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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불전쟁부터 냉전기까지 독일군 작전술에 대한 고찰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보불전쟁부터 냉전기까지 독일군 작전술에 대한 고찰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내용보기
양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보여준 전투력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실로 경이적인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에서 독일군은 전략적으로 양면 전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격파하여 거의 패배직전까지 내몰았습니다. 2차대전 초반의 화려한 승리, 특히 대전 말기까지도 독일군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항복하는 순간까지 선전하였으며 종종 국지적인 반
"보불전쟁부터 냉전기까지 독일군 작전술에 대한 고찰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내용보기

양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보여준 전투력은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실로 경이적인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에서 독일군은 전략적으로 양면 전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러시아를 각개격파하여 거의 패배직전까지 내몰았습니다. 2차대전 초반의 화려한 승리, 특히 대전 말기까지도 독일군은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항복하는 순간까지 선전하였으며 종종 국지적인 반격을 가하여 연합군에게 호된 일격을 먹이기도 하였습니다. 독일의 동맹군들은 변변찮은데다 전의도 없었다는 점에서 독일군은 사실상 혼자서 거의 전세계를 상대로 싸웠습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거대한 제국도 이런 모습을 보여준 예는 없었죠.

작전술 또는 전술적 차원에서 보여준 독일군의 전투 효율성은 실로 놀라웠으며, 이른바 '임무형 전술'을 통한 현장 지휘관의 적극적이고 융통성 있는 지휘 방식은 상대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영국군과 소련군을 훨씬 적은 병력으로도 유린하였습니다. 군사 후진국이었던 미군은 적군인 독일군을 통해 전투를 배웠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의 군사 전문가들은 적극적으로 독일군에 대해 연구하고 이들의 방식을 자군에 걸맞게 꾸준히 변화 발전시킴으로서 걸프전에서 진정한 세계 최강의 군대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군대가 미군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군대의 스승이 다름아닌 독일군인 셈이죠.


그러나 한편으로, 독일군의 화려한 승리에 과도한 서포트 라이트가 집중되면서 그 뒤에 있는 수많은 병폐와 모순은 간과되기 쉽습니다. 독일은 어쨌거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며 초반의 놀라운 성과는 대전쟁에 기여하지 못한 채 금새 흩어졌고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이에 대해 2차 대전이 끝난 뒤 할더와 구데리안, 만슈타인 등 명망있는 장군들은 회고록에서 자신들의 패배가 결코 전략적 오류가 아닌 히틀러와 그의 아마추어 측근들이 만들어낸 재앙 탓이라면서 모든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이들은 독일 육군의 우수성과 뛰어난 참모제도를 강조하였고 나치 정권에 반대하면서도 한편으로 전문 군인으로서 기계적인 효율성으로 작전을 계획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서구 학자들 역시 이들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면서 "독일군의 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 실제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들은 대전 초반 히틀러의 승리에 제일 먼저 열광하였고 성공에 눈이 먼 나머지 국가적 역량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히틀러가 저지른 실수는 대부분 이들 또한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대전 내내 파벌 싸움에 매달렸으며 광대한 전구에 대한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전략의 수립, 총력전에 대한 계획, 군수 병참의 준비, 각 전구에 대한 지휘 통제 역량에서 그야말로 졸속적이고 한심한 역량을 보여주었습니다. 뒷날 이른바 "발키리 작전"이라 불리는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던 슈타우펜베르크 중령은 참모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독일 최고 사령부에 대해 "가장 우수한 장교들이 만들어낸 그 어떤 조직보다 더 무능하다"라고 혹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독일군은 근본적으로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결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길찾기 출판사에서 지난달에 출간된 게하르트 P.그로스 대령의《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 보불전쟁부터 양차대전을 거쳐 핵전쟁 시대까지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와 작전술을 분석한 책입니다. 또한 역자는 칼 프리저 교수의 명저인《전격전의 전설》을 번역한 진중근씨로 국내에서는 매우 보기드문 독일군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양차대전에서 독일군의 가장 큰 특징을 꼽는다면 첫째로, 공세적이며 둘째로, 속전속결과 단기 결전, 세번째가 군수 병참이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 두번째 요인과 세번째 요인은 서로 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있는데 자원이 빈약하고 자급자족 역량이 없는 독일로서는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군수 병참을 뒷받침할 수 없기에 자연스레 속전속결을 추구하게 되었고 당연히 방어적이기보다 공세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공세적 교리와 속전속결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되면서 역으로 군수 병참에 대한 투자는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 점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따지기가 애매할 정도입니다.

어쨌거나 독일군은 단기적인 공격력은 그야말로 대단하지만 공격력에 비해 병참이 뒤따르지 못하다보니 깊숙이 진격할수록 공세 역량은 금새 바닥나 버리고 속전속결에 실패할 경우 수세에 몰리기 일쑤였습니다. 최고 지휘관들은 이런 구조적인 한계를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더 신속한 승리에 집착하였고 이를 위해 자신의 역량은 과대평가하고 상대의 역량은 과소평가합니다. 바바롯사 작전에서도 소련군에 대해 히틀러만큼이나 얕보고 있었던 할더는 몸소 체감한 뒤에야 비로소 "그들은 우리가 10개 사단을 괴멸시키면 그날 바로 10개 사단을 만들어낸다"라면서 경악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독일군은 결코 완벽한 군대가 아니었으며, 선진적인 면도 있었고 상식 이하일만큼 부조리함과 병폐도 가진 두얼굴의 군대였습니다. 보불전쟁기 독일군은 작전적 사고의 놀라운 발전에 비해 병참 능력은 대단히 열악했으며 실상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서 변화가 없었습니다. 보불전쟁은 물론이고, 2차대전기까지도 독일군은 충분한 차량을 확보할 능력도 없었지만 그런 노력조차 게을리하면서 대부분의 부대는 말과 마차에 의존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군사적 승리에만 집착했으며 군사가 정치에 종속된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오히려 정치를 군사에 종속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지도자의 리더쉽 결여와 독선, 무능함으로 인하여 정부와 군부는 서로 제대로 협조하지 않았고 실상 따로 놀았습니다. 그럼에도 전투에만 주목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보여준 수많은 결함은 고스란히 덮어졌습니다. 군부는 야전에서 적군만 격파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단순한 논리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못한 채 2차대전까지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이 책에서는 이른바 독일군 리즈 시절인 대몰트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독일군의 승리와 패배, 신화와 허상에 대하여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고찰합니다. 저자는 독일군이 작전적 사고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해 왔음에도 정작 "작전"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즉, 이들은 막연하게 야전에서 이기는 것만 강조했을 뿐, 정작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 지휘 역량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주먹구구식이었으며 상황이 예측불허로 돌아갔을 때 최고 지휘관들은 허둥대었고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는 대신 경직된 대응을 고수하였습니다. 지휘부의 전쟁 지도가 모호하다보니 각 전구는 따로 놀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2차대전 당시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역이지만 실상 다른 전구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롬멜 신화 벗기기"라면서 그의 독단성과 병참에 대한 경시를 문제 삼지만, 실상 이는 당시 독일군이 내포하고 있었던 구조적 모순을 간과한 채 시스템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잘못으로 전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야전에서의 완전한 승리만 추구하다보니 외교의 가치는 무시되어 아무리 전투에서 승리하여도 전선은 끝없이 확장되기만 할 뿐, 상대와 정치적으로 타협하지도 못했고 제3국가가 적의 진영에 가담하는 것을 막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거만한 태도는 동맹군과의 효과적인 협력을 가로막았으며 독일 장군들은 동맹군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거나 한낱 괴뢰군대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는 동맹군들에게 심한 굴욕감을 주었고 서로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은 자신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려고만 했을 뿐, 정작 동맹군과의 연합작전에 필요한 지휘 시스템은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롬멜과 이탈리아군의 갈등과 모순도 심각했지만 동부전선은 훨씬 더 심각하였습니다. 1942년 남부 러시아에 대한 청색 작전 당시 가뜩이나 열악한 철도망을 독일군이 일방적으로 독점하고 루마니아, 이탈리아, 헝가리 등 다른 동맹군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 이로 인한 갈등은 물론이고,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한 동맹군은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손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또한 동맹군의 의견은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협력적 관계가 아닌 수직적 관계를 강요하는 독일군의 태도는 동맹군의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고, 전세가 기울자 망설임 없이 총부리를 돌렸습니다.


1차대전의 패배 이후 연합군에 의해 해체된 독일군은 명망있는 일부 장성들을 중심으로 패인을 분석합니다. 이들은 독일군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고루하고 구태의연한 군 내부의 주류 세력들에 의해 비판받고 외면당합니다. 엘리트 장교단에게 독일군은 여전히 "무적의 군대"였으며, 패전의 책임은 자신들의 오판이 아니라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의 책동, 자원의 부족, 사회적인 동원 능력의 한계, 카이저의 무능함, 승리를 향한 의지의 부족, 슐리펜 계획을 무시한 소 몰트케의 실책 따위로 전가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 과정에서 독일군 내부에서 보여준 논쟁을 언급하고 있는데 상당히 눈여겨 볼만 합니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뒤, 동독은 국방군을 나치 군대라 하여 철저하게 배척한 반면 서독은 군을 재건하면서 구 국방군 출신의 실무자들을 대거 영입하였습니다. 이는 양면의 효과가 있었는데, 동독군은 자립 역량을 가지지 못한 채 소련군의 괴뢰군대에 머물었지만 서독은 과거 뛰어난 역량과 경험을 갖춘 지휘관들을 확보함으로서 나토의 주요 전력으로 거듭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과거의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과거 국방군 시절의 교리로는 미소가 주도하는 핵전쟁의 양상에 대응하는데 한계를 드러내었습니다.  


독일군의 신화 벗겨내기와 관련해서는 플래닛 미디어에서 나온 제프리 메가기 교수의《히틀러 최고 사령부》, 칼 프리저의 《전격전의 전설》 등 이미 시중에도 여러권의 책이 나와 있습니다. 이 책 또한 추천할 만 하며, 독일군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만 편집 상태가 썩 좋지 않고 가독성이 나쁜 점이 단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해당 출판사에서 좀 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차대전 매니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a*****1 2016.05.27.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_ 패인에 대한 냉철한 고찰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_ 패인에 대한 냉철한 고찰" 내용보기
위의 도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은 독일의 군사학 전문가인 'GERHARD P. GROSS 게하르트 P 그로스' 가 저술한 도서로써  1940년 6월 22일, 단 40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렸기에 전세계적으로 극강의 군사력을 가진 군대로 알려진 독일국방군에 대한 신화를 해부하듯 정밀하게 고찰한 도서이다.1940년 6월 22일, 단 40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린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독일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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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도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은 독일의 군사학 전문가인 

'GERHARD P. GROSS 게하르트 P 그로스' 가 저술한 도서로써  

1940년 6월 22일, 단 40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렸기에 

전세계적으로 극강의 군사력을 가진 군대로 알려진 

독일국방군에 대한 신화를 해부하듯 정밀하게 고찰한 도서이다.



1940년 6월 22일, 단 40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린 

극강의 전투력을 자랑했던 독일국방군을

종합적, 객관적인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위의 도서를 통해 개인적으로 느낀 패인을 살펴보면,


1. 보병부대 이동속도 간과

2. 보급 중요성 간과

3. 소련의 잠재력(광할한 영토, 병력 동원력) 외면

4. 육·해·공군 간의 권력다툼 등 지휘부의 분열

5. 전후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고 현실외면 


을 꼽을 수 있는데 

종합적으로 당시 독일군의 상황과 그들의 실수에 대해 

세밀하게 살펴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일의 지리적 특성이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항상 골칫거리로 느껴졌을 양면전쟁의 가능성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독 분단을 통한 지리적·전략적 변동을 지켜보면서 


'환경에 지배당하는 인류'를 흥미롭게 설명한 

도서 『총, 균, 쇠』(Jared Mason Diamond 저) 가 연상되기도 했다.


이처럼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기에 좋은 도서라고 평하고 싶지만,


사소한 오타가 제법 많이 보이고,

대중에게 생소한 군사문용어('종심', '회전', '작전적 사고' 등)에 대한 

별도의 용어 해설이 없으며,

관련 자료(작전도, 지도) 를 내용에 맞게 배치하지 않고 

단순히 도서 전반부에 몰아서 배치하는 등


편집적인 면에선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출판사에서는 참고해서 편집의 단점을 보완해주길 바라보며 감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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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군이 재탄생된 것은 

한국전쟁의 결과와 부족한 전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서방 연합군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독일군은 1955년 11월 12일 재창설되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군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나토의 일원으로 서독 연방군 창설을 승인했다.


이때도 합참의장의 명칭을 총참모장

(Chef des Generalstabes, Chief of the General Staff) 이 아닌 

국방감찰감(Generalinspekteur) 이라고 했는데 

이는 군(軍)에 대한 민(民)의 감시관 역할을 위해, 

문민통제를 확실히 하여 

다시는 군국주의가 대두되지 않도록 한 노력이었다.


독일 의회는 엘리트 군대로 인한 

과도한 군사우월주의의 폐해를 방지하고 군내 인권보호를 위해 

연방하원 의장 다음 서열에 

국회 국방관할관(Wehrbeauftragte des Bundestags) 을 운용하고 있다.




     p 005, 006

        추천사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ㅡ 예 준장 _ 주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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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문제는 

정치적 ㅡ 사회적, 전략적 그리고 국가의 총제적인 경제적,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적, 인류적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


그러한 차원에서 특히 독일군의 작전적 '신화'의 허구성과 

독일이 20세기에 세계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했지만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논리적인 원인을 찾고자 했다.




     p 016

        한국의 독자들에게

           역사학 박사, 육군 대령 ㅡ 게하르트 P. 그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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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적 사고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이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 우선 

'작전'과 '작전적' 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정의하고 

동시에 2000년대 초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된 

전쟁 지휘의 세 영역ㅡ 전략, 전술과 작전 ㅡ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개념들의 활용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이 개념이 인류의 다양한 일상생활에서도 사용되고 있고, 

두 번째는, '작전'과 '작전적'이라는 군사용어가 때로는 혼란을 초래하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정확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연구를 위한 가설로서 작전을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작전이란 독립적인, 지리적으로 

주어진 상황과 적의 움직임을 지향한, 

세계 대전 시대에서는 통상 육, 해, 공군의 합동 하에 

전략적인 목표 달성을 위해 

최초에는 전략적 행동으로 개시되어 

종국에는 전술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개념 설정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전쟁 지도는 적 수준

전투에서의 부대지휘는 적 수준

단일 전역에서의 대부대 지휘는 작전적 수준으로 설정한다.






그렇다면 작전적 사고란 무엇인가?


'작전'과 '작전적'의 변화무쌍한 관념 때문에 

궁극적, 포괄적인 정의는 불가하다.


그 개념은 전술과 전략 사이에서 혼동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포괄적인 의미로 작전적 사고는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해 

단일 전역에서의 대부대의 지휘와 전개에 관련된 

시간, 공간과 전투력과 같은 

특정한 요인 또는 상수에 대한 고찰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p 043 ~ 045

           2. 전술 - 작전 - 전략의 정의


==============================




독일 육군에서의 

작전적 사고와 전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소는 

바로 공간, 시간 그리고 전투력 이었다.


이 세 요소들이 모든 작전의 근본조건을 형성하고,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 사회적 변수를 통해 결정되는 

작전적 사고의 중심에 있었다.


공간, 시간 그리고 전투력은 상호 간에 영향을 끼치며, 

특히 시간과 공간은 

전쟁 행위들이 그 안에서 벌어진다는 의미에서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병력과 무기체계 및 최신의 정보와 통신체계 등은 

모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운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작전들은 전술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항상 시공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또한 작전적 사고과정에서 이 두 변수를 결정할 때는 

통상 아군의 '의지'보다 적의 '행동의 자유'에 근거를 두곤 한다.




     p 048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




첫 번째 다룰 주제는 '시간'을 지배하는 공간이다.

(※ 원문에는 "시간이 의존하고 있는 '형상'이다."

라고 되어 있으나 '공간'으로 번역하였음.)


모든 지리적 공간은 시간뿐만 아니라 형체를 통해 

구체화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따라서 군사지리적 조건은 작전계획과 실행의 결정적인 요인이다.


불과 수십 년 전까지 장군참모장교들은 

공간을 단순히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인류지리학적 관념에서 종교적, 사상적인 환경을 포함한 

인간생활의 총체적인 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결국 작전적 수준의 공간과 전술적 수준의 지형 분석은 

모든 군사적 상황평가의 출발점이다.



     p 048, 049

        공간과 시간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




독일 육군의 지도부는 결심수립과 전쟁수행에 있어서 

물리적 ㅡ 물질적 공간이라는 조건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총참모부 내에 총참모장 직속으로 존재한 

대규모의 측량 담당 부서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이 부서의 실무자들은 

독일군 총참모부의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을 위한 

실질적인, 지리전략 조건들을 분석한 결과 

'독일의 위치가 유럽 정중앙이라는 점이 

독일의 전략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제는 한 국가의 지리전략 상황이 

자연과학적인 공간으로만 정의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경제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상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공간은 영원불변한 요인이 아니다.


인간이 건축을 통해, 이익을 위해 변화시킬 수 있고 

그 이익은 정치적 평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공간은 

교통의 요지 또는 문화교류 차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군사적인 차원에서는 위협적이며 부정적일 수 있다.


총참모부는 오래 전부터 군사적 관점에서 공간을 평가한 결과, 

양면 또는 다면전쟁의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지리적 패권을 추구했는데, 

이는 독일이 유럽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기회라기보다는 잠재적인 위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바로 이러한 특수한 군사적 공간에 대한 인식이 

군사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고려한' 결과물이었다는 것이다.


양면전쟁의 발발은 결국 

지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는 일은 바로 정치권의 책임이었다.


장교단 내부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작전적 사고의 전문가들이라는 수많은 장군참모장교들은 

양면전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여겼지만 

그러한 양면전쟁은 실상 자연발생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의 행동으로, 

정치적 상황에 의해 야기되는 문제였다.



     p 049, 050 

        공간과 시간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




1871년 독일제국의 통일 이후 독일에서는 

군사적인 공간인식의 관점에서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현실을 위협으로 간주했다.


5대 유럽 강대국 중 독일제국만이 

다수의 국가들과 국경을 맞대고 잇는 유일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동쪽에는 러시아, 남동쪽에는 오스트리아 ㅡ 헝가리제국, 

서쪽에는 프랑스, 즉 3개의 잠재적 경쟁국들이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영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전시에는 독일의 국제해상 교통로를 봉쇄할 수 있는 

막강한 군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독일의 많은 정치가와 군인들은 

7년 전쟁 또는 30년 전쟁 시의 프로이센과 

당시의 독일제국의 지리전략 상황을 비교했다.


제국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는 

1888년 아프리카 전문가였던 오이겐 볼프 Eugen Wolf  에게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당신의 아프리카 지도는 매우 아름답소.


그러나 나의 아프리카 지도는 유럽에 있다오.


여기에는 러시아도 있고 프랑스도 있소.


그리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 있소.


그 지도가 나의 아프리카 지도라오."


이러한 상황평가에 기초해서 비스마르크와 그의 후임자들은 

연합세력을 구축하여 양면 및 다면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스트리아 ㅡ 헝가리와의 양국동맹을 통해 

일단 다면전쟁의 위협은 해소되었다.


하지만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독일 위에 걸려 있는 러시아, 프랑스의 양면전쟁의 가능성은 

독일의 정치, 군사 엘리트들의 머릿속에 

항상 골칫거리로 각인되어 있었다.


게다가 독일제국의 정치, 군사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공포심이 만여했고 

독익이 유럽의 정중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러한 감정은 더욱더 증폭되었다. 




     p 050, 051

        공간과 시간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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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군부는 

실패한 외교정책과 지리적 상황에서 야기된 딜레마의 해결책을 

역설적이게도 매우 '비관적이었던 유럽의 정중앙'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찾아냈다.


슐리펜이 규명한 대로 이것이 전략적 이점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이 두 동맹국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총참모부는 독일제국의 지리 전략적 위치를 토대로 

내선을 최대한 이용하여 

양면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즉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적들이 

외선에서 집중적인 공세의 이점을 활용하기 전에, 

적들을 각개격파하면 된다는 것이다.





작전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이러한 방책을 실행하고 성공시키기 위한 기본전제는 

영토 내에 충분한 종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만일 차례대로 적을 격파하기 위한 충분한 공간이 없다면 

사실상 내선의 강점들을 사라지고 만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전제조건은 아군의 신속한 기동력이다.


여기에는 기동성 있는 육군의 편성과 더불어 

특히나 잘 발달된 교통망이 필수였다.


총참모부는 독일이 내선에서의 전쟁수행을 위한 

모든 조건을 총족했다고 판단했다.


잘 발달된 국내의 철도망을 통해 

적시에 한 전선에서 다른 전선으로 대규모 육군병력을 수송하기에 

동 ㅡ 서간 독일 영토의 크기는 충분했다.


1918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무청 Truppenamt 이라는 명칭으로 

은폐된 곳에서 군사적 역량을 키웠던 총참모부에서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신념을 재정립했다.


1938년 베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간의 문제는 독일군이 중부유럽에서 내선작전을 수행하는데 있어 

작전의 자유를 제한할 만큼 영향이 크지 않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유럽의 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광범위한, 상호 연계된 주요 전구(戰區, Hauptkriegstheater) 들을 감당하는데 

공간 그 자체는 우리에게 상당한 강점이며 

4년 이상 , 3개의 전선에서 지상전을 수행한다 해도 큰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내선에서의 전쟁수행은 

시간적 요인에서 매운 큰 위험부담을 내포하고 있다.


두 적국 중 어느 하나가 전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까지 

반드시 다른 하나를 속전속결로 격멸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만일 조건을 충족하는데 실패한다면 

곧바로 상황은 재앙으로 돌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공간과 시간의 밀접한 연관성과 

이 둘을 별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도 모든 군사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전술적, 작전적 또는 전략적 본질을 결정짓는 핵심요소다.


또한 군사적으로 시간 개념은 특수성을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시간적인 개념상 전쟁이 촉발되기 이전의 과정은 

동원기간과 최후 통첩의 순이었으며, 

냉전 시대에는 이 과정들이 정치적 반응시간으로 축소되었다.


시간은 그밖에도 심리적, 물리적 전투력과 

화기, 차량, 물자들의 사용 가능성을 제한한다.


대규모 공간의 횡단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광대한 공간을 지향하는 작전적, 전략적 영역에 비해 제한된 공간, 

즉 전술적 영역에서의 결심과 실행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작전적 행위들은 전술보다 더욱더 미래지향적이며 

정보수집, 계획수립과 실행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작전이 개시되면 투입된 대규모 부대는 

심각한 문제가 아닌 한 작전 진행 중에는 

절대 정지하거나 재조직, 재편성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실책은 만회되기도 어렵고 만회할 수도 없다.


따라서 군지휘관은 

시공간적인 차원에서 밀리 내다보고 계획하며 

부대와 전투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은 자제해야 한다.


또한 예하 지위관들이 

자신의 의도에 부합되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한편으로 의사소통수단의 발전으로도 가능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하지휘관의 독단활용을 촉진하는 

임무형 지휘를 통해서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후자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교육훈련과 상급지휘부의 의도를 이해하는 차원에서 

동일한 집단적 사고가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지휘의 분권화도 

독일의 작전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과소평가할 수 없는 요소이다.




     p 052 ~ 054

        공간과 시간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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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시간이 갈수록 신속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구나 지상군의 

현대적인 전투차량, 공중전 및 수중전 무기체계들의 등장은 

동시다발적인 공간의 팽창과 더불어 

전쟁수행 범위를 3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이러한 촉진으로 

현대적인 무기체계에 대한 군수분야의 소모가 증대되었고 

이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문제들은 

군사결정권자들을 점점 더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시간적인 압박 때문에 지휘과정에서의 실수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따라서 적을 끊임없이 시간적 압박에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면 

아군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지고 상대방의 성공 가능성은 낮아지게 된다.


즉 군사적 행동을 위해 

시간을 확보하거나 쟁취하는 일이야말로 작전적 성공의 열쇠였다.


시간이 부족하다면 공간의 점령이나 포기를 통해서 시간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순수한 군사적 차원을 넘어서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즉 내선에서 적에게 역포위되어 대규모의 민간인 집중지역, 

경제적 산업 중심지역 또는 천연자원 채굴지역 등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사전에 전선지역, 후방지역과 핵심방어지역 등으로 

공간을 분리해야 한다.


게다가 정치적 또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포기하면 

한 국가의 국내정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


항상 내선에서 전투하는 쪽은 

시간 부족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시간 획득의 필요성 

때문에 압박을 받게 된다.



그와는 반대로 외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는 

종종 공간의 종심 또는 해상을 이용하여 시간을 확보한다.


게다가 집중적이고 적시적인 공격을 통해 

적을 엄청난 시간적 압박 속에 몰아넣을 수 있고 

공간을 포기하고 해상교통로를 봉쇄함으로써 시간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작전적 ㅡ 전략적 전쟁수행을 위해 

중요한 공간의 상실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


더 큰, 전 세계 곳곳의 자원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국가는 적국의 전쟁 및 생존에 긴요한 자원 확보를 

차단할 수 있는 능력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중심부에 위치한 국가, 즉 독일과 같이 

부분적으로 또는 전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국가는 

석탄, 석유, 식량 같은 전략적 자원들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가는 자신들의 전략적 상황에 따라 

오로지 단기전만 치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외선에 위치한 국가들은 

장기전을 감당할 수 있는 강점을 지닌 반면, 

내선에서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국가는 

적이 전투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 전에 

단기전, 즉 속전속결을 도모해야 한다.



따라서 시간은 

내선과 외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쌍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다. 


특히 중앙에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국가는 

더 심한 전략적, 작전적 시간적 압박에 시달린다.




     p 054, 055

        공간과 시간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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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독일과 같이 

선전포고 후 즉각 개전으로 돌입하는 대륙 국가들은 

시간적 요인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대규모의 육군을 필요로 했다.


반대로 영국 등의 해양 국가들은 

전쟁 초기 단계에는 소규모의 신속히 투입이 가능한 

상비군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이들은 제해권 덕분에 대륙 국가들과는 달리 

전시에도 군을 증설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과 같은 대륙국가들에서 의무복무제도는 

민주주의의 합법적인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필요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이른바 최정예 예비군을 포함하여, 

최단시간 내에 잘 훈련된 대규모 전력을 평시에 보유하는 것은 

전선 또는 후방에서 전쟁을 원할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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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투력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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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의 변수와 더불어 

전투력은 작전적 사고에 있어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시공간을 고려하지 않고 군사력을 투입하면 실패를 초래할 뿐이다.


따라서 모든 제대의 군지휘관들은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투력을 시공간과 잘 조화시켜야 하며, 

이것이 바로 공간, 시간과 전투력이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쟁에 동원되는 

병력과 장비의 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규모 육군일수록 공간에서 지휘 및 조정, 통제하기가 더 어렵다.


반면 소규모의 기동성과 현대적인 무장을 갖춘, 

잘 훈련된 병사들과 부사관들을 보유한 군은 

더 원할한 전쟁수행이 가능하다.


또한 소수 정예의 군이라면 

기습적이고도 대담하게 결전을 도모하는 작전도 능히 해낼 수 있다.


결국 어느 정도까지는 질(質)로서 양(量), 

즉 수적인 열세를 감당할 수 있다.


게다가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면 복잡한 보급의 문제도 야기된다.


특히 교통망이 불비한 상태에서 

원거리 보급을 해야 한다면 상황은 더욱더 심각하다.




     p 056

        전투력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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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회전 그리고 전쟁에서 수적인 우세는 승리의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 때문에 

대규모 육군의 지휘와 보급의 문제들이 무시되고 있다.


모든 군지휘관들은 결정적인 지점에 

국지적인 전투력의 우세를 달성하고자 노력한다.


수적으로 열세한 쪽이 적의 우세를 상쇄시키기 위한 두 가지 방책이 있다.


양호한 진지를 구축하여 방어의 이점을 활용하거나 

국지적인 아군의 수적 우세를 달성하여 적의 일부를 격멸하는 것이다.


이 두 방안은 중장기적으로 전투력의 균형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방식 측면에서 수동적인 방어는 주도적인 공격에 비해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또 하나의 방책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월등히 우수한 교육훈련과 지휘능력을 통해 

상대보다 질적 우위를 달성하는 방법이다.


즉 복잡한 작전들을 

신속히 공세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가장 효과적인 질적 증가도 

현실(수의 법칙)적인 표준화된 힘을 상쇄시킬 수는 없다.




     p 057, 058

        전투력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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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과 시간 요인은 세계대전 시대에 독일 군부의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수립과 인적, 물적 전쟁준비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독일의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었다.


전투력이라는 요인과 함께 이들은 1950년대 말까지도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영역뿐만 아니라 결정적인 원칙을 형성했다.


독일이 유럽대륙의 정중앙에 위치했기 때문에 

독일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까지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된 변수들을 상수로, 

더욱이 특별한 경우에는 결정적 요소로 인식했다.


장군참모장교들은 지리적 조건과 정치로 인해 초래된 

이러한 요인들을 변경시킬 수도 없었고 

영토 확장으로 현실을 바꾸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적국에 비해 열세에 있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인적, 물적으로 고도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로 

예견된 양면전쟁에서 신속하고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군사적인 방책을 발전시키는 일뿐이었다.




     p 058

        전투력

           3. 동인(動因)과 상수(常數) : 공간, 시간, 전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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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총참모장은 경전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항상 강력하고 수적인 우세를 달성하는 것이 

야전군 총사령관의 과업이라 생각 했다.


1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한 거대한 야전군 전체가 

회전이 벌어질 원거리의 장소까지 동시에 이동한다면 

교통수단의 기술적인 문제와 함께 

심각한 군수문제가 발생할 것이 명백했다.





몰트케는 대부대 지휘관을위한 규정에서 이를 명확히 지적했다.


(사진)


"대규모 부대가 한 지역에 집결하는 행위 그 자체가 재앙이다.


군이 한 지점에 집중되면 급식문제도 난해할 뿐만 아니라 숙영도 어렵다.


부대를 집중시키면 행군도 제한되며 작전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나아가 장기간 한 지역에 주둔시키기는 더더욱 어렵다.


집중은 오로지 적을 칠 때만 필요하다."



그래서 몰트케는 회전이 벌어질 지역에서 

군의 수적 우세를 보장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육군을 기동시키고 지휘하며 

원할이 보급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이러한 요소들의 결합이야말로 

결정적인 승리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몰트케가 찾아낸 해법, 

즉 독일군 장교들의 전유물로 이어져 온 

'분진합격, 즉 분산해서 기동하고 집중해서 적을 쳐라.

라는 슬로건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이 전법은 

몰트케가 창조해 낸 혁신적인 산물이 아니었다.


그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당시에 주어진 상황에 부합하는 

그러한 전투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 전법을 실행에 옮긴 곳이 바로 쾨니히그래츠와 스당 Sedan 이었다.





몰트케는 육군을 다수의 거대한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고, 

가능한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통로로 이들을 분산, 기동시켜 

회전이 벌어질 장소에서 적시에 결전을 위해 집중시키고자 했다.


또한 몰트케가 전투력, 공간, 시간의 결합과 

계산의 중요성을 강조한 자신의 논문, 

'행군 종대에 관하여 Über Marschtiefen 에서 증명했듯 

야전군 편성은 결정적인 작전적 시간에서 강점을 제공했다.


왜냐하면 분산해서 전진하는 부대들은 

고속의 기동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몰트케는 행군 간에는 

군수와 교통의 문제로 시간이 소요되는 집중을 거부했지만 

회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도 외선에서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잘 보여주었듯, 

분산해서 이동하는 아군이 집중하기 전에 

민첩하고 노련한 적이 신속히 위치를 이동하여 

아군을 각개격파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몰트케는 

전략적인 수준에서 내선작전의 강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제국 건국 이후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면전쟁을 위한 계획은 

내선작전의 개념에서 작성되었다.




     p 067, 068

        "분진합격"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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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의 군사적 활용은 일대 혁신이었다.


다수의 프로이센 장교들이 이러한 혁신, 

사실상 혁명적인 교통수단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표시했으나 

총참모부는 시간이 흐르면서 철도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1856년 이후로는 부대수송을 위한 철도운행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몰트케의 전임자들은 단지 군수와 병력의 수송 등 

단편적인 관점으로만 철도를 이해했다.


반면 몰트케는 1842년 한 소책자를 통해 

철도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했다.


즉 철도의 작전적 ㅡ 전략적 잠재력을 정확히 인식했던 것이다.


핵심은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키는 속도였다.


이 새로운 교통수단은 단시간 내에 거리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군사력의 활동 공간을 확대시켰다.


민간과 군사적 차원에서 수 세기 동안 존재했던 

시간 ㅡ 공간의 제한이 사라진 것이다.






몰트케의 전임자들은 전시 철도와 전신의 중요성을 간파했지만 

이 두가지를 전쟁계획과 구체적으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몰트케는 그 일을 해냈다.


1859년 최초로 정확한 날짜를 명시한 부대전개계획과 

철도를 이용한 수송계획을 결합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전쟁에 철도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마침내 이 신임 총참모장은 

1869년 총참모부에 독립적인 철도부를 신설했다.


이 부서에서는 철도수송에 관한 시간계획을 작성했고 

장차 동원계획의 기본조건이 되는 정보들을 처리했다.


게다가 몰트케는 부대훈련 또는 총참모부훈련의 일부로 

수송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철도와 전신, 이 두 분야의 기술적 혁신은 

시간,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아군이 지배했던 공간의 범위만 확대되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자국 영토 내에서만 

부대의 기동과 통신 속도가 가속되었기 때문이다.


군이 적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은 즉시 그러한 강점은 사라진다.


적들은 자신들의 시설을 사용할 수 없도록 파괴할 것이고, 

설사 남아있다 하더라도 아군의 시설과 호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1866년에도 1870/71년에도 

적국이 파괴한 철도 시설을 신속히 복구하지 못했다.


그 결과 부대들은 나폴레옹 시대에서처럼 

신속한 행군을 하기 위해서는 

육로나 마차에 의한 보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하역지점에는 보급물자들이 쌓여있었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공간의 확장과 시간의 단축은 마지막 하역지점에서 끝났다.




     p 069 ~ 071

        철도와 전신, 공간과 시간의 단축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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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을 다수의 야전군으로 분할, 편성하면서 

새로운 부대 지휘 방식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특히 시공간적으로 흩어진 채로 

총사령관이 직접 지휘하는 야전군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19세기의 통신 환경에서는 단 한 사람의 총사령관이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전진중인 야전군들을 

현지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몰트케는 대부대급 지휘관들에게 

그들의 임무 달성을 위한 폭넓은 독단 활용을 보장해 주기로 결심했다.


또한 총참모부에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 시대에서부터 

발전된 임무수행 방식을 도입하고 새로운 현실에 맞게 적용시켰다.


책임은 상급지휘부에서 감수하는 동시에, 

하급부대는 상급부대의 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지휘개념, 

지휘의 분권화를 실시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독일 육군의 전 제대에 적용된 

이른바 '임무형 지휘'였다.


몰트케는 개별적인 책임의식, 즉 책임의 분권화를 증대시켜서 

수직적인 지휘구조와 지휘수준을 수평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본질적으로 

작전적 사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투에 관한 공동의 사고로 이어진 통찰에 의해 

부대지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총참모장은 

군사령관 이하 지휘관들의 세부적인 계획에 개입하지 않고 

전체 계획의 범위 내에서 

그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를 명시한 임무만 하달했다.


아래의 예문은 

1866년 보헤미아(독일명 뵈멘 Böhmen) 로 진군하던 시기에 

하달된 몰트케의 명령이다.


이 명령에서는 이러한 지휘방식과 

그와 연계된 야전군사령관들의 행동의 자유를 잘 알 수 있다.


"전 야전군은 적과 마주치는 순간부터 

스스로의 판단과 상황에 따라 예하부대를 운용해야 한다.


이때 지속적으로 인접 야전군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상호 끊임없는 협력을 통해 서로를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지의 지휘관들은 

불확실하고 우발적인 사태나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마찰'이 발생하더라도 

탄력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급지휘관은 

이행 가능하며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서는 

절제된 명령을 하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도 있다.


많은 장점을 지닌 반면 위험요소도 내포하고 있다.


하급지휘관이 상급지휘관의 개념대로 행동하지 않거나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었다.


몰트케는 효율성에 더 큰 가치를 두고 

그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기로 했다.


그러한 지휘방식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전제조건이 존재했다.


하나는 하급자에 대한 신뢰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장교단의 일관성 있는 교육훈련이었다.


상황평가, 결심과 그 결심을 행동화하는 데 있어 

개별적인 독단을 활용하기 위한 

장군참모장교들의 통일된 교육훈련이 특히 중요했다.


즉 전쟁대학과 장군참모현지실습, 

전쟁연습을 통한 일관성 있는 교육제도와 

프로이센군의 장군참모제도는 

임무형 지휘를 구현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교육훈련의 결과로 

상하급 제대 장군참모장교들 간의 의사소통은 매우 원할했다.


그야말로 '이심전심'이었다.


이때부터 독일군의 명령지에는 

'상급지휘관의 의도'가 일개 항으로 명시되었으며 

이 항목은 오늘날까지도 작전명령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몰트케는 예하 지휘관들에게 주도권 장악을 요구했다.


전쟁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주도적인 행동은 

그로 인한 실수의 가능성을 감수하더라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맹종적인 명령의 수행이나 수수방관보다 

훨씬 더 유용했다.


이에 따라 지휘관이 상급 지휘부의 의도 하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장교가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동해야 하는 상황이 수차례 있을 것이다.


명령을 수령할 수 없는 순간에 

명령을 기다리는 행동은 매우 어리석인 일이다." 라고 주장했다.


지침에 의한 지휘의 장점은 분산된 부대들이 

상호 간에 대단히 원할한 협조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내선에서 방어하는 적에게 각개격파당하는 

위험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다. 




     p 071 ~ 073

        '지휘의 분권화'와 '지침에 의한 지휘'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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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케는 철저히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격멸'을 '완전한 섬멸', 

오늘날 해석하듯 적 부대의 '물리적인 전멸'로 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 부대를 더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으로 이해했다.


몰트케는 인종 이데올로기적 ㅡ 

국가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섬멸전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20세기에 등장한 특수한 전쟁수행 방식을 위한 기초를 세우지 않았다.


그의 작전적 구상이 그러한 기초가 될 수도 없었다.


클라우제비츠와는 달리 몰트케의 전쟁목표는 

오로지 적 지상군의 무력화였다.


그 이유는 바로 군의 대규모화, 전쟁으로 인한 

무역과 산업의 중단, 동원의 속도, 

그리고 유럽의 중앙에 자리잡은 

19세기 중반 프로이센 ㅡ 독일의 위치였다.


이를 고려할 때 전쟁을 가능한 

신속히 시행하고 종결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러한 원칙도 중요했지만 

프랑스와 벌였던 국민전쟁의 경험은 장기전을 부정하고 

단기전을 지향하는 신념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속전속결만이 지리한 대량학살과 

국민전쟁으로의 극단화를 방지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앞서 언급한 작전적인 이유와 별도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을 가능한 신속히 종결시켜야 했다.


그러나 몰트케는 국민전쟁의 발생을 막을 수 없으며 

이는 필연적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결정적 회전에서 

적 육군의 섬멸을 절대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몰트케는 다소 완곡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전쟁에서 대규모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원래 목표인 섬멸을 위해 거대한 회전을 감행하는 일이 옳은지 

아니면 일련의 소규모의 결정적인 성공들을 통해 

목표에 이르는 안전한 방책으로 나아가는 일이 옳은지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p 076, 077

        공간과 시간

           4. 시초 : 계획수립, 기동 그리고 임기응변의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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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해 필요한 수단 측면에서, 

즉 과학기술의 이용과 발전양상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상반된 두 가지의 성향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독일군은 신속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한 핵심적인 능력, 

즉 기동성과 관련하여 철도기술 면에서는 절정기를 맞았던 반면 

도로와 지상을 이용한 차량화는 철저히 경시했다.


이 문제는 전쟁수행 중에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과실이었다.


슐리펜은 육군의 군수문제도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군량(軍糧)은 절대 부족할 리가 없다.


풍족한 벨기에와 비옥한 북부 프랑스 땅에서 

아군은 충분한 군량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그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식량도 부족하겠지만 

적당한 압력을 행사하면 저장해둔 식량을 우리에게 내어 줄 것이다."



슐리펜은 탄약과 문자에 관해서는 일체 언급한 바가 없고 

현지 주민들에게 압력을 행사한다면 식량은 조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예를 제외하더라도 

슐리펜의 군수분야에 대한 무관심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슐리펜의 군수분야에 대한 생각은 백만 육군의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의 전쟁양상에 부합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슐리펜 외에도 거의 모든 군 수뇌부 인사들, 

군사 전문가들이 군수 분야를 경시했다.


군사 문제 전문가들과 총참모부는 

다양한 전술적 또는 작전적 주제에 관해서는 

극도로 격렬하게 논쟁했던 반면, 

공세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위한 

군수분양의 문제점들에 관해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작전적 사고만을 강조한 나머지 

작전적 ㅡ 전술적 관점이 군수분야보다 확실히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 또는 그 이전의 제후국들이 유럽의 중앙에 위치했으며, 

그로 인해 제1차 세계때전 발발 이전까지 

독일의 영토나 국경에 인접한 지역에서만 회전을 치른 데서 기인했다.


독일군은 군수보급에 있어서 문제를 겪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1870/71년 독일 ㅡ 프랑스 전쟁 당시에도 군은 전쟁기간 내내 

보급기지로부터 원할한 보급품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중부 유럽을 벗어나 집중적인 고세를 시도할 경우 

작전적, 전략적 승패를 가르는 요소는 완벽한 군수보급의 유무인데, 

이 분야에서 독일군의 역량은 크게 부족했다.


영국의 상황은 독일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사전에 보급문제가 보장되지 않으면 

영토 밖에서는 어떠한 공세도 실시할 수 없었다.



블루메는 기동전을 수행하기 위해 

군수분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군대는 ㅡ 적이 방해하지 않는 상황을 전제한다면, ㅡ 

자연적인 장애물을 극복하고 욕구를 충족시키며 

필요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을 스스로 보유하거나, 

외부로부터 공급받거나, 혹은 현지에서 조달할 수 있을때, 

즉 생존을 보장받을 때만이 자유로이 공간에서 기동할 수 있다.


때로는 전장이 매우 중요한 보조수단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장 그 자체에서 

모든 종류의 물자(그 예로 탄약 등)와 

모든 부대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조건을,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만큼 충족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보조수단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그만큼 작전수행 능력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블루메는 작전수행을 위해 

군수물자의 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총참모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수년 동안 

다수의 19세기 사례를 근거로 

작전적 수준의 전쟁을 위한 군수지원의 소요를 연구했다.


백만 육군으로 확장됨에 따라 군수지원은 더욱더 어려워졌으며 

특히 군수물자가 부족하면 

작전수행에 제한이 있었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찾은 해법은 신속한 기동전을 이행하기 위해서 

가능하면 소량의보급품을 직접 휴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투부대는 과거 나폴레옹 시대에서처럼 

반드시 필요한 양의 물자를 직접 보유한 채 전투에 투입되었고 

전장 주변의 주민들은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했으며 

이런 사고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역사가 휴 스트라챈 Hew Strachan 이 지적한 대로 

총참모부는 작전적 기동전을 시행하기 위한 

군수지원의 개념을 발전시키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초래되는 결과들을 무시했다.


결국 작전계획 수립 간에 

군수의 문제들은 끝까지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비망록과 전쟁연습들에서 알 수 있듯 

슐리펜뿐만 아니라 다른 군사 전문가들도 성공적인 회전 이후 

전쟁을 어떻게 종결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결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위험천만한 국민전쟁과 소모전쟁양상이 벌어지면 

독일은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데 모든 군사 전문가들은 동의했다.


따라서 회전에서 승리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는 개념을 진리로 받아들였다.



다른 유럽 국가들의 군대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수많은 독일 군사 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심리적, 정신적 요인에서만 찾으려 했다.


용감무쌍한 공격정신, 

즉 투철한 '옛 게르만인의 용맹한 돌격정신' furor teutonicus 으로 무장하고 

전장에서 종횡무진 돌진할 수 있는 확고한 필승의 신념과 총검만으로 

지리전략적인 상황과 수적인 열세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슐리펜은 자신이 주관한 마지막 전쟁연습의 사후강평에서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대우회기동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력한 독단성, 불굴의 투지, 필승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닌 지휘관과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정면돌파할 수 있는 부대가 필수적이다."







대부분의 독일 군사이론가들처럼 

슐리펜과 소몰트케도 결정적 회전을 매우 중시했으며 

거시적으로는 전쟁을 결정짓는 요소로 인식했다.


슐리펜의 작전적 계획들은 종래까지 알려진 내용보다 

덜 교조적이며 오히려 매우 탄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취약점이 내제되어 있었다.


적의 수적 우세를 고도의 교육훈련과 정신력, 사기와 결합한 

우수한 전투수행능력과 지휘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과 

전술적 ㅡ 작전적 요인들의 과도한 중시는 

군수의 요소들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p 137 ~ 139, 147

        슐리펜 계획, 소결론

           5. 양면전쟁, 다모클레스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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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의 작전적 계획들은 

최초 회전과 그 회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달성하는 방책까지만 작성되었다. 


상황 변화에 따라 이어지는 

향후 전쟁계획이나 전쟁종결 방책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작전적 사고 측면에서 근본적인 부실을 의미한다. 


전술적인 상황들을 작전적 수준으로 전환하여 

전술과 작전을 긴밀하게 결합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를 전략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전쟁수행에만 치중한 나머지 

정치 우위를 부정하고 정부의 모든 정책을 거부한 데에 있었으며 

또한 제국 내에 존재했던 관료주의적 관할 영역만을 강조한 

폐쇄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극단적인 조직 이기주의로 

관할영역을 초월하는 협력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육군과 해군은 물론 총참모부와 전쟁부 간에도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소통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종래까지 슐리펜은 

작전계획에 정치적 문제를 더 심도 있게 반영했지만 

당시 관료의 한계를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총참모부는 작전을 넘어서 

전략적 수준에 이르는 전쟁 전쟁지도를 위한 영역들에 대해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했다.


총참모부의 역할은 

조직의 관할영역 구분으로 인해 크게 제한되었기 때문에

전개 및 작전계획수립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고도 볼 수 있고 

각 조직의 폐쇄성과 배타적 성향으로 

작전적, 전략적인 수준의 결합이 불가능해졌으며 

그로 인해 총참모부가 현실에 안주하면서 

비판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도 있다. 


총참모장 주변의 장군참모장교들이 

어느 정도로 현실을 묵과하고 의도적으로 현실을 회피하려 했는지 

또는 조직 이기주의 때문에 의견개진에 얼마나 제한을 받았으며 

제국의 총제적인 전략계획수립에 얼마만큼의 문제가 발생했는지는 

현재까지 미해결 과제이며 충분히 연구해볼 만한 주제이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슐리펜과 소몰트케를 비롯한 

장군참모들의 자전적 ㅡ 전략적 개념 발전을 위한 

지적 능력을 문제시하는 주장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총참모부는 양면전쟁에 대한 작전적 계획들이 

얼마나 고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러한 계획들은 승리에 대한 해법이라기보다는 

탈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상조치 정도로 여겨졌지만 

국제정세는 점점 더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자전적 독트린에 따른 조치가 실패한다면 

외교적으로도 국가의 내정에서도 치명적인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중대한 위험요소였다. 


만일 전쟁에서 패배한다면 통치체제의 불안정이 발생할 수 있고 

가장 심각한 경우에는 호에촐레른 왕가의 종말로, 

이어서 군부의 권력실로 귀결될 수도 있었다. 


양면전쟁이 터질 경우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국 지도부에 알리고 외교정책의 변화를 권유하는 대안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안은 독일군 장군참모장교들의 자존심에 부합하지 않았으며 

그랬다면 제국의 통치기구 사이에서 

총참모부나 군부의 지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슐리펜과 그 후임자는 적의 전략적 잠재력을 무력화시키는, 

따라서 적의 팽창을 저지하는 데 목적을 둔 

기동을 바탕으로 하는 작전적 독트린을 발전시켰다. 


다만 독일이 이러한 작전적 계획들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신속하고도 기동성 있는 전력을 보유했는지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p 147 ~ 149

        소결론

           5. 양면전쟁, 다모클레스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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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제국이 창조하고 발전시킨 

작전적 사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가혹한 시험대였다.


엄격한 잣대로 평가한다면 

독일군 총참모부의 계획과 작전은 실패작이었다.


총참모부는 작전적 사고의 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험을 치렀으나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유일하게도 탄넨베르크 섬멸전에서 작전적 승리를 얻어냈지만 

전략적 실패라는 진실만은 숨길 수 없었다.


신의 축복, 영광적인 승리로 장식된 '동방의 칸나이', 

탄넨베르크 회전도 사실 작전적 사고의 관점에서는 

공세가 아닌 수세적인 포위회전이었다.



또한 육군 총사령부가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위험을 두려워하며 

서부전선이 일부 군사력을 동부로 차출, 이동시켰고 

이 과정에서 프랑스 전역에서 그만큼의 전력이 빠져나가게 되는데 

이것은 전략적 측변에서는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작전적 중점을 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양위포위는 물론 단 한 차례의 단순한 포위도 성공시키지 못했고 

하물며 전쟁의 승부를 결정짓는 회전을 승리로 이끌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공세 도중에 작전한계점에 도달함으로써 

마른강에서 혹독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파리 정복을 눈앞에 둔 순간에 

패배의 고배(苦杯)를 마셔야 했던 것이다.


또한 마른강에서의 패배로 독일 육군은 

전술적, 작전적 그리고 전략적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마치 '훈련장에서처럼' 공격작전을 시행했던 독일군 장병들은 

적의 기관총과 포병화력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전쟁개시 단계부터 그토록 강조했던 정신적 전투력 

ㅡ 의 우세를 상쇄시킬 필승의 의지와 공격 정신 ㅡ 

엄청난 화력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전쟁의 실상은 평시의 교육훈련과 

천양지차(天羊之差)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총참모부는 평시에 전쟁계획 수립을 전담했던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즉 백만 육군을 지휘하기 위한 기구도 아니었고 

그에 대한 충분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에 적합한 통신수단도 불비한 상황이었다.


슐리펜의 생각대로 

중앙집권적으로 엄격하게 작전을 지휘할 수도 없었다.


작전적 수준에서는 독일 육군이 그동안 발전시켜온 

'임무형 지휘'와 상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대 지휘관들에게 

독단적인 작전지휘 능력을 기대했지만 이 역시 패착이었다.


지휘관들의 인격, 

즉 사적인 적대감과 자기과시욕 때문에 끊임없는 마찰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이것은 엄청난 시간적 압박 속에서 

실시된 작전 중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p 189, 190

        소결론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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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단 몇 주 만에 

독일 육군은 이미 결정적인 취약점들을 노출시켰다.




이론적인 계획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기동성을 보유하지 못했다.


총참모부는 작전적 ㅡ 전략적인 측면에서 

시간적 압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 하에서도 

기동성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기동성이 작전수행을 위한 

가장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요소임을 간과하고 말았다.


고도의 시간적 압박 속에서 적을 섬멸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는 

제한된 시간 내에 광활한 공간에서 기동전을 수행해야만 했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양질의 교육훈련과 무장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도의 기동부대를 보유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 육군에 그러한 부대는 없었다.


기병은 더 이상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는 부대가 아니었다.


시종일관 보병의 행군과 포병의 이동속도가 공세의 템포를 좌우했다.


적이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른다면 모를까,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는 적 부대를 포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서부는 물론 동부에서도 수차례 적 부대를 격파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섬멸로 종결되는 포위회전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독일 육군에게는 이론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대규모 부대로 기동전을 수행하기 위한 기동성도 부족했지만 

그에 필요한 통신수단도 불비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전차는 기술적 결함이 있었지만, 

어쨌든 1918년 서부 전역에서 연합군이 실시한 공세를 통해 

다시금 기동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p 190, 191

        소결론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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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참모부는 매우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고 

달성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육군의 능력과 그들의 희망 간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했다는 것이 전쟁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독일의 군부와 정부 간의 요구와 현실은 

전쟁 이전부터 전쟁 말기까기 일치되지 않았다.


전쟁 이전에는 현실을 무시했고 급기야 전쟁중에는, 

마르틴 쿠츠가 강조한 바와 같이 

제3기 육군 총사령부는 급속히 현실도피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루덴도르프는 결정적인 단계에서 

전술을 작전의 상위개념으로 올려놓았다.


또한 시종일관 전략적 열세의 딜레마를 

탁월한 전술적 능력과 불굴의 의지로 해결하려고 했다.


전황은 날이 갈수록 산업화에 따른 

물량전, 소모전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필승의 의지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모든 정치적인 사활이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한다.'

는 루덴도르프의 신념이 

전통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를 눌러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쟁수행을 위한 작전적 ㅡ 전략적 결심도출과정에서 

정치적 상황을 철저히 배제시켰다.



독일제국 육군은 전쟁에서 또 다른 작전적 사고의 약점을 노출시켰다.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전통적으로 총참모부는 

항상 국경 일대의 전쟁만을 계획했다.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보급과 수송 능력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작전적 차원에서 전쟁계획 수립 당시 

서부와 동부전선 모두 전역의 범위를 

국경지역에서 400km 이내로 설정했다.


그러나 동부에서 

발칸과 오스만제국 일대로 전쟁을 확대시킴으로써 

기본 계획상의 공간의 범위를 넘어서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도로의 상태도 매우 열악했다.


보급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작전적 수준의 기동전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보급부대는 적시에 

보급품을 공급하지 못했고 물량도 현지히 부족했다.



그러나 위에서 기술한 취약점들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이 국경 인근에서는 전술적, 작전적 측면에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p 191, 192

        소결론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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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바로 전술적 ㅡ 작전적 측면에만 편향, 집착했다는 것이다.


이는 독일제국의 군부정치 체제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쟁 중에도 

독일은 총체적인 전쟁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


이에 대한 명확한 공간과 자원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둘 모두 다양한 기관에서, 

이를테면 육군총참모부와 해군 총참모부 같은 곳에서 

임의적으로, 독립적으로 평가했다. 


육군과 해군 지도부는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서로 간의 끊임없는 암투로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상호불신이 증폭되었고 조직의 권력 확장이 

때로는 총체적인 국가적 이익보다 중요했다.


슐리펜은 총참모장 재임기간 중 

인적, 물적 군비증감에 관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던 

전쟁부 장관에게 자신의 작전계획을 단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다.


소몰트케도 1912년에야 비로소 

전쟁부 장관에게 전쟁계획에 대해 통보했다.


또한 작전적 ㅡ 전략적 문제에 관해 

정치 지도부와의 대화도 거의 없었다.



독일제국의 헌법에 따라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을 

통합해야 할 사람은 바로 황제였다.


하지만 그러한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총참모장이 수립한 계획에 

치명적인 정치적 위험이 내포되어 있어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빌헬름 2세에게는 전시는 물론 평시에도 

총사령관으로서 군부와 정부를 조율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총체적인 전략, 특히나 경우에 따라서 

소모전을 위한 전략이 수립될 수 없었던 것이다.


총참모부의 철도부장과 전쟁청장 Chef des Kriegsamtes 

을 역임하고 훗날 제국군 국방장관에 올랐던 

빌헬름 그뢰너 Wilhelm Groener 중장은 

전쟁 말기에 당시의 상황을 매우 정확히, 날카롭게 지적했다.



"우리 온 국민들은 과거 수십 년간의 찬란했던 

경제적, 물질적 성장으로 인해 엄청난 자아도취에 빠졌고 

우리의 힘이 무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는 유럽에서의 지위를 충분히 보장받기도 전에, 

군사적으로 전혀 준비하지 못한 채로 

격동의 세계정세 속에 스스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쟁 종식 직전까지도 

그뢰너와 같은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p 192, 193

        소결론

           6. 혹독한 징벌,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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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의 책임을 인물에 전가함으로써 작전적 사고의 

근본적인 타당성에 관해서는 전혀 논의되지 못했다.


또한 독일은 

우수한 작전적 수준의 전쟁지도 능력과 전술적 혁신을 이루고도 

인적, 물적인 자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소모전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세계대전의 교훈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 때문에 독일제국의 총체적인 전략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략적인 전력 비교를 통해 

군사적, 경제적인 능력을 실질적으로 평가했더라면 

독일은 패권 욕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는 

결국 군사력을 기반으로 하는 패권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군부 엘리트들은 이러한 인식을 거부했고 

근본적으로 태도를 달리했다.


그들은 정치에 무관심했고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정치와 동떨어져 오로지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에만 매달렸다.


나아가 정치 우위의 원칙에 따른 전략개념을 발전시키지도 않았다.


오히려 공세적인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을 통해 

월등히 우세한 적국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군부 엘리트들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군사력 보유에 제한 

ㅡ 징병제 금지, 총참모부 해체, 항공기 및 잠수함, 전차 보유금지 ㅡ 

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허용된 10만 명의 육군 만으로도 

단지 일부 전술적 ㅡ 작전적 요소들만 새롭게 개선하면 

독일의 패권적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p 199, 200

        제1차 세계대전의 패인 분석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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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패전의 책임은 고스란히 몇몇 인물들에게 전가되었고 

전쟁 이전과 전쟁 기간 중 일사불란하지 못했던 

지휘구조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는 

베르사유 조약의 제약 때문에 

상부조직을 개편하기에 제한사항이 많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 

제국군은 장차전을 위해 전군을 통합지휘하는 조직, 

이를테면 국방군 지휘참모부 Wehrmachtführungsstab 

를 조직하는 방안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뢰너와 슐라이허는 

통합된 국방군 지휘기구를 창설하는 개혁을 단행했고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는 

국방군 총사령관, 블롬베르크가 그 작업을 이어받아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휘기구를 창설하고자 했다.


그가 주관한 수차례의 국방군 전쟁연습도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기여했고 

1934년 전쟁연습에서는 

전시 최고위 정치 및 군사지도부의 권한 역할이 논의되었다.


국방군 총사령관이 

국방군 참모부의 보좌를 받아 전쟁을 지휘해야 하며 

참모부에는 전시내각에서 결의된 사항을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육, 해, 공군사령관들에게 전략지침을 하달하는 

작전부서가 편성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부는 이러한 체계에 동의하지 않았다.


장차전은 전 유럽대륙에서의 지상전이며 

따라서 당연히 자신들이 전시 작전계획수립과 지휘권한, 

즉 총체적인 군령권을 가져야 한다고 맞섰다.


따라서 상부지휘구조에 대한 투쟁은, 

독일군 내부적으로는 육군 총사령부의 독립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 외부적으로는 베크의 정치적 투쟁이었다.


즉 자신들의 고유의 전문분야라고 여겼던 

작전지휘에 대해 정치권이 간섭하지 않도록, 

사전에 이를 철저히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육군 총참모부는 군내의 '다면 분쟁'에서 

애초부터 수세에 몰려 있었다.


히틀러는 공군을 국방군의 제3의 독자적인 집단으로 조직하고 

육군의 작전적 공중전의 지휘권을 

신설된 공군 총참모부에 이양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결정으로 육군 총참모부는 

공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한뿐만 아니라 

과거 '제정시대의 막강한 총참모부'로서의 권위를 상실했다.






육군 총참모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들의 고유 권한을 

새로이 창설되는 국방군 지휘부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베크는 육군 총참모부를 

제정시대의 총참모부로 돌려놓고자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총참모장의 권한도 슐리펜의 권한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평시에도 전시에도 명령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전임자들과는 달리 그는 

단지 육군 총사령관의 최선임 조언자일 뿐이었고 

통수권자에게 직접 보고 및 건의할 수 있는 권한마저 상실했다.


한편 군 서열상 육군 총사령관의 대리자로서 

특정한 분야에 관해서만 권한과 책임이 주어졌다.






베크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는 

중앙집권적 국방군 지휘조직을 만들려는 

블롬베르크의 노력에 수년간 반기를 들었다.


1937년 프리치는 이러한 권력투쟁중 

'육군이 총체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방책수립 권한을 보유하고 

작전적 수준의 전쟁과 육군에 대한 지휘권 단일화를 회복해야한다.' 

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결과 베크와 프리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국방군 총참모부를 조직하려던 블롬베르크의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국방군의 지휘권을 넘겨받았으며 

1938년도에는 블롬베르크가 창설하려던 국방군 대학의 문을 닫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던, 

육군 총사령부가 총체적인 전쟁수행에 있어 

국방군 총사령관의 주요 조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만은 관철시키지 못했다.






1938년 초에 이르러 마침내 히틀러가 정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했다.


블롬베르크 ㅡ 크리치 사태로 블롬베르크가 사퇴하자 

이 독재자는 '제국 국방장관' 과 '국방군 총사령관' 직책을 독차지했다.


이로써 상부지휘구조와 작전적 지휘에 관한 문제는 

피상적으로 블롬베르크의 소망대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국방군의 육, 해, 공군은 그들의 독자적인 전문성을 상실했고 

국방군 총사령부와 각군총사령부가 제국 국방부의 기능을 나눠 가졌다.


그러나 결국에는 히틀러가 이들 모두를 통제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한 사람의 손에 정치적, 군사적 권력이 집중되었고 

이 독재자의 힘은 이전 제국시대의 누구보다 강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 기간 중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를 

사례로 들어 이러한 권력집중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현대의 전쟁을 지휘하고 복잡다단한 

국내외적 과업들을 해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미 전쟁은 총체적이고도 복합적인 사건들의 집합체였고 

따라서 한 사람이 이것을 지휘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피상적으로 단일의 중앙집권적 명령체계는 합리적이었지만, 

정치 우위와 더불어 3군의 독자적 작전권이 인정되었어야 했다.


이러한 원칙 아래 국정운영과 군사지휘를 분리하는 것만이 

당시로서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제정시대 때처럼 

3군은 상호 벽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다.






육군 총사령부는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요구했지만 

결국 거부당했다.


하지만 각 군의 총사령관들과 총참모부는 

제각기 작전적 영역에서만큼은 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1939년 전쟁 발발과 함께 

국방군의 통합된 작전적 지휘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상부지휘구조를 둘러싼 분쟁은 장교단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베크는 자신의 부하장교들에게 

국방군 총사령부와의 업무상 접촉까지도 금지시켰다.


국방군 총사령부는 육군 총참모부를 시대착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는 고전적 ㅡ 프로이센식 사고를 지닌 

전통주의자들의 아지트로 생각했다. 


반면 육군 총참모부는 국방군 총사령부를 

육군의 합법적인 권위를 손상시킬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도 

보수주의 성향의 육군 총사령부와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는 혁명가적인 국방군 총사령부의 장교들 간의 

불화의 골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중상모략'과 '권위 훼손'이 난무하는 가운데 장교단의 분열이 가속화되었고 

히틀러는 이러한 반목을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 수뇌부는 통합적인 상부지휘구조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군권을 장악했지만 이는 군 수뇌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는 각 군의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바로 히틀러 때문이었다.


각 군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를 조성하여 

상방된 이해관계로 인해 분쟁이 생기는 순간, 

히틀러는 상호갈등을 철저히 이용하여 1인 독재체제, 

즉 총통의 국가를 만들 수 있었고 또한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군 내부의 권력 투쟁 때문에 

일사불란한 정치 ㅡ 군사 지휘체계를 정립하지 못한 채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p 248 ~ 253

        상부지휘구조를 둘러싼 갈등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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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사적, 경제적인 제재와 영토할양을 감수해야 했지만 

여전히 잠재적인 유럽의 패권국가였다.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는 일은 군부 엘리트들의 지상 최대의 목표였다.


'제정시대'에서처럼 전통적 패권정치의 수단을 통해, 

필요하다면 군사력을 사용해서라도 그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비교하면 

병력과 장비, 물자 면에서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제국 육군의 병력은 겨우 10만 명이었고 

징병제, 전차와 항공기 보유는 금지된 상태였다.


한편, 전쟁에서 슐리펜의 논리 중 적어도 하나만은 옳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독일이 장기간의 소모전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진실이었다.


그러나 독일 군부엘리트들은 그러한 현실을 부정했다.


왜냐하면 현실을 인정한다는 말은 

곧 군부 주도의 패권국가의 부활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치적 소양교육을 받지 못한 채 

집단의식으로 똘똘 뭉친 장교들은 패전 이후에도 

정치가 작전수행에 절대로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군부는 정치 우위의 원칙, 즉 정치가 전쟁수행을 통제해야 한다는 

현대적인 전략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했다.


작전적인 차원의 문제는 

그들 고유의 독자적인 전문분야여야 했고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작전적 사고의 원칙이 진리였다는데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작전가들은 장차전을 준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마치 오래된 술통에 새로운 와인을 채우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월등히 우세한 적국을 상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만을 찾으려 했다. 


세계대전 직후 전쟁 이전부터 중시되었던 작전적 원칙, 

즉 기동전 공격 등의 가치를 다시금 증명하기 위해 

전쟁경험을 선별적으로 분석했다. 


작전적 원칙을 준수하지 않았던 지휘부의 실책뿐만 아니라 

슐리펜 계획의 오용, 과학기술의 경시, "배후의 배신자" 

등이 패인으로 지목되었다. 


지휘관을 예술가로, 

작전적 수준의 전쟁지휘를 예술로 인식했기 때문에 

총사령관 등의 주요 인사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교단은 대동단결하여 

진정한 패전의 원인을 숨기고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극소수의 인물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독일제국의 부활을 위한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장교나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제국군 수뇌부는 

작전적 ㅡ 전략적 차원에서 실질적인 패인에 관한 연구를 거부했다. 


반면, 전술적 수준의 전쟁경험은 매우 면밀하게 분석했다. 


러한 편향된 전훈분석은 

제국군 지휘부의 전술적 작전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술적 작전적 기동을 통해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관념은

그들에게 영원불멸의 진리였던 것이다.




     p 253, 254

        소결론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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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작전과 지연전의 중요성이 

1914년 이전보다는 훨씬 더 증대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의 전쟁연습에서처럼 

군부의 관심은 다시금 고전적인, 작전적 차원의 

공세적인 기동전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적의 잠재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속전속결에 대한 믿음과 

기습, 중점형성, 포위, 섬멸, 내선 및 열세에서의 전투, 

그리고 지휘관의 전술적 영역은 작전적 사고의 핵심원칙이었다.


게다가 제정시대에 한창 치열한 논란이 일었던 돌파는 

포위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점점 더 중시되었다.


군부는 돌파를 일련의 연속적인 작전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작전적 포위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 이후 몇 년간, 

일부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크와 프리치의 주도 아래 

그러한 작전적 독트린을 기반으로 하는 독일 육군이 재건되었다.


군사력 증강에 따라 1920 ~ 30년대의 수세적 태도를 버리고 

마침내 공세적인 의도를 다시금 표출했다.


독일군 수뇌부의 목표는 열세에서도, 

유럽대륙에서의 양면 또는 다면전쟁에서 

속전속결을 도모할 수 있는 대규모, 공세적 육군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한 논란도 만만치 않았다.


총참모부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 우위의 원칙을 강조했던 반면 

경제적, 재정적 그리고 물량적 측면에서의 현실을 무시했다.


결국에는 장기전을 대비한 종적 군비증강이 아닌 

단기전을 위한 횡적 군비증강 정책을 채택하고 말았다.






사실상 유일한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수립 기구였던 육군총참모는 

제정시대의 총참모부와는 달리 군비증강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기체계의 발달과 

육, 해, 공군의 협력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그들의 권력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작전적 문제에 관한 한 유일무이한 통수기구로서의 지위를 고수하고 

군사 조직 내에서 전통적인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들은 당시까지도 권력을 군사력으로 인식하는, 

소위 1차원적인 빌헬름 2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대규모 공세적인 육군의 창설과 전체적인 군 구조 내부에서 

육군과 총참모부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투쟁에만 열중했다.


또한 육군 총참모부와 국방군 총사령부 간에는 

군사작전을 정치의 하위에 두어야 할지, 

작전적 ㅡ 전략적 상황에 따라 

전쟁을 결정해야 할지에 관한 논쟁도 이어졌다.


블롬베르크 ㅡ 프리치 사태의 결과로, 

한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전쟁계획수립을 반대했던 이유로 

베크가 물러나고 히틀러가 국방군에 대한 지휘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p 256 ~258

        소결론

           7. 새로운 술통 속의 오래된 와인, 

               제국군과 국방군 작전적 사고의 현실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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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로부터 

25년 후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국방군 장교들은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한 

혁명적인 첫발을 내디뎠다며 기뻐했다.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이 전쟁은 애초부터 동부에서 생활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종의 인종주의적 섬멸전쟁이었다. 


결국 국방군은 1945년 5월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독일의 전국 방방곡곡에 승리의 종이 울려 퍼진 1940년 여름, 

그 어느 누구도 몇 년 뒤에 

국방군이 무조건 항복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18년 11 월 11일의 상황과 정반대로, 

1940년 6월 22일, 단 40일 만에 프랑스를 무너뜨리고 

콩피에느 Compiègne 숲 속의 열차 안에서 

프랑스군의 항복을 받아냈을 때 

독일인들의 만족감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객차 안에서의 상징적인 언동은 전 독일 국민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 패배의 오명을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이 시기에 국가사회주의 정권과 국민과의 일체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럽 최강의 군사대국을 상대로 예상치 못한 속전속결을 달성하기 이전까지 

1939년 가을에는 폴란드를 제압했고 이어서 덴마크, 노르웨이까지 정복했다. 


독일과 세계의 언론들은 즉각 독일의 전쟁수행 방법을 

전격전 Blitzkrieg 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언어권에서 

속전속결의 동의어로 사용된 이 용어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국방군의 군사적 성공을 대변했다.


사실상 이것은 독일의 군사적 우수성, 

즉 '무적'의 국방군이라는 관념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선전물이었다. 


1941년 러시아 전역에서 패배의 기운이 감돌자 이내 

나치는 그러한 선전을 중단했다.


전격전이라는 개념은 전차 및 기갑 부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용어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영미권에서 창조된 용어가 아니라 

1930년대 중반부터 이미 산발적으로 

독일의 군사 저널리즘에서 사용된 적이 있었다. 






히틀러가 세계 정복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단계적 계획의 이행을 시도했다는 가설은 

얼핏 보면 꽤 매혹적이며 사실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가설은 

마치 어쩌면 하나로 맞추어질 듯한 다양한 퍼즐 조각들로 

자신들이 바라는, 그려내고 싶은 

그림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짓이나 다름이 없다.








국방군 총사령부는 천부적인 통수능력을 지닌 

'총통'이 일궈낸 승리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 승리가 슐리펜 이래로 

압도적인 인적, 물적 우위에 있는 적을 무력화, 섬멸하기 위해 

속전속결의 공세적 작전을 추구한 

총참모부의 성과였음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군무청, 훗날의 총참모부의 작전가들은 

지난 세계대전의 장기전, 소모전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장기전을 회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기 속전속결에 대한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군수참모부장 게으르크 토마스 Georg Thomas 장군, 

라인하르트 혹은 졸단과 같은 인물들로서, 

장차전을 지지전 또는 지리한 소모전으로 예측했던 

군사 저널리즘과 군내의 극소수 인사들이었다.


베크도 그들 중 하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거부 의사를 밝혔고, 

1938년 7월에는 전격전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1938년의 군무청 현지실습에서 

베크의 신념은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전쟁 발발을 불과 1년 앞둔 시점에 실시된 현지실습에서 

브라우히치를 비롯한 다수의 장군들은 양면전쟁이 벌어져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의 연속적인 전격전 ㅡ 전략에 관한 계획도 없었고, 

심도 깊은 연구도 시행된 적이 없었다.


1914년과는 대조적으로 1939년의 독일제국은 

양면전쟁을 위한 완벽한 전쟁계획 없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슐리펜 계획도, 몰트케 계획도 없었다.


전쟁 발발 이전, 히틀러 자신도 

폴란드, 서방 제국을 상대로 하는 양면전쟁은 절대 있을 수 없으며 

더욱이 그에 관한 총체적인 전략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폴란드 침공도 총체적인 전략적 맥락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와 프랑스에 대한 승리들은 

오랜 기간 심사숙고한 전격전 ㅡ 전략의 산물이 아닌, 

오히려 단기간에 수립된 작전계획에 의한 

전통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실천한 결과물이었고 

한편으로는 적국의 실책이 결정적인 승리의 원인이었다.




     p 260 ~ 262, 263, 264

        전격전 사상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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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전쟁 발발 당시 육군의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부대마다 기동성과 무장, 교육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독일 육군의 157개의 사단 중 

16개 사단만이 완전히 차량화되어 있었다.


단지 이러한 극소수의 '엘리트' 부대들만 

첨단 장비를 갖추고 규육훈련 수준도 높았으며 

따라서 기동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90% 정도의 부대들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도보나 말을 이용해야 했으며 일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보다 

더 낙후된 무장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오늘날까지 독일 국방군은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완전히 기계화된 전격전 군대'로 각인되어 있지만 

이는 완전히 날조된 나치 선전의 결과물이었다.


실제로 독일 육군은 여전히 말과 마차의 군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두 배 이상의 말이 투입되었다.


한편 대부분의 병사들도 겨우 수주일 간의 훈련을 받은 신병 수준으로, 

국가사회주의 선전물에 등장하는 '젊고 역동적인 베테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10개의 기갑사단, 6개의 차량화보병사단을 포함한 

총 77개 사단만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1918년 미하엘 공세 개시 당시와 비교하면 

겨우 5개의 사단이 늘었을 뿐이었다.


결국 독일 육군은 차량화뿐만 아니라 무장면에서도 매우 열악했다.


또한 군 수뇌부의 전술적 ㅡ 작전적 사고에도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다.


1939년 기계화부대 운용을 주장하는 개혁파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중시하는 보수파가 

군부의 주도원을 놓고 논란을 벌였다.


더욱이 병력의 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장교의 숫자가 대폭 늘었고 

따라서 장교단의 통일된 전술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p 270, 271

        공세, 계획되지 않은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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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부터 총참모부는 만슈타인의 구상을 기반으로, 

베네룩스 국가들의 중립을 과감하게 배제하는 

이른바 '황색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종래까지의 계획들과는 달리 관건은 바로 

작전적 사고의 본질을 구성하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었다. 


더구나 위험천만한 모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시간은 걸정적인 요인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장애물만으로도 기동로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노출된다면 치명적 피해를 입게 될 항공 위협 하에서 

기계화부대들은 가능한 한 신속히 진격해야 했다. 


늦어도 공세 개시 5일 내에 마스강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연합군은 독일군의 기도를 간파할 것이고 

든 자전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1939년 육군 장군참모현지실습의 사후강평에서 

할더의 요구대로 전선을 돌파한 기계화부대들은 

측방 위협을 무시하고 단숨에 솜까지 진격해야 했다.


완벽한 포위, 섬멸을 위해서였다.



총참모부의 작전계획에서 돌파는 

적 부대를 포위하고 섬멸하기 위한 전제이자 

작전적 사고의 원칙을 이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전술적 ㅡ 작전적 돌파에 실패한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 돌파에 성공하기 위해서도 

기습과 일관된 중점형성, 전술적 수준의 신속한 공격이 필요했다.


한 순간도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확보해야만 

고도의 위험 속에서 작전적 ㅡ 전략적 성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1940년 5월 10일 국방군은 공세에 돌입했다. 


하지만 폴란드 전역과는 달리 

병력과 장비, 물자 등의 양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핵심전력의 질적 차원에서도 열세를 면할 수 없었다. 


북부에서는 B집단군이 

슐리펜 계획을 재현하듯 양공작전을 전개하고 

남부에서는 C집단군이 수세를 취하는 동안 

기계화부대와 공군의 주력으로 편성된 A집단군이 

중부에서 공세의 중점을 형성했다. 


독일 공군은 기습적으로 연합군 공군 기지를 폭격했고 

연합군 항공기들은 지상에서 괴멸당했다. 


이로써 개전 3일 만에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은 

스당에서 지상군의 돌파를 지원할 수 있었고 

그로부터 단 6일 후인 5월 19일에 기갑부대 선두는 

대서양 해안의 아브빌 Abbeville 에 도달했다. 


마침내 거대한 포위망이 구축되었고 

연합군의 주력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국 원정군을 완전히 섬멸하는 데는 실패했다. 


독일군 기갑부대의 진격이 중지되자 영국은 그틈을 이용해 

됭케르크 Dünkirchen 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시켜버렸다. 


독일은 섬멸적인 승리, 

나아가 칸나이와 같은 대승을 눈앞에서 날려버리고 말았고 

따라서 만슈타인이 의도했던 전략적 승리 대신

'평범한' 자전적 승리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할더가 말한 대로 서부 전역의 제2단계, 

'적색 계획'을 통해 드디어 칸나이를 달성했다. 


독일군은 재편성을 완료한 6월 5일, 

솜강을 따라 설치된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슐리펜의 개념대로, 남부 및 마지노선의 후방으로 돌진했다. 


그 사이에 C집단군의 일부도 이에 호응하여 

마지노선을 공격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은 대규모 섬멸전으로 남부의 프랑스군을 사면초가에 빠뜨렸고 

결국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했다.



서부 전역의 승리는 

독일군의 작전적 수완과 연합군의 실책뿐만 아니라 

폴란드 전역 이후 실시된 공세적인 교육훈련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 덕분에 제병과가 긴밀하게 결합된 기동전과 

전술적-작전적 기갑부대 운용이 가능했으며 

마침내 대승을 달성했던 것이다. 


국방군은 구시대적인 제1차 세계대전의 방식을 고집한 

연합군을 단 6주 만에 물리쳤다. 


기갑부대는 기습적으로 중점을 형성하여 

마스강 일대의 프랑스군 진지를 돌파했다. 


과거 보병의 돌파부대 전술을 기갑부대에 적용하고 

'하늘을 나는 포병', 슈투가를 접목시켰다. 


도보 보병사단이 아닌 

기계화된 최정예사단들이 중점을 형성하여 

서부 전역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다.




     p 275 ~ 277

        공세, 계획되지 않은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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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역의 대승 이후, 

히틀러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한편으로 히틀러의 실낱같은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영국이 평화조약은커녕 

독일의 대륙 지배권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바다사자 작전' Unternehmen Seelöwe 으로 

영국 본토 침공을 시도했지만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한 이후 이를 포기하게 된다.


쌍방의 팽팽한 전략적 대치 국면이 형성되자 

독일로서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져버렸다.


과거 나폴레옹 시대에도 이러한 상황이 조성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슐리펜 시대 이래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망각한 독일 정부와 군부는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단계에서 이 같은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즈음 육군과 해군 지도부는 한 가지 돌파구를 마련했다.


지중해 지역의 영국군을 공격하여 

전략적 중점을 유럽 외부로 옮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중해 대체전략은 

대륙에서의 주도권 확보문제 때문에 일찍부터 뒷전으로 밀려났다.


서부 전역이 종결된 직후 할더는 

대륙에서의 패권 쟁취를 위해 대소련 전쟁을 계획했고 

또한 위험천만한 양면전쟁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p 279

        공세, 계획된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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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쟁의 목적은 소련을 제압함으로써 

유럽 대륙의 패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총참모부는 과거로부터 전수된 원칙에 따라 

속전속결을 통해 최후의 승자가 되고자 했다. 


따라서 대륙에서 잠재적국과의 전쟁 ㅡ 이로써 사실상 양면전쟁 ㅡ 

을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자발적인 의지와 독단으로 계획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전략적-작전적 사고 차원에서 

소비에트와의 전쟁을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한편으로는 과연 영국을 간접전략으로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점차 증폭되면서 대소련 전쟁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서 깨우쳤듯 

영국과 영국의 혈맹인 미국을 상대로 하는 장기간의 소모전을 대비하기 위해서

소련의 대규모 원료 생산지와 공업지대를 확보해야 했고 

이를 통해 독일과 동맹국들의 결속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7월 22일, 히틀러는 영국과의 평화협상이 무산되자 

러시아와의 문제 해결을 지시했다. 


이에 이미 작성된, 

영토방위의 수준을 뛰어넘은 구상안들이 제시되었고 

며칠 후에 이 계획들은 히틀러가 지향한 '생활권 전쟁'이자 

'히틀러의 궁극적인 목표'와 완전히 결합되었다. 


히틀러에게 '생활권'은 전략에서 

영국에 대한 투쟁과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소련을 제압한다면 대륙에서의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미국의 전쟁개입을 억제하고, 

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던 일본의 부담도 덜어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경제적 측면에서 

장기간 세계대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식민지를 획득하고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대 소련 전쟁은 이제 더 이상 

소련군을 격멸하는 예방적 차원의 전쟁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목적은 소련을 제압함으로써 

유럽 대륙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 

계속적인 전쟁수행의 여건 조성을 위한 것이있다. 


따라서 소련 침공은 

오늘날까지 수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방전쟁이 아니라 

패권확장을 위한 침략전쟁이자 

뒤에서 증명하겠지만 동부에서 생활권을 획득하기 위한 

인종 이데올로기적 섬멸전쟁이었다.



1940년 7월 31일 히틀러는 드디어 

소련 침공에 대한 의지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할더는 이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대결에서 러시아는 틀없이 끝장날 것이다. 


1941년 초반이 적기다 러시아를 더 빨리 무너뜨릴수록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




     p 280, 281

        공세, 계획된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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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로사 작전' 은 처음부터 전격전으로 계획되었다.


국경회전에서의 속전속결로 소련군의 주력을 섬멸하고자 했다.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시간과 공간이었다.





마르크스는 전체 전역을 9주에서 17주 정도로 예상했던 반면, 

할더는 초여름에 침공을 개시한다면 1941년 가을 정도에, 

즉 8주에서 10주 정도면 전역을 종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히틀러는 약 21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외국의 수많은 전문가들도 독일의 예측에 동의했다.


신속한 승리를 자신했기에 육군의 지휘부는 

러시아 침공을 통해 초래될 

양면전쟁에 대한 근심은 일찌감치 떨쳐버렸다.


필시 양면 전쟁으로 귀결되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치러야 할 소련과의 충돌을 적절한 시점에 

'단일 정면전쟁'으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화산의 분화구를 닮은 동쪽으로 갈수록 광활해지는 영토, 

그리고 엄청난 종심, 공격축선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하천, 

서부유럽에 비해 열악한 도로사정 등을 고려할 때 

도대체 작전가들은 어디서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까?


총참모부는 처음부터 열세를 전제로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실질적인 규모, 즉 전투력을 과소평가했다.


열세에서 공격해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이런 관점은 슐리펜 이래로 지속된 독일군만의 전쟁관념에 부합했고 

또한 무기체계의 성능, 부대의 교육훈련 수준, 특히 지휘 측면에서 

적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히틀러와 측근의 장군들은 소련군의 전투력을 우습게 여겼다.


1920년대 폴란드와의 전쟁, 

1939/40년의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소련군의 중간 및 고위급 장군들의 지휘능력은 수준 이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때전 당시에 

독일군의 부차적인 전역이었던 '동부전선'에서, 

특히나 열세에서도 '왼손으로' 짜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러시아의 영토 일부를 점령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소련군을 얕잡아 본 것이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스스로 전쟁수행능력의 우위를 확신했고 

또한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가 

조기에 분열되어 지리멸렬하리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설상가상 마르크스는 육군 총사령부의 계획에 

러시아 전역의 종결을 '1918년 동부에서의 철도공격'*

으로 표현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 철도공격이란, 원문에는 

'열차를 타고 진군하는 것' Eisenbahnvormarsch 로 표기되어 있는데 

1918년 독일의 공세에 무기력했던 러시아군을 조롱하는 의미임.



그러나 소련군의 전쟁수행능력에 대한 과소평가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혐적 

ㅡ 극소수의 국방군 고위급 장교들만의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동부 전역을 경험 ㅡ 

산물이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비롯되었다. 


세계대전의 작전적 경험과는 무관한 사회적인 통념, 

상대 국민을 멸시하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저질 인종인 러시아 병사는 당연히 

독일군 병사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 마치 진리처럼 여겨졌다. 


이로써 극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불굴의 용기를 발휘했던 

러시아군 병사들의 능력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대몰트케와 슐리핀 팔켄하인이 엄중히 경고했던 

러시아 영토의 광활함과 무한한 인적 동원능력을 경시고 말았던 것이다. 


1914년 러시아의 무시무시했던 무한(無限) 동원능력을 잊은 채 

1940년에는 러시아를 사상누각으로 인식해버렸다. 


이렇듯 많은 부분에서 총참모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현실을 바라보고 평가했다. 


그 예로 1939년 8월, 

소련군이 할힌골 Chalchin Gol 전투에서 일본군 제6군을 대파076했는데

이처럼 자신들의 의도에 부합하지 않는 사건들은 철저히 불문에 부쳤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실수였다. 


소련군은 이 회전에서 전술뿐만 아니라 작전적 차원에서도 

기계화부대와 공군을 결합한 제병협동전투수행 능력을 입증해냈다. 


하지만 독일은 이를 무시한 채 극도의 교만과 아집에 빠져 있었다. 


론 과거 러시아군과의 전투경험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폴란드와 특히 프랑스 전역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때문이었다. 


총참모부는 전역 이후 

공군의 지원 아래 최정예 기갑부대들을 주축으로 

기동전을 구사한다면 열세에서도 승리할 수 있으며 

드디어 공세의 원칙이 부활했다고 확신했다. 


향후 이러한 개념을 발전시키면 

어떠한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결국 총참모부는 '바르바로사' 작전개시 직전에 

기갑사하의 전차 숫자를 감소시켜서 

사단의 수를 증가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 1915년 팔켄하인이 보병사단의 숫자를 증가시키기 위해 적용한 방법으로, 

기준 기갑사단 예하의 전차연대 중 하나를 예속해제시켜 

이들로 새로운 기갑사단을 창설하여 기갑사단의 숫자를 늘였다.(저자)



기갑사단에 보병대대와 오토바이대대를 추가로 창설하여 

보병 전력키고 기계화부대 숫자를 늘려 

기동전 수행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의도였으나 

제로는 기갑부대의 타격력이 감소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p 286 ~ 289

        공세, 계획된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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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소련 침공을 위해 해결해야 할 매우 중대한 

작전적 사고와도 밀접하게 관련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속도 위주의 기동전에서 광활한 작전지역을 감안할 때 

기동성을 갖추고 공세부대를 후속할 수 있는 

대규모 군수보급체계가 필요했다. 


더욱이 전투부대들이 기계화되고 고속기동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수의 중요성도 한층 강조되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 2차 세계대전의 전간기 동안 

작전의 우위로 인해 이토록 중요한 문제가 계속해서 무시되고 말았다. 


일례로 동부전선에서 수송의 중점은 철도에서 도로로 전환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야지에서 

일선 진투부대를 후속할 수 있는 트럭과 같은 수단들이 필요했으나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와 동일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수년 동안 노출된 

철도 부문의 문제들도 아직 해소하지 못한 상태였다.



할더를 포함한 극소수의 예외도 있지만 

총참모부는 군수분야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대적인 기동전을 위해 

군수의 중요성이 현저히 증가했음에도 

수송과 보급분야는 경사를 넘어서 무시되고 말았다.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와 군수지원의 공간적 범위는 

전통적으로 중부유럽 및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 범위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 한계를 드러냈다. 


동부 전역 기간 중 유발된 군수문제들은 시종일관

즉흥적인 기지(機智)로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이로써 작전가들은 

의례 '군수 분야의 전문가' 들이 어떻게든 마법처럼, 

난감한 상황을 해결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작전을 우선시함으로써 '바르바로사 작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는 대단히 심각했다. 


독일군은 종래까지 수행한 작전의 범위를 능가하는 공간에서 

신속한 공격을 감행하고자 했다. 


이 공격의 성공여부는 광활한 공간에서 

300만 명 이상의 병사들과 약 50만 대의 차량, 30만 필 이상의 말에 대한 

원활한 보급에 달려 있었다. 


환경적 조건도 동쪽으로 갈수록 

넓게 펼쳐지는 지형, 불비한 도로망, 빈약한 사회간접시설과 혹한의 기후 등 

중부 및 서부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열악했다.


특히 전체적인 군수 부대들은 

다모클레스의 칼이 머리 위에 매달려있는 것처럼 

과중한 시간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동부로 넓게 펼쳐진 소련 지형의 특성상, 

공격정면은 최초 2,000km 에서 작전 진행 중에는 3,000km 이상으로 확장될 것이고 

여러 방향의 작전목표들은 최초 집결지로부터 약 1,500km 이상 이격되어 있었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공격하는 전투부대들에게 원할한 보급은 필수적이다.


특히 기계화부대에 대한 보급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한편, 전역 초기에 국경지역까지 

물자수송을 위해 철도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이 소련 영토에 진입하면서부터 매번 궤간(軌間) 변경 

ㅡ 독일과 소련은 철도 규격이 달랐다 ㅡ 

을 해야 했기에 소련의 철도망 이용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총참모부는 전역 기간 중 예상되는 보급의 문제점들을 인식했지만 

단기간의 '전격전'으로 계획, 예측했던 터라 

그런 문제들은 무시해도 좋다고 결론지었다.


작전가들은 군수분야의 문제들로 인해 

작전에 차질이 발생하거나 위협적인 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결코 예측하지 못했다.


단기 속결을 전제로 군수분야도 그에 맞게 준비했다.


총참모부는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을 초기 단계에서는 

화물차량을 이용한 보급만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독일군은 군수보급 측면에서만큼은 

극도의 모험을 감행하려고 했다.


국방군은 당시까지도 속전속결의 기동전을 위해 

필수적인 100% 차량화된 보급수송부대들은 보유하지 못했다.


예상되는 모든 문제점들을 인지했지만 총참모부도, 히틀러도 

보급과 수송문제들이 작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그래 왔듯 과거처럼 

군수분야는 간과해도 문제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만일 전쟁이 장기화된다면 그러한 문제점들 ㅡ 어떠한 형태로든 ㅡ 

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전쟁 전체를 그르칠 수도 있었다.


이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독일군 지도부는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우월감과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 누구도 장기전이 벌어지리라고는 생가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처럼 

모두들 성탄절은 집에서 가족들과 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소련 침공 전날까지 

독일의 종말 finis Germaniae 이 닥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멸망을 예측했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이 

종전 후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객관적으로 증명된 바는 없다.


어쨌든 선잔장관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는 

1941일 6월 16일의 일기에 오만방자하게도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이는 당시의 분위기를 잘 반영한다.



"소련은 약 180에서 200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아마 더 적을 수도 있다.


하여튼 우리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나 인적 자원, 무기체계, 물자의 성능 면에서 

우리와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곳곳에서 돌파는 성공할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유린될 것이다.


총통은 약 4개월로 예상하고 있지만 

나는 훨씬 더 빨리 끝나리라 확신한다.


볼셰비즘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우리는 역사상 유례없는 대승을 맛보게 될 것이다.


과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모스크바를 저쟁에서 이탈시켜야 한다.


유럽이 초토화되고 피바다가 될 때까지…."




     p 291~ 293

        공세, 계획된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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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로사 작전'을 통해 전술적 ㅡ 작전적 수준에서, 

또한 작전적 ㅡ 전략적인 차원에서 

독일군의 취약점들이 완전히 노출되었다.


총참모부는 실제적인, 있는 그대로의 공간과 시간적 요소를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대로 평가했다.


마이어 Meier ㅡ 벨커 Welcker 의 언급대로, 총참모부는 

'러시아 영토,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히틀러와 총참모부는 소련을 속전속결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소련의 잠재력이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바로 고전적인 독일의 작전적 사고로부터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처럼 

히틀러와 총참모부도 동부 전역의 공간과 시간적 요인을 경시했고 

또한 여기에 과거의 적에 대한 고정관념과 우월주의까지 결합되었다. 


그 결과 소련군의 물질적 능력과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광활한 영토 

그리고 그곳의 기후 조건들을 철저히 과소평가했다. 


게다가 육군 총사령부와 히틀러의 지휘권 다툼으로 

엄중해야 할 지휘체계에도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기까지 했다.



국경 일대의 방어선을 신속히 돌파하여 종심상으로의 진격 후 

양익포위망을 형성하여 소련군을 섬멸한다는 것이 

바로 '바르바로사 작전계획의 핵심이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총참모부는 처음부터 

러시아에서의 거대한 슈퍼 칸나이를 계획하지 않았다.


약화시킨 후 모스크바 전방에서 결정적인 회전을 감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전적인 작전적 원칙에 따라 전역을 구상했던 할더는 

결국 패전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히틀러가 작전적-전략적 목표를 

적군의 섬멸이 아닌 공간 확보에 두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아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소련군의 능력과 러시아 영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갑부대의 대규모 손실이 분명한 전역의 중대한 위기 속에서도 

히틀러는 새로이 생산된 전차들을 북아프리카에 투입하기 위해 남겨두었다. 


더욱이 모스크바 공세 개시 직전에 

제2항공군을 지중해로 이동시켜버린 결정은 

독일군 수뇌부의 교만이 극에 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미 서부 전역에서의 전술적 ㅡ 작전적 문제점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단순히 배제했다는 사실도 동부 전역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실상 그러한 문제점 제거 자체가 불가능했다. 


자원이 빈약했던 독일제국의 구조적 결함 때문이었다. 


자원도, 재정도 부족했기에 육군을 전면적으로 차량화할 수도 없었다. 


지 소수의 부대만 기계화, 차량화되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일반 보병부대로 남았다.



그러나 이러한 도보 보병사단들로 기동전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들은 종심으로 돌진하는 기갑부대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여전히 독일군의 기동속도는 

도보 보병이나 우마차의 능력에 의해 좌우 되었다. 


언제나 보병의 속도에 맞추어 제병협동전투를 실시해야 했기에,

기동성 부족은 전술적 차원의 통합 전투력도 약화시켰다. 


특히나 포위작전을 조기에 종결시킬 수도, 

작전적 공격 기세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병이 포위전투 지역에 도착하지 않으면 

기갑부대가 그 지역을 이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술적 성공들을 작전적 수준으로 전과 확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포위회전의 제2단계, '소탕' 작전에 기갑부대의 발이 묶여 있었고 

따라서 기계획된 차후 작전에 큰 지장이 초래되었다. 


전술이 작전을 지배하는 사례가 곳곳에서 빈번히 발생했다. 


게다가 기갑군의 전투력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사단들이 포위작전에 더욱더 적극 가담했어야 했다. 


보병의 행군속도로 인해 결국에는 포위 기동의 속도도 저하되고 말았다. 


작전계획 수립단계에서부터 

이러한 기갑사단과 보병사단의 행군속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따라서 '포위망의 형성 가능성과 그 위치'는 

결국 소련군 지휘관의 실수 여부에 달려있었다. 


앞서 기술했듯 보병의 기동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소규모 포위망을 구축할 수는 있었어도 기계획된 거대한 포위는 불가능했다. 


기갑부대가 포위망의 동쪽을 봉쇄하는 데 성공했지만 

보병 전투력의 부족으로 

포위망을 완전히 폐쇄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따라서 기갑부대의 성공적인 작전에도 불구하고 

섬멸회전을 달성하지 못했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기갑부대와 보병부대의 간격이 점점 더 크게 벌어졌다. 


또한 기갑부대의 보급지원을 위한 

후방 병참선의 안전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전투지역 후방에 위치했던 보급부대들도 

소탕되지 않은 잔적들이 여전히 저항하는 지역에서 움직여야 했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처음부터 문제투성이였던 보급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들은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나치의 선전으로 탄생한 '전격 전 군대'라는 

독일군의 이미지는 전역에서 산산 조각나버렸다. 


당시의 육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동물의 행군능력이 공격 속도를 결정한 

이른바 보병과 우마차의 군대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동성이 부족했던 포병을 부분적으로 대체했던 슈투카와 전차는 

긴 창의 날카로운 끝을 형성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하나였지만 

두 부류의 전투력을 보유한 군대가 러시아 전역에 투입되었고, 

작전의 마지막 몇 개월간 입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은 

당시 독일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으며 

마침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p 302 ~305

        공세, 계획된 전격전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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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말기,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빼앗긴 것도 문제였지만 

한편에서는 유류부족으로 전투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머지않아 항공기의 출격도, 전차의 가동도 중단될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독일이 장악했던 극소수의 헝가리의 유전지대도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헝가리를 확보하기 위한 공세를 명령하였다.


이러한 최후의 공격작전도 소련군의 저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설사 이 공격이 성공했다고 해도 

유류 부족과 수송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연합 공군의 폭격기들은 

원유 재처리 및 생산시설들을 집중적으로 폭격했고 

특히 독일의 사회기반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에 

여타 전선으로 유류를 수송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부 장군들은 작전적 수준의 기동방어를 주장하고 끊임없이 시도했지만, 

수량도 부족하고 온갖 잡다한 장비들을 보유했기 때문에 

기동방어도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따라서 차량화 되지 않은, 

우마차를 보유한 보병사단들을 투입하고 방어를 위해 

참호나 기타 야전축성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병통치약으로 부각된 작전적 기동방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우선 보병사단들이 차량화되지 못한 것은 

전투차량의 부족이기도 했지만 유류도 궁핍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중점을 형성하는 

주공부대에만 그나마 충분한 전투차량을 편제시켜 주었다.


연합군은 끊임없이 차량화를 가속화시켰던 반면, 

국방군은 오히려 우마차 군대로 퇴보해갔다.


국방군의 반차량화 실상은 시시각각 심각해지고 있었다.*


* 그 예로 제3기갑군은 1944년 소련의 하계 공세 당시 

약 6만 필의 말을 보유했지만 전차는 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했다.


작전적 수준의 신속한 기동전은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p 315, 316

        고수방어와 기동방어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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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일부 장군들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작전뿐만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도 

히틀러가 어설픈 아마추어라고 거리낌 없이 비판했는데 

이는 다시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


히틀러는 양면전쟁의 전략전 문제를 인지하고 

오로지 충분한 자원을 확보하고 안정적인 산업기반이 조성되어야만 

장기간의 소모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반면, 대다수 장군들의 최종 목표는 적군의 섬멸이었다. 


왜 히틀러가 물론 전투력이 부족했음에도 총제적인 전략적 목표, 

즉 캅카스의 자원을 학보하기 위한 공세를 

여타의 자전보다 상위에 두었는지를 장군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히틀러가 가장 기초적인 작전적 원칙들에 대해 무지했던 것처럼 

군 지휘부도 전쟁을 전략적 차원에서 이해하고 

지휘하는 능력 면에서 부족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과거 국방군의 엘리트들은 소위 

'글로 쓴 승리' (베그너Wegner) 라고 일컫는 참전 기록물들을 출간했다. 


그늘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전략적 관념 부족을 배제하고 

패전의 책임과 모든 작전적, 전략적 오만을 

이미 죽어버린 독재자에게 전가했다. 


히틀러가 대다수의 군부측근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았던, 

놀라울 정도로 탁월한 전략적 본능뿐만 아니라 

전략적 상황을 통찰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오히려 장군참모장교들보다 

전쟁을 더 현실적인, 현대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장군참모장교들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작전적 사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집착함으로써 

현대적이고도 총제적인 사회적 전쟁수행이라는 

새로운 개념들을 모두 무시했다. 


물론 전쟁 발발 초기에 히틀러가 

일부 군사 ㅡ 전략적 사안들을 본능적으로, 

때로는 다행히 이성적인 행동으로 성공했다고 해도 

전쟁이전과 진행 중에 독일의 경제적, 지정학적 상황에 

적합한 전체적인 전략개념을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그과 경멸했던 귀족 출신의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전략을 설계, 조율하여 여기에 부합하는 

작전계획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p 328, 329

        히틀러는 과연 진정한 전략가였나?

           8. 잃어버린 승리, 작전적 사고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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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8일 국방군은 항복을 선언했다. 


독일은 30여 년간에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연합군은 독일을 4개의 점령지로 분할하고 무장 해제시켰다.  


이로써 독일은 유럽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 


1918년과는 달리 완전한 패배였고 무조건 항복이었다. 


게다가 국방군은 600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동부와 발칸지역에서는 인종 이데올로기적인 말살 전쟁을 전개하여 

엄청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따라서 독일의 국가이미지는 윤리적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크게 실추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에게 전쟁 종식은 단지 패망일 뿐이었다. 


패전 후 40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전쟁 종식을 달리 인식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85년 5월 8일 독일 연방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Richard von Weizsäcker는 

연방의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일을 독일도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며 

나치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동감하면서 국민적인 반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논란과 비판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한편, 동독과 서독이 과거 문제를 청산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다.


동독은 소위 '파시즘적인 국방군' 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군과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구분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은 애초부터 인종 말살 전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상적인 이유 특히 

파시즘을 극도로 적대시했던 사회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반면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국방군과 나치체제를 별개로 규장했다.


전쟁에 대한 책임, 그리고 전쟁과 관련된 모든 범죄행위에 대한 책임은 

국방군이 아닌 오로지 친위대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패전의 책임은 고스란히 히틀러에게 떠넘겨졌고 군은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 국방군에 대한 국내의 정치적 논쟁은 오랜 기간 매우 격렬했다.

결국 1990년대에 이르러 '결백한 국방군'의 이미지가 깨졌다.

국방군 일부 군대의 범죄행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저자)




     p 346, 347

        패인에 관한 연구와 과거사 극복을 위한 노력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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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첨예화된 냉전의 첫 조짐이 보였던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무장해제시키고 자원을 몰수하여 다시는 무장할 수 없도록,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자는데 합의했다.


이러한 조치로 프로이센 ㅡ 독일이 

군국주의 국가로 부활하는 길을 영구히 차단하고자 했다.


그러나 동 ㅡ 서 양진영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이러한 합의는 무산되었다.



한편 독일은 서방국가들과 소련 간의 

정치적 대립이 지속되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북에서 남으로 양 진영의 경계선이 생겨났고 

결국 독일은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고 말았다.


소련의 점령 지역이자 훗날 독일 인민민주주의공화국(동독)은 

작전적 ㅡ 전략적 관점에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의 서유럽 침공을 위한 전개공간으로 전락했으며 

서방국가들이 점령한 훗날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NATO 방위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소련은 이미 1948년부터 점령지역에 

군대에 준하는 경찰력을 비밀리에 창설하기 시작했다.


연합국들은 그 대응책으로 서독의 재무장에 관한 논의를 벌이게 된다.


프랑스가 재무장에 큰 우려를 표명했지만 

재래식 군비 면에서 소련의 압도적인 우세를 인식했던 미국과 영국은 

서독의 군사력이 서방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재래식 전력의 열세를 직접 경험하게 되자, 

서독의 재군비는 다시금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한편, 신생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 Konrad Adenauer 도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논리로 서독의 재무장을 주장했다.


독일이 유럽방위에 기여함으로써 

주권을 회복하고 국제기구에서 연합국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아데나워의 목표였다.


게다가 서독의 영토방위 문제도 중요했다.


그는 1953/54년 경 서방 연합국이 핵전쟁을 계획하고 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핵전쟁터로 사용되는 독일은 초토화되리라는 정보를 얻었다.


이에 아데나워는 독일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재래식 군사력을 강화하여 핵전쟁이 유발되지 않도록, 

방위력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독군이 서방의 동맹체제, 이를테면 

유럽방위공동체 EVG나 NATO에 가입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국내에서 거국적인 재군비 반대운동이 일어나기 한참 전인 1950년대부터 

일부 과거의 군인과 정치가들은 새로운 연방군의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1950년의 슈베린 위원회 Dienststelle Schwerin 와 

1950년 10월에 창설된 암트 블랑크 Amt Blank 가 바로 그 주역이었다.



이에 미국도 

'히틀러와 단절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국방군 창설을 요구했고 

독일 정부도 이에 흔쾌히 응했다.


독일은 12개의 기계화사단으로 편성된 군대를 창설하기로 계획했다.


동부전선에서의 경험을 근거로 

그 정도면 소련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독일 정부의 목표는 과거 국방군의 타격력을 갖추되 

이념과 정치적인 측면에서 과거 국방군과는 철저히 단절된

의회의 통제를 받는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구조적 혁신'으로 신생 독일 연방공화국의 주권을 보호하고 

영토 통합을 위한 '민주화된 군대'와 전술적 ㅡ 작전적 사고 측면에서 

'과거의 전통을 추구하는 군대'는 어쩌면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1950년 초 독일의 군사 저널리즘에서는 

작전적 사고의 르네상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반면, 독일 정부는 

과거 총참모부의 전통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뜻밖에도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전문가들, 

즉 국방군의 작전가 출신 장군들이 새로 창설된 연방군, 

특히 육군의 수뇌부에 대거 입성했는데, 

당시로서는 이러한 현상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


과거 총참모부의 작전부장을 역임한 아돌프 호이징어가 합참의장에 발탁되었듯, 

당시 '출신 성분이 분명한 유력인사'들이 군의 고위직을 장악했다.







호이징어는 수년간 연방정부를 위해 막후에서 자문을 맡았고 

암트 블랑크에서 그를 군사부문의 책임자로 발탁했다.


재무장 초기 단계에서 과거의 동료들과도 원할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고위직부터는 능력과 자질, 공동의 합의보다는 

개인적인 출신, 배경이 더 중요했다.



주요 작전 전문가들이 암트 블랑크와 새로이 창설된 연합군의 

요직을 장악할 수 있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단기간 내에 강력하고도 작전적 수준의 방어에 적합한 

독일군의 창설을 기대했던 서방 연합국의 요구 때문이었다.


독일 정부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충분한 자질을 겸비한 군지휘관이 필요했고 

따라서 과거 국방군 출신이면서 

작전적 측면에서 숙달된, 유능한 장교들을 선발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육군의 인적, 지휘구조상 

그러한 조건을 갖춘 인물들은 바로 장군참모장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총참모부의 작전참모부에서 근무한 자들이 

바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이었다.


그들 간에는 매우 긴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직접 인선에 참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대부분이 동부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한 경험도 없었고 

사실상 서방의 요구조건에 충족되지 않았지만 

새로이 창설된 육군의 주요 보직을 독점했다.


동부전선에서의 풍부한 전투경험을 지녔던 지휘관 출신 장교들이 배제된 이유는, 

작전참모부에서 근무한 장군참모들을 발탁하고자 했던 수뇌부의 의도도 있었지만 

포로 신분으로 소련에서 돌아온 이들에 대한 불신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서부 전역에서 참전하거나 고위급 지휘부에서 근무했던 장교들에 의해 

프로이센 ㅡ 독일군 장교단의 부활이 시작되었고 

더불어 독일의 작전적 사고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시 고위 계층에 있던 장군참모장교들은 

제각기 직책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어쨌든 동부 전역에서의 범죄적인 전쟁행위와 관련되어 있었으며 

비정치적인 구사 전문가들로서 나치체제에 동조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초 

'결백한 국방군'과 '범죄적인 나치 체제'를 확실히 구분하려는 인식이 확산되자 

이러한 장교들은 더 쉽게 연방군에 편입되었다.


게다가 모든 고위급 장교들을 조사 대상으로 

인사검증위원회 Personalgutachterausschuss 가 구성되었는데 

이는 독일 전후(戰後)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의 전쟁범죄와 홀로코스트 Holocaust 

에 대한 참여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호이징어처럼 전혀 다른 정치 ㅡ 사회체제 하에서, 

그리고 4개의 독일군*에서 퇴출당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 육군, 이후의 제국군, 제2차 세계대전시 국방군, 이후의 연합군



대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없는, 이른바 관료적인 장군들과 장교들 

ㅡ 한스 슈파이델 Hans Speidel 예비역 중장 등을 포함하여 ㅡ 

도 연방군에 편입되었다.


그들은 나치체제에서도 그랬듯 총참모부의 전통에 따라 

철저히 정치권과 거리를 두었고 관여하지도 않으려 했다.


이렇듯 '완전히 변화된 정치적 환경에서 다시금 

민간 정치지도부의 우위를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기 때문에 

다시 군복을 입을 수 있었다.




     p 350 ~ 355

        연속성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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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징어의 작전적 구상, 즉 소련의 침공에 대비해야 할 

서부 유럽의 방위 문제의 핵심에는 늘 독일이 존재했다.



그러나 호이징어와 함께 이러한 문제를 연구했던 작전가들은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전략 상황에 직면했다.


과거 독일은 양면전쟁의 위협이 존재했던 유럽의 중심부였지만, 

분단된 동, 서독은 서로 대치하게 된 

양 진영의 첨단이자 외곽지역으로 변해 버렸다.


게다가 1950년대 말까지 독일은 독일인의 것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지배하에서, 연합국이 전시에 사용할 공간일 뿐이었다.


이제 독일은 

북대성양을 전략적 중심으로 인식했던 미국인들의 전초기지였고 

이러한 위협적인 상황 때문에 

서독의 작전가들은 깊은 고뇌에 빠져있었다.


이로써 슐리펜 시대로부터 발전되어온 

작전적 사고의 핵심이었던 지리전략 전제조건이 의미를 상실했다.


서독의 작전가들에게 양면전쟁의 위험은 사라졌고 

시간적 압박 속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추구했던 

속전속결과 신속한 공격 방법은 더 이상 연구할 가치가 없어졌다.


이제는 새로운 전략 상황에 부합하는 작전, 

즉 서방 동맹국들의 월등한 잠재력을 동원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획득하고 

독일 영토를 방위하기 위한 방어작전 구상에 몰두해야만 했다.



슐리펜 이래로 작전적 사고의 핵심은 

기습적인 개진 선포와 함께 

즉시 전장을 적의 영토로 옮겨 속전속결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개념은 전략적 수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지정학적 상황과 군사력 수준, 그리고 확고한 정치적 원칙, 

변화된 지리전략적 상황 때문에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중추적인 요소들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서독은 자전적 ㅡ 전략적 수준에서 

과거 서방 적대국들을 상대할 때처럼 대륙패권국가가 아닌, 

제는 해양패권국가의 일부였고 

작전가들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군사전략과 작전을 구상해야 했다. 


장차전에서는 적국으로의 신속한 공세가 아닌 

점진적인 군사력 증강을 보장하고 시간을 획득하기 위한 

방어작전을 준비해야 했다. 


제는 섬멸전략이 아닌, 

억제전략이 실패하는 순간에 적용해야 할 포괄적인 소모전략이 필요했다.



새로운 작전적-전략적 상황에 직면한 호이장어와 그의 동료들은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핵심요소들을 포기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사고의 전환을 강요받았다. 


군사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비정치적 성향을 지녔던 그들은 

이러한 상황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또한 그들은 지리전략적 여건이 변했지만 

전술과 연계된 작전적 사고의 또 다른 요소들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확신했다. 


즉 월등한 지휘력, 전투수행 능력, 

주도권 확보 측방공격과 포위에 기반을 둔 작전적 기동전을 구사한다면 

아직도 승산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새로운 동맹국들은 이러한 작전적 능력도 없을뿐더러 

재래식 군사력이 월등한 소련과의 전투 경험도 없었다. 


이에 호이징어와 옛 장군참모장교들은 

한편으로는 서독의 국제지위를 인정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연합방위 체제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넓힐 수 있는 호기로 인식했다. 


그들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와는 달리 

서방 동맹체제 하에서 자신들의 패권적 지위를 단념하고 

애초부터 인내심이 투철한 새로운 우방임을 내세웠다. 


이러한 정책은 동맹에 참여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호이징어는 작전적 사고와 동부 전역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연합국의 군사력 열세와 소련의 압도적인 군사력 우세, 

그리고 방어작전에 불리한 800km 이상 늘어난 전선을 고려할 때 

지역 확보를 위한 진지전 성향의 방어작전은 

대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게다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서독의 지형적 특성상 방어 종심도 매우 얕았다.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북부의 함부르크 Hamburg까지는 약 125km, 

남부지역의 종심은 최대 425km 정도에 불과했고 

인강 동쪽에는 방어작전에 유리한 지형도 거의 없었다. 


호이징어는 '1949/50년 서유럽의 방위' 

Die Verteidigung Westeuropas 1949/50 

등의 모든 보고서에서 공세적인 기동방어를 주장했다. 


아데나워의 지시를 받아 작성된 

'힘머로더 보고서' Himmeroder Denkschrift 에는 

본질적으로 호이징어의 작전적 사고와 구상이 담겨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압도적인 재래식 군사력 우위를 점한 러시아를 상대로 

일과 서유럽을 모두 온전히 지키가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호이징어는 

연합군이 일사불란하고도 통합된 작전적 능력을 발휘한다면 

소련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총체적인 서유럽의 방위차원에서 얕은 종심 때문에 

더더욱 최대한 동쪽에서 작전을 실시해야 하며 

소련의 기습적인 침공에 대비하여 

신속한 방어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유럽의 방위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곳의 작전적 중점을 제시했다. 


첫째,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소련이 지중해로 진출하는 입구이자 서쪽으로 향하는 병참선이 될 수 있으므로 

이곳을 반드시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남부 스칸디나비아 덴마크, 슐레스비하-홀슈타인Schleswig Holstein 지역, 


세 번째는 남부독일, 알프스와 타글리아멘토 Tagliamento 지역이었다. 


발트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고 소련의 서양 진출을 저지할 수 있는 

북부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과 알프스, 이탈리아 지역을 이용한다면 

남북 양방향에서의 측방 역습으로 러시아의 침공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즉 그는 공세적인 기동방어를 서유럽 방위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정면에는 연합 공군의 지원 하에 적을 고착하고 

지상군의 주력을 남과 북에서의 측방타격에 투입하여 

적을 격멸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방책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했던 전형지인 

'적의 측후방 타격 전법'이었다. 


중부유럽이 주전장인 그의 전쟁계획에서는 

핵무기 사용이 철저히 배제되었다. 


바쿠의 유전지대와 같은 

러시아 영토 내의 목표물을 공격할때만 핵무기를 사용하도록 한정했다. 


소련이 중부유럽을 침공한다면 서방 연합군은

기갑 및 기계화사단등의 재래식 전력으로 싸워야 하며 

엘베강과 라인강 일대에서 방어자전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독일군 기갑사단 12개를 포함하여 

대략 25-30개의 완편된 사단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장갑화된 펀치력'으로 

대서양 방면을 향한 소련군의 공세를 신속히 저지하고 

미국 본토에서 증원 전력이 도착하는 즉시 

역습으로 소련군을 격멸한다는 계회을 제시했다. 


또한 공군에게는 이동 중인 소련군의 예비대를 격멸하고 

지상군의 방어전투를 근접지원하는 임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호이징어의 구상은 세계대전에서도 증명되었듯 

소련군이 확실한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지만 독일군의 기동전에는 취약했때문에 

서방 연합국은 소련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독일의 지원과 독일군 작전적 노하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호이싱어가 핵무기 사용을 배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 주된 이유는 연합군 내부의 기밀유지로 오랫동안 

그가 미국의 핵무기 사용계획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p 355 ~ 358

        연속성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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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징어의 구상에도 간과할 수 없는 중대한 딜레마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계획상 서독은 서방국가들의 방위를 위한 전초기지일 뿐만 아니라 

이른바 기동방어를 위한 주방어지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적 안전보장과 연계된 NATO 가입과 국가 주권 보장의 대가로, 

전시에 서독은 장차전의 주전장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독일연방정부는 그러한 상황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호이징어는 서방의 안전보장에 기여하기 위해서 

사실상 이같은 딜레마를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그는 전쟁의 위험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재래식 억제력을 증강시켜야 한다는 또 다른 대안도 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한다면 

가능한 한 동부에서 방어작전을 시행하고 

전장을 최대한 신속하게 동독지역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공세를 통해 가능한 한 신속히 적의 영토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점에서 

호이징어의 계획은 독일의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맥을 잇고 있었다.


또한 이즈음 그의 작전적 의도는 연합국의 의도에 정확히 부합했다.


1950년 연합국은 전체 동맹국의 안전보장과 영토 수호를 위해 

가능한 한 동쪽으로 진출해서 방어작전을 수행하는, 

즉 '전방위전략 forward strategy' 을 채택한 상태였다.




     p 359

        연속성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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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부터 1955년 연방군이 창설되기까지, 

서독과 장차 창설될 군대의 융합과정, 

그리고 유럽에서 미국의 군사적인 개입을 둘러싼 안보정치, 

국제정치적 전개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서독에서의 작전적 계획들의 발전과정도 이해하기 어렵다.


서방 연합국들은 

서독 연방군이 독일의 군대가 아닌 엄격한 통제를 받는 

동맹군의 일부로 창설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독일이 

중립적인 성향의 동맹국이 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었다.




     p 361

        연속성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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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전후로 호이징어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과의 접촉 과정에서 

서방 동맹체제 내에서도 자신들이 수립한 

공세적 기동방어 계획들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NATO의 군사전략이 변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종래까지 전략적, 정치적인 무기로 전쟁계획에서 배제되었던 핵무기를 

장차전에서는 전술적 차원에서 운용하기 위한 계획이 등장했다.


향후 유럽에서 소련과의 어떠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든 NATO는 

모든 전술, 전략 핵무기를 이용하는 섬멸적인 반격, 

소위 '대량보복전략' massive retaliation 으로 맞서기로 했다.


새로운 군사전략이 갑작스럽게 대두된 것은 아니었다.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 우위와 핵무기 보유, 

서방 국가들의 재정적 문제들이 겹치면서 

이 전략은 1950년대 초부터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계획을 접한 독일인들은 매우 큰 충격에 사로잡혔다.






1955년 이전까지 그러한 계획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도 없었고 

작전적 수준의 잰쟁과 전술 핵무기를 결합하는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특히나 자신들이 구상한 

작전계획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공세적인 재래식 기동방어전투는 더 이상 의미를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핵무기 보유 측면에서 우위를 점했던 연합국은, 

양 진영이 충돌한다면 

초전 30일 동안 핵 난타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판단했고 

두 번째 단계에서 전술 핵무기를 투입하고자 했다.


비로소 종래까지 공존했던 개념들, 

즉 재래식 방어와 전략적 핵무기 운용이 결합되었다.


전술 핵무기 운용이 포함된 한층 발전된 작전적 독트린에서 

재래식 기동부대들의 과업은 최소 소련군의 핵공격을 회피할 수 있도록 

최대한 원거리에서 전투력을 보존하고 적의 공략을 신속히 저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공중우세를 달성하고 핵무기로 반격하는 임무가 공군에게 부여되었다.


지상군이 준비된 방어진지에서 

탄력적으로 전투를 수행하면서 적에게 집중을 강요, 유인하면 

공군이 핵으로 섬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 시나리오에서 주전장은 바로 독일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독인들의 중대한 관심사는 

'어디에서 방어작전을 수행해야 하는가?' 였다.


NATO는 서독군의 창설 이전, 즉 독일군이 참가하지 않을 경우, 

라인강 ㅡ 아이셀강 jssel 선에서 소련군을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창설되자 방어선을 

트라베운하 Trave 엘베강과 베저강 Weser ㅡ 레흐강 Lech 선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방어작전의 중추'였던 기계화부대를 대신한 전술핵무기 운용 지역을 

서독 영토의 동부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재래식 군사력을 운용 지역을 서독 영토의 동부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어쨌든 재래식 군사력을 운용하는 지상군은 

핵반격 전력을 보호하고 적의 전투력 집중을 강요하는 '방패'였고 

핵무기 그 자체와 핵무기를 운용하는 집단, 

즉 공군이 적군을 섬멸하는 '검'이었다.


따라서 공군이 핵전쟁의 주역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새로운 군사전략이 연합국 내부에서 무조건 수용되지는 않았다.


육군의 주요 인사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지휘권 침해를 좌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NATO 로서도 핵무기를 조기에 투입하는 방안 외에는 

재래식 군비 면에서 소련의 압도적인 우세 

ㅡ 1950년대 중반, NATO는 18개 사단을, 소련은 82개 사단을 보유 ㅡ

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 없었다.


'핵 억제력이 효력을 발휘한다면 독일의 초토화를 막을 수 있다.' 

라는 희망 이면에는 

핵전쟁 발발 시 독일의 전 국토가 

황폐화되리라는 무시무시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었다.




     p 367 ~ 369

        핵전쟁 시대에서의 작전적 사고의 적용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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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이징어는 핵무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며 

정치권에서도 바라는, 전방방방위전략 Vorne verteidigung는 

오로지 재래식 전력의 증강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하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주장했다. 


이 두 장군은 재래식 군사력, 즉 

육, 해, 공군의 조화와 균형 있는 발전을 요구했다. 


그들은 여전히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재래식 전력만으로 적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육군은 끊임없이 이것을 건의했다. 


다행히도 1950년대 말, 

독일 외에도 핵전쟁에 반대하는 국가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량보복 massive retaliation 이라는 미명 아래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영토도 국민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유럽의 방위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러한 딜레마는 독일군 지휘부를 압박했다. 


그들의 해법은 강력한 재래식 무기를 이용하는 전방방위전략이었다. 


최악의 상황이 발생한다면 

핵무기 사용을 최소화하고 굳이 사용해야 한다면 

가능한 한 서독 영토 밖에서 사용하길 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참모부는 해체되었지만 

총참모부의 전통에 따라 작전가들은 

전쟁연습과 장군참모현지실습을 통해 대안을 찾고자 했다. 


1960년도에 육군에서 주관하여 

전술 핵무기 투입을 가정한 장군참모현지 실습이 실시되었다. 


여기서 육군참모차장 요아힘 슈바틀로 게스터딩 Joachim Schwatlo Gesterding 장군은 

전술 핵무기 투하 이후 엄청난 손실과 제한사항들이 발생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작전적 수준의 전쟁수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 전쟁연습에서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공군의 입장은 달랐다.


핵전쟁 이후 대공황사태가 발생할 것이고 

따라서 조직적인 작전수행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공군참모총장 요제프 캄후버 장군은 

'지상작전이 가능하다는 육군의 주장은 과대망상이며 

최초의 핵난타전 이후 

육군은 병원에서 작전을 부르짖게 되리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러한 발언은 다소 냉소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1960년에 실시된 육군의 전쟁연습은, 

놀랍게도 지난 150년 동안의 총참모부와 관행을 그대로 답습한, 

현실 문제들을 모조리 무시한 전형적인 사례였다. 


전쟁으로 파급되는 사회간접자본들과 

국민에 대한 피해 영향을 철저히 배제했던 것이다.


그즈음 동맹국들과 

조건반사적인 '대량보복전략'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도 

급기야 불만을 표출했다.




     p 380, 381

        핵전쟁 시대에서의 작전적 사고의 적용

           9. 핵시대의 작전적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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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작전적 사고는 

원래 대규모 부대를 원거리에서 분권화 지휘하기 위해 생겨났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거치면서 

중부유럽과 독일 인근 국경지역에서의 

양면 또는 다면 전쟁을 위한 대안으로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총참모부는 눈앞에 직면한 

공간적인 약점과 자원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작전적 사고의 원치에 따라 고도의 정예군과 

특히 탁월한 지휘술을 결합시켜 

유럽의 정중앙에서 내선의 이점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작전적 사고의 원칙이란, 

이미 오래전에 속전속결을 위해 대몰트케가 발전시킨 

기동, 공격, 속도, 주도권, 행동의 자유, 

중점형성, 포위, 기습, 섬멸 등을 의미했다.


목표는 국경 인근의 하나 또는 다수의 회전에서 

신속하게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때 섬멸이란 물리적인 살육이 아닌 적군의 항복 등을 통한 

군사적 위협을 제거 또는 군사력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시간과 공간은 

작전적 ㅡ 전략적 계획수립과 인적, 물적 군비정책의 핵심적인 고려요소였고 

전투력을 포함한 이 세 가지 요소는 작전적 사고의 결정적인 중심축이었다.



군 지도부는 지리적 약점과 자원, 전투력의 열세 등 

소위 전략적 딜레마를 시종일관 작전적 승리로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과거 경험을 토대로 

전술적 ㅡ 작전적, 과학 기술적 측면에서 

장차전을 대비하기 위한 방향을 도출하고 

전쟁양상을 예측하고자 노력했던 점들은 매우 탁월했다.


현대적인 작전적 기동전을 시도하여 

전투효율성을 증대하기 위해 애쓴 점도 인상적이다.


작전적 발전상은 전체 전역에서 

작전계획과 실행 과정의 역동성으로 표출되었다.



군 지도부는 오로지 공격작전만을 중시했다.


방어작전은 결국 승리할 수 없는 

소모전의 양상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전략, 전술, 작전술의 세 가지 중 

작전술의 영역은 기동성을 발휘하여 속선속결의 섬멸회전을 도모하고 

적의 우세한 잠재력을 사전에 무력화시키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모든 작전구상과 계획수립에 시간은 핵심적인 요소였다.


군 지도부는 항상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다모클레스의 칼과 같은 시간적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항상 공격작전으로 기동성을 유지하거나 되찾고자 했고 

그러한 의지가 독일 육군의 

전통적인 전술적 ㅡ 작전적 사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공격정신은 

정치적, 정신적 여유(餘裕)에서 발전된 결과물은 아니었으나 

세계패권을 지향했던 당시의 외교정책과 함께 

독일 사회 전반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루데도르프는 

'공격은 언제나 독일인의 전투 본능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더욱이 1918년 군부 엘리트들은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벌어진 사태를 수습할 해법과 

장차전에서 승리할 방책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했다.


이들은 집단적인 현실거부 의식에 사로잡혀 

패전에 대한 실질적인 전략적 현실 ㅡ 군사력 및 잠재능력의 열세 ㅡ 을 무시했다.


군부 엘리트들의 선별적인 현실인식은 합리적이지 못했다.


전술적, 작전적 원칙은 옳았으나 

실행하는 몇몇 사람들이 무능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스스로 '전투에서는 절대로 패하지 않는다.' 는 자신감에 찬 그들 모두는 

제국의 잃어버린 패권적 지위를 되찾기 위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방법에 차이가 있었을 뿐 목표에는 이견이 없었다.




     p 390 ~ 392

           10.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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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로부터 발전된 독일의 작전적 사고의 핵심요소인 

포위, 기동, 속도, 기습, 섬멸과 공격작전을 우선시하고 

이를 군사적 원칙으로 중시하는 성향은 

전세계 모든 군대의 공통점이다.


단지 적용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여기서 독일은 다른 국가들보다 

주도권과 행동의 자유에 더 큰 무게를 두었다.


독일 육군은 항상 열세에서 비롯된 엄청난 중압감 때문에 

적국을 신속히 무력화 ㅡ 이른바 섬멸 ㅡ 시켜야 한다는 것과 

고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중점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특히나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과거의 군사사, 

이를테면 나폴레옹 전쟁사에서도 검증되었으며 

독일군 총참모부에 의해서 창조된 원칙이 아니었다.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수많은 원칙들은 

소련과 같은 또 다른 대륙의 패권국가의 군사교리에도 반영되어 있다.


대륙의 패권국가들도 

수십 년 동안 해양 패권국가들이 구축한 연합세력에 비해 

장기전을 치르기에는 자신들이 인적, 물적 열세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속한 기동전으로 상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p 404

           10. 끝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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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게하르트 P. 그로스 저/진중근 역
채플린과 히틀러의 세계대전
오노 히로유키 저/양지연 역
총, 균, 쇠
제레미 다이아몬드 저/김진준 역
예스24 | 애드온2


b*******s 2018.11.06.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내용보기
독일군 총참모부를 다룬 책 하나가 나왔습니다.역자는 "전격전의 전설"을 번역해서 밀덕들을 흥분시켰던 진중근 중령입니다. (그 사이에 진급하셨네요)독일군에 대한 전문가 답게 훌륭한 책을 골라 번역하셨고 길찾기가 무게감있는 책을 출판했습니다.이 책은 뛰어난 작전술을 보였다고 생각했던 독일군의 허상을 짚어내고 있습니다.보불 전쟁의 화려한 승리 이후 독일 총참모부는 정치의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내용보기

독일군 총참모부를 다룬 책 하나가 나왔습니다.
역자는 "전격전의 전설"을 번역해서 밀덕들을 흥분시켰던 진중근 중령입니다. (그 사이에 진급하셨네요)
독일군에 대한 전문가 답게 훌륭한 책을 골라 번역하셨고 길찾기가 무게감있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뛰어난 작전술을 보였다고 생각했던 독일군의 허상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보불 전쟁의 화려한 승리 이후 독일 총참모부는 정치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논리대로 움직였습니다.
1,2차 대전을 일으켜 초반의 화려한 승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완벽하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러한 패배를 독일이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리적 약점으로 인한 양면전쟁의 위협에서
단기 결전으로 승리를 획득하는데 집착한 독일 총참모부의 문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제국군으로 시작해서 국방군, 연방군 시절의 독일군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독일군은 승부를 볼려고 했던 전장에서는 패배하고 부차적인 전장에서는 승리했습니다.
1차 대전에서는 서부를 중점으로 두고 동부가 부차적이었는데 동부전선에서 승리했고
2차 대전에서는 동부를 중점으로 두고 서부가 부차적이었는데 서부전선에서 승리했습니다.
이게 우연의 일치라고는 볼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독일군에게는 약점이 있었고 저자는 이 부분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읽다보니 독일은 군대가 국가를 가졌다는 소리가 맞는 점이 있다고 생각 들었습니다.
동부와 서부에서 강적을 둔 만만치 않는 상태에서 오직 군사적 승리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외교나 정치적으로 한쪽과 협상을 하여 위협을 완화시킬 생각은 않고 
대규모 회전을 통한 군사적 승리만이 목적이었습니다.

이러니 손자의 말대로 계속적인 승리가 독이 되어 완벽한 패전으로 굴러 떨어질수 밖에 없다고 보이네요.
비스마르크 이후 이러한 약점을 조정할만한 정치, 외교가가 없었습니다.
이게 독일의 비극이라고 볼수 있었네요.
1차 대전에는 빌헬름 카이저, 2차 대전에는 히틀러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다 보면 뭐 독일의 패배는 군사적인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약점이 극대화된 경우가 되겠지만요.
정치 외교적 패배를 군사적 승리로 메꾸는 것은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이미 정치 외교적으로 한계가 정해진 상황에서 
독일은 그 한계를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안에서 이전투구로 승리를 쟁취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천재성에도 한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던 것이지요.

전쟁사에 익숙한 분들이 전장이 아닌 작전계획과 개념에서 어떤 역활을 했는지 
자세히 살펴 볼수 있는 점이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독일군과 2차 대전에 관심있는 분들이면 볼만한 책이라고 추천드릴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9***d 2016.04.2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 내용보기
이 책의 부제는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악역이었지만 가장 비중이 컸던 주인공이었던 독일군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군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분야 뿐 아니라 기업이나 행정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친 참모본부 제도는 거의 전설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육해공군의 수장이 참모총장이라는 타
"독일군의 "작전적 사고"" 내용보기

이 책의 부제는 총참모부 작전적 사고의 역사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악역이었지만 가장 비중이 컸던 주인공이었던 독일군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군대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군사분야 뿐 아니라 기업이나 행정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친 참모본부 제도는 거의 전설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 육해공군의 수장이 참모총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작전적 사고라는 다소 낯선 단어다. 독일의 군사적 전통에서 나온 독특한 용어인데, 굳이 표현하면 전술과 전략 사이에 존재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한가운데 있고, 강적들에게 둘러싸여 물적 자원에서 열세에 있는 독일군이 우수한 장교가 이끄는 잘 훈련된 병력으로 단기간 내에 결정적인 회전에서 승리하여 결국 전쟁애서 이긴다는 개념이었다.

 

7년 전쟁 때 강대국에 포위된 프리드리히 대왕이 로이텐과 로스바흐의 승리로 전쟁을 이긴 데 착안한 작전적 사고100년 이상 독일군의 금과옥조가 되었다. 독일군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이센-독일 육군은 1860-7년대 세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독일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다. 그들은 1,2차 대전에서도 최소한 물적 자원에서는 훨씬 우세한 적들을 상대로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두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무적 독일군의 신화를 만들 정도로 눈부신 군사적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작전적 사고를 가지지 못한 러시아, 미국, 영국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아주 설득력 있는 논리로 잘 설명하고 있다. (알고 싶으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의 역자는 전격전의 전설을 번역한 진중근 중령이다. 그 책의 저자 프리저는 독일군은 전격전이라는 파천황적인 초식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작전적 사고에 기반한 독일군의 전통적 결전시도에 기계화 부대와 항공기라는 새로운 도구가 결합되고 연합군의 실수가 이어져 거둔 승리였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그로스 대령은 현재 독일군 역사의 최고 권위자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한 전역을 다룬 것에 불과전격전의 전설을 넘어서 몰트케 원수에서 2차 대전 전후 독일연방군 합참의장이었던 호이징어 장군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의 지휘부는 작전적 사고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전쟁사와 독일군에 대해 알만 큼 안다고 한 필자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 훌륭한 책이다. 다만 밀리터리 초보자들에게는 권할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훌륭한 책을 번역한 역자와 발간을 결정한 출판사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w*******2 2016.04.2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