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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산 지는 꽤 됐습니다. 한 3년 전이었나요? ㅎ.. 양은 많지 않지만, 내용이 참 풍부합니다.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했던 김용석 교수가 97년 영구귀국 이후 벌여왔던 주목할 만한 저술활동의 결과물 중 하나죠.
제목에서처럼 그의 목적은 깊이와 넓이를 함께 갖추는 데 있습니다. 본인은 그것이 성공적인지 아닌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며, 이 책을 쓸 당시 계속적인 앞으로의 시도를 다짐하는 겸허함을 보이지만, 제가 보기에 이 책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깊이와 넓이를 물론 함께 갖추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우리 내부에는 항상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쉬운 일을 지향하는 심리가 도사리고 있고, 또한 그것이 골치 아픈 사색이나 삶에 관한 통찰 따위의 정신적 활동이었을 적에, 여러 가지를 아우르기보다는 체념적으로 하나만을 선택하며 "그냥 살지 뭐~" 하는 식의 태도가 어쩌면 더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저는 거의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는 의문입니다. 언제나 통념이란 것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깨고 나가는 일을 머뭇거리게끔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삶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이나, 자기 자신에 관한 진지한 생각을 한 번 이상은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부딪치게 되는 난관은, 삶의 다채로움과 심층성 때문에 사색의 흐름이 막히고, 정리되지않으며, 그래서 느끼게 되는 막막함 정도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이 우리로 하여금 진지한 정신활동에 대한 편협한 통념을 갖게끔 하는 일이라고 여겨지며, 또한 그런 사색의 흐름을 막힘없이 차근차근 이어나갈 수 있게끔 해 주지 못했던 교육에 관한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 책은 그런 인식을 바꾸는 데 하나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볼까요?
깊이를 '종'이라 하고 넓이를 '횡'이라 할 때, 상식적으로 우리는 종과 횡의 만남은 한 점에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횡은 결코 한 점에서 만나는 개념이 아닙니다. 수학적으로 말해서 종과 횡은 각각 y축과 x축으로 설명할 수 있고, 그 두 점의 만남을 (0, 0)의 좌표를 갖는 "원점(原點)"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 원점은 오로지 x값이 0이고, y값이 동시에 0일 경우에만 발생할 수 있습니다. 임의의 x값과 y값이 만나는 무수히 많은 점의 집합을 면(面)이라 부르며, 그 면 상(上)에서 어떤 특정한 원칙에 따라 x값과 y값이 만나서 이루는 점의 집합을 우리는 선(線)이라 부릅니다. 그 원칙은 방정식이 되겠지요.
우리의 삶을 말해볼까요?
세상에는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60억이 넘는 삶이 있습니다. 삶은 선도, 평면도 아닙니다. 입체입니다. 그것도 무수히 많은 입체의 교차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고작 x와 y로 이루어지는 방정식 하나로 삶이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종과 횡, 즉 깊이와 넓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형태로 이미 상존하는 것이 삶이란 점입니다. 우리는 살아감 자체로 깊이와 넓이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단지 그것이 끔찍하리 만큼 복잡한 방정식에 의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복잡한 방정식을 한 번에 다 풀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작은 x와 y를 놓고 이루어지는 평면 위에서의 선으로부터 이루어짐이 마땅해 보입니다. 실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까운 문명의 산물들로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x와 y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단순한 방정식에 비유될 수 있겠습니다.
김용석 교수가 제시하는 방정식은 우리에게 친근한 부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영화, 만화, 스포츠, 문학 등, 우리 주변의 문화산물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문화비평서' 라는 딱딱한 카테고리에 대한 우리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먼저 일상적 대상들을 다루면서 이야기의 서두를 연 후, 그것을 바탕으로 저자는 우리 모두, 즉 인간의 생활양태로 접근해 들어갑니다. 무척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그와 함께 호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렵고 골아픈 화두에로 접근하는 그의 화법은 시종일관 비전문적이고 명료하며 간략한 문장을 통해 별 거부감 없이 독자들에게 다가섭니다.
인간의 생활양식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그는 다시 거시적인 문제로 눈을 돌립니다. 사회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각 분야가 가진 문제점과, 그것을 개선하여 공생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식의 전환을 모색합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어떤 전략적, 전술적 전환을 꾀하기보다 그는 좀 더 근본적으로 우리가 인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사견이긴 하나, 이런 저자의 주장은 몹시 고무적입니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 인식에 관한 이 같은 주장이 많이 나오며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수록 인류의 미래는 밝아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 모두가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떤 생각을 갖게 된다 해서 세상이 바뀔 턱이 있나 하는 체념을 갖든지 혹은 미래를 위해서 내가 정신을 바꿔야겠다 하는 마음을 갖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 겠으나, 분명한 것은 우리 한 명 한 명이 현재를 살아숨쉬는 이 순간에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시간이 지난 후,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현재의 우리 족적이 역사가 될지 통사가 될 지 결정되겠으나, 후대의 그런 결정은 결국 후대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 맥락의 뿌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혹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용을 하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진 않습니다. 모두에겐 선택의 권리가 있으며, 그것은 각자의 고유권한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있어 좀 더 풍부한 시대에 관한 안목과, 자신에 대한 사색의 방법을 알게 된다면, 그 선택 자체가 더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선택의 풍요로움을 위한 이 책의 유용함은 의심할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
| < 앞강물, 뒷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딸라가라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 깊이와 넓이 4막 16장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는 시이다. 이시만 보더라도 무엇을 말하는지 무슨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안을까 싶다?!! 처음 이책을 보았을때 겉표지를 한참 동안을 보고 있었다. 밑줄 그어 놓은 단어들 손가락 하나를 피고 어딘가를 가리키는 모습, 작게 적혀 있는 해리포터에서 피버노바까지라는 부제로.. 평범하면서도 왠지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책 내용 또한 어렵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절한 해설(?)과 그림으로 엮어진 설명등 차분하면서도 편하다고나 해야 하는 걸까? 길들여진 야수, 알데르데고, 이상속 다른것의 존재의 설정, Virtual Reality, 쓰기, 치기, 처리하기, 이영도, 포플러, Http, 해리포터, 만화, 사진, 광고,무성영화, 유성영화, 피버노바....등등등 수없이 많은 예제들 무심코 지나갔던 말, 단어들. 글세 어쩜 위에 쭉 늘어놓은 단어들에 대해 다시 의문점과 아하!! 그렇구나!! 하는 뭐 그런거..... 만약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겊표지를 5분이상 한번 쳐다보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내 작은 느낌이다. |
| 지난 번에 이승환 교수님과의 대담(?)집을 읽고 난 후에 저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자의 생각을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일단 책 자체가 참 특이하다. 저자의 말 그대로 관객 참여를 위한 아고라(agora)를 만든 느낌이다. 그가 철학자이면서 문화와 관련된 부분을 전공했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나는 책의 첫머리 나오는 '혼합의 시대'에 관한 그의 정의부터 꼼꼼히 읽었다. 중간중간에 그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들도 잘 훑어 보았다.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재밌다. 비유하자면, 마치 홍세화 선생님이 수십년을 조국과 단절된 채로 살다가 갑자기 등장했던 것과 비슷한 아우라를 보여준다. 그러나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계속 읽어나갈수록 힘이 떨어지고, 지루해지는 감도 있다. 저자가 다방면의 소재를 융화하려는 것에는 감탄했지만, 그 이후에는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이다. 즉, 나의 생각으로는 '깊이'가 '넓이'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저자의 책이 많이 출판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좀 더 읽어보아야 할 것 같다. |
| 호평을 받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는 예는 별로 많지 않다. 책도 마찬가지다. 고전이라는 책이 가장 극단적이다. 모두가 입에 올리고 심지어 인용하지만, 실상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몇명이나 될지... 어줍잖이 고전까지 갈 것도 없다. 매일매일 출간돼 나오는 책들부터가 그렇다. 평론가의 호평이란, 나같은 얼치가 독자에게는 고통을 뜻하기 십상이다. 이 책에서 본 문장이지만, 서머셋 모옴이 이렇게 말했단다. 독서는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책을 읽기란 퍽 힘이 든다. 그동안 너무 쉬운 글들만을 읽은 것인가. 뒤늦게 인터넷 서점에 올라 있는 독자 서평들을 찾아 봤다. 후후, 묘한 안도감이란... 좋게 남겨놓은 글들이란, 대개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문장이다. 그리고 악평이란, 쏙쏙 들어오는 쉬운 문장이다. 그렇다고 나 역시 과감하게 악평의 대열에 합류하고픈 마음은 절대 없다. 힘들게 읽어가는 한 문장, 한 문장은 주옥같다. 필요 이상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적지 않지만, 결국 가는 지향점도 대개 분명하다. 제목처럼 4개의 대주제와, 16개의 소주제를 다루는 동안 저자가 그리려는 큰 그림이 뭔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문화에 관한 한 제목처럼 깊이와 넓이 그 자체다. 글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간단하다. 내가 잘 아는 분야의 글을 읽으면 재미있다. 그렇게 본다면 팔리는 책을 쓰는 법도 간단하다. 사람들이 잘 아는 분야의 책을 쓰면 된다. 그렇다고 주구장창 익히 알고 있는 내용만 써놓으면 그야말로 자원 낭비요 정력 낭비다. 비율은 대략 6 대 4 정도가 좋을듯 싶다. 즉, 새로운 내용은 40% 정도만 담으면 족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는 이 책을 준비가 안됐다. 나는 이 책에서 열거하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를 제목조차 처음 들은 것들이 많다. 특히 영화 얘기가 나오면 그냥 몇 단락을 건너뛰기 일쑤였다. 내게 영화란 매혹적이지만 어려운 주제였다. 얼마되지 않지만, 가까스로 이해한, 그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대목만으로 판단하건대, 이 책은 분명히 읽을만 하다. 별뜻 없이 사용하는 말 한 마디에 대한 의미 부여마저도 예사롭지 않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읽기는 지식 창조의 가장 본질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다양한 현상을 읽는 사람들은 읽기의 행위를 자신의 두뇌 작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포착하여 그것을 읽어내 갖가지 기호 및 말이나 글로(이점에서 읽기는 글쓰기로 이어진다) 표현하고자 한다. 즉 남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읽기'에 대한 이런 의미부여가 중요한 것은 '글읽기'와의 차이때문이다. "익기가 지식 창조의 방식이라면 글읽기는 인간과 지식 사이에서 지식습득의 방식이다." 해리포터에서 피버노바까지 모든 문화 현상을 포괄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현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결코 쉽지 않다. 나 같으면 그렇게 힘든 길을 택하지 않았을 법 한데, 저자는 일부러 애둘러 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스스로 답을 제시한다. "글쓰기의 변천을 꿰뚫는 화두가 '수정'의 문제라면, 오늘날 글읽기의 변화를 뀌뚫는 화두는 바로 '노력'의 문제다. '고치기'와 '애쓰기'가 없는 세상이 있다면 그건 패러다이스일 것이다." 요컨대 글읽기에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에 못지않은 글쓰기의 노력이 전제됐을 때의 얘기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결국 나는 글읽기와 글쓰기의 문제에만 천착하고 말았다. 문화 현상 전반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게 많았던 저자의 높은 뜻에 비하면 퍽이나 초라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나마라도 얻었음을 안다면 저자 역시도 기뻐하지 않을까. 내가 저자라면 그랬을거 같은데... |
| 저자가 이 책에서도 유토피아를 다루면서 지적하지만, 유토피아란 결코 존재할 수 않았기에, 않기에, 또한 않을 것이기에 자신의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유토피아적 접근이라 부른다면, 이 책에 대한 나의 관점은 벌써 드러나버린 셈이다. 저자 김용석이 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은 미래 문명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용해시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현대 문명-특히 디지털로 대표되는 기술 문명-에 대한 그의 논의는 읽는 이의 두 눈을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단지 순간적이고 일시적으로 우리의 눈을 잡아 이끄는 가벼운 유혹이 아니라 곰곰히 곱씹어서 소화시켜야 할 정도로 그 속이 꽉 차 있는 것임에도 틀림없다. 특히 저자는 이 책의 전체적 주제와 알맞도록, 전체적인 내용 전개에 있어서 과거-현재-미래의 관계를 두루 살핀다. 단지 현재의 문화가 아니라 그것이 형성된 계기, 그리고 변화의 계기로서의 과거와 함께 지금의 우리의 삶이 가져올 미래의 삶에 대한 책임까지도 현재의 삶과 연결시키면서, 책의 제목처럼 깊이와 넓이를 갖추려고 노력한다(주로 넓이 쪽에 주목한 것이 사실이지만). 또한 그러한 논의들은 가장 우리와 가까운 문화들 속에서 논의된다. 예를 들어, 펜글씨에서 타자기, 그리고 지금의 워드 프로세서와 앞으로의 하이퍼 프로세스로의 변화가 우리의 삶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 지를 밝히는 등 말이다. 그의 글쓰기의 매력은 이처럼 우리의 가장 가까운 것들에 대한 가벼운 논의 속에서 무게가 꽤 나가는 핵심을 담아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참으로 알차고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미래 그리고 현재에 대한 논의 속에서 무수히 많은 문화적 타자가 형성된다. 왜냐하면 앙가주망이라는 논의 속에서도 어느정도 드러나듯이, 그는 사회의 구조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는 타자들(예를 들면, 계급적 타자들)에 대해서는 의도되었든, 또는 무의식적으로 피해가는 듯한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논의 속에서 부르주아적인 기름기가 흐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나의 지나친 비약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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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단순한 삶'과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지상 명령(?) 이 동맹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이 문명 발달에 반감을 갖게 된 때부터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단순한 삶=자연속의 삶"이란 등식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순한 삶과 자연 회귀가 누구에게나 가능할까?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단순한 삶을 찾아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회사주나 회사의 권력을 갖고 있는 최고 경영자, 아니면 피고용인일지라도 그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 기술의 소유자거나 뛰어난 브레인들이다. 그들은 제멋대로 해도 해고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못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괜히 단순한 삶을 흉내냈다가는 그 다음날로 해고될 것이 뻔하다. 아니면 경제적 부를 축적해 두어서 아예 일 않고 은둔할 수 있는 사람이다(최소한 니어링 부부처럼 학식과 명망이 있어서 강연과 인세 수입이라도 있어야 한다. 19세기의 소로우도 당시 부오한 집안 출신이었고 생활에서 그 덕을 보았다) 서민들은 단순한 삶, 자연속의 삶을 실현할 꿈도 꾸지 못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귀농'이 아닌 '전원 생활'을 즐길 수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전원 생활을 하려면 힘겹게 농사라도 지어야 한다.
다들 원론적인 얘기들만 떠드는 세상에서, 현실적인 대목을 만나니 고개도 끄덕여지고.....단 하나, 농사를 짓는 것을 힘겹게 여기냐 아니냐는 당사자에 따라 달라질 테니, '힘겹게 농사라도 지어야' 이 대목에서의 논리만 좀 허술할 뿐...... 아는 분이 무주로 들어가 애들은 시골학교 보내고 농사도 지어 가면서 사신단다. 그 분은 농사가 주업은 아니다. 공무원이다. 그러니 그 분도 생계를 보장받은 '단순한 삶'을 사시는 셈이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영화 '행복'에서처럼 삶을 위해서 시골에서 살며 농사나 짓는 경우는 내 주변 현실에서는 보기 힘들다. 그리고 나 역시 서울을 버리고 딴 데 가라면....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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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김용석 선생님의 새 책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팬이 되어 버렸다. 이번에 나온 <깊이와 넓이=""> 또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과연 넓고 깊게 알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선생님의 화두답게 이 책에는 심오한 이론에서부터 매우 개별적인 이야기거리까지 총 망라되어 있다. 그래서인가 글 읽기가 예전의 책들에 비해 조금 쉬워진 기분이 들지만 글의 연결이 이어지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인문적 소양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과학기술을 다룬 글에서 과학이나 기술 자체를 지나친 기술전체주의로 비판하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즉 인문사회적 입장에서의 과학기술 비판만 다루고 있을 뿐 과학기술 내부의 논쟁거리는 조금 소홀히 다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미덕이 더욱 많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김용석 선생님의 다음 책을 기대해 본다.깊이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