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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전체 문화는 그 불안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 요사이 고등교육을 받은 지적이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많은 사람들이 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 예컨대 사람을 사귀거나 아이를 갖는 것과 같은 일들에 대해 불안해한다.
1. 줄거리 。。。。。。。
제목이 책의 내용을 잘 담고 있다. 크게 2부로 구성된 이 책은, 먼저 현대사회의 한 주요한 조류로 자리 잡은 포스트모더니즘을 하나의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한다. 저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장점(모더니티가 갖고 있던 각종 문제점들을 일부 극복했다는)들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세계관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과 부작용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는 부분이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근본적인 존재론적-인식론적 불안과 불안정,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길로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를 기초로한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2. 감상평 。。。。。。。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이론적인 책이었다. 얼마 전 읽었던 『완전한 진리』가 기독교 세계관의 실천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다뤘다면, 이 책은 그것의 이론적인 우위성을 좀 더 강조하고 있다. 장르를 생각해 보면 현대철학이나 대중문화이론(이게 생각보다 무지 어려운 분야다)에 가까운 이론서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고, 앞서 책 내용 요약부에도 적었듯, 이 책은 두 가지 주제를 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세계관. 그 중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은 매우 깊고 정교하다. 학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강의를 몇 개 들어 놓은 것이 그나마 내용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정도.(처음부터 이 책을 열었다면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을지도...;;) 흔히 빠지기 쉬운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부정의 함정을 적절하게 피해가면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복잡한 세계관의 공과를 노리고 있다. 그 결과로 저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사람들을 행복과 평화로 이끌어 가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결론을 내기까지의 과정들이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저자들이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다. 단지 성경이 제일이니 그것이 옳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세계관적인 해결책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들을 치유할 수 있음을 매우 학문적으로(특별히 철학적으로)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기독교 세계관을 하나의 메타내러티브(거대한 이야기, 세계와 전체를 포괄하는 근원적 이야기)로 보고 이를 풀어내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특유의 분절성과 단절성, 고립성에 대한 구조적인 반론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책의 내용은 매우 학문적이고 짜임새도 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저자들은 현대인들에게 주요한 삶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사실 이 말자체가 웃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어떠한 주도적 원리도 고의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이 담겨 있으니)이 가진 문제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 해결책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대로(또는 자신의 원칙대로) 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때와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원리와 세계관에 입각한 행동원칙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은 그 사실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완전한 진리』의 낸시 피어시는 바로 그런 부분에 집중을 했고, 사람들이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진화론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를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 그리고 메타내러티브로서의 성경 기사의 해석은 이 책이 갖는 귀중한 자산임에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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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더니즘의 위용 근대주의라고 표현되는 모더니즘 시대의 인간은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자율성과 합리성을 전면에 내세워 , 자신 이외의 그 어떠한 권위도 용납하지 않았던 시절. 1층에는 과학이라는 지식적 토대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2층에는 기술이라는 힘이 그 기반을 통해 세력을 확장시켜 주었고, 그로 인해 더욱 높은 경제성장의 층을 세워 나갈 수 있게 되었던 시절이었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1596~1650)의 주장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이성적 사고 능력을 통해 실재하는 세계를 알 수 있고, 탐구가 가능하며[1] , 이를 이해하는 것과 지배하는 것 까지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이런 자율적 주체는 전통이나 무지, 미신 등에 방해 받지 않고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고치고 치료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근대에서 인간은 곧 ‘구원자’ 였기 때문이다.
[2]모더니즘의 종말 하지만, 시대는 변화되었다. 과학과 기술이 인류를 안내하고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과거의 모습을 요즘은 찾아 보기 힘들다. 이러한 믿음을(진리가 아닌) 많은 이들이 과학 지상주의 , 기술 지상주의 , 경제 지상주의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또한 이 책의 저자는 성경에 나와 있는 수 많은 거짓 신들이 바로 이러한 모더니즘의 야심과 다를 바가 없다고 부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율성은 모더니티라는 건물을 지탱할 힘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 자명한 예를 들어 보라고 말을 한다면 , 제 1차 세계대전 때(1914~1918) 사용한 폭탄, 겨자 가스 , 참호전과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 등을 거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역사 속 인간의 최후의 실수, 유일무이한 오점으로 치부하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한 결정적 사건을 나열해 보자면, 20년도 채 못 되어 발발한 제 2차 세계 대전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사건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실존주의가 태동하게 되었고 , 이 때부터 포스트모던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시대를 완전한 포스트 모던 시대의 도래라고 보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쪽도 있고 반대하는 쪽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은 실존주의 사조가 잘 드러내 줬던 것처럼 당시의 시대 상황은 심리적인 두려움과 압박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두 시대를 이어주는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시기는 모든 것이 불안한 시대였다.[2] 우리에게 근본적이던 인생의 궁극적인 세계관적 질문들과 신앙의 바탕이 되었던 대답들이 공격을 받기 시작한 현실. 너무도 자명한 명제로 여겼던 개념들이 하나하나 난도질 당하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 과연 이 시대에도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3]포스트 모더니즘의 도래 그러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는 이러한 세상과 완전히 절연될 수는 없다. 이 시대와 하나님 사이의 가교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 모더니티의 위기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세상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소리 치고 있는데 , 그 소리를 듣지 않고 외면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라는 질문에 대해서 , 실재하는 세상을 그리던 모더니스트들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가 지나가고 , ‘우리는 우리가 구성하는 실재 속에 있다’ 라고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면 , ‘실재’ 는 또는 ‘현존’ 은 아예 없다는 말인가? 모더니즘 시대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도발적인 질문들이 지금 시대 때는 너무도 거리낌 없이 거론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모든 패러다임들이 인식론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사회적으로 조합된 개념에 불과하며 사상과 표현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있다고 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3] 또한 이 시대를 ‘이것은 진리인가 ’ 라는 질문은 회피하고, ‘이것은 통하나 ’, ‘이것은 어떤 느낌인가 ’ 를 묻는 시대라고 표현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4] 해체 철학의 대표주자인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는 그 동안의 실재론을 ‘현존의 형이상학’(metaphysics of presence) 라고 명명하며 , 선(先)언어적 , 선(先)개념적 ‘실재’ 는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기 시작한다. 사실, 실존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기존의 합리성 논증에 타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존’ 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 , Verb-like 와 같다는 개념을 쓰곤 하는데 , 이와 같은 유동성은 noun(명사) 로 소급시킬 수 없는 모호함과 추상성이 포함된 개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5]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따라 가며 생기게 된 사조들 중 분석철학에 대한 언급도 필요할 것 같다.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던 , 우리는 어느 순간 그 존재가 표현되는 양식인 ‘언어’ 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언어’ 를 분석함으로써 즉 언어 게임이라는 규칙을 수행하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만 우리가 ‘의미’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 보기도 했었다. 이 반실재론 철학의 대표적 인물로는 비트겐슈타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6] 하지만, 지금과 같은 해체 철학이 득세를 하면서부터는 이와 같은 ‘언어’ 마저도 , 해체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물론, 해체주의는 허무주의와 분명 다르며 잘못 가고 있는 모더니티의 문화를 치료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하는데[7] , 이와 같은 의견에는 이견들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실재론자들이 말하는 현존의 형이상학이 세계의 무한한 복잡성과 통약 불가능성을 동질적인 전체로 바라봐 버리는 게 곧 폭력적이라는 것이다.[8] 타자를 이질적으로 보려고 하는 ‘인종주의’ 가 자리잡고 있는 기존의 전반적 지식 체계 모두가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그들의 의견은 일견 타당해 보이는 게 사실이긴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동질화’ 를 추구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좀 더 살펴봐야 할 것이다.
[4]포스트 모더니즘의 진행 일단 해체주의가 내세우는 삶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모든 질서를 해체시키고 , 우리의 모든 세계관도 주관적이며, 한계를 지닌 그저 그런 체계임을 동의해 버리는 순간 아노미(Anomi)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막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재마저도 인간의 구성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삶 속의 ‘의미’ 라는 개념을 찾아 내기도 불가능 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체주의는 ‘포스트모던’ 문화의 주된 특징이 아니며 , 리처드 로티가 대표 주자라고 말하는 이 책의 저자의 말을 참고했을 때[9] , 데카르트의 합리성의 기초는 거부했지만 , 베이컨의 핵심 사상인 자율성을 철저화 한 게 포스트모더니티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결국 포스트 모던은 모던의 지속이며 , 하이퍼모던(hypermodern) 혹은 울트라모던(ultramodern) 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카니발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그 어떤 권위도 존재하지 않고 혼란과 해체가 뒤섞인 축배를 들며 , ‘이질성’ , ‘비동일화’ 를 외치게 만드는 포스트 모던 시대. 자아 마저도 사회 제도의 구성물이 되어 버리고 , 자아의 이성적 산물로 여기던 언어가 자아보다 선행한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는 이 시대에 기독교 내러티브는 과연 어떤 효력을 지닐 수 있을까?
[5]포스트 모던 시대에 기독교 내러티브의 접근성 포스트 모던 주체는 일관성 있는 세계가 필요 없다. 정신분열의 시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 속에서 , 도덕성도 마비되는 것은 필연적이다.[10] 진짜 ‘나’ 의 존재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로 ‘관계’ 에 헌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윤리도 측정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잣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하라’ 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는 이 시대 속에 기독교의 내러티브는 어느 지점에서 있을 수 있을까? 또한 이와 같은 다중 인격적이고 , 카니발과 같은 ‘쇼핑몰 문화’ 속에서 ‘선택의 내용’ 보다는 ‘선택의 행위’ 가 더 존중 받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선택하는 정신’ 이 만연되어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더 나은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행동 자체도 가치를 상실하고 마비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이런 시대 속에서 , 기독교 내러티브가 하나의 ‘의미 있는 선택’ 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 이러한 시도가 과연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와 같은 포스트 모던의 위용 앞에서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바로 생생한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다. 세상과 인간을 위해 이스라엘,예수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서사적 드라마 안에 성서가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해 봤을 때 ,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포괄적 내러티브를 통해 성서를 해석해 나가는 방식은 꽤나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다. 하지만,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매타 내러티브’ 가 또한, 인식론적 폭력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이 물리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 많은 역사를 거론하며, 그들은 이와 같은 거대-담론 자체를 거부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난관 속에서 우리는 포스트 모더니즘도 결국 또 하나의 담론이며 , 메타 내러티브로 기능할 수 있음을 언급해 줘야 할 것 같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의 등장을 ‘구원론적 착상’ 으로 여기며 더 나아가 ‘선(善)’ 그 자체로 바라봤음을 고려했을 때 결국 그들 또한 거대-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메타내러티브가 필요하지 않다는 논증을 하기 위해 메타내러티브에 은밀히 호소하는 그들의 자가당착은 마치 , 모든 실재하는 것을 물질의 원인으로 환원시키던 크릭의 말이 내포하는 역설과도 유사하다.[11] 즉, 유물론자들이 정의 내리는 인간 존재 즉, 신경 세포와 분자들의 상호작용에 불과한 인간이 그와 같이 ‘세상’을 설명해 내려고 시도하며, 그 주장을 납득시키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체적인 논리의 모순성이 드러나는데 이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주장과 유사해 보인다. 또한, 그들의 주장이 이 시대에 어떤 통합성과 희망도 주지 못하는 양상을 띄고 있기에 , 우리에겐 더욱 급진적인 치유책이 필요할 것이다.
[6]성경 속 내러티브 그에 대한 방안으로 우리는 기독교 내러티브의 핵심인 ‘성경’ 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물론, 포스트 모던 시대는 그와 같은 성경 텍스트를 또 하나의 ‘메타 내러티브’ 로 간주하며, 불편해 하겠지만, 그들이 말하는 ‘비동질적인’ , 그리고 ‘차이’ 를 인정하는 수 많은 내러티브들도 결국 메타 내러티브와 같은 종류의 오류와 폭력성을 지닐 수 있으며, 포스트 모던이 초래하는 수 많은 아노미도 존재함을 기억해 봤을 때, 그들의 주장이 나은 대안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 이쯤 되면 메타 내러티브 자체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과 타락성에 문제가 있는 것임을 인정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는 아직까지도 인간의 선함을 낙관하며, 종교가 개입되는 논의 일반을 하등 불필요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다.[12] 하지만, 이와 같은 근거가 빈약한 낙관론을 펴는 것 보다는 역설적일 수도 있지만, 쟈크 데리다가 말한 파르마콘, 즉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는 메타내러티브라는 체계 속에서 ‘더 바른’ 메타 내러티브를 찾아가는 게 더욱 합리적이고 지금으로선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일단은 포스트 모던 시대 속에서 성경이라는 고대의 메시지가 현대의 삶을 살아가는데도 중요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아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성경은 비단 전체주의적인 메타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비전체주의적인 즉, 국지적인(localized) 내러티브를 삶을 통해 살아내기를 종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삶의 모든 영역과 ,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진리’ 를 드러내는 삶을 가능케 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 수 많은 논의들 속에서 ,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은혜의 청지기적 인식론’을 당당히 취함으로써[13] , 하나님의 선하신 은총으로 얻게 된 수 많은 자연에 대해 , 우리의 독단적인 주장을 한다든지 , 우리의 가치를 무한히 떨어뜨려 우리를 ‘비실재’ 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 스스로가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세상 속에서 우리 스스로도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그러한 부분들을 잡아 내고 , 또한 함께 어울려 참다운 삶을 살아 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경 속의 이야기를 우리 삶에 융합시킴으로써 우리의 본연의 위치를 회복시켜 나가는 삶. 폭력을 유발하지 않고 , 고통을 끌어 안으며 , 평화를 노래하며 , 사랑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청지기의 삶을 살아내는 것.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이론이 분리되지 않고 , 하나로 움직이는 삶을 추구함으로써 거대한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는 삶. 이와 같은 관점을 훈련함에 있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경 속 내러티브는 중대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 속 내러티브와 , ‘나’라는 내러티브 , 더 나아가 나를 구성하는 ‘주변 세계’와 , ‘타자’(others)라는 내러티브가 한 데 어울려 움직이는 춤사위 속에 ‘진리’ 가 실현되어 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7]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 하지만 아무리 좋은 논리와 지식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실제 삶 속에서 그 지식이 전개되는 양상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와 자세를 짚고 넘어가는 것은 필수적인 사항일 것이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필수적인 삶의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히브리 철학 속에서 모든 지식(앎)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출발했으며 , 십계명과 산상수훈 , 성경 전체 속의 모든 개념들이 결국 그 분과의 교제, 그 분으로부터 받은 자원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음을 기억해 본다.[14]. . 리처드 니버도 [그리스도와 문화] 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중요한 명제는 , 하나님을 전 존재로 사랑하는 것에 우선될 수 없는(우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 사안임을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지 않은가[15] 물론, 포스트 모던 시대에 ‘신’ 에 대한 전제가 어떻게 유효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표상을 제거하고, 모든 기준을 무너뜨리며, 모든 의미를 이질화 시키는 이 시대 속에서도 분명 ‘신’ 은 유효하다. 왜냐하면, 폴 틸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관심은 우리의 궁극적 관심, 곧 우리의 신이 되려고” 하기에 , 엄밀한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16]예를 들어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 을 쓴다 해도 , 그의 안에 유전자의 복제와 자연선택설 이라는 궁극적 관심이 존재하여 자신만의 ‘신’ 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17] 둘째, 우리가 유한한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행사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며 아직 끝나지 않은 교회의 역사 속 그 어딘가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일 것이다.[18] 이와 같은 태도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너 거기 있구나’(There you are) 라는 마음을 지니며, 상대방을 마치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너는 어디 있느냐 ’ 라고 말씀하시며 아담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듣고 , 그들이 서 있는 이야기의 지점을 찾은 뒤, 그들의 가능성과 그들의 의도를 충분히 숙고해 보는 겸손한 자세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 속에서만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는 아름다운 ‘이야기’ 로 그들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삶을 살아 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선행되고 난다면 서로 이질적인 입장들 속에서도 소통 가능한 풍성한 내러티브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라 기대해 본다.
[8]실천에 대한 고민 삶의 자세와 태도를 정돈했다면 이제 수반되어야 할 것은 구체적인 ‘실천’ 을 향한 고민일 것이다. 우리끼리 이야기 한 논의들을 세상과 문화 속으로 들고 나가는 작업을 함에 있어서 , 이질적인 두 논의가 충돌할 것에 대해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건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길을 삶으로 살아 내려면 이와 같은 걱정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용기(다른 말로는 ‘믿음’)가 요구된다. ‘세상’ 은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타당성 구조’가 암묵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임을 사전에 인정하고 , 우리의 메시지가 다른 이들의 ‘구조’와 달라 그들을 불편하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로부터 독단적이고, 교만하다는 말을 일방적으로 듣는 건 정당한 처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면, 용기를 발휘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19] 왜냐하면 예를 들어, 세상이 물질로만 존재하는 게 진실이었다면 과학적 연구가 지식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겠지만, 성경적 관점에서는 실재의 토대가 인격체임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은 충분히 다원적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인격체와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진리를 알아가게 될 것이다. 거대하고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지며 진리가 계시되어 가는 것이다.[20]물론, 이와 같은 ‘다원성’을 전제하더라도 이 문제가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책임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에, 이와 같은 성경적 세계관에 대한 고민 그 자체를 그쳐선 안되며, 이러한 노력들이 ‘삶’ 이 되도록 노력 하는 시도들을 멈춰선 안 될 것이다.[21] 기독교 세계관은 결코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22] 실존적인 성격을 내포하며,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이기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진리대로 살아 행하며 그 권위를 성경에 두고 달려가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을 행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과감한 선택을 하는 용기일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입장을 정립하고, 바른 자세와 태도로 타자와 주변 세상과 소통해야 할 시점에 이르면, 선택은 필수 사안일 것이다.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선택은 ‘믿는다’는 단어의 근본 개념 중 하나로서, ‘책임’과 ‘헌신’의 요소는 ‘순종하는 믿음’ 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23]완전하고, 순전한 ‘지식’과 ‘삶’ 에 도달하는 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행위적 완전성과 논리의 완전성은 저 멀리 존재할지라도, 태도의 완전성을 지향하며 그 마음의 중심을 계속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이렇게 묵묵히 삶을 노래하다 보면, 갈망하는 세대들에게 온전한 진리가 비춰질 날이 올 것이다.그 때가 되면, 우리의 생각들은 모두 발 아래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리고 문제라고는 애초부터 전혀 없었음을 보게 될 것이고 말이다.[24]난 그 날을 갈망한다.
[1] 박영욱, 데리다&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파주시: 김영사, 2009). p.25 [2] 윤용아,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vs 의미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서울시:숨비소리,2007).p.85 [3] 스콧 버슨&제리 월즈, 김선일 옮김,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마포구: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09).p.27 [4] 오스 기니스, 윤종석 옮김, 회의하는 용기 (종로구: 복 있는 사람,2008), p.131 [5] Cooper, Existential Therapy, ( ) . [6] 빅터 레퍼트, 이규원 옮김, C.S 루이스의 위험한 생각, (서초구: 사랑 플러스,2008).p.108 [7] 누구누구, 데리다의 헤체론과 기독교 연계성…..머시기머시기 [8] 박영욱(2009), p.19 [9] 리차드 미들턴&브라이언 왈시,김기현&신광은 옮김,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파주시: ㈜살림출판사, 2009), p.83 [10] 필립 존슨, 양성만 옮김, 위기에 처한 이성,(서울시: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00), p.149 [11] 필립존슨,양성만 옮김(2000), p.68 [12] 리처드 도킨스, 이한음 옮김,만들어진 신,(파주시: 김영사, 2007), p.347 [14] 윌리엄 커원,정동섭 옮김,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본 현대 기독교 상담학 , (용산구: 예찬사 , 2007). p.54~55 [15] 리처드 니버,홍병룡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 (마포구 : IVP , 2010), p.xxxxx [16] 박만, 폴 틸리히-경계선상의 신학자, (파주시: ㈜살림 출판사,2009), p.84 [17] 알리스터 맥그라스&조애나 맥그라스, 전성민 옮김, 도킨스의 망상-만들어진신이외면한진리 (파주시: ㈜살림출판사,2008), p.114~115 [18] 리처드 니버,홍병룡 옮김(2009), p.363 [19]레슬리 뉴비긴,홍병룡 옮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서울시:IVP,2007),p.30 [20]필립 E. 존슨,홍종락 옮김, 진리의 쐐기를 박다,(서초구:좋은 씨앗,2005),p.177~178 [21]알버트 월터스&마이클 고힌, 양성만&홍병룡 옮김, 창조,타락,구속,(서울시: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2007),p.179 [22] 콜린 듀리에즈,홍병룡 옮김,프랜시스 쉐퍼(종로구:복 있는 사람,2009),p.328 [23] 오스 기니스, 회의하는 용기, (종로구: 복있는 사람,2008),p.134 [24] C.S 루이스,강유나 옮김, 헤아려 본 슬픔,(마포구: 홍성사,2006),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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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세계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책에는 외부(예를 들어 다른 종교)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이게 기독교의 한계인가? 아니면 이런 책만 한국에 소개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이 있는 건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도식의 유지가 바로 기독교 외부를 못보게하는 대표적인 혐의를 제공했다. 물론 이 책이 창조-타락-구속을 굉장히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창조-타락-구속이 아무리 포괄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불교와 같은 순환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고려해낼 수 있을까? 결국 이에 대한 고려가 없기에 이 책에는 다른 종교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언어가 이미 그 말이 잘 작동하는 언어놀이의 터전이 따로 있음을 암시한다. 이 책이 창조-타락-구속를 폭넓게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변경한 것처럼, 불교 측에서 만일 순환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만들어낸 포괄적인 개념과 도식을 가지고 기독교와의 화해나 연대를 제의한다면, 과연 기독교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책은 포스트모던한 세계를 다원주의 세계로 이야기 하면서 다른 종교와의 관계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도 종교란 기독교밖에 없는 것인가? 이 책에서는 종교 외의 다른 가치들과의 제휴가능성과 공존성을 언급하는 곳에서조차 기독교의 제국주의적 선교의 이면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다른 종교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이 언급하는 도식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고려하지 않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종교는 과연 어떤 종교일까? 원론적으로도 다른 세계관의 충돌과 조화를 고려하지 않는데, 이 책은 현실적으로존재하는 충동에 얼마나 할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한국 기독교와 북미 기독교 자체가 다른 종교라는 외부적 경험을 철저히 배제하지 않았던가? 이런 역사성이 병리적으로 반영된 이 책에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외부를 사유 가능성 안에도 넣지 않는 세계관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세련된 전체주의 아닐까?
결국 이 책은 웃는 얼굴을 뒤로한 공포스러운 권력자의 얼굴을 숨겨놓고 있다. 역자는 이 책이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분의 말에도 같은 혐의를 두고 싶다.
이런 점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이 책은 결국 상당히 불손하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하다!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