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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황무지에서 싹틔우는 한 줄기 희망 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지은이는 무책임하게 남용되는 "용서"라는 말, 그리고 요즘 부는 용서신드롬은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라고,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희생자 가족이거나 지인이라면? 그때도 당신은 “먼저 용서하십시오. 그래야만 진정한 치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충고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야기는 아름다운 인생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역지사지(처지를 바꿔놓고 생각해보기)
자, 이런 예가 적절할지 모르겠다. A대학에서 형법을 강의하는 법학자 K , 그는 인권과 법원의 오판우려 등으로 생명을 강제로 끊는 사형폐지론자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런 소신을 시험에 들게 하는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 벌어진다. 평소 K씨를 못마땅해 하는 Z가 K의 아이들 납치해 놓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네 아이를 죽인다. 그래도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할꺼냐? 할테면 해봐라 하고 공개적으로 도전한다고 가정하다. 아이의 아버지 K는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사형폐지론을 폐지할 수 있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생각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소신내지 사상에 대한 시험을 하는 유사한 예는 많다. "그래도 지구는 둥글다"라고 했던 갈릴레오 갈릴레이 예가 그러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게 말했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는 유폐, 격리 정도이지 갈릴레오를 죽이겠다는 그런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만약,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내 소신을 꺾지 않겠다고 했을 때 K의 운명은 상상만 해도 끔직하다. 사회적으로 지탄은 물론, 가족 내에서도 너는 사람도 아니다 는 등의 주변의 모든 것들(사람을 포함하여)로부터 배제될 것이다. 후일 역사에서나 평가가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도 문제이기에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의 지은이는 말한다. 남의 이야기니 편하게 할 수 있겠지만 정작 네가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됐다면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라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내로남불? 처럼, 나를 중심에 놓고 고통을 이야기 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 밤비 2016년)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교구 사제였던 지은이에게 살인 범죄로 10대의 아들을 잃은 어느 여인의 질문에서 시작된다. "그들을 꼭 용서해야 하는 건가요?” 그는 그 피해아이의 엄마에게 “용서를 떠올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너무 이르지요.” 진실을 말하자면, 용서에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시간이 명약이라는 말 넘어 더 중대하고 본질적인 것들이. 피해자의 고통에서는 한 낱 물거품이었다. 이런 문제를 정면으로 부닥치며 헤쳐나가기 위해 그는 신학과 의학, 심리학과 인지학의 연구 자료를 샅샅이 뒤지고 끔찍한 사고와 사건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의 파고를 함께 체험하면서 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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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소설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어린 남자아이가 유괴되어 살해당했다. 가해자는 금방 붙잡혔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리는 만무. 아이의 부모는 오랜기간 고통스러워했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는데 그녀는 종교를 믿으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드디어 살인자를 용서할 마음이 들어 면회를 갔다. 하지만 그 살인자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죄를 뉘우쳤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분개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느님이 용서할 수 있냐고.
책 중 p.15를 보면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라는 말이 나온다. 성경에서는 딱히 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라도 한번은 들어 보았을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주어라"라는 말이 있다.(성경은 용서와 관련된 구절이 꽤 많다).
그렇다고 해도, 또 신심이 아무리 깊다해도, 보통 사람은 막상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용서보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용서란 과연 어떤 것일까?
다른 사람이 실수로 자신의 발을 밟았다면 "미안해"라는 말 한 마디에 간단하게 "괜찮아요" 더 나아가도 "앞으로 조심해"정도의 말로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전재산을 훔쳤다면? 가족 중 누군가를 해쳤다면? 아무 이유 없이 날 찔렸다면? 간단하게 용서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지은이는 그 때문에 용서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섣불리 '용서'했다간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긴다. 단지 기독교 정신으로 용서해야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용서'를 하는 건 용서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뉘우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조건 용서를 하는 건 사회에 있어서도 좋지 못하다. 그렇다면 용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책은 용서에 관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고 있지만 직접적인 해답은 주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란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필자가 신학자인 만큼 종교적이지만 남이나 내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렇지 않더라도 마음을 좀 더 닦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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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끔찍한 사건 소식에 모두가 분노하고 있다. 사건의 당사자들이 느끼는 분노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크기가 클 것이다. 소중한 가족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로 인해 잃었을 때 어느 누가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혹 제 자신이 그와 같은 사건으로 인해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는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어쩌면 용서가 가해자에게 가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일 수도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소위 사이코패스로 불리는 이들이라면 피해자 측의 무너지는 모습으로부터 조차도 희열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복수 차원이 아닐지라도 용서는 중요하다.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용서는 쉽지가 않다. 성인군자가 되어 그 어떤 부당함에도 성내지 않을 정도의 내공이 쌓인다면 또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를 그리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동료가 내 물건을 훔쳤다거나 실수로 내 소중한 (물질적인) 무언가를 망친 경우라면 조금 쉽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스로를 피해자의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이 옳지 않음을 잘 알고, 또 본인 스스로도 이렇게 사는 게 억울하다는 생각을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피해자만이 용서를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 즈음해서 용서가 권리인지 의무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용서가 아름다운 행위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왜 너도나도 용서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 아닌 강요를 피해자들에게 해대는 모양새를 연출한단 말인가! 데리다는 “용서는 미친 짓”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미친 짓을 기꺼이 피해자에게 요구한다. 그래야 당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서 말이다. 용서를 하면 정말 마음에 평온이 찾아올까? 저자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오히려용서에 수반하는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가 제시한 많은 사례들 간에는 차이가 분명 존재했다. IRA의 폭탄테러 사건으로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든 윌슨(Gorden Wilson)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제게 앙심은 없습니다. 아무런 원한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라며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행동은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한 반발을 억제해야 한다는 정치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는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반면 끔찍한 사건으로 여동생을 잃은 메리언 파팅턴(Marian Partington)은 유사한 감정에 도달하기까지 4년가량의 시간이 걸렸다. 일관되게 분노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경험한 감정의 굴곡은 너무도 컸고,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분노의 감정과 싸우고 있다. 두 인물 모두 직접적으로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언행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용서였다. 그들의 용서가 가해자를 향한 반발을 누그러뜨리는데 기여했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상처로부터 완벽히 해방시킨 것은 아니다. 태도를 바꾸지 아니 한 고든 윌슨의 아픔이 가해자를 생각지 않는다고 없는 게 될 리는 없다. 용서는 피해자 혼자 하는 게 아니며, 주변의 인물들이 부추긴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상대가 피해의 늪 한가운데서 조금이나마 가장자리로 나올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길동무는 피해자가 용기를 갖고 상처를 직시할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지나친 관심과 배려로 인해 피해자가 다치지 않도록 이끌 역량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 충분히 애도하고 공감하고 기다려주는 지혜가 거듭 발휘되어도 때론 실패하는 것이 용서다. 어쩌면 평생을 싸워야 겨우 쟁취할 수 있는 게 바로 용서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관대하지 못하다. 뭐든 빨리빨리 해치우길 기대하고, 상대의 상처를 나의 도약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이런 사회 분위기라면 아마도 용서를 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조금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떠올려야 하는 까닭은 모두가 분노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무도 권리도 아닌, 어쩌면 미친 짓일지도 모르는 용서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희망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