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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에 대해 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지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알게 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쓴 책들을 여러 권 쌓아놓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읽은 책은 [과학이란 무엇인가] 달랑 한 권뿐이다. 철학보다는 과학이 이해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과학이란 무엇인가]를 처음 선택했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는 차라리 에세이가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했드랬다. 그래서 이번엔 [결혼과 도덕], [게으름에 대한 찬양] 두 권의 에세이를 놓고 망설이다가, 이 책을 먼저 집어 들었다. 읽다가 지루해서 [결혼과 도덕]을 슬쩍 들춰보니 그 책이 이해하기가 더 쉬워 보인다. 항상 눈앞에 보이는 것보다는 조금 멀리 있는 것에 더 마음이 간다지만 내가 러셀의 책을 대하는 것이 꼭 그런 것 같다.
이 책에는 러셀이 1930년대에 쓴 15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러셀이 이 글들을 쓰던 시기는 양차대전의 전간기(戰間期)로, 대공황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경제상황의 치유를 위하여 자유경쟁시장 메커니즘에 정부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개입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수정자본주의, 관리경제체제 등이 나타난 시기이다. 또한 서구 유럽에서는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우려가 팽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 걸쳐 러셀 자신의 생각을 쓴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러셀은 서문에서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세계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반논제라고 말한다. 따라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나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15편의 글 모두가 당시 서구사회에서 나타난 문제점들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갔던 글은 표제 글인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설사 최소한의 필요를 웃도는 작은 잉여가 생긴다 해도 그것은 전사나 사제집단의 몫이었다. 이들 놀고먹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잉여를 강제했으나 곧 그것을 윤리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빠져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윤리는, 노동을 의무로 만들었다. 러셀은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고 단언한다. 부자들은 수천 년에 걸쳐 근로가 미덕임을 혹은 노동의 존엄성을 역설하면서 자신들은 그 부분에 있어 존엄하지 않아도 되도록 애써 배려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일이란 오직 생계에 필요한 수단이었다. 현대의 생산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러셀은 보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쪽 사람에게는 과로를, 그리고 다른 쪽 사람에게는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왔다며,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고, 이 어리석음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이유가 없다고 러셀은 말한다.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세계는 노동력중의 작은 일부만으로 사람들을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노동자들이 하는 8시간 노동을 모든 사람이 한다면 4시간 이하의 노동으로 현재의 생활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고 러셀은 강조했다. 기술문명의 발달로 노동을 현명하게 재구성한다면 일반대중도 게으름을 누릴 수 있고, 노동의 바쁨보다 게으름이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면 게으름은 바람직하고, 권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셀이 이처럼 게으름을 찬양하는 목적은 실용주의와 목적달성에 떠밀려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을 누구나가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러셀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은 대다수 사람들의 진정한 인간성 회복에 꼭 필요한 여유를 의미하고 있었다.
러셀이 이 글을 쓸 당시와 다르게 지금의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노동에 목을 매개 만들고 있다. 또한 기술문명은 점차 노동의 현장에서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러셀의 주장이 지금에도 유효한 면이 있다면 노동자는 초과근무에, 실업자는 생계유지에 시달린 나머지 여전히 여가를 꿈도 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일각에서 나오는 기본소득도 러셀이 말한 게으름을 위한 조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러셀이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신이 사회주의자였기에 가능했지 싶다. 그는 또 다른 글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에 봉사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수단에는 동의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경우는 그들의 수단은 물론 목표까지도 증오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에서 러셀은 사회주의가 기계생산체제에 대한 적응책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러셀은 사회주의 체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반드시 체제의 한 요소이어야 하고, 다수를 평화적으로 설득해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회주의가 경제적 불안을 방지하게 되면 극소수 최상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증진될 것이라고 러셀은 주장했다.
러셀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글이 90년 전에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현재 세계에도 해당되는 글들이기 때문이다. 비단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나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15편의 글 대부분이 서구문명의 중심에 자리 잡은 불관용과 편협함으로 인한 문제들에 대한 비판이다. 물론 그 중에는 사람에 따라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지만, 아마 당시에도 그의 글에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저작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것은 러셀이 말하는 요지가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러셀의 글을 읽을 때는 힘들었지만, 그의 저작을 찾아 책상 위에 쌓는 일과 그 중에서 선택하여 읽는 일은 계속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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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역사가인 버틀란드 러셀(1872~1970)은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던 인물이다. 수학에도 조예가 있어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저술하여 수리논리학의 성립에 공헌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는 파시즘과 그로 인해 세계대전에까지 이른 당시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개진하면서, 평화주의 운동과 저술활동을 벌렸고 그 결과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버트란드 러셀은 스스로 자유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이며, 아울러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당시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견해를 드러냈다. 이 책은 모두 15편이 수록된 러셀의 에세이집인데, 자유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로서의 저자의 면모를 가장 즐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표제작이기도 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게으름 자체를 다루고 있다기보다,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과도한 노동에 종사하는 대중들도 임금은 줄지 않고 노동 시간을 줄이면서 게으름을 누릴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가 아닌 ‘인간답게 살 권리’ 또는 과도한 노동에서 해방되어 휴식을 취할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말이 되어 자신만의 취미생활과 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는데, 러셀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되며 여가를 활용하면서 자신만의 삶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취업이 당면 목표가 되어버린 21세기의 현실에서 취업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지식만이 강조되기도 하는데, 러셀은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이라는 글에서 때로는 ‘무용한 지식’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글은 제목과 달리 건축이라는 주제를,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처지에서 건축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모든 건물이 햇볕이 잘 드는 마당과 보육원을 갖추고 공동 취사가 가능한 공간과 레저 공간을 갖출 수 있다면, 여성들도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주장들에서 경제적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비판적이고,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그의 사상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고 이해된다.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오로지 권력자의 의도에 따라 대중들을 몰아가는 체제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에서는 모두 9가지의 논거를 들어 자신이 사회주의를 찬성하는 이유를 제시하기도 한다. 오로지 경제력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현대판 마이더스’라는 글에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아울러 서양의 대학에서 발견되는 젊은이들의 무기력한 태도에 대해서 ‘우리 시대 청년들의 냉소주의’를 지적하고 있는데, 취업만이 목표로 설정된 현재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처음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보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자기중심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러셀의 논리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당면한 현실에서 요구되는 ‘유용한 지식’이 중시되고 있지만, 때로는 지적인 자극을 던져주는 현실에서의 ‘무용한 지식’들도 우리의 삶을 여유롭게 이끌어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이러한 삶의 태도가 러셀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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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게으를 수 있는 권리』(폴 라파르크. 1997. 새물결)을 읽었습니다. 라파르크는 마르크스보다 한 단계 넘어 노동을 타도하자고 외쳤던 인물입니다. 같은 게으름이 든 이 책을 슬쩍 보고서 비슷하게 노동에 관한 이야기로, 노동을 찬양하거나 노동을 하지 말자는 주장을 담은 글이라 오해하기 쉽겠는데요, 책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하게 생산하고 효율성과 직접적인 실용성만을 따질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고 사고하고 판단하자는 책입니다.
러셀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마찬가지 같습니다. 무용함은 곧 게으르다가 되고, 시간을 쪼개어 살며, 뭐든 실용성만을 생각했던 시대였고 또 지금입니다. 뼈 때리는 글이고 책입니다. 저 또한 이 글을 읽으며 되돌아봅니다. 계획과 지출을 결재하면서도 항상 머릿속에는 이것들의 효율을 생각했습니다. 폴 라파르크가 120년 전 8시간의 노동을 얘기했다면, 러셀은 90년 전 4시간의 노동으로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행복한 세상이 될 수 있다고 하네요.
첫 장이 제목의 글이 실린 책이지만, 이 외에도 여유에 관해 그가 보고 느꼈던 것들, 가령 건축이나 미술, 고서, 어린아이 교육, 청소년, 서구 문명, 사회주의, 혜성, 영혼 등 그의 철학이 깃든 글이 함께 든 책입니다. 그 시대나 지금이나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지만 무슨 해결책을 내는 책이 아닐 겁니다. 당장 실행 되긴 어렵죠. 그러나 러셀의 휴머니즘, 인간애를 볼 수 있는 책입니다.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농축된 지혜가 필요할 때입니다. 모든 사물이 시간의 절약과 효율을 따지는 현대입니다. 러셀은 단 30분 만이라도 부동자세로 명상을 한다면 모든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사안을 맑은 정신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노동은 더욱 강도가 높아지는 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현대의 기술로 볼 때 4시간의 노동으로도 충분히 모든 이가 행복할 수 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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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주제를 다루고 있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사색의 필요성 아닐까. 나도 모르게 쫓아가는 '효용성 숭배'를 반성한다. 그리고 노동에 주객전도되는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버트런드 러셀의 존재를 알아 감사하다.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반 논제다. 따라서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 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사고나 여론이 획일화되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 기구가 획일화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대의 발명품들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여러 개의 작은 단위들로 나누어 생산할 때보다 하나로 통합해서 대규모로 생산할 때 비용이 더 절감된다. 이것은 핀 생산뿐 아니라 여론의 생산에도 딱 들어맞는 얘기다." "바람직한 것은 복종도 반항도 아니며, 선한 본성과 사람들 및 새로운 사상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의이다. 이러한 자질들은 부분적으로 선천적인 기질에서도 기인하지만―이를 구식 교육자들은 너무 등한시해 왔다― 활기찬 충동들이 저지되었을 때 생겨나는 좌절된 무력감으로부터의 해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내가 생각하는 타인에 대한 배려란 필요한 일을 기꺼이 공정하게 분담하고자 하는 마음, 모든 것을 고려하여 불화를 없애는 방법들에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말한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대부분의 아이들의 경우 저절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를 발휘하지 않고는 가르치기 힘든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성인들이 포기해선 안 된다는 입장의 가장 중요한 근거일 것이다." "호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두고 미리 규율부터 내세우는 일은 불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호의라는 충동이 자연스럽게 올바른 결정으로 이끌어갈 것이고 당신이 아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이가 느낀다면 어떤 결정이든 대체로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규율이란 제 아무리 현명한 것이라 해도 애정과 접촉을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종류든 간에 중요한 작업이 집단화된다면 필연적으로 개인적인 부분은 줄어들 것이다. 개인들로선 지금까지 천재적인 사람들이 해온 것만큼 뚜렷하게 자기 주장을 하기가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주제를 너무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행동이 뒤따르지 않을 땐 더욱 그렇다."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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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향 버트런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이 책은 사회에 대한 다각적 측면에서의 문제제기와 해결방법에 대한 저자의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15편의 수필은 1935년 그 즈음의 시대상황에 맞는 고민거리이지만 2018년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형인 일들이 많다. 1930년대는 미국에서 발생한 대공황의 여파로 전 세계가 휘청거렸으며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닥쳤던 시기이다. 그러나 미국은 루즈벨트의 뉴딜 계획과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공황을 극복한다. 독일은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태인을 박해하고 전 세계를 전쟁 폭풍 속으로 휘몰아치게 만들었으며 소련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강제이주를 하게 한다. 고려인들 역시 중앙아시아로 이때 이주했다.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여 난징 대학살의 만행을 저지르고 스페인은 내전으로 고통 속에 있었다. 세계의 이런 흐름 속에서 러셀은 세계가 고통 받고 있는 원인에 주목했다.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들, 방향이 틀렸음에도 옳다고 행동하는 나라와 애국심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존재때문에 세계가 고통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이 글들을 관통하는 논제다. 복잡한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마음 자세와 다양한 관점에 대해 의견 교환할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하다는 게 러셀의 처방이다. 1883년 폴 라파르그는 ‘일할 권리’에 대한 반박으로 ‘게으를 권리’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글이었다면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노동이 제일 축복 받을 만한 미덕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원시 공동체 시대에는 농부들에게 농부 자신들의 본분은 열심히 일하는 것임을 주입시켜 강제력을 쓰지 않고도 잉여물을 취득하여 전사와 사제들에게 잉여물이 돌아가게 하였다. 기근시에 그들에게서 생명을 보호 받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식의 교육은 지배 비용을 줄이는 특징도 있어 의무를 강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의무란 개념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하는 하나의 술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할수록 일은 즐겁지 않다. 저자는 노동자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은 여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부은 노동자들은 여가생활 조차 영화관람, 축구 시합 관전, 라디오를 애청하는 일이 전부다. 과거에는 일하는 계층이 대다수였고 여가를 즐기는 자는 소수였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력이 축소되었는데 여전히 여가는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고 있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여가를 즐길 줄 몰라 해매고 극심한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받아들인다. 인간의 선한 본성은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온다고 러셀은 말한다.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 선한 본성인데 편안함과 안전이 보장된다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지 않은가. 우리 모두 편안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스템에 의해 우리 모두가 여가를 누려야 한다. 여가를 누릴 때 불편하다 여기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생활여건이나 삶의 질을 높이는 방식의 차원에서 여가가 우선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가 시작되려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읽을 책이라곤 집에 있는 백과사전 뿐, 엄마가 언제 오시나 대문가를 어슬렁거리던 때, 숨바꼭질, 공기놀이를 하고도 남은 시간이 많아 이리 저리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시간을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할 일을 끊임없이 찾아야만 했고 장난감을 스스로 만들어 놀아야 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완벽하게 많은 것들이 주어져 있다. 그 많은 신상품을 구입하고 그럼에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계속 일을 하는 돈의 노예가 되는 상황을 종종 목격한다. 점점 여가는 멀어지고 삶은 각박해지고 행복은 멀어진다. 러셀의 ‘게으름의 찬양’은 일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님을 깨우치려 한다. 그러게 된다면 세상이 훨씬 행복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고 세상은 고통으로 몸부림 친다. 레셀의 지혜를 빌려 지금 당장 머리를 맞대고 우리 함께 고민하는 것만이 세상을 고통 속에서 그리고 나의 선함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사족으로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읽는 동안 불편하고 한 문장 안에서 주어와 동사를 찾으러 다니고 피동문도 많고. 한글인데 읽기를 몇 번 반복해야 겨우 이해가 되고.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의 저자가 영문학을 부전공한다는 이야기가 반가웠다. 경우는 다르지만 ‘채식주의자‘,’흰‘을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가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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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트 러셀을 알게된건 영국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알게되면서 였다. 비트슡슈타인이 버트런트 러셀 제자로 공부하다 버트런트 러셀이 몇개월 뒤 더이상 가리칠게 없다며 제자의 천재성을 인정했다는 일화를 보고 나서였다. 제자의 천재성을 인정한 스승도 많지만 이카루스의 아버지 처럼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스승도 많기에 제자를 인정하는 러셀의 일화를 읽고서 인상적이었다. 심지어 버트런트 러셀 그도 수학 원리 라는 기념비 적인 저서를 쓴 최고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라는 것도안 인상적이었다. 버트런트 러셀에 대한 궁금중과 호기심으로 그의 저서를 읽고 싶던 중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란 제목에 혹해서 사게되었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쓴 가벼운 글 이라 생각하고 살만큼 아무런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게 되었는데 사회문제들을 꼬집는 내용들과 통찰력이 느껴지는 가볍지만은 아닌 글이었다. 특히 첫장 게으름에 대한 찬양 글에서 노동의 순고함이 계급 정점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의 여유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계급에게 세뇌시킨것이라는 말에서 좋은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높은계급 즉 현재에는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 일반 사람들을 필요에 의해 쓰고 버린다는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나조차도 노동의 순고함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믿고 있었다. 물론 책에 나왔듯이 노동은 꼭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이용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외에도 러셀의 통찰력이 느껴지는 글들이 많아 "이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 구나"라고 느끼게 해줬다. 여러번 읽고 싶은 책을 오랜만에 만나서 즐거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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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 1940년대쓰여진 이 책은 한창 경제 발전이 세계곳곳에서 일어날때 쓰여진 책이다. 각 챕터별로 제목마다 러셀의 짧은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의 첫 챕터가 바로 이 제목이다. 제목에 그냥 확! 끌려서 읽었다.
주 52시간 노동에 대해 300인 이하 기업에도 올해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재계의 반발로, 주 52시간의 기준이 기존 3개월에서 6개월로 늘어난 지금, 1940년대 노 철학자의 게으름에 대한 생각을 읽으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말그대로 사람을 갈아넣어 생산성을 맞추겠다는 마인드가 21세기에도 여전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무슨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게으름이라 이야기했지만, 저자가 말하는 찬양의 대상은 여가다. 사람은 여가가 있어야 사유를 하고 그만큼 더 나아가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것. 뭐 2-3세기 그리스에서 꽃피웠던 각종 철학들이 노예들의 노동을 기반으로 일반 시민권자의 여유속에서 가능했다는 것을 보면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 아닌가.
또 다른 내용에서는 그 당시 전세계를 사로잡았던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날선 비판. 당시 구소련이나 중국을통해 공산주의가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산주의가 성공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쓰여진 내용을 읽다보면, 저자의 생각에 사뭇 놀란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배계급에게는 '민주주의' 국가의 자본가 계급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이 주어진다. 그 계급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그 힘을 쓰려할 것이다. 그러한 이익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보다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p. 163
결국 프롤레탈리아라는 노동자 계급의 노동을 신성시 함으로써 발전되는 형태인 공산주의 또한 특정 계급을 대변함으로써, 그들을 위해서만 존재함으로 특정한 계급에 한하여서만 편파된 권력이 행사됨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또한 타 계급에 대한 폭력이 되기에 말이다. 또한 그런 권력 유지 수단으로 국가주의 적이며, 반 민주적인 형태를 띠기에 말이다. 공산국가의 몰락을 자본에 대한 욕망이라는 측면에서만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면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 또한 오래 지속될 수 없음을 꼬집고 있었다.
이밖에도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편을 읽고 있다보면 우리가 현재 소위 사회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북유럽을 생각케한다.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 어떤 체제가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없는 지금 우리는 각 케이스에 맞춰 조금씩 변해가는 사회를 보고 있다. 더 훗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 밖에도 "현대사회의 획일성"을 보고 있자면 1940년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것없는 우리나라의 교육이 답답해지기도 했고, (물론 교과과정등이 많이 변했지만, 큰 틀에서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를 놓고보면 사회가 변한만큼 교육은 제자리걸음이라는 생각을 하는 일인이지라..) 혜성의 비밀을 읽고있지만, 저자의 해학이 재밌으면서 놀라웠다.
철학자의 책이다보니, 중간중간의 내용은 조금씩 어려웠지만,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각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당시의 철학자가 바라본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비교하면서, 읽기에 개인적으로는 재밌고, 놀라웠던 책이다. 굿굿!
"우리의 일상 세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인공적이다. 이로 인해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다. 안전한 자신의 영토 안에서 인간은 점점 더 사소해지고, 교만해지고, 약간씩 미쳐간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혜성이 1662년 보스턴에서와 같은 유익한 도덕적 효과를 낳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은 좀더 강한 약이 필요한 시대다." p.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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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플루언서 추천으로 읽게 된 책입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스테디셀러인 것은 이전부터 알았지만 여차저차 배송비를 아껴보고자 주문했었는데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알겠더라고요.. 굉장히 좋은책입니다^^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합니다. 건축, 곤충, 니체와 히틀러, 사회주의, 철학 등 다채롭게 다루고 있습니다. 열 다섯편의 글로 구성돼있어서 한편한편 부담없이 읽기 좋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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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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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점점 더 우리가 편안하고 편리한 상태로 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육체적으로는 편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많은 고통과 불안을 야기시키고, 스트레스가 언제나 우리 주위에 산재하여있다. 항상 생산적이고 효유을 중시하는 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