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는 Salman Rushidie도, J.G. Ballard도, Iain M. Banks도 아니다. 지금까지 스물 네 권에 달하는 [디스크월드] 시리즈 소설을 발표한 테리 프라쳇(Terry Pratchett)이다.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영국 사람들을 웃겨온 더글라스 아담스(Douglas Adams)의 뒤를 이어 여전히 굳건하게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프라쳇의 인기가 미국에서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점은 일견 기이하다고 할 정도이다. 아니나 다를까 몇 해 전, 미국에서는 이 상품성이 높은 작가를 미국 전역에 걸쳐 대규모로 소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쉽게도 생각만큼 쉽게 프라쳇이 미국에서도 베스트셀러 작가로 떠오르지는 못한 것 같다. 완전한 실패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좋게 말해서 그냥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정도라고 할까. 그룹 Abba의 인기가 미국에서 결코 로켓처럼 솟아오르지 못했던 것만큼 이는 꽤 의아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이는 프라쳇의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판타지가 그러나 결코 바보스럽지 않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Monty Python 식 코미디가 어이없지만 뭔가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면이 있는 것처럼, 프라쳇의 작품들은 완전히 말 장난에 기운 채 표류하는 미국의 Friends나 The Third Rock from the Sun 등의 시트콤과는 또 다른 웃음을 선사한다.
닐 가이먼은 [샌드킹]이라는 만화로 (실은 대본을 직접 쓰고 만화가를 잘 섭외한 덕에) 젊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작가이다. 그는 얼마 전 [American Gods]라는 판타지로 휴고상을 수상했으며 뉴욕타임즈의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프라쳇은 미국에서 여전히 언더독에 불과하던 가이먼과 용케도 1990년 책을 함께 썼다. 세상의 종말을 다룬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세상의 종말 직전 11년을 다룬) 판타지 소설 [Good Omens: the Nice and Accurate Prophecies of Agnes Nutter, Witch] 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두 가지 상충된 느낌에 시달린다. 첫째는 킥킥 웃음을 솟아오르게 하는 대단한 상상력과 풍자의 힘이다. 두 작가의 필력 앞에서 도시 계획도, 요한계시록도,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도 어느새 요절복통의 코미디로 탈바꿈한다. 중간 중간 드러나는 미국과 미국적인 것에 대한 교묘한 냉소에 나는 가슴까지 시원해지곤 했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를 누비는 작가의 투철한 사색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특히 지난 6천년간 일종의 지구 책임자로 인간사회에 섞여 살면서 서로 세상을 천국과 지옥으로 만들고자 애써온 라이벌인 동시에 친구인, 대천사 Aziraphale과 악마 Crowley가 나누는 "선(good)"과 "악(evil)"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은 이 작품을 시답지 않은 코믹 판타지의 경지에서 진정한 걸작의 반열로 훌쩍 순간이동시킬 정도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렇게 전갈의 꼬리침처럼 날카롭게 풍자하고 웃음을 선사하는 작품을 100퍼센트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계속 느끼고 또 깨닫는다. 문장 이곳 저곳에서 튀어나오는 엄청난 문화적 레퍼런스에 어리둥절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치루어야 하는 대가인지도 모른다. 모든 독자가 모든 사회와 문화에 깊숙히 침잠하고 또 폭넓게 노출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디선가 뜬 구름처럼 테리 프라쳇의 작품의 출판여부를 가리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아무쪼록 범문화적인 웃음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국에 살지 않았어도 영국 문화를 잘 몰라도 문장 하나 하나에 차고 넘치는 위트와 풍자를 99퍼센트 잡아낼 좋은 번역자를 통해 프라쳇을 비롯한 여러 훌륭한 SF 및 판타지가 한국독자에게도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인상깊은구절]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사탄의 아들이 탄생하고 이를 바꿔치기함으로써 정확히 11년 뒤 세상의 종말을 획책하려는 악의 세력이 아차차 아기를 잘못 바꿔치기하는 바람에 일이 꼬이기 시작했을 때 이를 눈치 채고 당황한 두 천사들의 (악마도 원래는 천사였다는 점을 상기하라) 대화이다. 아지라페일이 이렇게 비꼰다. "사악함은 언제나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는 법이지. 악이란 것이 궁극적으로 부정적일 수 밖에 없잖나. 그러니 명백한 성공의 순간에도 사악함은 결국 추락할 수 밖에 없는 걸세.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세심하게 계획하고, 아무리 모든 실패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바로 그 내재적인 죄악의 성격 때문에 결국은 사악한 일을 꾸민 당사자에게 되돌아가고 마는 법이라네. 일이 풀리는 중간 중간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여도, 결국 맨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일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거지. 부정과 불법이라는 암초에 걸려 망각의 망망대해로 그만 침몰해버리고 마는 걸세." 크라울리는 그 말을 곰곰히 되새기는 듯 했다. "에이, 그게 아니야."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기해도 좋은데 말이야, 그건 다 무능력해서 그런거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