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50%
  • 리뷰 총점8 0%
  • 리뷰 총점6 5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오규원 시 두 편
"오규원 시 두 편" 내용보기
1. 봄에 대한 상상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오규원 시 두 편" 내용보기

1. 봄에 대한 상상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오규원,

 

 

오규원의 에는 언어 속에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존재가 나온다. 언어와 사물 사이에 펼쳐진 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인이 언어 속에서 추구하는 자유라는 게 언뜻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물의 본질에 민감한 시인들은 무엇보다 이 언어라는 매개때문에 저주받은 시인이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사물이 순간적으로 내보이는 진실을 시인은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직관은 말 그대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순간을 시인은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만, 직관과 언어 표현 사이에는 항상 시간이 개입한다. 돌려 말하면 언어는 시인이 직관한 진실을 추상화하여 표현한다. 사물의 구체성에 언어라는 추상이 개입되는 것인데, 사르트르라는 철학자는 그래서 언어를 사물 살해라는 끔찍한 말과 연관 짓기도 하였다.

 

오규원은 어떤 방식으로 언어에 자유를 부여하고 있을까? 시인은 우선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내 언어 속에세운다. 사물을 언어 앞에 세우는 게 인간 인식의 출발점이라는 걸 시인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표상(表象)’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에는 사물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성의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오규원이 언어 속에 있는 사물에 자유를 주려면 바로 이 표상의 과정부터 깨뜨려야 한다. 그는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라고 쓰고 있다. 언어의 자유는 사물들의 자유로 곧바로 이어진다. 시인이 만든 언어공간은 사물들을 추상화하는 세계가 아니라, 사물들이 즐겁게 뛰놀 수 있는 살아 있는 세계로 표현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시인은 자신이 만든 언어공간에서 말 그대로 신()이 된다. 정확히 말하면 조물주(造物主), 즉 사물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 문학적으로 표현하면 언어를 통해 상상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된다. “내 언어라는 말이 암시하는바,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만든 세계에 사물들을 불러들인다. 그곳에서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구르면 된다. 그가 만든 언어공간에서는 사물에 쓸데없이 의미를 붙이지 않는다. 의미는 속박이다. 속박을 받는 사물들이 자유롭게 뛰어 놀기는 힘들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담벽은 시인이 만든 언어공간에는 없다. ‘담벽이라는 사물은 있지만 담벽이라는 글자=의미는 없는 것이다. 의미로부터 해방되었으니 담벽은 얼마나 자유롭겠는가? 담벽은 이곳에서 별이 되고, 개똥이 된다.

 

봄은 자유다.”라는 시인의 선언은 그러므로 이러한 언어공간을 전제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꽃 피고 싶은 놈 꽃 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싶은 놈은 반짝이고, 아지랑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과 전혀 닮지 않았다. 시인이 만든 세계에서는 누구나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아지랑이만 아지랑이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아지랑이가 될 수 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 피는 지옥이라고 하자.”라는 시인의 제안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가 지옥이라고 했으니 지옥이라고 하면 된다. 이때 지옥은 의미가 없는 말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지옥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옥나라라고 표현해도 상관없다. 의미가 없는 언어들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 말이나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규원은 이렇게 언어에 내재된 관습적 의미로부터 언어를 해방하려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언어에 부여된 의미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봄은 지옥이다.”라는 비유가 일상세계로 나오면 언어 관습에 매인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1930년대 독자들에게 오감도(烏瞰圖)라는 이상한 세계를 제시한 이상(李箱) 시인을 생각해 보라. 이상은 자신의 시가 시대의 주류를 형성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대 독자들은 오감도연작을 쓴 이상을 미친놈으로 취급했다. 언어 관습이란 게 그만큼 질기고도 질긴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 관습이 바뀌는 것을 그 어느 일보다 부담스러워 한다.

 

오규원은 이 시의 끝 부분에서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라고 외치고 있다. “내 말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라는 시적 진술에 담겨 있다.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언어로 만들어진 관습의 바깥으로 뛰쳐나가 자유롭게 뛰어 놀자고 시인은 주장한다. 언어 안에서 언어의 바깥을 바라보는 사유는 사실 모더니즘을 경험한 시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려면 역설적으로 언어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현실이 상상이 되는 세계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와 다르지 않다.

 

봄을 표현하는 말이 자유든 지옥이든 아니면 개똥이든, 그것은 의미를 중시하는 현실에서만 중요할 뿐이다. 그 현실을 벗어난다면 봄은 하늘을 나는 돼지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언어를 쓰는 사람이 언어에 매이지 않는다면 언어 바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오규원이 나아가는 상상의 길이다. 그의 시가 이후에 어떻게 바뀌었든, 이 시에서 오규원은 언어 밖을 상상하는 조물주가 되어 사물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의미에서 벗어난 사물들이 자유다라고 외치며 마음대로 뛰노는 세상을 그는 내 언어의 뜰에 아름드리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2. 흔들리며 사는 인생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만의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 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 오규원, 살아 있는 것은 흔들리면서-순례 11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흔들린다. ‘끊임없이라는 말을 새겨보자. 흔들리지 않는 생명은 없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게 아니다. 바람은 단지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살아 있는 것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흔들린다. 시인의 말마따나 살아 있는 것은 흔들려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 튼튼한 줄기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튼튼한 줄기에 무성하게 잎이 달린다. 잎이라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잎이 흔들리는 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잎이 흔들리는 건 자연(自然)’이다. 자연 속 생명들은 스스로흔들림으로써 살아 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일과 스스로 흔들리는 일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2연에서 시인은 바람은 오늘도 분다.”라고 이야기한다. 바람이 부는 건 자연 현상이다.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바람 또한 자연스럽게 불고 그친다. 바람이 불면 잎이 흔들린다. 오늘도 바람이 부니 오늘도 잎은 흔들린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 흔들림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수만의 잎이 있어도 흔들림은 제각기 겪는다. 살아 있는 생명은 저마다 흔들리면서 더불어 사는 존재들이다. 들판에는 온갖 생명들이 저마다 자신의 생명을 증명하며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로 표현한다. 슬픔과 고독과 고통은 생명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슬픔이고, 고독이고, 고통이란 걸 시인은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 들판을 채운 생명들만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다른 곳에 사는 생명들 또한 바람에 쓸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바람에 쓸리는 일이 외부에서 오는 시련이라면, 자기를 헤집는 행위는 내면에서 겪는 아픔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바람에 쓸리는 행위에 이미 자기를 헤집는 행위가 들어 있다고 봐도 좋다. 바람에 쓸리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바람은 바람의 길을 따른다. 바람은 자기의 길을 갈 뿐, 다른 생명이 가야 할 길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바람에 쓸리는 생명은 그러므로 자기의 길을 가야 한다. 바람에 쓸리며 자기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 속에서 생명은 끊임없이 성장한다. 바람에 쓸리고, 자기를 헤집으며 생명들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눈다. 자기 의지로 몸을 가누며 생명은 바람과 마주한다.

 

바람과 마주하는 일은 이렇게 보면 제 생명을 펼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바람을 피하면 생명은 제 몸을 펼칠 수 없다. 바람과 맞서야만 생명은 제 몸을 가누는 힘을 얻는다. 살아 있는 몸을 증명하려는 생명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피하지 마라라는 시구는 정확히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살아 있는 몸에게 바람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바람이라는 타자 속에 생명이 원하는 힘이 있다. 바람이 곧 생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흔들리는 생명의 미학은 바람에 내재된 생명의 힘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시인은 빈들에 서서 바로 이 진실을 깨닫는다. 빈들에서 생명을 향해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말 그대로 거센 생명을 잉태하는 힘을 의미한다. 사방이 뚫린 들판에서 어떻게 바람을 피할 수 있겠는가? 바람이라는 운명과 기꺼이 맞서는 생명만이 흔들릴 수 있음을 시인은 이를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있다. 살아 있기 때문이다. 돌려 말하면 죽은 자는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니 죽은 자의 몸은 금방 썩는다. 흔들린다는 건 그러므로 썩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어진다. 고인 물은 썩는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몸은 무엇보다 흐르는 물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바람은 불고 잎은 흔들린다. 바람과 잎은 살아 있다는 말이다. 바람이 부는 들판에서 우리 또한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시인은 우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라면 이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순례연작시의 한 편인 이 시에서 시인은 흔들리며 사는 삶을 순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순례는 한 곳에 정주하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순례하는 사람은 이곳저곳으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들판에 설 수도 있고, 산꼭대기에 오를 수도 있다. 어디에 있든 그는 끊임없이 흔들려야순례를 계속할 수 있다. 인생이라고 해서 다른 게 아니다. 순례가 곧 인생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순례의 어디쯤에 해당될까? 하긴 시인에게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생명이 끝날 때까지 순례를 해야 한다. 움직이고 또 움직여야 한다. 끊임없이 흔들리며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삶이 우리네 인생이다. 우리는 바람 앞에서 늘 흔들리고 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유일한 진실이다. 시인은 그 진실 앞에서 거침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려고 한다. 흔들린다는 것은 곧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o*****s 2018.09.16. 신고 공감 4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오규원 시 전집_오규원
"오규원 시 전집_오규원" 내용보기
‘오규원 시 전집’ – 오규원   누군가의 시, 일생에 걸쳐 쓴 시들을 한 번에 다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에 이번에 처음 도전했다. 시인을 알게 된 이유는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라는 시 덕분이었다. ‘정채봉’씨의 책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 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오규원이라는 시인의 시 전집을 산 것이었다. 사실, 인터넷에서 그의
"오규원 시 전집_오규원" 내용보기

오규원 시 전집’ – 오규원

 

누군가의 시, 일생에 걸쳐 쓴 시들을 한 번에 다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에 이번에 처음 도전했다. 시인을 알게 된 이유는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라는 시 덕분이었다. ‘정채봉씨의 책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이 시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오규원이라는 시인의 시 전집을 산 것이었다. 사실, 인터넷에서 그의 이 시는 많이 찾아볼 수 있었지만, 어느 시집에 수록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전집을 샀다.

시인은 1971년에 첫 시집을 펴냈다. 내가 태어나던 해이니, 참으로 오래 되었다. 그 시절의 삶은 참으로 팍팍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시인은 시대를 비판하는 시들을 대부분 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집이 출판된 시기가 그 뒤로 갈수록, 현실을 비판하는 시보다는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한 시들의 비중이 높아져 갔다. 그리고 시는 읽기에 조금은 편해졌다. 하지만 역시나, 시인의 시를 읽는 사람이 완벽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저, 시라는 것은 내가 느끼는 만큼만 느끼면서 좋아하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시인의 시집 2권으로 갈수록 좀 난해해진다. 그래서, 결국 큰 재미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원했던 그 시는 찾았다. 그런데, 이번 시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제목이 바뀌었다.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으로. 그리고 이 시는 시인의 1995년작 동시집 나무 속의 자동차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시인의 일반 시들은 좀 이해하기 난해했다면, 이 동시집은 참 아름다웠다. 역시나 아이들을 위해서 쓴 시인지라 시인 개인의 내적감정의 외적 표현보다는 주로 자연현상을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언어들로 썼다. 그런데, 예전 사람인지라 주로 자연을 이야기하면서 많은 풀과 새들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도 잘 모르는 것들이 많다. 우리의 아이들은 이런 시들을 읽게 되면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시라는 장르가 우리에게 다가오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시인이 말하는 단어(어떤 사물이건 생물이건)를 알지 못하는데, 그 내용이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싶다. 요즘의 아이들은 요즘 시인들의 언어로 감동을 받아야 하려나. 그렇다면 노트북, 아이패드, 윈도우8, 아이폰, 갤럭시, 카톡 같은 것들이 시의 주제가 되어야 되겠다는 씁쓸한 생각도 든다.

하여튼 내 마음에 들었던 그 시 한 편을 옮기고 독후감을 마친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마지막 두 연이다. ‘다가오는 겨울이/섭섭하지 않도록 //  하루 한 걸음씩 한 걸음씩/마중 가는 일이다

사람들이 모두 싫어할 수도 있는 추운 겨울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한 걸음씩 마중 나가는 것이 오늘이 할 일이란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이 진리이고, 막을 수 없는 세월의 법칙인데, 그런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운해하지 않도록 마중을 나간다니. 나도 나이를 먹는데, 나이 먹는다고 서운해하지 말고, 오는 나이를 한 걸음씩 마중 나가서 서운해하지 않도록 배려할 일이다.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씨앗은 씨방에

넣어 보관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 있는 바람은

잔디 위에 내려놓고

 

밤에 볼 꿈은

새벽 2시쯤에 놓아두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가을은 가을 텃밭에

묻어놓고

 

구름은 말려서

하늘 높이 올려놓고

 

몇 송이 코스모스를

길가에 계속 피게 해놓고

 

그 다음 오늘이 할 일은

 

다가오는 겨울이

섭섭하지 않도록

 

하루 한 걸음씩 하루 한 걸음씩

마중 가는 일이다

 

 

2015. 06. 15

 

l******2 2015.06.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