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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 국면을 클로즈업(Close-Up)하면 이렇게 보이지 않을까? 고상하고 기품있고 아름다워 보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무엇에 렌즈를 가까이 갖다대면 댈수록 이내 그 본색인 천박하고 추하거나 불결해보여 외면하고 싶은 그런것, 이 작품집을 읽는 내내 이러한 감정 상태를 떨쳐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곤 자살, 추방, 폭력, 고립과 같은 단어들에서 발산되는 어둠의 답답함이 시종 가슴을 압박하는 불쾌한 기분에 짓눌린 기분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의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이런 것이라는, 우리의 의식이 손사래를 치며 은폐시키고 있던 것들을 어쩔수 없이 마주하는 그런 수치심, 몸서리, 분노, 자괴감이 뒤엉킨 무기력 같은 것...
1. 너무도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인
"아버지가 칼등으로 블루길의 대가리를 찍었다."라는 첫 페이지의 문장이 시선을 장악하는 이 소설집의 첫 단편인 <미끼>의 흥건하게 흐르는 폭력의 피비린내가 훅 하고 내 정신을 훑는다. "버텨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야, 알겠어?", 아들인 화자(話者)를 절름발이로 만들어놓은 아버지가 하는 말이다. 대어를 잡아들이는 떡밥의 비밀을 취재하기 위한 VJ의 탐욕스러움이 가세하여 이들 부자(父子)가 하는 낚싯가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폭력의 쇼는 바로 그 속성인 완력, 힘의 자기 파괴력일 것이다. 그래, 살아남은 놈이 주인이 되는 거다. 바로지금 우리의 정치사회에서 벌어지는 어이없기그지없는 쇼의 궁극이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 구조적인 사슬을 끊어야 할까? 약자는 모두 쓰레기처럼 풀 숲에 던져버려지는 것이 진실인가?
나는 수록된 이 소설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이 클로즈업된 전경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하는 용기가 필요했으니까. 거의 소설집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다 <아름다운 것들>이라는 단편에 이르렀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게하는 문장을 만났다. "가만히 잠든 아이의 얼굴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아이의 숨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가만히 베개를 누르자...." 파업 노동자인 남편의 자살 후 천문학적인 파업손해배상액을 빚으로 떠 안은 정신분열의 시어머니, 어린 두아이의 엄마가 견뎌야하는 잔인한 현실의 결말이다. 쓰레기처럼 방치되는 것이 바로 현실이다. 지나치게 현실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그런 현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들...
단편 <폭염>의 화물트럭 운전으로 딸아이를 키워내는 여인, <흉몽>의 모텔 청소부인 여인, 억척스런 생활의 몸부림에도 그네들을 모욕으로 점철시키는 우리들의 사회는 "나도 따라 죽을거야.", 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찢어진 눈매를 치켜보며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거나, 삶이란 절망과 고통스런 의혹일 뿐이다.
2.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
'다카다 아키노리'라는 일본 철학자의 '궁극의 선택'이라는 어휘가 떠오른다. "똥맛 카레와 카레맛 똥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와 같은 불가능한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적 속박을 일컫는 말이다. 아마 우리들중 많은 이들은 오늘 이러한 속박을 피할 길 없는 상태에 있을 것이다. 이것(사회적 속박)을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살이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김이설'의 소설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물들로 가득차 있다. 내 존재를 떠 받쳐주는 타자가 없는 이들, 세계가 외면한 곳에는 항시 죽음의 그림자가 떠돈다. <폭염>, <흉몽>, <복기>, <아름다운 것들>..., 또한 한결같이 등장인물들은 아이를 갖지못한다. 이 사회의 번식녀 계급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잔혹한 폭력의 세계...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않은'또는 '언어나 문자 따위로 전할 수 없는'이라는 비밀의 얘기로 돌아가자. 사실 우리들의 사회가 은폐한 것들의 이야기이니 이 소설집의 모든 작품들이 비밀의 발설이라 해야할 터이다. <비밀들>이라는 단편의 주인공은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인 이혼요구를 받고 친정으로 내려온 여인의 이야기다. 그런데 "내 부모와 세상이 바라는 정상적인 과정"이라는 문장이 눈길을 끈다. 사회적 속박의 다른 표현이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지 못한,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혼란과 방황이다. 온갖 편협한 편견들과 반지성이라 불리는 옹색하고 천박한 자기주장, 이미 윤리적 도덕적 올바름을 망각한 세계가 말하는 '정상'이란 단어처럼 의심스런 것도 없으리라. 이 구조적인 폭력이 여인이 온전히 서 있을 곳을 지워버린다. "여전히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서울행 버스가 도착했다. 정수리에 박힌 햇빛이 뜨거웠다." 이 마지막 문장이 왜 그리 울려대는지...
"비밀을 만드는 사람은 결국 외롭게 되어있어." 라는 단편 <부고>의 문장에 가 닿는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 같았다."라는 화자(話者)의 독백에서 또한 자기의 이야기가 없는 인물을 만난다. 그녀의 삶에 자기 것이라곤 일체 없다. "논문을 쓰다보면 그것이 내 논문 같고, 내가 석사 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원으로 출근하다보면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 같았다. 상준과 누워있으면 아내 같고,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 뒤로는 여자의 친자식 같았다." 다음 시간 단위에서 발생하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들의 지속이라면 아마 우린 순간을 살아내는 것 뿐일 것이다. 여기에 무슨 자유가 있을까? 이런 상황에 계속 굴복하여 살도록 강요하는, '시몬 베이유(Simone Weil)'가 말한 '공장화된 현대사회'의 본성인 '타인의 의지로만 움직이는 물건이된 인간'을 떠 올리게 된다.
'OO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이란, 우리들의 모습일 것이다. TV광고 속 그와 그녀 같은, 드라마, 스포츠, 재벌,...의 그 무엇과 같은. 급기야 단편 <빈집>에 이르러서는 신도시에 아파트를 장만한 여자 '수정'은 이렇게 말한다. "새 아파트는 잡지 사진과 최대한 닮은 것"으로 만들겠다고. 모방, 지속되는 결핍, 미완성의 고통만이 늘어날 것이다. 그녀는 말끔히 정리하곤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들어앉아 비로소 평온을 느낀다. 그 고요함이 마냥 지속되기를.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를. 이 은밀한 고통들, 폭력들, 속박들의 고리가 끊어지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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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힘들다고 말한다. 죽을 만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습관처럼 내뱉는다. 내게 주어진 삶이 가장 힘드니까 남들이 어떻게 살든 관망할 여유도 없다. 그게 산다는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헛된 꿈이라도 말이다. 돌아보면 그곳의 모든 흔적은 내가 만든 것인데 왜 그렇게 살았나, 후회가 밀려온다. 김이설의 소설에는 후회라기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외침이 있다. 아니, 그것은 비명일지도 모른다. 더 비참해진 삶, 더 잔혹해진 사람들, 소설의 인물들은 지독한 세상을 닮아가듯 비루한 생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어깨를 짓누르는 절망에 지지 않고 말이다. 그게 삶이니까.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슬픔을 대신 덜어줄 수 없다. 대신 앓을 수 없고, 대신 살아줄 수도 없듯이, 온전히 자기 혼자 버텨내야 했다.’ (「폭염」, 89쪽)
김이설의 소설은 불편하고 힘들다. 폭행이나 폭력에 대한 묘사의 등장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라는 세계의 끝에 현실이 닿아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가해자에게 대들지 못하고 자라 아버지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미끼」의 아들이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교사 아버지의 교묘한 폭언과 자신의 아들의 교육을 위해 재혼한 새어머니의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부고」속 딸에게 작은 기쁨이나 바람은 존재할 수 없었다. 윤리나 도덕이 배제된 게 당연한다. 그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니 남편 실직과 빚 때문에 모텔 청소를 하며 버티는 「흉몽」의 아내와 남편과의 불행했던 결혼생활과 이혼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비밀들」 의 ‘나’의 부도덕한 행동을 탓할 수 없다. 판단도 그들의 몫이다. 비난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위로할 수도 없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삶이 타인의 그것이라 우리는 크게 안도하고 쉽게 잊는다.
『나쁜 피』를 시작으로 김이설이 직시하는 건 불행한 삶이다. 누구나 알고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애써 살피지 않는 삶 말이다. 이 소설집에서 주목할 점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걸 말하고자 한다는 거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열심히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주장한 파업의 대가로 회사로부터 손해배상 청구를 당한 남편의 자살 후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어린 자녀를 둔 여자의 슬픈 독백 「아름다운 것들」을 읽으며 가슴이 먹먹해지고 답답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거대한 행복의 궁전으로 들어가기를 바란 게 아닌데.
그런가 하면 아내 정미의 자살에 대해 감당할 수 없었던 남편 윤철의 조금씩 안정을 찾고 오히려 편안해하는 「복기」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집을 장만했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불안한 일상을 이어가는 「빈집」은 인간의 욕망과 심연을 투영하는 거울과 같다. 윤철은 정미가 죽고 나자 결혼 전 자신 때문에 다리를 절게 된 정미에 대한 자책감을 덜어낼 수 있었다. 행복으로 꾸며진 집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수정의 슬픔이 멈추기를 바라는 건 나만의 바람일까.
‘윤철은 정미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것이 윤철이 꿈꿨던 이상적인 남편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취향의 차이, 입장의 차이, 결국 타인이기 때문에 절대 합일될 수 없는 관계의 한계일 뿐이라도 여겼다.’ (「복기」, 257쪽)
‘수정은 그 순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낀다면 바로 이 순간에 느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햇볕이 꽉 찬 실내는 따뜻했다. 집안은 깨끗했다. 그런데도 뭔가 허전했다. 무엇이 더 필요한 걸까.’ (「빈집」, 317쪽)
모두에게 완벽한 삶은 어디에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기준에 도달하려 안감힘을 쓰는 거다. 거기에 작은 격려와 응원이 더해진다면 조금이나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니 절망에 지지 않는다는 건 그것과의 단절과는 다른 말이어야 한다. 예측은커녕 상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는 삶에서 절망을 끊어낼 수 있는 이가 있을까. 우선은 절망이 지지 않고 대등해져야 한다. 설령 절망과 나란히 걷더라도 말이다. 걷고 걷다 보면 그 끝에 절망이 아닌 그 무언가(희망이면 좋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버티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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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족이 싫었다. 나는 가장이다. 나는 누군가를 닮기 싫어 했다. 누구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렇게 안살기로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그렇게 발버둥을 쳤건만,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것처럼 문득 생각한다. 내가 여자친구와 친구와 통화를 하거나 다투거나 감정이 격해졌을때... 나는 그를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닮길 원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순간 생각을 한다. 그 사람처럼 되지 않기 위해 지금 이상황을 견뎌 내보거나, 역시나 나도 똑같았구나... 그치만 난 내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결국엔 후자를 택한다. 오늘처럼 고요히는 가족에 얽힌 가장 불편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다. 세상에 아름다운 가족은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듯 먹고살기 힘든 핍박받던 시절의 가족들의 이야기가 다 그러하듯.... 그래서 더 답답하고 힘들다. 이 소설은 1편의 중편소설과 8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간략한 줄거리를 얘기하기 보다는 각 소설당 인물관계에서 일어날수 있는 사건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게서 일어난 일들이지만, 어느 관계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를 포커스를 잡고 집중적으로 그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소통의부재를 다루기에 각 소설마다 가족이라는 큰틀은 같지만, 모두가 다르다. 부자지간 [미끼] 새엄마와 딸의사이[부고] 모녀지간[폭염],[비밀들] 부부사이[흉몽],[복기],[빈집] 부녀지간[한파특보]
시어머니와의 관계 [아름다운 것들] 어떤 갈등을 사건으로 바라보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에 따라 소설의 이야기가 각각다르지만, 실은 위에 써놓은것처럼 언급되는 관계들의 주제나, 부주제로 활용되는 포커스들이 공통적으로 들어난다. 가족이란 특별한 나머지 알아주면 당연한 것이고,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기도하고 그것이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더욱 큰 상처로 남는다. 가족은 천륜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에 연결된 고리 같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닮고 싶기도 하지만, 가장 닮기 싫지만 닮을 수 뿐이 없다. 나는 엄마와 같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아빠와 같은 남자가 되기위해 한편으론 아빠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 엄마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좋은 모방을 하며, 한편으론 회피하지만 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혈육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우리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성격과 닮을수 뿐이 없이 전염되는것이다. *'전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전염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기에 전염이라는 표현을 사용 어쩌면 한편으로 가장 증오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나의 삶을 만든것 처럼... 우리는 가족과 좋던 싫던 함께 해야 될 수 뿐이 없는 올가미 같은 것이 가족이다. 이소설에서는 가족이라는 계념이 계약를 하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계약을 한 사람처럼 이행해야되는 계약관계에 있는것 처럼 느껴지는것처럼 보인다. 집안의 장손으로 큰 남자는 책임감이 기본적으로 몸에 베여 있지만, 한편으론 그 책임감이 발목을 잡을뿐더러, 책임지는 일을 꺼려한다. 그 이유는 내가 왜? 책임을 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에서 올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닐까한다. 그만큼 우리는 가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무가 무의식에 존재하고 회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는 것처럼, 완벽한 가족 또한 없다. 우리는 그런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안간힘쓰며 발버둥치고, 때론 닮아가기도 하고, 때론 나쁜것이 전염되기도 하는것처럼 좋은것만 받아들일수 없기에 인간인것이다. 우리는 그런 곳에서 희망을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발버둥치며 가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구성원들로서 살야하지 않겠는가? "소설속의 인물들을 모두 한자리로 불러들이고 싶다. 그들에게 내가 막 끓여온 미역국을 대접하는 것이다. 뜨거운 국물로도 마음이 녹지 않는다면, 그래서 조금 더 바짝 붙어앉아 화톳불이라도 피운다면, 기꺼이 내 소설이 박힌 책들을 찢어 불쏘시개로 쓰겠다." 작가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 이러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래 힘들어도 살아야겠지. 잘살고 있어라는 우리는 위안이 필요했고 우리의 편이 필요했다. 가족에게 상처받은 이들에게 작가는 소설은 너무 현실적이여서 불친절할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마치 '이런 사람들도 살고 있는데' 힘내자 라는 응원을 작가는 보내는듯 느껴진다. 얼어붙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따듯한 미역국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녹일수 있다면, 그 미역국이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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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스물두 살. 딸과 나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한 남자의 나이는 서른두 살. 나와 그 남자의 나이 차는 열 살입니다. 나는 사고로 죽은 남편을 이어 화물 운송업을 합니다. 여자가 하기에는 일이 힘들고 거칠다고 생전의 남편도 말렸던 일입니다. 그날 남편은 일 나가기가 싫다고 했습니다. 나는 억지로 깨어서 남편을 보냈습니다. 빗길 사고였습니다. 택배 일이라도 해보겠다고 운전을 배우고 합격 인지를 붙인 순간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종종 생각합니다. 그날 나가기 싫다는 남편을 그냥 두었더라면 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삶이라 만약으로 시작되는 가정으로만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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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어지간히 무감각한 사람이라도 소설을 읽으며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이설의 소설에 희망이나 화해 따위는 없다. 삶은 불안하기만 하고, 성은 불온하거나 불결하기만 하다. 하지만 작가의 이런 태도를 뭐라고 할 수 없다. 그 직시의 태도가 이 작가의 소설을 이끄는 힘이다.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기도 힘들다. 그렇게 듣기 싫은 소리, 보기 싫은 장면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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