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은 폭설로 고립된 산골마을이 시야를 가득 채우며 시작한다. 이 적막한 마을에 밤새 내린 눈은 사람 키를 넘어버리기도 하고, 먹이를 찾아 내려왔던 산짐승을 고립시키기도 하고, 길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바로 그 마을의 외딴 집에 젊은 어머니와 열 세살 사내아이가 살고 있다. 사내아이의 아버지는 5년 전 집을 나가버리고 어머니가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삯바느질로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 이 소설은 첫 시작부터 고향에 관한 아득하고 원초적인 체험들로 넘실거린다. 뒷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고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며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것 같은 동네에 대한 풍요롭고 아름다운 묘사라든가 쌓인 눈 때문에 방문이 수월하게 열리지 않지만 가까스로 눈을 털어 문을 열었을 때 숨막히도록 하얀 바깥 풍경이 펼쳐지는 것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그것 뿐 아니다. 방안을 살펴보면 윗목에 사기 요강이 놓여있고 횃댓보가 쳐진 방 아랫목에는 어머니의 반짇고리가 놓여있는 단촐한 살림살이가 있다. 다만 좀 특이한 것은 이 집의 부엌 문설주에는 시래기 말린 것이라든가 무말랭이 조각 엮은 것 대신에 꽝꽝 마른 홍어가 연기 그을음과 땟국에 절은 채 걸려있다는 것이다. 이쯤만으로도 시골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책을 읽으며 감회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배경에 관한 묘사와 더불어 편모 슬하의 가정환경, 애옥한 살림살이, 상상력이 풍부한 십대 소년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별다른 재미로 읽혀진다. 특히 '바람난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라는 모티브는 우리 소설에서 낯설지 않은 것인데도 유난히 이 어머니의 캐릭터는 도드라져 보인다. 아버지의 不在, 궁핍한 생활, 생활력 강한 어머니의 자존심 같은 것은 다른 소설가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에 나온 어머니의 캐릭터와도 살짝 겹쳐진다. 피난살이하는 동안 장작을 사다 쌓아놓았던 <마당 깊은="" 집="">의 어머니와 아이를 가혹하게 매질하거나 때를 벗기는 <홍어>의 어머니 모습이 그렇다. 소설 <홍어>의 어머니는 곤고한 살림살이에도 기생들의 옷은 짓지 않는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이고 남의 이목을 먼저 염려하는 어머니다. 꼬장꼬장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이 어머니는 비록 가난해도 아들 세영에게 '경주 최씨' 家門 자손임을 상기시키며 삶에 대한 자존심을 관리하도록 훈육하곤 한다. 소설은 주인공들이 빈곤한 가정환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빈곤함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설속의 빈곤함은 서정적인 배경처럼 느껴진다. 폭설이 내린 아침같이 고즈넉하고 아늑하게 흘러가는 이야기에 돌 하나를 던지듯 나타나는 '삼례'. 이 계집아이를 어머니는 식구로 받아들이고, 한창 자라는 열세 살 사내아이 세영은 누나뻘 되는 삼례에게서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 신비에 감싸인 삼례는 오만스러움과 방자함을 감추지 않았고 몽유병에 걸린 그녀의 속절없는 奇行은, 책 읽는 사람을 더욱 낯설음으로 몰고 간다. (눈 내린 마을을 삼례와 세영이가 뛰어 다니는 모습을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아주 썩 환상적인 그림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 그려보라. 계집아이와 사내아이가 천지사방이 하얀 밤중에 춤추듯 뛰어 다니는 그림이라니....) 母子가 사는 집에 한동안 머물며 고요함을 깨뜨리고 가는 삼례는 이 소설의 분위기를 신기루처럼 떠다니는 나른함과 몽롱함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밖에도 어머니와 관계가 모호한 옆집 남자, 눈 때문에 차가 끊겼다며 갓난아이를 놓고 떠나는 여인, 두 살 짜리 동생 호영이의 등장, 혈육의 비밀, 말 못하는 감정 속에 이빨처럼 드러나는 이해관계......<홍어>는 김주영의 다른 소설에서 만날 수 있었던 정통 내러티브 스토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인과관계의 불명확성, 환상성으로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무엇인가 해결이 안되고 미진하고 균형이 잡히지 않은 느낌 말이다. 6년만에 집에 오는 아버지를 두고 이튿날 떠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의 변명이나 해명을 듣고 싶었던 독자들에게 크나큰 아쉬움을 남긴다. 쓰다 달다 일언반구 하지 않고 떠나버리는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그런 식으로 마지막 반격을 하고 싶었을까. <홍어>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꽃밭과 같은 행복이나 탁 트인 수평선과 같은 상쾌함을 바랐던 충실한 독자인 나에게 이 결말은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끝나지 않은 듯한 앙금을 남기고 말았다. 소설은 지지고 볶는 사건보다는 분위기와 이미지로 헤어짐과 만남, 떠남과 돌아옴, 생성과 소멸의 모티브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황량하고 쓸쓸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내 가슴을 매캐하게 만들며 최씨네 부엌 문설주에 매달린 홍어에 대해서, 그 홍어가 지느러미를 유유히 흔들며 深海를 떠돌고 있을 모습을 그리게 한다. 홍어가 거칠고 싱싱하게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고 땅 위에서는 사내아이가 가오리연을 만들어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연결시키는 대목은 가히 일품이었다. 말랑말랑하게 쓰지 않는 작가 김주영의 눅진한 필력 덕분일 것이다. 개성과 감각, 판타지와 악마주의, 기타 등등으로 무장하고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 같은 것이 우리나라 젊은 작가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요즘, 김주영의 <홍어>는 소설의 미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곧 경칩이다. 이번 겨울은 소설<홍어>에 나오는 마을풍경처럼 천지가 다 하얘지는 폭설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네(유지태 분)집 한옥 마당에 캐시미어처럼 곱게 쌓이는 눈 정도의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지나가고 말았다. 그저 분분히 날리는 눈발만 겨우 두어 번 볼 수 있었을 뿐. 쌓인 눈길 위를 싸묵싸묵 걸어갈 때 오도독 오도독 하는 눈소리, 그 눈소리가 그립다. 지금도 겨울이면 천지사방이 눈에 둘러싸인 산골에서 바람을 팽팽히 품은 가오리연을 날리고 있을 소년을 생각해본다.봄날은>홍어>홍어>홍어>홍어>홍어>홍어>마당>마당> |
| 김주영씨의 소설은 이, 홍어가 처음이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것이 '멸치'가 나온 뒤에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고는 이 책을 함께 구입했다. 그리고 멸치를 읽기 전에 홍어를 읽어냈다. 그런데.. 딱딱한 겉 표지라 말해주듯이 이 책은 내게 전혀 녹녹케 읽히는 다른 책들과는 정말 백팔십도 달랐다. 지하철 안에서도, 잠자기 전에도, 버스 안에서도 읽었지만 이 책은 하루는 커녕 일주일 내내 읽었으니 말이다. 처음, 이 책을 몇장 읽으면서 든 생각은.. 어쩜 이리도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 냈을까. 정말 빈틈 한 구석이 없구나.. 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능력일까..? 정말이지 숨막히도록 완벽한 마치 하나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처음 이 책을 접한 것은 학교 다닐 때, '페미니즘' 문학을 공부하면서이다. 이 책이 페미니즘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생각해 보라... 이 책에 나오는 세영이 어머니는 정말 상식을 뛰어 넘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해도 정말 할 말도 없을 정도로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아니, 내 눈에는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영이 또한, 내가 그 나이때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나.. 하는 민망함이 들 정도로 성숙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아버지의 흔적처럼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을 아무 군말 없이 다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가슴 속에 남은 그 흔적들을 다 지워버리려는 듯이 홀연히 떠나 버린다. 여성해방...?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어쨌든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던 그 시간들을 이제는 다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을 굉장히 어렵게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읽고 또 읽고... 읽고 생각하고... 그래도 아직까지 작가의 의도따위조차 짐작하지 못하겠다. 한번 더 읽어봐야 하는 것인지.. 그런데 아직까지는 다시 읽는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그래서 아직도 '멸치'조차 집어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언젠간 다시 한번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 그게 바로 명작의 힘인가 보다. |
| 저자가 이 작품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문체상 특징이 있다. 일단 묘사가 상당히 미학적이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이 될 저자의 풍성한 어휘는 놀라울 정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현실과 상상을 자유롭게 드나들기 때문에 읽는 이는 주인공이 현재 빠져들어가 있는 상황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함 속으로 종종 빠져든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주인공이 겪고 있는 모호함이라고 본다. 저자는 그로써 주인공이 맞고 있는 그 상황과 심리 안으로 독자를 깊숙히 끌어들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또 1인칭 관찰자 시점 하에 상대방의 속을 훤히 꿰뚫어보는 듯한 전지적 시점이 혼합되어 있는데, 그것이 주인공의 판단인지 객관적 사실인지 뚜렷하지 않다. 이로써 저자는 다시 한번 그 판단을 하는 주인공 세영의 심리 속으로 독자를 이끌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아버지의 회귀에 대한 기나긴 기다림을 무던히 치러낸 어머니가 결국 그렇게 기다린 바로 그 다음날 집을 떠난다는 것으로 일설할 수 있다. '어머니의 떠남'이 엄청난 반전으로 객관성과 힘을 얻게 되는 것은 아버지를 기다려온 어머니의 일상과 그 내면의 심리 묘사, 삼례라는 여자 아이와 맺어진 조그만 갈등과 그리움 등에 의해서이다. 그렇게 저자는 그의 특유의 심미적 묘사와 치밀한 구성에 의해 독자의 서정과 서사에 대한 욕구 모두를 충족시키고 있다.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보여준 수작이라 여기며, 저자에게 일어서서 박수를 보낸다. |
| 추운 겨울 세영과 어머니는 단둘이 추운 겨울을 보내고있다. 아버지는 6년전 춘일옥이라는 곳에서 술집여자와 바람이 나 가출을 하였고 지금은 어머니가 매일 남의 옷을 만들어 주는 일오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별명은 홍어... 홍어는 가오리를 일컫는 말로 홍어는 성기가 2개여서 홍어는 젊었을 때부터 밖으로 바람 피우고 다니기에 바빴던 아버지를 뜻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문설주에 말린 홍어를 매달아 놓는다. 그러던 어느날 삼례의 출연과, 한 여인과 아기의 출연..이 모두는 모두 아버지가 벌인 일이었다. 그 모든걸 알면서도 삼례를 거두고, 여인은 떠나고 아이는 남겨진다. 남겨진 아이들 거두지만 불평한마디 내놓지 않는다. 몇년 후 아버지는 죽을 자리를 정하러 온듯..아무말 없이 돌아온 아버지는 아내의 따뜻한 밥상을 받는다. 그 다음날 어머니는 떠난다. 남편이 돌아올때까지 그전 마음 그대로 아버지에게 정성을 쏟는 것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온 것보다 어머니가 떠난다는 부분에서 내 마음을 무척 저리게 하지만 이 책은 정말 나에게 많은 감동을 준 것 같다. |
| 난 이책을 읽고 진작 읽지 못한 점을 후회했다. 홍어라는 것이 물고기 이름이고 이 소설의 주제를 알려준다라고 읽기 전 부터 짐작을 했었다. 내 예감은 맞았다.홍어는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볼수 있는 기다림을 상징하는 것이다. 13살 소년인 세영이 화자로 해서 어머니를 관찰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세영이는 순수함을 상징한다고 볼수있다. 삼례의 출현,호영이의 출현은 아버지로 인해 생긴 일이다. 세영의 어머니는 옛여인을 보는 듯했다. 순종적이고(아버지를 기다리는 부분에서.) 고답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나는 점이 있었다. 그건 삼례가 왜 떠났느냐는 것이다. 잘 살고 있었는데 남자로 인해 떠났다는 것은 삼례도 어쩔수 없었나 보다. 그리고 마지막의 세영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돌아와서 다음날 떠난 부분에서 난 놀랐었다. 세영의 어머니는 절대 그럴 수 없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것도 우리의 편견이라고 생각을 하면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한편의 풍경화를 보는 듯한 홍어의 배경은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시에 사는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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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는 홍어를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아니 언젠가 먹어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홍어인지 모르고 먹었을 뿐 그 넓적한 바다 생물이 언젠가 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는 홍어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내 기억을 전적으로 믿기로 한다. 우중충한 흑갈색 빛을 띠고 있으며 허연 진액까지 묻은 홍어를 먹었을 리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이상하게 생긴 생물은 먹지 않는 쪽이니깐......
김주영님의 소설 홍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우스꽝스럽게도 그런 생각부터 했었다. 소설을 펼치고 김주영님이 이끄는 문장에 빨려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은 곧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랬다. 이 소설은 마음 잡고 읽지 않아도 저절로 빨려들어갈만큼 강한 흡인력이 있었다. 하여 나는 내가 홍어를 먹어보았던가 아니었던가에 대한 생각 따위는 곧 잊어버렸다. 이 소설의 아름다운 문체가 내 영혼을 끌어당기고 있는데 그깟 미각의 기억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읽어본 사람은 느끼겠지만 이 소설의 문체는 너무나 아름답다. 눈 덮힌 마을의 정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부분들을 읽고 있노라면 거의 넋이 빠질 지경이다. 아름다운 문체와 함께 등장하는 나와 어머니는 눈 덮힌 마을의 정경처럼 고요하게 움직인다.
십대 초반의 '나'가 화자인 이 소설의 핵은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눈과, 눈 쌓인 길을 조심스럽게 걷는 어머니의 삶에 있다.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동네 여자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렸는데, 어머니는 그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남편이 돌아올 거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인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바람이 난 동네 여자의 남편은, 그 아버지만 돌아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다. 어머니는 동네 남자의 화가 수그러들어야 아버지가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그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 소설은 바로 '나'의 눈에 비친 그런 어머니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리고 있다.
한편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아내라는 이유로 혹여나 동네 사람들의 입담에 오를까봐 항상 노심초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날 이들의 집에 길을 잃은 낯선 여자가 들어오는데, 어머니는 당분간 묵게 되는 그 여자를 자신의 친척이라고 속이기까지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을 데리고 산다고 흉을 볼까 두려워 아예 친척이라고 해 버린 것이다.
한동안 그들의 집에서 묵은 그 여자는 어느날 집을 나가 버리고, 동네의 술집에서 창녀노릇을 하게 된다. 남의 입담을 두려워할뿐더러 체면을 중시하는 어머니는 그 여자에게 찾아가 오랫동안 모아온 돈을 내밀며 떠나라고 종용한다. 친척이라고 소문이 난 여자가 술집에 다니는 걸 두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그 여자는 동네에서 떠나고 또다른 여자가 그들의 집으로 들어온다. 아기를 데리고 온 그 여자는 역시 한동안 그들의 집에서 묵으며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돕는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잘 지냈던 여자는 어느날 아기를 두고 그 집을 떠난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그 아기는 '나'의 동생이다. 아버지가 밖에서 낳은 자식인 것이다. 어머니는 애초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 묵묵히 아이를 받아들인다.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을 위해선 오랜 기다림은 물론 무어이든 참아내야 한다고 믿는 여자인 터라 당연한 받아들임이다.
체면을 지키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하는 어머니, 그리고 남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철저히 믿고 기다리는 어머니. 눈이 하얗게 덮힌 어느날 마침내 집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온다. 어머니는 동네 남자를 기어코 설득하여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둔 것이다. 어머니는 이토록 남편에 대한 기다림으로 갖은 노력을 다했고, 그러면서도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피나는 세월을 살아온 분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온 이튿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린다. 하룻밤을 지샌뒤 도시의 술집으로 떠난 여자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떠나 버린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고, 체면을 지키려던 자존심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어머니는 문득 깨달은 것일까......그리고 도시로 간 여자의 주소는 왜 갖고 떠난 것일까......
소설은 여기서 끝나버려 그 다음의 일은 알 수가 없다. 여전히 마을엔 눈이 덮혀 있고 어머니가 간 길은 보이지 않아 그 이상의 유추는 짐작일 뿐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세상의 이면을 덮어버리는 눈, 그 눈의 허위성을 어머니가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랑과 체면, 그리고 자존심의 허위성을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우리가 믿고 있는 절실한 사랑, 체면, 자존심 따위들은 잠시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눈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환상 말이다.......
긴 여운을 남기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나는 다시금 홍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먹어보았는지 아닌지를 말이다. 결단코 먹어 본 적이 없다고 기억하고 있는데.......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혐오스럽게 생긴 생물 따위는 먹지 않겠다는 나의 오랜 의지가 기억을 조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내가 홍어를 먹은 적이 있고 없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나는 이토록 오래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나는 홍어를 염두하고 생각을 확장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흉물스럽게 생긴 홍어 따위는 결단코 먹지 않을 것이며 또 먹어 본 적도 없다고 믿고 싶은 나, 그리하여 그것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고자 하지 않는 나.
그런 나를 보며 모든 것에 대해 가치 있다/ 없다, 싫다/ 좋다, 라는 식으로 사고하는 것의 불합리함을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 가치있는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내 스스로 정해 놓고 그것이 정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인양 생각하고 있는 나를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도는 걸 느낄 수가 있다. . [인상깊은구절] 아버지는 눈의 궁전에서 찾아온 눈의 사자인지도 몰랐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엔 너무나 많은 눈이 내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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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다. 책 한 권 내내 눈이 내린다. 첩첩 산골에 내리는 눈은 고립이다. 하루에 한두번 다니는 버스도 눈이 많이 올 땐 오지 못한다. 나도 그런 산골에서 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더 공감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나는 '홍어'를 네 번째 읽지만 질리지 않는 책이다.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탁월한 작품을 써준데 대해 작가에게 감사한다. 존경받지 못할 남편임에도 끊임없이 기다리며 품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써는 어머니는 가련해 보인다.
아버지 없이 기르기 때문에 줏대없는 집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아들을 엄하게 다그치는 어머니에게 안간힘이 느껴진다. 혹시 이웃의 입방아에 오르내릴까 옆집의 개에게도 눈길을 주지않는 어머니, 그것이 옆집 남자와의 구설수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 사소한 장치까지 빠뜨리지 않는 작가가 존경스럽다.
옛날엔 삼례같이 떠도는 아이들이 간혹 있었다. 집이 가난해서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집을 나온 아이들, 거지처럼 떠돌다가 어느 집의 수양딸이 되거나 식모가 되거나 하던 아이들. 우리 동네에도 삼례같은 아이가 하나 왔다. 열살 정도 된 아이, 이름은 명희였다. 명희는 아들만 넷 있는 집에 수양딸로 들어갔다. 물론 그 집은 동네에서 잘 사는 축에 속했다. 말이 수양딸이지 명희는 학교도 못다니고 식모처럼 일을 했다. 어떤 때는 매맞는 소리가 삽짝 밖까지 들릴 때가 있었다. 명희는 춤도 잘추고 노래도 잘 불렀다.
여름 밤에 모기를 쫓기 위해 마당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모여앉으면 명희의 리싸이틀이 시작되었다. 허리를 꼬며 꾀꼬리같은 목소리로 간드러지게 노래를 불렀다. '섬마을 선생님'이라든가 '소양강 처녀'같은 노래를 얼마나 잘부르던지...... 첩첩산골인 우리 마을에 명희는 가수였다. 그런데, 어느날 부턴가 명희가 보이지 않았다. 명희가 갔다는 것이다. 재혼했다가 다시 돌아온 명희의 엄마가 명희를 데리러 온 것이다. 명희 때문에 한동안 즐거웠던 우리 마을은 또 다시 침묵에 쌓였다.
산골은 그렇다. 문명과 문화와는 거리가 먼 곳, 자연만이 모든 것이었다. 겨울에 눈이 오면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빙판에서 썰매를 타거나 하는 것들, 여름이면 냇가에서 송사리를 잡고 재수가 좋으면 바위밑에서 메기를 잡기도 한다.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소풀을 뜯거나 소나 염소를 몰고 풀을 뜯기러 가는 일들이다. '홍어'에서 나의 어린시절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어머니는 집을 나간다. 아버지를 찾아나설 수도 없는 어머니는 오로지 기다림으로 외로움을 이기며 살았는데 아버지가 돌아오자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없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던 아버지에 대한 모든 환상이 무너진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제는 훨훨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삼례처럼. 마지막 부분 어머니의 떠남으로 답답했던 가슴이 툭 터지는 기분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엉뚱한 결말인지도 모르지만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다른 독자에게 권하고 싶다. 산골의 정서, 눈의 정서를 만끽하기를...... [인상깊은구절]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바로 이튿날, 어머니는 어째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어머니의 가슴속에 6년 동안이나 간직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환상이, 아침에 문을 열고 내다보았던 폭설로 말미암아 모두가 허상으로 침몰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
| 이 책을 꼭 읽어봐야지, 라는 생각을 한 것은 TV 문학관을 본 이후부터였다. 그 전에 이미 베스트셀러에 오른 홍어라는 책을 알고 있었지만 그닥 읽고 싶은 맘은 들지 않았다. 1년 전 이 맘 때쯤 나는 감기에 걸려 골골 대며, 겨우 겨우 텔레비전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산골집과 화면을 모조리 덮어버린 순백의 눈, 그리고 연기자들의 열연, 가슴을 지릿지릿하게 하던 대사들. 그 때의 감동으로 기필코 이책을 읽어보리라 다짐을 했건만, 어찌된 일인지 일년을 후딱 넘겨버리고 새해 처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너무나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들, 홍어의 이미지와 사춘기를 맞은 세영의 몽환적인 세계는 드라마를 통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다소 흠이라면 이미 머리 속에 굳어진 어머니와 세영, 삼례, 옆집 아저씨의 얼굴들이리라. 내가 먼저 이 책을 접했다면 그런 붙박인 얼굴을 벗고 더욱더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지도 모른다. 긴긴 겨울 밤 정독하고 싶다. 밑줄 긋고 싶은 문장도 많고 소리내어 읽고 싶은 부분도 많고, 그 어머니의 심정이 되어 읊조려 보고 싶기도 하다. 홍어와 씀바귀나물의 여정까지 어머니의 한이 길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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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외진 산골, 그곳에 깔려 있던 짙은 쓸쓸함, 그리고 나의 간절했던 기다림.. 객지에 돈 벌러 나가 소식 뜸했던 부모님 탓이었을까. 어린시절, 난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였다. 돌봐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농사일로 늘 바쁘셨고, 6살짜리 꼬마는 언제나 그렇게 혼자서 엄마, 아빠를 손꼽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살던 깡촌에도 겨울이면 눈이 참 많이 왔더랬다. 가난한 시골 사람들에게 춥고 배고픈 겨울이 달가울 리 없었지만 막상 그 적적한 세상에 슬금슬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 그렇게 마음이 즐거울 수가 없었다. 눈발은 기어이 함박눈 되어 머리 위로, 장독대 위로, 나무들 사이사이로 하얗게 가만가만 내려 앉곤 했다.
그러나, '홍어'에서의 눈은 철저히 고립의 의미다. 밤새 내린 눈은 툇마루를 덮고 이웃집을 가로막아 버림으로써, 13살짜리 아들과 어머니를 세상과 단절시켜 버린다. 갑자기 찾아든 낯선 삼례로 인해, 세영은 서서히 용기를 얻어가고 어머니도 점차 세상과 교류하기 시작하지만, 몇 년 전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삼례도 역시 그들을, 그곳을 결국엔 떠나 버린다. 어떻게 보면 삼례는 아버지다.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다. 매년 어머니가 문설주에 꼬박꼬박 매달았던 홍어가 바로 아버지였고, 또 그 홍어가 삼례이기도 했던 것처럼.
전체적으로 보면 그리 발랄한 분위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울함에 더 가깝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작가는, 그만의 특유한 감칠 맛으로 시종일관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재주꾼이었다. 지금도 놀라운 건, 제법 지루할 수도 있는 소품들로 어떻게 그런 재미있는 소설을 엮을 수 있냐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구체적인 추억을 끄집어 내는 일이란, 또 독자들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는 듯한 의외성을 선사하기란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작업이던가. 재미있게 읽고도 여운이 많이 남는, 흔하지 않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알겠다. 슬플 때, 그보다 더 슬픈 노래를 들으려는 사람의 심리를. [인상깊은구절] 그것은 사람들이 가오리라고 말하기도 하는 홍어(洪魚)였다. 언제나 부엌 문설주에 너부죽하게 꿰어 매달려 연기와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있던 말린 홍어가 보이지 않았다. 하찮은 홍어포 한 마리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겐 내가 열 살 되던 해부터 집을 떠나버린 아버지로 상징될 만한 건어물이었다. 그것이 매달려 있는 자리가 항상 부엌 문설주 였기 때문에 부엌문을 열고 닫는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는 좋든 싫든 홍어포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
| 적지않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게 참 많치만 책을 다 읽구나서 느끼는건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아.. 참 재밌다.. 이 작가의 다른책두 읽어보고싶은걸'이고, 둘째는 '읽긴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지.. 담에 한번더 읽어봐야하나? 나만 이렇게 이해를 못하나 하고 속상하다!!'인데.. 홍어란 책은 아무래두 후자쪽인 것 같다. 몇달전 "TV문학관"에서두 이 소설을 드라마화해서 보여줬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도 책에 대한 부담감이 남아있던지 별재미를 못느꼈다. 역시 선입견은 안좋은건데 말이다.. 산골에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어린 소년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제목 홍어는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매개체로 나온다.. 근데 난 왜 홍어에 그런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고, 아버지가 돌아온후 어머니는 왜 떠나버렸는지도 모르겠고, 삼례의 출현과 떠남.. 암튼 전체적인 맥락조차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어딘가모르게 속상했던 책이다.. 다시 읽어보면 이해가 되려나? 아님 내가 좀더 나일먹은담에 읽어야 이해가 될까? 이번에 김주영님의 신작 <멸치>두 나왔던데 선뜻 손이가질 않는다.. 아무래두 멸치는 홍어에대한 나의 거부감이 사라질쯤 손이가지않을까싶다. (선입견으루 좋은책을 놓치는 실수를 범하고싶진 않은데.. 역시 책읽기는 쉽고도 어려운것 같다.)멸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