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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워드 혹스 감독이 1959년에 만든 서부 영화 <리오 브라보 Rio Bravo>는 쉰 해가 넘는 세월을 뛰어 넘는 작품으로, 왜 이렇게 늦게 보았는지 뉘우치게 될 만큼 나무랄 데가 없었다.
사내와 계집의 아슬아슬한 사랑과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끈끈한 사이, 올바른 일에 목숨을 거는 사내들의 꿋꿋함이 어우러져 짜임새가 아주 좋았다.
마을 보안관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을 영화에 담았는데, 볼거리가 풍성하고 넉넉한 웃음을 주기에 141분을 다 보고 나서도 입가에 웃음이 오래 남았고, 가슴에 들뜬 마음이 오래 갔다. 다음에 서부 영화를 다시 본다면,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싶다.
2. 마을에서 보안관으로 일하고 있는 존 티 챈스(존 웨인)는 술집에서 총으로 죄없는 이를 죽인 조 버뎃을 잡아 가둔다. 이레 뒤에 오는 연방 집행관에게 넘길 때까지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제 아우의 잘못이 무엇이든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네이선 버뎃(존 러셀)은 그 사이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조를 빼내려고 한다. 아우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돈으로 총잡이를 사서 일을 풀어가려 한다. 먼저 마을로 이어진 길목을 막고 보안관이 조를 다른 곳으로 못 보내게 한다. 돈에 눈이 먼 사내들은 조를 빼내는 데 걸림돌이라면 보안관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없애려 하고.
챈스 보안관은 답답하다. 버뎃 무리에 맞서서 같이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늙은이 스텀피(월터 브레넌)와 술꾼이어서 술이 없으면 손을 달달 떠는 듀드(딘 마틴)가 곁에 있을 뿐이다.
보안관의 벗인 팻 윌러(워드 본드)를 지켜주는 젊은 총잡이 콜로라도 라이언(리키 넬슨)이 마음에 들지만, "저는 그런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하며 딱 잘라버리는 터라 그를 끌어들일 수가 없다.
3. 나쁜 짓을 한 조 버뎃한테 지은 죄값을 받도록 하려는 보안관과 제 아우를 살리려는 네이선 버뎃의 싸움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돈이 많은 네이선 버뎃은 제 아우를 빼내는 일이지만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50 달러짜리 금화만 던져주면 돈에 눈먼 사내들이 목숨을 걸고 보안관한테 덤벼든다. 그러다 목숨을 잃으면 다음 사람한테는 60달러를 주고, 그래도 안 되면 갈수록 돈을 더 올리면 된다. 돈으로, 돈으로 산 힘으로 제 잘못을 덮으려는 사람들. 바로 우리 곁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맞서 나쁜 짓을 못하게 하고 지은 죄값을 치루게 하려면, 아마도 이 영화의 챈스 보안관과 듀드, 스텀피와 같이 바보가 되지 않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눈만 감아주면 돈을 주겠다는 달콤한 말이나,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괴롭히거나 목숨까지도 빼앗겠다며 놓는 으름장을 꿋꿋하게 물리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건 어쩌면 바보나 할 수 있는 일인 지도 모른다.
괜스레 죄 없는 인디언들을 나쁜 사람들로 몰아 죽이는 짓을 보여주거나, 혼자서 모든 일을 척척 다 하는 사람을 내세운 서부 영화에 견주면, 그런 바보들의 이야기는 보기에 안쓰럽기도 하지만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었다. 여럿이 같이 일을 풀어가는 것도 보기에 좋았고.
4. 서부 영화에 나와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는 보안관 노릇의 존 웨인이야 더 보고 덜 볼 것도 없었다. 믿음직한 모습과 아랫사람들을 잘 다독이는 모습만으로도 든든해 보였다.
그런데 나한테는 믿음직한 존 웨인보다 오히려 딘 마틴이 더 돋보였다. 동냥짓을 해서라도 술을 마시고 싶은데 술집에서 챈스가 쪽박을 깨자 몽둥이를 들고 달려드는 첫 대목이나, 윌러를 죽이고 달아난 나쁜 사내를 쫓아 술집으로 들어가려 할 때 챈스 보안관한테 "늘 뒷문으로만 들어갔는데 오늘은 제가 앞문으로 들어갈 게요" 했다가 앞장 서서 하는 일이 잘 안 풀리는 대목에서 나타내는 얼굴은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닐 듯하다.
듀드는 역마차를 타고 왔던 아가씨 때문에 가슴앓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 탓에 술꾼이 되었고. 챈스 보안관은 역마차를 타고 온 아낙네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이 많다. 이들이 서로 겪은 아낙네를 갖고 주고 받는 말들은 같은 사내인 나한테 웃음만 나오게 했다.
약방에 감초 노릇은 스텀피로 나온 월터 브레넌이 해주었다. 챈스 보안관이 듀드한테 "오늘 왜 이긴 줄 알아? 놈들이 자네를 비웃고 있었기 때문이야... 다음에는 자네한테 총을 쏜 뒤에 웃을 거야...앞으로 더 조심해야 해" 하며 말하자, "남이 잘 하는 꼴을 못 봐요...혼자 잘났어" 하면서 빈정거리거나, 챈스가 저를 잘 했다며 추켜세울 때는 "그냥 하던 대로 해!" 하며 내친다.
다리를 절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챈스 보안관 어깨에 든 바람을 빼놓는 일을 도맡아 했다. 자칫 챈스 보안관의 무게 때문에 딱딱하게 보일 수도 있는 대목을 부드럽게 넘어가게 만들었는데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로 보였다. 그래서 보안관을 나무라는 말들이 따갑기보다는 정겹게 느껴졌다.
쌍권총을 차고 나오는 콜로라도 라이언을 맡은, 앳된 리키 넬슨은 본디 텔리비전에서도 이름났다고 한다. 노래도 잘 불러서 보안관 사무실에서 어울려 부르는 노래는 신나서 손이 저절로 장단을 맞출 뻔 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침대에 누워 딘 마틴이 "...내 총 한 자루와 조랑말..." 하며 먼저 노래를 하나 하는데 그 목소리가 정말 부드럽고 감칠맛이 나서 총싸움 하는 영화라는 걸 잠깐 잊기도 했다.
5. 총싸움과 사내들의 훈훈한 정이 마음에 들었지만, 이 영화의 맛은 다른 데 있었다. 역마차를 타고 마을에 들어온 페더즈(앤지 디킨슨)와 챈스 보안관이 벌이는 사랑 놀음이 그것이다.
겉보기엔 1931년에 태어나 이 때 스물여덟 살의 꽃띠 앤지 디킨슨과 쉰둘이나 되는 존 웨인은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로 보여 어울리지 않을 듯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나이를 뛰어 넘는다.
챈스 보안관은 처음에는 페더즈를 고운 눈길로 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튼다. 이들이 밀고 당기며 하는 사랑은 어쩌면 간지럽기도 하고 속 깊은 맛을 주기도 해서 눈길이 갔다.
하워드 혹스 감독이 만든 영화 속에 나오는 아낙네들은 사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면서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제가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사내한테 먼저 말을 하거나 덤벼들기도 한다.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이 나오는 흑백 영화 <소유와 무소유 TO HAVE and HAVE NOT>에서도 로렌 바콜은 사내인 험프리 보가트보다 먼저 앞장을 섰다.
이 영화에서도 페더즈는 멈칫하며 머리를 굴리는 챈스 보안관을 보면서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지 뭘 망설이며 걱정하냐며 먼저 나선다. 들이댄다.
"가라고 안 해도 갈 때가 되면 역마차를 타고 갈 거에요..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나요?" 페더즈가 따질 때, "이렇게 버뎃 무리만 없는 때라면, 나도 다를 거요..." 하며 보안관은 둘러댄다. 좋아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그 마음을 알았다는 듯 페더즈는 챈스한테 그냥 입맞춤을 해버린다. 얼떨결에 당한 챈스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다시 입맞춤을 하는 페더즈를 받아들이는데, 페더즈는 더 앞서 나간다. "(혼자 할 때보다) 이렇게 같이 하니까 두번 째가 더 좋아요" 이렇게 덮치는(?) 데 넘어가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으랴?
챈스 보안관을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란 두 글자가 솟아나오고, 날씬한 몸매에 노란 셔츠를 입은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영화 속에서 하는 말과 몸짓이 딱 들어맞아서,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아마 앤지 디킨슨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열에 대여섯은 되지 않을까.
6. 이 영화를 보면서 게리 쿠퍼가 나온 서부영화 <하이 눈 High Noon>이 떠올랐다. 같은 보안관이면서 게리 쿠퍼는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나쁜 놈들과 싸워야 했다. 끝내 혼자서 다 물리치고 사랑하는 그레이스 켈리와 마을을 떠나게 되지만.
덤에서도 나오지만, 하워드 혹스 감독은 <하이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총을 제대로 쏠 줄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한테 왜 도와달라고 하느냐며. 그런 사람들은 총알받이가 될 뿐 나쁜 무리들에 맞서 마을을 지켜내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리오 브라보>에서 보안관인 존 웨인은 혼자가 아니다. 나쁜 놈들에게 맞서 싸우려는 사내들이 곁에 있어서 보안관은 외롭지 않다. 그것도 나름대로 총을 쏠 줄 아는 이들이다. 숫자는 적어도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
그런데 나는 하워드 혹스 감독과 생각이 조금 다르다. 나쁜 무리들이 괴롭힐 때 꼭 총이나 칼을 잘 쓰고 몸을 잘 놀리는 사내들만 나서야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누구든 같이 나서서 작은 힘이라도 보탤 수만 있다면 보태는 게 나쁜 무리를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람을 가려서 하다간 오히려 나쁜 무리들한테 거꾸로 짓밟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만든 지 오래된 영화라 디뷔디는 크게 바라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은 세월이 흐른 탓에 아주 깔끔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깨끗하고 보기에 좋다. 소리는 괜찮으며, 우리말로 옮긴 건 마음에 안 들게 가끔 말이 안 되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덤은 마음에 들었다. 푸짐하다. 영화를 보면서 뒷얘기들을 들려주는 게 있으며, 하워드 혹스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를 뒷사람들이 말해주고, 이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하워드 혹스 감독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씩 풀어가며 이야기를 해주며, 존 웨인이 나온 영화 몇 편의 예고편을 보여주는 것도 들어있다.
이만 하면 두 장짜리 디뷔디로 나무랄 게 없다. 내가 샀을 때는 13,800원 했는데, 이제는 8,800원이다. 값도 딱 좋다.
예스24의 상품 칸에 보면 이 영화의 영어 이름을 잘못 적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작품인 <아버지의 깃발>이 적혀 있으니 이건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디뷔디 집에 나온 줄거리에 보면 페더스를 '과거의 여자'로 적고 있는데 챈스하곤 처음 보는 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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