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중예술이라는 다서 생소한 단어를 너무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힘겨루기에서 밀렸지만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다수의 "뽕"의 기운이 넘치는 우리 주위 문화를 잘이해할수 있게 된다.수업시간에 누누히 말씀하셨던 "북극성" 혹은 "존재의 만남"이 일어나는 모든 문화에 대해 예술이라고 말하고, 조금은 말하기 꺼렸던 것들,,,,품위의 동네가 아니라 꺼렸던 느낌들을 아주 말끔히 없애주었다. 교수님이면서도 모든 장르를 넘나들면서 요즘 신세대인 나보다도 더 자세히 아시는 모습에도 또한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자신이 잘모르고 혹은 무시해 왔던 분야들에 대해서도 읽으면서 아,,,이런면이 있구나 할수 있는것이다., 또한 "뽕"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것들의 밥상차림, 잘받아 먹을 수도 있고 혹은 지나칠수도 있지만,, 만들어 차려놓은 밥상들...그래서 보는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밥상들에 대한 얘기또한 인상깊었다. 교수님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으로, 다시금 이 책을 통해 그 강의의 감동이 나오는 거 같았다. 이 책을 읽게 되면 그냥 좋아하기만 하던 어떤 것들에 대해서 좀더 애정이 생기고 잘 알수 있게 될것이다. 그리고 문화전반에 대해 따스한 시선의 이해를 보내줄 거 같다. 이 책과의 존재의 만남을 기대한다. |
| ^^.. 먼저 저는 서울대학교에서 이 책의 작가이신 박성봉 교수님께 직접 [대중예술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습니다. 수업에서는 이 책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더욱 풍요롭고 다채로운 대중예술에 대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접 박성봉 교수님께 수업을 들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보시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대중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실 수 있을 겁니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품끼'와 "뽕끼!!"의 예술들.. 흔히 전문가들 눈에는 대단한 예술작품으로 보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저게 무슨 예술이야', '저거 유치원생이 그린 그림아니야'. 혹은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겠다'.. 뭐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소위 품위의 예술품들에 우리는 당당하게 대중예술의 이름으로 도전장을 던집니다. 아니.. 예술이면 다 예술인가. 어디 하루 날잡아서 그것도 큰 맘 먹고 미술관이라도 방문해야 볼 수 있는 그런 그림들, 조각품들만이 예술은 물론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일상 속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예술이겠지요. 8초짜리 광고 속에서 우리는 예술적 미를 느낄 수 있고, 지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도 예술을 체험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친 일상을 뒤로 하고 버스에 올라 밤 늦게 집에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잔잔한 대중가요 가사들이 내게 감동적인 시적 운율로 다가올때 우리는 "그래,, 이런게 바로 예술이지~"라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는, 그림, 사진,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시트콤, 전자오락, 만화 등 다양한 대중예술의 분야들을 꽤 섬세한 감각을 가지고 살펴보며, 우리가 친근하게 느끼는 작품들, 영화 등을 통해 그 미학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화장실에 앉아서 학문아닌 항문에 힘쓰며 심심풀이로 보아도 좋은 책.. 그러면서도 우리 일상 속에서 접하는 많은 부분들에 예술적인 눈을 띄어주는 책.. 바로 이 책입니다. 괜시리... 이해할 수 없는 추상화 앞에서 후까시 잡기 보다는, 토요명화를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대중적 감수성을 지니신 분들께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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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집어든 책이었지만 읽어내려가면서 열정이라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을 찬찬히 읽다보면 박성봉 교수가 삶을, 그리고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예술과 계속 친하게 지내다보면 제일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이건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건데. 이건 나와는 아주 낯선 것인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경향은 점점 뚜렷해진다. 좋아하는 것만 좋아하고,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 물론 가끔은 그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새로운 것이 일상을 모두 날려버릴 정도의 충격을 주면서 내게 올 때.(나는 이럴 상태를 가르켜 '뻑간다'라고 표현하지만) 근데 문제는 새로운 것이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시 위에서와 마찬 가지로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갈수록 더. 하지만 박성봉 교수는 그러한 자극들에 대해 진지하고 성실하게 자신을 열어놓고 맞이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소중하게 배운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을 열어놓기. 다만 글 자체가 강의하는 것처럼 너무 산발적으로 쓰여져 있는 까닭에 읽어나가면서 정리하기가 어렵다는 점. 그리고 지나치게 다양한 분야를 다루면서 필연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 그 두 가지 점이 아쉽다. ps. 언젠가 나도 박성봉 교수의 수업을 듣고 싶다. 얼마나 열정적인지. [인상깊은구절] 모든 폐인이 다 달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폐인을 겪어보지 않은 달인은 없다. |
| 박성봉 교수의 예술 강의 정말로 감칠맛 나게 잘 들었다. 어렵고 따분하고 졸립고 지겨운 것, 그러나 문화인인척 하기 위해 좋아하고 즐기는 척 해야 하는 것이 내게 예술이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책도 사보고 인사동에 화랑가도 기웃거려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도 모두 물거품,,, 도대체 뭐가 뭐지 재미가 없다. 왜 그럴까? 이 책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예술은 허세가 아니다. 나를 장식하기 위한 악세사리도 아니다. 예술은 끌리는 대로 즐기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고 진정 즐기고 싶은 장르를 찾아 즐기고... 내 느낌을 마음대로 표출하는 거... 그런게 예술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예술은 장르는 무엇이지 무엇이었던가? 영화... 그중에서도 에로 영화?! |
| 쉽게 마음 편하게 읽힐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페이지 넘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북극성, 존재의 만남, 엄마의 밥상' 등 예술에 붙여진 관사들은 '대중예술'과 '진짜 예술'에 대한 구분을 쉽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뽕끼'라는 말을 중요시합니다. '뽕끼'란 '존재의 만남, 일상에서의 작은 감동, 상투성, 소통성, 자극적 양념' 사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재미와 감동, 북극성이 뜨는 것, 생명심의 유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무르녹은 '뽕끼'라는 것이 대중 예술에 있다고 합니다. 어렵습니다. 정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문학, 영화, TV, 음악, 만화 등 각 장르에 적용되어지는 과정들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천편일률적 상투성, 만만함,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통성, 자극성(성·폭력·환상·공포·엽기·눈물·웃음), 느슨함, 응어리' 등을 뽕끼의 구성요소로 제시합니다. 뽕끼의 작용방식도 분석하는데, 가령 대중영화나 소설(뽕끼적 내러티브)에서는 상투성과 긴장의 역동적 관계를 주목합니다.(문화일보 북리뷰 인용, 2002.2.22) 결론이 뻔한 드라마와 영화를 볼 때 시청자들이 갖는 감정들의 발현이 과연 동일한 매커니즘에 적용되는지 사실 의문이기도 합니다. 긴장감과 역동성이 주는 어긋남이 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보게 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대중예술에 대한 주장들에 계속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수많은 작품과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는 나옵니다. 만화를 다룬 7장에 가면 상투적이고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과 개성, 재능과 훈련된 기술로 무장한 만화들이 보기로 나옵니다.(알라딘 독자서평 인용, 2002.8.11.) 분야와 장르를 망라한 광범위한 지식, 다각도의 시각, 그에 따르는 저자 특유의 새로운 해석 방법에 대해서 딴지걸 마음은 없습니다. 깊이와 넓이에서 그 극단을 가늠할 수 없어 경외심마저 듭니다. 그런데 박봉성의 '분노의 바다', 大介寺澤(다이스케 데라자와)의 '미스터 초밥왕'은 결코 만만히 읽을 수 있는 만화가 아닙니다. 눈으로 읽는 거야 뭐 어렵겠습니까마는. 보기로 든 만화나 제가 제목을 적은 만화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대등하거나 그 이상의 자료 수집과 천착을 거쳤을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대중 예술'이란 익명의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대량생산품'(yes24 lozwein님 서평 인용, 2002.4.16)이라는 개념에 동의합니다. 특정한 계층을 향해 발사되는 특별한 예술이 아닙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작품들이 과연 대중을 위한 일반적 예술일런지. 이런 대중 예술에는 따뜻함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없습니다. 존재의 만남을 위한 자리도 없습니다. 대중예술은 '존재의 만남' 類를 애초부터 원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많은 사람을 현혹시키면 됩니다.(yes24 위 서평 인용) 시청률, 동원 관객, 발행 부수 등 계량화에 의해 한 번에 많이 팔아먹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고도 그렇습니다. 정말 1회용이죠. 그러나 광고를 예술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문화대기권에는 들어있습니다. 이 책의 모순의 일각이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광고에는 '뽕끼'가 들어있습니다. 예술적 만남은 찾아보면 보입니다. 하지만 광고 자체는 따뜻한 밥상도 존재의 만남이 목적이 아닙니다. 지나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로 포장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상업성을 감추기 위해 갖가지 '뽕끼'의 방법이 사용되니 광고도 대중 예술의 당당한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뽕끼'에 대한 정의를 접하면서 왜 '광고'에 대한 언급은 없는지 의문입니다. 광고, 특히 TV-CF를 30초의 예술(방영시간에 따라 20', 15'도 있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말입니다. 힘겨루기의 대상에도 못든다는 것일까요? 광고인이기에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해 봤습니다. 결국 저자는 또하나의 구분짓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저자가 말하는 '뽕끼'를 머금지 못한 수많은 '대랑 생산품'들은 어느 동네로 가야 할지 방황하고 있습니다. '문화 대기권'이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인간적인 관계, 생명심, 일상 속의 맥락으로서의 예술. 8장에 나옵니다. 이쯤에 오니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대중문화'가 아니라 '대중예술'이 대상이었으니 '예술 대기권'이 나와야 하는데 '문화 대기권'으로 급작스런 비약을 합니다. 문화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기에 예술과 문화를 등가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문화 대기권 - ①품끼의 예술(북극성, 존재감, 어머니의 밥상 등등의 예술), ②대중 예술(뽕끼 그윽한 예술), ③품끼도 뽕끼도 없는 예술(사이비 감동, 5분의 감동), ④그외(쓰레기들?) 교통 문화, 경기장 관람 문화, 행락 문화... 물론 이때 문화라는 낱말이 제대로 부려 쓰여진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교통 예술, 경기장 관람 예술이라고 할 수 없으니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책의 오류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의도는 없습니다. 8장의 내용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니까요. 우리 아들과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 생활 속에 불러 쓰는 예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꾸 예술을 가져다 쓰자는 저자의 의견과 상통하는 행위입니다. 저자는 더이상 무엇이 예술인가 물어서는 안되며 질문은 예술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기능과 효과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에 자꾸 눈길이 갑니다. '다른 시각으로 예술보기'에도 동의합니다만 대중 예술을 갈음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저자마저도 갈피가 잡혀 있지는 않은 듯 합니다. 어줍잖은 결론으로 서평을 마무리합니다. "'문화 대기권'내에는 굳이 '품끼'와 '뽕끼'의 예술, 그도 저도 갖지 않은 것들이 함께 숨쉬고 있다. 차려진 밥상 위의 많은 국과 밥, 반찬이 있다. 잘못 만들어진 반찬은 일감해 보고 버려질 수도 있다"고. |
|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의 예술? 할일없이 서점가에 돌던 중, 예쁜 표지에 독특한 제목이 눈에 띈다. 거기에 부제-박성봉 교수의 대중문화 읽기에 눈이 가자, 나는 덥석 손을 내밀어 그 책을 잡는다. 대중문화에 대한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의 비평서는 고급예술을 논하고 있지, 그들의 말대로라면 '천박한' 대중문화를 논하지 않는다. 그런데 '교수'의 대중문화 읽기라니. 첫 반응은 교수가 알면 얼마나 알라구! 라는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그 비웃음이 절로 수그라든다. 만화, 영화, 대중문학, 온갖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대중문화 읽기'에 놀란다. 교수의 대중문화 읽기에 대한 선입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심 많은 나에게, 몇가지 의아심이 드는것은 어쩔 수 없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뽕끼>이다. <뽕끼>란 존재의 만남, 일상에서의 작은 감동, 상투성, 소통성, 자극적 양념 사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재미와 감동, 북극성이 뜨는 것, 생명심의 유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뽕끼는 대중 예술에서 발견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박성봉 교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저자는 정말로 <뽕끼>가 대중예술 모두에 담겨 있다고 믿을까. <존재의 만남="">이 대중예술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을까. 대중 예술이, 어머니의 밥상처럼 저자에게 그런 따뜻한 만남을 가져다줄까. 대중예술은 익명의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대량생산품>이다. 따뜻함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그 속엔 없다. 존재의 만남을 위한 자리도 그 속에 없다. 대중예술은, 대중 문화는 존재의 만남 따윌 원하지 않는다. 그저 많은 사람을 현혹시키면 되는 것이다. 한 번에 많이 팔아먹으면 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저자가 말한대로 5분의 재미와 감동이 있을 지라도, 따뜻한 밥상도 존재의 만남도 없다. 저자가 예로 든 대중 영화, 만화는 <뽕끼>가 가득한 예술들이다. 그것은 <대량생산품>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이다. 지금 욕을 먹는다 할 지라도, 지나고 나면 번연의 '천로역정'처럼 <고급예술>로 분류될 것들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예로든 작품들은 대중예술의 극단에 서 있어, 자신의 존재감을 강렬히 표출하는 작품들이다. <일반적인> 대중 예술은 그 정도의 뽕끼가 없다. 나를 <존재의 만남="">의 자리에 초대하지도,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도 않는다. 저자는 <뽕끼>가 가득한 작품과, 그저 <대량 생산품="">에 지나지않는 보통의 작품들을 혼동시켜 대중예술을 맘껏 즐기라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는 고급예술의 품위성 - 그 지독하고도 편견에 가득찬 - 에 대한 경고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구분해야만 한다. <대중>을 위한 예쑬과 <개인>을 위한 예술. 후자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것이 품격이건 뽕끼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분위기가 중요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로 <존재의 만남="">을 위한 자리를 준비하고 있는지, 작가의 따뜻한 손길이, 섬세하고도 치열한 손길이 담겨있는지다. 그 이외의 작품들은 무시해도 좋다. 아니, 무시해야만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기만한다.존재의>개인>대중>대량>뽕끼>따뜻한>존재의>일반적인>고급예술>대량생산품>뽕끼>대량생산품>존재의>뽕끼>뽕끼>뽕끼> |
| 쉽게 마음 편하게 읽힐 것이라는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한장한장 넘어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북극성', '존재의 만남', '엄마의 밥상' 등 예술에 붙여진 관사들은 '대중예술'이 무엇이고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 결론도 잘 지어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뽕끼'라는 말입니다. '뽕끼'란 '존재의 만남, 일상에서의 작은 감동, 상투성, 소통성, 자극적 양념' 사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재미와 감동, 북극성이 뜨는 것, 생명심의 유발,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이 무르녹아 들어간 '뽕끼'라는 것이 대중 예술에 있다고 합니다. 어렵습니다. 저자의 정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학, 영화, TV, 음악, 만화 등 각 장르에 적용되어지는 과정들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천편일률적 상투성, 만만함,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통성, 자극성(성·폭력·환상·공포·엽기·눈물·웃음 7가지), 느슨함, 응어리' 등을 뽕끼의 구성요소로 제시합니다. 뽕끼의 작용방식도 분석하는데, 가령 대중영화나 소설(뽕끼적 내러티브)에서는 상투성과 긴장의 역동적 관계를 주목합니다.(문화일보 북리뷰 인용, 2002.2.22) 그렇지만 대중예술에 대한 주장들에 계속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수많은 작품과 아티스트들이 이 책에는 나옵니다. 만화를 다룬 7장에 가면 상투적이고 세속적이라기보다는 작가의 끊임없는 노력과 개성, 재능과 훈련된 기술로 무장한 만화들이 보기로 나옵니다.(알라딘 독자서평 인용, 2002.8.11.) '대중 예술'이란 익명의 대중을 위해 만들어진 '대량생산품'(yes24 lozwein님 서평 인용, 2002.4.16)이라는 개념에 동의합니다. 특정한 계층을 향해 발사되는 특별한 예술이 아닙니다. 대중 예술을 논하기 전에 '대중'이란 자체에 대한 의미 규정이 있어야 하겠지만 여기에서 논의될 문제는 아니므로 넘어갑니다. '뽕끼'에 대한 정의를 접하면서 왜 '광고'에 대한 언급은 없는지 의문입니다. 광고는 현재의 이야기이며 우리를 둘러싼 문화·사회·역사적 환경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광고는 어느 한구석에도 끼어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힘겨루기의 대상에도 못든다는 것일까요? 저자의 '뽕끼'의 정의에 투영해본다면 광고의 수많은 스토리와 이미지들에서 그 '뽕끼'를 수백번도 더 찾아볼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다시 본류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런 대중 예술에는 따뜻함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없습니다. 존재의 만남을 위한 자리도 없습니다. '존재의 만남' 류를 애초부터 원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을 현혹시키면 됩니다.(yes24 위 서평 인용) 시청률, 동원 관객, 발행 부수 등 계량화에 의해 많이 팔아먹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광고에 눈을 돌리면 확실해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장의 인쇄 광고, 또는 30초 TV-CF를 보고 단 5분의 재미와 감동이 있을지라도, 광고 자체는 따뜻한 밥상도 존재의 만남이 목적이 아닙니다. 지나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로 포장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천박성을 감추기 위해 갖가지 '뽕끼'의 방법이 사용되니 광고도 대중 예술의 당당한 반열에 오를 수 있습니다. 광고인이기에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해 봤습니다. 문화 대기권 - ①품끼의 예술(북극성, 존재감, 어머니의 밥상 등등의 예술), ②대중 예술(뽕끼 그윽한 예술), ③품끼도 뽕끼도 없는 예술(사이비 감동, 5분의 감동), ④그외(쓰레기들?) 결국 저자는 위와 같이 또 하나의 구분짓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문화 대기권'내에는 굳이 '품끼'와 '뽕끼'의 예술, 그도 저도 갖지 않은 것들이 함께 숨쉬고 있다. 차려진 밥상 위의 많은 국과 밥, 반찬이 있다. 잘못 만들어진 반찬은 일감해 보고 버려질 수도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