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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시리즈는 신의 얼굴에 이어 천사의 얼굴을 책에 담아냈다. 신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천사와 악마의 존재에 대한 관심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신에 대한 그림 못지 않게 천사에 대한 그림도 다양하고 작품의 수도 많다. 천사가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지 어떤 역할을 하는 지는 비단 형이상학의 부재로 보이는, 오로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도 흥미거리이다. 과학에 대한 맹신은 오히려 사람을 미신의 세계로 끌어간다. 여전히 각종 신문에는 오늘의 운세 등이 자리를 잡고 사람들은 장난인 듯 진심으로 글을 읽고 마음에 담아 둔다. 천사에 대한 생각은 어떠할까? 천사가 과연 존재한다고 믿고 천사가 무엇인지 탐구할까? 오히려 천사보다 악마의 존재, 한국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더욱 믿고 있는 것도 같다. 사람에게 영적인 세계란 여전히 미스테리하며 또한 더욱 궁금함을 유발시킨다. 천사에 대한 이전 사람들의 작품은 각각 그 의미가 다르고 또한 작품을 감상하는 독자에 따라 다르므로 어떻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다만 왜 화가들은 이처럼 많은 천사에 대한 작품을 그려냈을까, 무엇이 붓을 들게 하고 도대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단지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 혹은 날개 달린 천사에 대한 동경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천사가 등장하는 영화, 애니메이션, 동화는 지금도 많다. 게다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인간의 힘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에 대한 상정은 사람들의 사유를 늘 땅에서 하늘까지 끌어올렸다. 유비쿼터스 기술이 등장하고 컴퓨터로 인한 사고는 인간을 더욱 천사의 세계, 악마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만든다. 단테의 신곡을 비롯한 과거 문학 작품과 현대 스파이더맨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바라보는 인간 이상의 세계는 결국 각 개인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더욱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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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꿈을 꾸었다. 푸른하늘위로 뭉게구름이 떼지어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중 구름뭉치 하나는 꼭 도마뱀을 닮아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참 신기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도마뱀의 구름이 진짜 용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입에서 붉은 불덩어리를 내뿜기 시작했다. 덩달아 다른 구름들도 모두 제각기 무서운 동물의 모양으로 변해 빠르게 하늘위로 지나갔다. 순간 두려움에 떨었고 꿈에서 깨어났다.
뚱딴지같은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은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조차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알수없는 경이와 경외, 혹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는 사실이다. 고대인들은 이것을 여러행태로 풀어내었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산짐승이나 인간을 바치면서 하늘의 자비를 구하고 노여움을 달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중 중동에서 일어나 인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였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등은 그 하늘을 쳐다보며 천사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하늘을 날고자하는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에 날개를 달고 인간을 수호해주는 천사야말로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 원형은 그리스신화의 이카루스의 날개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뭏든 그러한 아이디어는 어느새 종교와 결합해 정교한 이미지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천사를 만들어내었고 그 천사는 곧이어 악마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책을 보며 '원죄'라는 낱말을 떠 올려야 했다. 어차피 연약한 인간은 무엇인가에 의지하게 되어 있는 존재지만, 책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와 수많은 천사아래 인간은 정말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중세시대를 거쳐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실제 성경구절을 그대로 믿으며 이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또 당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림의 모습을 실제로 믿었을 것이다.
최후의 심판날에 천사의 나팔소리에 관속에 있던 자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깨어나고 그 위에 저울을 가진 커다란 천사가 선과 악을 판단해 천국과 지옥행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그림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책을 보며 당대 사람들의 두려움과 그것을 이용한 교회라는 절대권력이 만들어냈을 부정적인 모습을 떠 올려야 했다.
평화로운 천사만큼 칼과 창, 방패로 무장한 천사들의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현대사회가 인간만큼이나 희노애락과 평화와 전쟁의 모습을 간직한 천사를 그저 웃는 아기모습의 평화로운 수호자의 모습으로만 변질시켜버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당시, 그리고 중세시대의 천사는 오늘처럼 그저 천진난만하지 않았다. 사탄에 맞서 완전무장을 한채 때로는 무자비하게 창과 칼을 휘둘렀다. 평화와 전쟁은 사실 상극이 아니라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경우가 많다.
종교적으로 말한다면 영적인 전쟁을 치뤄 승리하지 않은 자는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다. 예수의 손에 난 못자국위로 흐르는 붉은 피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한 자를 상징하기도 한다. 상극되는 것들을 통해서 온전한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치가 그러하며 천사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의 다양한 그림들이 보여준다. 그런데 오직 어린아기같은 천진한 한쪽의 천사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진정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유익함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이는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고대의 동화는 잔혹했다. 지금처럼 부드러운 신데렐라와 백설공주는 없었다. 하지만 잔혹한 동화는 힘든 노동의 시대를 살아야했던 당대의 아이들에게 세상을 살아가는데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부드럽고 착하기만 한 권선징악의 동화는 당대의 아이들이 살아나가는데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 나약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림이든 이야기든 그 배경에는 시대상황이 있는 법이다. 그런면에서 오늘날의 시대가(대중문화가) 천진난만한 한쪽의 천사만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의식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진한 천사와 더불어 악마와 무자비한 싸움을 벌이는 무장한 천사의 모습도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수태고지를 하면서 마리아의 주위에 경건함으로 있는 천사의 모습이나, 악마와의 싸움에 무기로 무장한 채 격전을 벌이는 천사의 모습은 우리안에 있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거시의 세계와 미시의 세계는 결국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큐피드는 천진하게 두 권의 책 위에서 활을 깍고 있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지혜의 단어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그의 다리 사이로 두 명의 '푸티'(아이)가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살기 넘치는 칼에 베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신의 불에 닿에 데었을까?) 이 고전적인 주제는 사랑을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본 르네상스의 좀 더 은밀한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은 지식으로 얻을 수 없다. 이성과 지식의 상징인 책을 덮어버려야 감성의 혜안이 눈을 떠 진정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큐피드는 책을 발로 짓밝고 사랑의 활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 활을 맞은 아이는 사랑에 기뻐하거나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상을 쓴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사랑의 화살의 본질은 쾌락, 즐거움속의 고통일때가 많다. 그래서 주석은 사랑을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본 르네상스시대의 개념을 설명해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 재미있다. 사랑을 고통의 본질로 보면서 큐피드를 통해 이를 형상화한 그림하나.... 무엇인가 깨닫게 해 준다. <전쟁의 천사>를 현대가 잊고 살듯이 사랑의 고통을 무시한채 너무 로맨틱한 일회성 쾌락에 매달려 살아가는게 우리시대의 사랑이야기에 대해 큐피드의 그림은 경종을 울려주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고대나 중세시대의 엄격한 수도승적인 삶의 태도로 돌아가야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하지만 너무 가볍고 편안하며, 눈과 입 귀는 즐겁지만 영양가가 쏙 빠져버린 인트턴트문화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이즈음.... 옛 천사들의 그림은 우리에게 전쟁과 상처, 아픔도 같이 삶에 동반되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온전하고 통일된 모습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고통속에 비로소 승리한 그리스도의 삶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을 무시한 채 천국만을 바라는 태도는 우리시대가 너무 현학적이며 눈에 보이는 즐거움만 추구하도록 끝없이 세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새삼 느끼게 된다. 종교를 너무 경건하게 있는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의 사랑과 투쟁을 형상화한 천사들을 통해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현실은 고달프다) 적당히 마취시켜 왜곡해버리는 지금의 대중문화, 그속에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말이다. 대중문화의 달콤함은 우리가 (지극히 당연한) 현실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과 배움, 영적으로 성숙해질 기회를 차단시켜 버리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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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도 나름대로 천사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종교 이전에 신화의 세계에서 이미 천사란 존재를 인간이 표현해왔다는 의미로, 천사란 기본적으로 날개가 달려있어 날아다닐 수 있으며 얼굴에는 항상 온화한 웃음과 예쁜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는 쉽게 그려낼 수 있다. 물론 기독교에 의해서 천사의 모습은 더 다양해졌으며, 그 역할 또한 여러 가지인 것을 이 책 <수백 가지 천사의 얼굴>(안티쿠스.2007년)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이 책은 ‘이미지로 보는 종교 철학’ 시리즈의 두 번째 책으로, 첫 번째는 <수백 가지 신의 얼굴>이란 제목으로 이미 소개된 바 있다. 천사라는 말은 원래 ‘전령’ 또는 ‘사자(使者)’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anghelos'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천사는 어원적으로 하늘의 전력으로 하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보면 천사의 역할을 단순히 전령에만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문명권에서는 보편적으로 최초의 지배자 집단의 사람들은 ‘하늘’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 즉 천손(天孫)이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존재인 것이기에 그들이 일반인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듯 인간의 신화에서는 하늘이라는 곳은 신성하고 사람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이었고, 이렇게 시작된 하늘에 대한 경외는 종교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종교에서 하늘에는 세상을 만든 분이 존재하는 곳이며 땅에 있는 우리들과 창조주를 연결하는 존재가 바로 천사인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미술이서 보면 천사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5세기 초에 이르러야 천사들은 날개와 님비(nimbi, 후광)를 갖춘 모습으로 표현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초기의 그림에서 천사의 모습에서 날개가 없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천사를 쳐다보면 천사를 숭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 책은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장은 ‘천상 존재들의 계급구조’로 천사들에게도 엄격한 계급 구조와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천사는 크게 세 계급으로 나누는데 첫째 계급은 ‘상담자’로 그림에서 볼 때에 주로 하느님의 곁에 서 있는 존재이다. 둘째 계급은 ‘통치자’, ‘자배자’로 천국 영역을 다스리는 존재이다. 마지막 셋째 계급은 ‘전령’으로 인간과 활발히 교류하는 역할을 한다. 2장부터 6장 까지는 천사의 역할에 대한 부분으로 2장은 ‘수호와 전력’으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것을 알리는 가브리엘이 등장하고, 3장은 ‘정의와 심판’ 역할의 천사로 최후의 심판에서의 천사의 역할을 하는 미카엘과 라파엘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4장은 평화와 희망에 대한 내용이며, 5장은 치유, 섬김, 애도에 관한 내용, 마지막 6장은 복수와 죽음의 천사들이 등장한다. 각장 마다 천사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가득한데, 그 그림에 묘사된 천사의 모습에서 성경의 해당부분을 읽어내며 또한 천사의 복장에서 이름을 찾아내는 도상학의 기술을 보여준다. 이는 저자 중의 한 명인 로라 워드가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이기에 독자들에게 그림의 의미를 적절하게 읽어주고 있다. 이를테면 그림에 등장하는 천사가 갑옷을 입고 칼, 방패, 창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미카엘이고, 손에 백합을 들고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을 건네고 있으면 바로 가브리엘인 것이다. 수백 장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천사의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읽어낼 수 있으며, 그들의 삶에 있어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종교화는 유명한 화가들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 소개되며, 그 외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화가들의 작품까지 있어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예술과 종교의 세계를 함께 느끼게 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