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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개혁, 사회 변혁, 이런 과제들에 생각만 하고 있고 답이 진정 없는걸까? 대안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이 과제들을 수행할 수 있는지 방법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원하는 대중이 없다면? 변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원하는 대중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의 저자는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는 학생들은 어떤지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을 짚어 본다. 학교는 곧 사회로 나아가는 기점인데 학력, 학벌이 권력 구조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티켓인 셈이다. 그 의미는 교육이 계급을 결정짓게 되는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는 요인이 되며 누구라도 차지하고 싶은 성공을 위해서 교육은 경쟁 구도로 갈 수 밖에 없다. 부모가 가진 부와 권력이 오롯이 자식에게로 세습되다시피 하는 현상이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 이런 순서로 가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것의 이유를 가장 우선적으로, 학교 다닐 적에 공부하지 않았던 탓으로 먼저 돌린다. 임금 구조가 잘못 되었고 전반적으로 오류가 있음을 생각해 보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고통 받기만 하는 대중들은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질문하지도 않는다. 대중이 이러할 진대 이 사회의 기득권자들이 잘못된 부분을 고치려 하고 치열한 경쟁 사회나 잘못된 교육 정책을 고칠 이유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런 잘못된 정책 하에서의 최대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큰 목소리로 용기 내어 저자는 말하고 있다.
교육 과정에서 가르쳐야 하고 학생들은 배워야 할, 그리고 알고 있어야 할 역사적인 순간들은 배제시키고 일제 강점기 하의 고난과 고통만 부각하는 교과서나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배려나 존중을 마치 수험서를 참고해서 인성을 주입시키는 것과 같은 교육방법은 나중에 어떤 사회인으로 길러져서 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 될 지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 분위기가 바로 그 결과임을 말한다. 노동자가 대부분인 사회에서 노동 조합을 끔찍히 싫어하는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고 단체 행동은 엄연한 불법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가? 대단한 학교 교육이 가져온 성공적인 모습일 뿐이다.
나도 학교란 그런 곳인줄 알고 살았다. 지켜야 할 규칙들, 왜 지켜야 하는지 지키라고 하니까 이유도 모른 채 그냥 따랐을 뿐이다. 그 많은 학생들도 모두 나 처럼 지시와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하니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따랐을 뿐이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았던, 선량하다 못해 너무나 교육에 익숙했고 길들여진 생활을 했다. 그렇게 자라 온 사람들이 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다. 남들이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것이 당연한 삶인 것 처럼 그렇게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통제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없이 말 잘 듣는 양순한 시민 교육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경쟁에 내 몰린 아이들이 노예처럼 살기 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너도 나도 대학을 향한다. 직장이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 곳 만을 바라보며 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고통받으며 노예의 삶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암울함을 느끼면서 대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저자는 묻고 있다.
:::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왜 대안없는 비판이냐고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먼저 질문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이 고통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다. (...) 내 고통의 뿌리에 닿지 못한 질문은 쉽게 방향을 잃어 버린다. 정확한 질문은 내 고통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서 나온다. 그렇게 질문이 정확하면 답은 이미 도처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대중이 질문하기 시작할 때 세상은 변할 것이다. (4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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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깊고 다양하게 경험을 다룬 이야기도 있다. 사실 근거 자료를 이야기 한 것도 있지만, 무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교육이 쉽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실성이 없거나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크게 보면 삶도 마찬가지겠지만 교육은 인내와 관심과 계속된 질문과 대답이 연속된 일이다. 아이는 분명 알고 싶고 해결하고 싶고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질문들을 한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성실히 해주는 선생님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업무가 많은 선생님은 근무 시간이 정해졌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의 질문을 회피하는 경우, 선생님들이 학생에 대한 편애와 그 선생님의 성격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 가만있지 마라, 질문하라, 비판하라, 저항하라! 그래야 희망할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다. " 보통 책을 읽을 때, 머리글은 나중에 읽던가 넘길 수도 있는데 『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는 아주 꼼꼼하게 읽고 싶은 욕심에 머리글 부터 읽었고 차례 첫번째 < 학교의 거짓말, 인성 >을 세 장도 못 넘겼는데 다 읽을 자신이 없었다. 감정이 벅차고 나의 일상과 아들의 행동과 말이 담겨 있어서 혼란스러워 책을 넘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교육, 어떤 교육이든 현실이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3~4세 부터 대학생 성인까지 인성을 말하자면 나의 경험에 의하면 당황스러웠던 일들로 먹먹하다. 어린이집에서 교사가 아이들을 학대하는 것은 방송에다 인터넷에 시끄럽지만 아이들에게 맞은 교사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현실은, 사실은 많다. 선생님 꼬집고 물고 교구 던지고 의자도 발로 차고 밀고 침도 뱉고, 천사같은 4살 5살 아이가 철모르고 하는 행동이라고 감싸겠지만, 엄연히 인성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교사가 그 아이에 대해 많은 관심과 인내가 필요한 인성교육도 중요하지만 가정교육에는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학생, 부모, 교사 언제나 함께 소통하며 서로 이해하고 노력할 일이다. 누구에게 전담하거나 넘기려고만 하면 발전은 없을 것이다. " 입시에 반영하지는 않는다지만, 학생들에게는 이제 인성도 `학습`해야 할 의무가 되었다 " 수능 시험에는 출제되지 않을지는 몰라도, 수시로 지원하는 학생들에게는 필요하다.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수시 지원하는 학생들은 생활기록부에 기록되기 때문에 (배려), (책임감), (협력), (소통), (정직) 등도 중요시 여긴다. 정시로 수능으로만 지원하는 학생들은 생활기록부가 무용지물일수도 있다. 입시 방법이 다양화되면서 학생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 수시 지원학생들은 과목별 수행평가, 수업태도, 비교과는 물론이고 학교생활 전반에 걸쳐 종합적으로 3년을 잘 해야 원하는 학교 지원학과에 지원할 수 있다. 그러니 숨통이 막힐만도 하다. 학생은 공부만 하면된다는 말은 옛말이다. 동아리, 자율동아리, 봉사활동, 독서활동, 자율활동 등 스트레스가 참 많다. 서울의 좋은 대학, 학벌과 지방의 박사, 학력에서 유리한 것은 학벌이라는 말이 참 씁쓸하다. 고등학생들이 인서울 진학이 목표다. 그리고 장래 진로 희망은 나중일이다. 비참하기까지 하다. 학생들에게는 생활기록부는 보여지기 위한 서류다. 어떤 학생은 꼼꼼하게 일년에 5~7권을 읽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상을 받기 위해 50권을 읽는 학생이 있다. 각 과목의 수행평가에도 절절매고 시험 준비에 바쁜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알 것이다. 두께와 내용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대로 독서를 얼마큼 할 수 있는지 말이다. " 20년 교직 생활에서 내가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은 학교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것, 그리고 모두를 위한 교육은 불가능하고 중립의 교육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학생도 눈치가 있고 학부모도 경험했고 듣는 것이 있어 조금이라도 알것은 안다. 다는 몰라도 어렴풋이 공감을 한다. 고등학교 2학년 아이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읽기란 수월하다. 공감 투성이기 때문이다. 많은 학생, 교육자. 관련 공직자, 학부모 등 읽고 깨닫고 누구나 갖고 있는 용기를 꺼내 " 가만있지 마라, 질문하라, 비판하라, 저항하라! 그래야 희망할 수 있고, 길을 찾을 수 있다. " 라고 나도 외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간절한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불온한 책 읽기 >는 많은 생각과 가슴을 뜨겁게 하는 내용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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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제도의 문제와 불합리한 교육 현장의 모습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 학교는 학생들에게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것 일까? 규율과 통제 일변도의 제도적 학교의 문제, 아니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노예의 품성을 가진 아이들을 양산해 내지않고 순응자로서의 아이들이 아닌 학교 교육에 있어 질문없는 교육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지속된 역사와 같은 흐름을 질문하고 비판하며 저항하는 길만이 삶의 희망을 노래하고 길을 만들어 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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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제목을 보고 학생들과 하는 수업에서의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질문(발문)을 하느냐에 따라 학생들의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고, 수업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교사의 발문과 관련해서 다양한 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수업에서의 질문이 아니라, 학교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사회에서를 바라보는 시각을 갖자는 의미의 질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질문 없는 학교, 우리 사회의 축약판>은 학교에서 행하는 다양한 활동이나 교육적 목표들이 사실은 거대한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행해지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경쟁이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곳인 학교에서 무슨 인성을 이야기하며, 공부가 미래 직업의 결정 기준이 되고 학생의 성실성까지 판단을 하고, 나랏님도 어쩌지 못하는 가난이 게을러서 그렇게 되고 공부를 못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요즘 사회다. 서로 이해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어느 새 이러한 일들이 고착화 되어 가고 있다. 사회적 편견이 학교에까지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많이 이야기되는 학교 폭력도 학교라는 장소에 한정되어 이야기할 수 없다. 가정에서의 정서적 관계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학교에서의 일이라며 학교에서 관리를 잘 못 했기 때문이라고 한정하고 있다. <질문 없는 사회, 우리 학교의 확장판>에서는 학교에서의 대부분의 일들은 사회적 질서라는 목적을 가진 기득권층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 교과서 때문에 그렇게 시끄러웠던 이유도 어떻게 기술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달라지기 때문이지 않을까? 학교 관리자들의 결정에 따른 교사와 학생들이 얼마나 잘 따른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학교에서 과연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들에게 민주시민의 자질을 기를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삶의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불온한 책 읽기>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다양한 책을 소개해 주면서 저자가 읽고 느꼈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한 전태일 평전, 정의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잘못된 사회적 현상을 미화하게 된 열녀의 탄생 등...
학교와 사회는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가 없다. 학교의 구성원이 넓게는 사회의 구성원이다. 기득권층의 논리로 이루어지는 교육적 목적을 어느 정도의 비판적 시선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질문을 함으로써 보다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있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보다 나은 미래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과 파멸을 단지 타인의 것으로만 격리하는 무감함이 바로 인성의 타락이고, 이는 단지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 경쟁 관계에서 과연 인성이 자랄 수 있을까? 서로 의지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어른들이 어떻게 해야 할까? *국가가 책을 독점하던 시대에 책은 당연히 국가 지배이데올로기를 전파하였다. -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조금은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겠다. 요즘의 언론은 더 잘 파악해야 하겠다. *자기의 언어를 갖지 못하면, 타인이 제시한 언어에 갇혀 철저히 타인에게 지배당하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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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학교 교사로서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꼬집고 있다. 특히 학교 안에서 동료 교사들에 대한 비판은 날이서 있다. 바르게 가르치고 본이되어야 할 교사가 울타리 안에서 조차 체제에 무조건적 순응과 비판의식 없는 사고의 부재로 인해 현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학교 운영상 일어나는 부조리한 부분에 대한 비판은 왜 우리나라가 교육의 부재 상태일수 밖에 없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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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전작인 ‘아주 작은 것을 기다리는 시간’의 개정 증보판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거친 문장을 다듬고 몇 편의 글을 교체하였다고 하니, 기존 책을 읽으신 분들도 새로운 내용만
찾아서 읽으시면 될 듯 합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이 책의 저자는 경북의 한 읍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기면서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계십니다. 질문과 대화가 오가는 수업으로
생각하고 비판하고 참여하는 시민의식을 익히기를 바라고 있으며, 이러한 개인의식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학생시절에 노예의 품성을 배웠고, 교사가
되어서 또 다른 노예를 성장시키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러한 교육 현장에 있는 교사로서의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책은 크게 세 주제로 구분하여 학교에 대한 내용, 사회에 대한 내용, 독서에 대한 내용으로 각각 여러 개의 소주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첫
시작인 학교의 인성, 공부 그리고 가난에 대한 거짓말의 내용은 누구나 공감하지만 바꾸려고 하거나 의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런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을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서울대 출신이 권력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임을 알고 있기에, 학교에서부터 우위에 있어야 성공한다는 인성을 배우고, 자신보다 못한 자들에게서 우월감을 얻으려는 학창시절의 모습은 가정에서 볼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란 것을 생각해
봅니다. 또한, 복종의 시대에 살아왔던 교사들에 의해 학생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복종을 강요하고 교칙과 교사의 권위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도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복종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질문이 넘치는 행복한 교실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마지막
장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독서에 대하여 저항이 필요하다는 내용, 새로운 나를 만들기 위한 고통이 있어야
하며, 급진적이고 불온해야 하는 독서가 인문학만을 강요하는 현 시대에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 할 숙제
같았습니다.
이런 선생님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명문대 진학만을 원하는
부모들은 싫어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상적인 생각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지만 어디까지의
행동이 적당한지 고민하게 만드는 대한민국이 안타깝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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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9 교사는 돈 잘 벌고 안정된 일자리? ―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 황주환 글 갈라파고스 펴냄, 2016.4.11. 15000원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일하는 황주환 님이 쓴 ‘자기고백 교육비평’이라고 할 만한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갈라파고스,2016)를 읽다 보면, 황주환 님 스스로 부끄럽다고 여기는 이야기가 곳곳에 흐릅니다. 이를테면, 여학생 뺨을 때린 이야기라든지, 또 아이들을 때린 일을 그만 잊어버렸는데 나중에 그 학생하고 만났을 적에 그 학생이 왜 저를 때렸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꾸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낱낱이 써도 될까 싶기도 한데, 이렇게 ‘자기고백’을 하기에 오늘날 이 나라 학교교육를 차근차근 짚고 바라보면서 비평을 할 수 있으리라고도 느낍니다. 왜 나는 그런 지도법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아마도 내 몸에는 그런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이미 몸으로 학습한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닌 까닭이다. (57쪽) 학교폭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톱만한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도, 그것을 승자의 특권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학교폭력은 더 이상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75쪽) 교사 황주환 님은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고 남한테 밝히기에도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까닭을 곰곰이 파헤칩니다. 황주환 님이 어릴 적에 학교에서 교사한테 늘 맞고 자랐으니 ‘맞고 자란 몸’이 버릇으로 굳었고, 이 버릇대로 ‘교사 자리에 서고 나서는 때리는 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몸으로 학습한 것(57쪽)”은 마음보다 늘 앞섰다고 털어놓아요. 그러니까, 학생으로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폭력 아닌 사랑으로 배운 일’이 몸에 남지 않은 터라, 아무리 ‘머리에 이론이나 지식’으로 ‘학생을 사랑으로 가르치자’고 하는 말을 넣는다고 하더라도, 이런 이론이나 지식이 제대로 샘솟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폭력을 안 쓰고 부드러운 말로 타이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동료 교사’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무척 낯설었을 뿐 아니라 ‘나는 왜 저렇게 할 생각을 못했나?’ 하고 부끄러이 여겼고, 황주환 님으로서 부끄러운 몸짓을 ‘이제부터 새로 배워서 털어내자’고 다짐했다고 해요. 아이들이 교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란다. 국어 교과서에 소원 세 가지를 적어 보라는 예비 문제에, 돈 많이 벌기, 돈벼락 맞기,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적는 것처럼, 오로지 돈을 반복하는 학생들이 교사가 되고 싶단다. (80쪽) 공부를 못한다고 자기를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지 자기 몫을 주장하고 곳곳의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행하는 이 수업이 바로 연대의 사례라고, 내 믿음으로 말한다. (107쪽) 《왜 학교는 질문을 가르치지 않는가》라고 붙인 책이름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시골 읍내에 있는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이 ‘자기고백’을 하면서 밝힌 대목에서 이 책이름에 얽힌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드러납니다. 학교가 ‘질문을 가르치지 않’을 때에, 학생은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는 삶’을 몸에 익히지 못합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체제와 정치와 사회가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따르는 ‘기계’가 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묻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아이들은 ‘돈 많이 버는 안정된 일자리’를 바란다고 합니다. 또는 ‘돈 많은 애인 만나기’를 바란다고 해요. 아이들은 교사라고 하는 자리를 ‘돈 잘 벌고 안정된 일자리’로 바라본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황주환 님은 아이들 머릿속에 ‘돈’만 남도록 되고 만 우리 사회가 참으로 무시무시할 뿐 아니라 앞길이 캄캄한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찾으려는 삶이 아니니 앞길이 캄캄하지요. 꿈을 꽃피우고 사랑을 나누려는 아이들이 아니라 돈만 바라보는 아이들이 된다면 더없이 무시무시하지요. 아무리 인성교육이나 도덕교육을 정부에서 시키려 한다고 하더라도, 막상 사회에서는 돈이 없는 사람이 억눌리거나 짓밟히는 모습이라면, 아이들은 오직 돈만 바라볼 수밖에 없으리라 느껴요. 왜 우리는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주장하지 못할까. 그러니까 왜 우리는 부당한 지시에도 충직하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 않던가! (168쪽) 교사 황주환 님은 이녁이 학생일 적에 ‘저항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고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교사로 학생을 마주하는 오늘날에도 학교 틀거리와 교과서 얼거리에서는 ‘저항하는 법’을 가르칠 수 없다고 털어놓습니다. 예나 이제나 학교 안팎에서는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학생’만 기르려 한다고 털어놓습니다. 교사를 비롯해서 ‘어른 자리’에 있다는 이들은 학생과 어린이와 젊은이가 ‘공손한 태도’이냐 아니냐만을 따진다고 털어놓습니다. 어린이와 젊은이가 바라는 ‘정당한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교사나 어른이 너무 적다고 털어놓습니다. 문득 높임말이라고 하는 말을 떠올립니다. 높임말이란 서로서로 높이려고 쓰는 말입니다만, 어느 때에는 낮춤말로 탈바꿈하기도 해요. 한쪽만 높이도록 하는 높임말일 적에는, 다른 한쪽은 어느 한쪽을 낮추는 말이 되어요. 어느 한쪽은 나이가 많대서 높임말을 받고, 높임말을 받으면서 나이가 어린 사람한테 반말(낮춤말)만 쓸 적에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공손하게 높임말을 안 쓴다’고 하면 아무리 ‘바른 말(정당한 요구)’을 한다고 하더라도 ‘버릇없다’고 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귀를 닫기 일쑤예요. 왜 교사는 학생들의 정당한 요구조차 들어주지 않을까? 왜 교사는 학생의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를 논의하기보다 학생이 공순하냐 아니냐에 민감할까? (172쪽) ‘묻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묻지 않는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 또는 생각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학교가 아이들을 ‘묻는 사람’으로 키운다고 한다면, 학교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키운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학교가 아이들을 ‘묻지 않는 사람’으로 길들이려 한다면, 이는 아이들을 ‘생각을 잃어버린 채 고분고분하기만 한 기계’로 길들이려 한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시골학교에서도 도시학교에서도 아이들이 스스로 묻고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골교사 한 사람뿐 아니라 도시교사 누구나 아이들한테 ‘생각하기’를 가르치고 ‘생각하는 사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묻는’ 사람이 되어서, 새롭게 꿈을 꾸고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빌어요. 2016.5.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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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벗어나면 아이들은 생기가 돈다. 평소 무기력하게 있던 아이들이 눈부신 몸짓을 발산한다. 존재감 없던 아이들도 저혀 다른 모습으로 생동한다. 한 번도 따뜻한 시선을 받아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있던 아이들조차 무대에서 친구들과 함께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보여줄 때, 우리 교사들도 경탄해 마지 않는다. 아이들이란 무대에 따라 이토록 아름답게 약동한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이 자기를 온전히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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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는 '전대(前代) 미학에 대한 비판'으르 동력으로 발전한다. 사회사도, 과학사도, 예술사도 그랬다. 그래서 현재와 과거에 대한 고찰과 성찰은 인류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통념에 대한 비판이 언제나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 질문이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질문이 사라졌다. 아니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무차별적인 공격이 자행되었다. 질문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성찰도 사라졌고, 따라서 발전에 대한 동기와 동력도 사라졌다. 민주주의적이지 않을 정도로 획일하된 사고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학교에서조차 질문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이 아닐지라도 질문은 공부하는 사람에게 공부의 목적과 이유가 구성되는 의미있는 절차이다. 오직 받아적기에만 급급한 우리의 단면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대답을 요구하는 중세사회에서 벗어난 지 이제 백 년여가 지났을 뿐인데, 과연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질문이 아닌 정형화된 대답만을 요구하는 것인지 조금은 추상화 수준이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흐릿하게나마 인식하게 된다.
앞으로 우리의 내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 후속세대에게 질문의 여지를 만들어 줄 필요가 우리에게 존재함을 다시금 느끼게 한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