무집에서 사나흘을 같이 보내게 되고 아픈 몸을 이끈 안나의 전 남편 아셀방크를 건장한 사냥꾼 패터슨이 돌보게 된다. 안나라는 끈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정작 안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역시 통쾌하면서도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장면으로 마무리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약하고 병에 걸린 아셀방크를 과연 남자답지 못하다 할 수 잇는 것인가? 신체적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어머니와의 끊임없는 갈등과 여자들은 있지만 뭔가 모르는 2%가 부족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패터슨을 과연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서 생각이 이르게 된 것은 겉모습이 아름답다고 해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잇는 것인가? 겉모습이 못 났다고 해서 못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쩌면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에 이르르니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작가가 실감나게 표현한 패터슨의 사냥에 대한 욕구는 살인자의 심장때문이였을까? 아니면 날짐승처럼 살기를 원했던 인디언 혼혈의 아버지때문이였을까? 둘 다 적잖이 작용을 했으리라 본다. 달빛에 빛을 품어내는 암사슴을 보고 경이로움을 느끼면서 또 다시 사냥을 하는 그리고는 피범벅되는 패터슨. 상당히 역설적인 인물이다. 안나와도 수전과도 편안하지 못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아셀방크는 안나와 결혼을 하지 않앗던가? 가여운 사람이 아셀방크인지 패터슨인지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두권째 읽기 시작하면 감이라는 것이 온다. 그 작가가 풍기는 향기를 책속에서 느끼게 된다. 실랄하기도 매섭기도 상당히 현실적이기도 한 그의 작품에서 보통때 같으면 어렵다거나 메스껍다고 하면서 멀리 했겠지만 왠지 모르게 끌림을 느끼게 된다. 머지 않은 날 또 다시 장폴 뒤부아 그의 작품을 손에 들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상당히 흥미로운 작가이다. 역시 프랑스인들은 생각이 자유로운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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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기대하지 않았던 책에서 어떤 특별함을 발견했을때의 행복이란, 책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수 있는 한가지 기쁨이다. 이 책에서 그런 기쁨을 발견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고, 그냥 가볍게 읽어 내려가고 싶은 생각에서 책장에서 꺼내 들었는데, 기대외의 특별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 특별함을 함께 느껴보자고 권해드리고 싶은 한 권의 책.
한 남자가 아내를 찾아 나서는 여행길에 떠난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어느 날 자신의 곁을 떠난 아내에게서 온 한통의 편지. 그 자취를 찾아서 길을 떠나는데, 어떤 병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끔찍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남자가 그였다. 진통제 없이는 하루도 견딜수 없는 고통을 안고, 아내를 찾는다. 그리고 만나는 첫번째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일년여동안 함께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고. 그 남자가 가르쳐 주는 곳으로 찾아간 주인공은 눈덮인 하얀 벌판위 붉은 통나무집에서 또 다른 한 남자를 만난다.
사냥꾼. 그도 안나와 한동안을 함께 보낸 남자이다. 주인공처럼 안나를 그리워하며 사는데, 그는 살인자의 심장을 이식받은 사냥꾼이었다. 폭풍설때문에 그 통나무집에서 두 남자가 보낸 몇일밤은 특별함이었다. 자신의 아내와 함께 지낸 그 사냥꾼에 대해 반감이 들만할법한데, 이 두사람의 대화나 행동에서는 전혀 그런 느낌은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주인공이 진통제가 없어 고통에 몸부림칠때, 사냥꾼은 그의 병간호를 하며, 폭풍설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심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안나는 왜 그들을 떠났던 것일까? 책의 마지막이 조금 의아한 점도 있었지만. 안나는 책의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 남자의 기억속에 그녀의 이미지만 나타날뿐. 한 여자를 추억하는 두 남자의 만남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책이었는데, 조금 특별하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묘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프랑스 소설의 분위기를 맘껏 느낄수 있는 책으로 추천해드리고 싶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것.
인생이란 정해진 길에서 계속 벗어나고 미끄러지며 결국 그 끝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빙판길에 비친 그림자처럼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담배와 뜨거운 커피 맛을, 차 안을 따뜻하게 해놓고 운전할 때의 포근한 기분을, 여자에게 전화할 때의 설레는 마음을, 난바다에서 파도가 넘실대는 풍경을, 그 길 위에서 맘껏 누릴 수 있었으므로. 인간이면 누구나 맘속에 품고 있는 달콤한 환상, 즉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그 달콤한 환상과 함께.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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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내내 내 머리속에 흰 눈으로 덮인 넓은 벌판을 그려주었다.
일단 읽기 시작하면
주인공의 소소한 일상의 삶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도 있고, 좀 거부감이 드는 것도 있었지만, 프랑스에 대해
전보다 더 알게 되는 것이 좋았다.
뒤로가면서 두 남자가 만나고, 그 사이에 오가는 일들은
나에게 삶에 대해, 나의 삶의 태도나 세계관, 그밖에도 문화 등등
정말 다양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책 표지와 같이, 흰 눈으로 덮인 이야기의 배경은 꼭
그림책을 보는 것 마냥 강력한 인상을 남겨준다.
가볍게 스르륵 넘겨가며 볼 책은 아니지만
읽고나서 후회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가치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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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에 대해서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소설의 주인공인 아셀방크의 돌아가신 엄마는 아셀방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셀방크는 지금 엄마의 말이 뼈저리게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쉰 여섯 살 전직 보험업자인 아셀방크는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나서 어느 날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라진 아내를 찾아나설 결심을 한다. 그녀에게서 받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 삼 년 전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나를 떠났다... 캐나다에서 마지막으로 부쳐온 편지에 그녀는 이렇게 써놓았다. 왜 우리는 인간답게 행동할 줄 몰랐던 걸까?... 나는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그녀의 목소리를 아직도 지우지 않고 있다. 가끔 나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지금은 집에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북미의 어느 외딴 도시, 모텔방에 짐을 풀고 아내의 흔적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먼저 만난 사람은 사이슨... 자연학자이면서 동시에 살인도 불사하는 격투기를 즐기고 스폰서까지 맡는 미스터리한 이 인물의 호화주택에서 아내는 함께 기거했다. 사이슨에게서 흘낏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나는 이제 사슴 사냥꾼이며 숲 속에서 혼자 살고 있는 패터슨을 찾아나선다.
“... 아내가 사이슨이나 패터슨처럼 ‘극단적인’ 남자들, 즉 ‘외곬수’들과 함께 살았다는 사실을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기지 않았다. 안나를 정상적인 생활의 중심에 놓고 봤을 때 그들은 그 양 극단에 서 있는 남자들이었다.”
사이슨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패터슨에게서도 찔끔찔끔 아내의 이야기를 듣다가 그만 폭풍설에 갇혀버리는 나... 어마어마한 폭풍설은 집 앞에 세워놓은 자동차까지 가는 길마저 허락하지 않고, 그 사이 나는 자동차에 있는 약을 먹지 못하여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패터슨은 그런 나를 보살핀다.
“에스키모들이 그러더군요. 폭풍설이 몰아치는 동안 두려워해야 할 건 딱 하나밖에 없는데, 그거 돌풍이 제 안에 들어 있는 나쁜 면을 쓸어가 버리는 거라고요. 날이 개면 평생 꼭꼭 제 속에 감추고 있었던 그 나쁜 면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겁니다.”
폭풍설로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날씨, 격투기가 열리면 온 도시가 살냄새와 피냄새로 가득해지는 이 도시에서 아내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그리고 아내는 또다시 어딘가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왜 아내를 찾아 프랑스에서 캐나다까지 날아온 것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음을 앞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작가의 눈은 인간의 보이지 않는 어떤 면을 향하고 있다. 한 인간의 생이 곧 그 인간의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의 어떤 면은 인과 관계로 해석되지 않기도 하는 것... 그렇게 주인공인 아셀방크와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아셀방크의 아내 안나, 그리고 그러한 안나와 함께 살았던 사이슨과 패터슨의 삶 또한 정상적인 범주에서 해석 불가능한 비의들로 가득하다. 바로 우리들의 삶이 그러한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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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장풀 뒤부아를 알게 된 것은 1년전 프랑스적인 삶을 통해서였다. 책의 겉 표지와 글씨의 배치등이.. 이쁘게 보이려고 노력한 디자인보다 끌렸다. 그리고 프랑스 작가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에 읽었었다. 그 때 머리가 아펐다. 무슨 내용이지? 정말 프랑스 사람의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다룬 것이 다일까?라는 생각을 가지며 해답을 풀지 못하였다.
몇 주전 서평에 나와있는 장풀 뒤부아의 이름을 보는 순간, 예전의 고민이 떠 올랐다. 특이하였다. 한국인 작가들은 그렇게 이름도 잘 못 외우면서 장풀 뒤부아의 이름은 보는 순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해결하지 못한 난제와 같은 매력적이면서도,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 나를 부추긴 것이였다. 과연, 프랑스적인 삶과 같은 느낌의 책일까? 궁금하였다. 전과는 달랐다. 한장 한장을 읽는데 묘한 매력이 있었다. 뒷장의 내용이 궁금하였고, 상상할 수 없는 스토리의 진행이였다. 프랑스적인 삶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저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흥미 위주의 소설일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흥미 위주의 소설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적인 삶도 장편소설이지 에세이나 산문집이 아니였기 떄문이다. 혼란스러웠다. 이 문장 하나 하나가 무엇을 말하려고 의도하는 것일까? 책의 마지막 장이 와서까지도 나는 왠지 모를 반전이 기대 되었고.. 패터슨과 어머니의 대화에서 나온 "그 더러운 작자를 끌어들인 게 누군데?...."의 문장에서 혹시 패터슨이 안나를 죽이고, 안나를 찾아온 아셀방크도 어떻게 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저 평범한 소설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안나가 죽었다는 것이 나오지 않았으며.. 아셀방크는 갑자기 통나무집을 떠나게 되었다는 것에..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일까?
남자대 남자.. 아니 인간 대 인간이다. 장풀 뒤부아는 남자라는 하나를 통해서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려고 시도한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난 프랑스적인 삶에서와 같이 그의 의도를 해석하지 못하였다. 그저 내용이 이랬구나.. 라는 것 뿐이 말하지 못하였다. 사실 부끄럽게도 인간에 대한 내면을 말했다는 것도 옮김이의 말을 통해서 깨닭을 수가 있었다.
프랑스 작가들의 글은 생각이 달라서 그럴까?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알랭드보통도 그러하였다. 문화의 차이에서 나온 생각의 다름일까? 이러한 생각을 가지며.. 남자 대 남자를 다시 한 번끔.. 의도를 파악하려고 한다.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은 한 사람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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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폴 뒤부아는 잘 알고 있었지만 '남자 대 남자'로 처음 만났다. 친구가 장폴 뒤부아의 책을 읽고 기분이 찝찝?)했다는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 작가의 책이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남자 대 남자'는 나에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책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의 독특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친구의 말처럼 사회와 인간 그리고 동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이 책의 표지는 제목을 대변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한 여자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의 이야기를 풀고 있는 '남자 대 남자~ '
불치병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안나의 남편 폴 아셀방크와 살인자의 심장을 이식받아 야생의 사냥꾼으로 살고 있는 플로이드 패터슨.. 두 남자 사이를 연결하는 중요한 인물인 안나의 등장은 없고 사라진 아내를 찾아온 프랑스 남자 폴과 연인을 떠나보낸 야성적인 남자 플로이드의 만남이 긴장감있게 전개된다. 국적도 살아온 환경도 너무나 다른 두 남자가 만나 폭풍속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그 곳에서 병든 남자 폴과 묘한 관계이지만 그 남자를 돌볼수 밖에 플로이드의 관계를 장폴 뒤부아만의 독특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여자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잠자가 거친 폭풍과 싸우는 것이 두 남자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한 여자를 생각하는 두남자의 마음이 폭풍이 일고 폭설이 내리는 거대한 벌판에 외로이 서 있는 느낌이 아닐까?
'남자 대 남자'에서 두남자의 연결고리인 안나는 이 책이 끝맺을 때까지 안나의 행방은 묘연하다. 안나가 중간에 등장한다면 두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안나가 나타났다면 두 남자 모두 행복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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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대 남자..
전형적인 도시속에 녹아서 특별한 열정도 없이 살아가는 이성적으로 사는 남자, 아셀방크 자연속에서 자연과 하나되어 어찌보면 동물적 본능에 의지해 살아가는 남자, 패터슨 그리고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취향을 지닌 남자 사이슨..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축이지만,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여자, 안나
아셀방크가 떠나버린 아내, 안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이야기의 큰틀이지만, 이야기는 아셀방크가 안나를 찾아가며 만나는 남자들의 미묘한 관계속에서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남자, 혹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대 여자로 시작했지만, 남자대남자, 인간대동물의 이야기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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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대한 예감이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언젠가는 그 예감마저 완전히 사라질 때가 오지 않을까? 그건 좀 지나친 바람일까? ( 205쪽)
존 스타인벡의 말을 웅엉거리던 아셀방크가 선명하다. 캐나다의 폭풍설에 발이 묶여, 아내의 애인이었던 패터슨의 집에 며칠 묵게 된 아셀방크는 죽음과 아내에 대한 그리움에 목이 메인 남자다. 패터슨 또한 마찬가지다. 유일하게 함께 살고 싶었던 아셀방크의 아내, 안나가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아셀방크가 떠나버린 안나를 찾아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묘하기 짝이 없다. 떠난 아내를 몇 년이 지나서야 우체국 소인만을 단서로 찾아 나서는 것, 자신의 팔뚝에 직접 주사 바늘을 꽂아 넣는 것, 아내의 연인이었던 남자들을 순서대로 만나는 고역을 참아내는 것도 모두 묘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떠나버린 안나는 정말 '온전한 남자'를 찾아 떠난 것일까. 이야기가 모두 끝날 때까지 안나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알 길이 없다.
- 그러니 제 속을 너무 오래 들여다 보지 않는 게 좋은 겁니다. 거긴 우리의 가장 추한 얼굴이, 평새토록 감추고 살아야 할 얼굴이 숨어 있으니까.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인간은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동물이라 기억 같은 걸 가져서는 안 된다고, 과거의 일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는 그 잡동사니 상자야말로 악의 근원이라고 하셨죠. (211쪽)
몸도 마음도 유약한 남자인 아셀방크에게 패터슨은 '온전한 남자'로 보인다. 안나 역시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인정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패터슨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악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기에, 그가 '온전한 남자'인지도 의문이다. 그런 의문 때문에 안나가 패터슨을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두 남자 모두 한 여자에게 버림받은 것이고, 이 책의 제목이 <남자 대 남자>로 이름 붙여진 것이리라. 한 여자의 남편과 애인이라는 자리로써.
그들에게 안나가 돌아온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안나는 행복과 불행을 알아내는 것이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몫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인정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던 아셀방크는 그 말의 의미를 얻기 위해 안나를 찾아 나서려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삶의 끄트머리에서 마침내 행복을 얻기 위해. 하지만 끝내 안나는 종적이 묘연하고, 그 탓에 아셀방크는 답을 들을 수 없다.
아셀방크는 안나를 찾아 내는 것을 그만둔다. 그것은 단순히 안나를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을까. 이미 행복의 답을 찾아 내었기 때문일까. 행복과 불행을 찾아 내는 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던 안나가 아셀방크에게서 잊혀질 수 있을 거라고 여겨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안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이제사 찾았던 것은 아닐까. 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