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은 비교적 평탄한 구조로 흐른다. 그다지 어려운 것이 없는 내용이다. 소설가이자 기자인 주인공은 폴란드에 구레츠키라는 음악가를 취재하기 위한 여행길에 오르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세 젊은 이 -각각 연극학도, 영화학도, 음악학도로 구분되는- 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대화들은 끊임없이 진행된다.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은 서술이라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대사이다. 심지어 소설은 '인터뷰'라는 방식을 통해 질 답의 구조로써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방법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하고픈 말을 딱 부러지게 듣게 할 수 있다. 작가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한계를 지닌다. 자칫하면 등장인물이 평면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작가가 하고픈 말을 대신 하는 등장인물일수록 그것은 더 한다. <슬픔의 노래>의 경우 '박운형'이라는 인물이 그러하다. 평소에 말이 없는 그는 무대 위에서만 빛나는 인물이고,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직접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도식 하에 독자는 기자이자 소설가인 주인공의 위치에서 작가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러한 도식 속에서 '박운형'이라는 인물은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인간이 아닌 듯한 기분. 굳이 말하자면 소설의 한 등장인물로써 극을 이끌며 다른 인물들과 함께 소설이 찾아야하는 주제를 찾아 헤매는 인물이 아닌,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존재로써 '신성화'되어 있다거나,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 같아 보이는 것이다. 소설은 그 등장인물로 하여금 독자 자신이 자신과 가장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인물에 자신을 동화시켜 극에 빠져들 수 잇게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소설의 매력이다. 이 <슬픔의 노래>는 그 점에 있어서 소설의 매력은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