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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생명과 우주의 섭리를 아는 길목에 들어선 작가. 대부분의 작가가 적어도 그 길을 알지만 그 길에 들어선 작가는 또 다르다. 아는 것과 체험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는 많이 다르니까. 중학교가 배경이다. 물론 주인공들도 중학생. 이 작가의 나이(59년생)를 생각하면 대단하다. 생명과 자연의 섭리는 육체의 나이로 아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나이로 안다. 20살만 넘어도 중학생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는 심리 질환을 앓고 있는 도오루, 자기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나’와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과 부적응의 고통을 대신 발산해주는 히카루.라는 소년이다. 끔찍한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여 마음에 입게 될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라 한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남자의 마음을 가진 ‘성 동일성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시라토. 그는 자신의 특이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 도오루의 아픔을 알고 먼저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서로의 아픔을 있는 대로 알아보는 그들 속에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싹트고 사랑의 힘으로 두 사람은 치유된다는 것이 주요 줄거리다. 하지만 그 속엔 현대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부조리와 고통과 혼란이 다 들어있다. 그런 현실을 예리한 현실 파악과 환상적인 상징을 통해 기가 차게 엮어나가고 있다. 예리하고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깊고 넓은 통찰력을 갖춘 작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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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은 못 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츠지히토나리는 내게 냉정과 열정사이라던가 좌안 우안 같은 이야기로 익숙한 작가이지 이러한 사회적인 소설을 쓸 사람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탓일까. 개인적으로 츠지 히토나리의 색채 자체가 사회적인 소설 이전에 연애소설과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인 이유도 있을 수 있다고는 하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소설에 1점이 부족하다, 2%부족하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역시 해결방법의 문제가 아닐까. 구체적인 문제들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해결하려 든다면 그건 역시 너무 안일한 생각은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도오루라는 아이의 주변부를 배경으로 하고 이 아이의 시각을 따라간다. 이 아이의 환경은 매우 큼직큼직한 사회의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 일단 도오루 본인이 그렇다. 정신 착란? 정신 분열? 아무튼 자기 스스로에게만 존재하는 히카루라는 친구가 있다. 이 히카루는 도오루 자신. 결국 자아정체성 혼란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도오루의 친구인 시라토. 시라토는 성 정체성 혼란의 아이이다. 그리고 불륜의 엄마, 명예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빠, 무관심한 사회. 이 사회는 극단적인 '살인'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에 무심히 눈을 돌릴 뿐이다.
도오루는 죽은 아이를 만나고 견신빙을 만나고 시라토를 구하고 하는 과정에서 문득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정신이 성숙해나가고 자아와 현실사이의 관계속에서 도오루의 환상은 수 많은 것들을 만들어 내었노라, 라고. 그러나 과연 그것들이 환상인가? 문득 내가 사는 이 사회도 내 혼란이 빚어낸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했다.
도오루의 세계는 온통 회색빛이다. 작가는 이야기한다. 오직 사랑만이 이 회색을 물리칠 수 있음을. 그러나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을 정의하고 말고를 떠나 사랑이 그토록 위대한 것이라면 나는 누구를, 무엇을, 어떻게 사랑해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가치를 물론 아주 고귀한 가치이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세세한 힌트를 제시해 줄것을 기대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것들을 단순히 '사랑'이라는 가치로 녹여낸다는 것은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전반적인 소설의 구조상 이러한 애매모호한 결론이 결국은 여운을 남기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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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에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책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여자에 대해 쓴 책이었는데, 그래서 사실 츠지 히토나리의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도 왠지 그런 소재의 작품일 것만 같았다. 그 혹은 그녀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그 기억이 희미해지고 옅어지면서도 둘의 사랑을 놓지 않는.. 아마 그런 줄거리를 예상했는지도 모를일이다.
츠지 히토나리는 항상 말랑말랑한 사랑을 작품의 주제로 가지고 놀았던 것 같은데, 이번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덮고 느낀 점은 성장소설이라는 것인데, 성장소설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분위기는 (매우) 어두침침하다.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나는 그래서 그런지 처음 3장을 채 읽기도 전에 덮으라면 덮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그 속에 빨려들어가고, 도오루가 생각하는 그 회색의 정체가 무엇인지, 함께 찾아내고 싶었다. 모두가 회색이 되어가고 있어. 자꾸자꾸 회색이 되어가. 그러는 게 편하거든. 무기력하고 무감동하고 무사상에 무능력에 무자비하게 되는 것으로 직접적인 아픔이나 공포, 슬픔이나 미래로부터 도망칠 수 있지. 인간이 이 세계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남겨진 길이라고는 더 이상 고민할 것 없이 회색이 되는 것뿐이야. 그저 멍해진 채 현실에서 도피하여 망상이나 허구 속에서 사는 거야.(p201) 이 회색의 해답은 읽는 독자가 생각하는 것이 정답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와닿는 건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나는 사람들의 거짓, 위선, 가식, 이기적, 메마른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대체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왠지 그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며칠 전 '나는 당신의 말할 권리를 지지한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서 말하는 회색의 의미와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에서 말하는 회색의 의미가 충돌해서 내 머릿 속은 회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한가지 사물 혹은 추상적인 어떤 것에 대해 하나의 의미만 있다고 가정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loose해질 것인가. 시선을 피하지 말고 세계를 똑똑히 응시해. 회색에 지지 말고.(p251)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에서 우리가 회색을 이겨내는 방법은 사랑. 믿음.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도오루는 성정체성을 앓고 있는 시라토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아마 그 사랑은 어떤 모양으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랑을 하며 도오루의 변화하는 행동을 보는 것도 재미가 쏠쏠하기까지 하다. 문득 어느 순간, 히카루가 예전에 말했던 대로 시라토가 타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지 두려웠다. 도오루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수반된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깨달았다.(p312)
요즘엔 세계가 나날이 발전해가고 있는 것에 비례해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산다. 아이들은 GPS가 장착된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오직 그것만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있었다. 모두가 공유하는 정보,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동을 찾아 자신만의 세계로 잠겨들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책상 밑에서 더듬 더듬 휴대전화를 조작하며 가상의 외계를 향해 자신을 발산하는 것 밖에는 살아있다는 실감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p36) 정보화 시대로 발전해감으로써 세계는 더욱 성장하고 탄탄해짐을 느끼긴 하지만, 그것만이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나 역시도 정보화 시대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인터넷이라는 가상에서 내 존재가 하나 더 생겨나고, 그것에 대한 책임감은 당연히 하락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나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의 그런 상황을 감지하고 츠지 히토나리는 그래서 도오루에게 히카루라는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친구를 선물해줌으로써 그 시기를 이겨나가기가 조금 수월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걸 이중인격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은 매 순간이 선택의 갈림길이고 어떤 선택을 할 때, 적어도 두 가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마음에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도오루는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분신인 히카루와 충돌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이중인격인 것일까? 뭐 사람마다 생각하는 차이는 얼마든지 있겠지만. 인생이란 모두가 말하듯이 멋진 것일까, 아니면 나쁜 꿈일까.(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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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비온 뒤에 피어오르는 밤안개의 상큼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어렸을 때는 종종 밤안개 속에서 거리를 걷곤 했다. 맑은 공기와 뿌연 가로등, 멀리 울려 퍼지는 소리들이 내 온몸의 감각기관을 작동시켜 좀처럼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다닐 때는 이런 날이면 꼭 술을 한 잔 걸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예전만큼의 밤안개를 보기도 힘들고, 잘 떠올리지도 않는다. 이젠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내 미래를 불투명한 안개 속에 내맡기고 싶지 않은 마음 탓일까. 안개 같은 회색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도오루를 지켜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는 자기정체성 장애를 겪는 중학교 1학년생인 도오루와 성정체성을 고민하는 소녀 시라토가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3년 전 도오루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한 명의 소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다.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되는데, 3년 후 비슷한 사건이 또다시 발생한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히카루’라는 분신과 함께 살아가는 도오루는 이때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고 급기야 견신빙을 만나 전설로만 들려오던 지하 학교에 들어서며 이 기괴한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남장 여자로 살아가고 있는 시라토는 이때 만난 친구이다. 그녀 또한 남자로 살고 싶은 욕망과 여성이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 속에서 도오루와 친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도오루와 시라토가 겪는 정체성은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감정을 갉아먹는 회색의 세계, 그 세계를 경계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회색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오루가 지하 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려 할 때 들려오는 냉소적인 일침은 가슴을 뜨끔하게 했다.
“거짓만 난무하고 서로 속고 속이는 세계, 너희는 항상 움찔움찔 떨면서 살아가야 하지. 그런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 너희에게는 희망조차 없어. 있는 건 불안과 공포뿐이잖아.” (192면)
그러나 회색의 세계는 이 현실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가. 도오루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분신인 히카루도 도오루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그렇다면 회색의 세계를 경계하기 위한 고민 또한 이 세계에서 펼쳐져야 한다. 아마도 츠지 히토나리는 그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터이다. 아이들이 살인사건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시라토가 들려주는 후짱의 메시지는 바로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도오루가 찾아야 하는 정체성도, 시라토의 성정체성도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극복하고 만들어가야만 하는 희망인 것이다.
“인생이란 모두가 말하듯이 멋진 것일까, 아니면 나쁜 꿈일까.” (269면)
이 책을 읽으며 밤안개가 떠오른 것은 학창시절의 불투명한 내 장래가 밤안개를 통해 투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평상시에는 괜찮다가도 고민에 휩싸이고 답답함을 느꼈을 때 불쑥 떠오르는 밤안개 속에서 나는 무엇을 갈망했을까. 누구나 다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학창시절의 모습이지만 이는 성년이 된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색무취의 회색의 세계, 감정이 메말라 버린 곳.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그 그늘의 세계를 하루 빨리 거둬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희망으로, 우리들의 꿈으로!
by 꽃다지, 2007년 7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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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의 아름다웠던 날들, 이미 가물가물 잊혀져가고 아련한 그리움에 설레는 마음으로 돌이키게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러했을까? 그 사춘기에서 기억이란 분홍빛 포장을 벗기면 그 속에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미, 흥분과 우울이 뒤범벅이 되었던 짧았던 시절이 드러난다. 정체를 알 수없던 욕구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에 대한 불안감과 죄책감에 몸살을 하던 시절, 자기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세계가 외부로부터 밀려오는 이질적인 자극에 의하여 때로는 의식하지 못하리만치 서서히, 때로는 핵폭탄을 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으며 쓸려나간다. 파괴와 복구의 힘든 시절, 자아를 만드는 땀과 눈물의 시절이 사춘기의 본질이 아닐까? 이 시기를 다룬 대표적인 소설로는 데미안이 있다. 20세기 초의 불안한 세기말 상황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그의 이야기는 영원한 청춘의 초상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다. 그럼 21세기의 젊음의 시작은 어떠할까? 역시 사춘기라는 본질은 변할 리 없건만 환경에선 현격한 차이가 있다. 현시대의 젊은이, 싱클레어들에게 데미안은 누구일까? 아쉽게도 현시대의 데미안은 인간이 아니다. 바로 현시대의 데미안은 기계다. 네모진 테두리에서 정보를 제공하며 사고의 틀을 한정시키어 자기만의 고독하나 무방비적인 자아를 조성한다. 주인공인 중학교 일학년 학생인 도오루는 그냥 있기만 한 자로 채팅사이트에 남아있다. 텅 비고 무력한 자아, 그의 거세된 욕망은 자기에게만 보이는 자기의 분신, 히카루에게 투영된다. 도오루와 히카루는 색채가 살아있는 세계가 회색빛에 의하여 잠식당하고 의미를 상실해간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이 건조하며 욕망만 충돌하는 어른의 세계에 의하여 대체되어가는 것을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도오루의 자아는 그렇게 황폐되어가며 욕망의 분신인 히카루는 점점 거칠어져만 간다. 결국 히카루에게 완전히 자아가 먹히기 직전 도오루에게 컴퓨터 내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하는 사건과 만남이 시작된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같은 반 학우로서 남자의 내면에 여성의 몸을 타고나서 성 정체성에대한 사회적 통념에 대하여 씩씩하게 저항하는 시라토와의 만남, 도오루의 시라토에 욕망과 사랑은 도오루 스스로도 혼란스럽게 하고 시라토에게도 호감과 혐오 속에서 도오루를 대하게 한다. 결국 도오루에 비하여 자아가 튼튼하고 낙관적인 시라토는 성정체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와 사랑의 성 정체성을 초월한 훨씬 중요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바로 옆에 있는 도오루를 사랑하는 데 있어 무형의 자기의 성 정체성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결국 시라토는 자신이 거부하며 맞서 온 것이 사회적 통념 이전에 자기 스스로의 고정관념 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도오루의 세상에서 이탈된 그냥 있기만 한 자로서의 세계는 시라토의 존재에 의하여 깨어진다. 즉 새가 알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id로서의 하카루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도오루의 자아는 살아있는 세계에서의 시라토를 선택한다. 처음에는 이 작가의 처녀작으로서 청소년 학교 씨리즈의 흔한 통속물인 줄 알았는데 점점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의 무게가 느껴지었다. 한 작가의 역량은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세계관의 넓이와 깊이이다. 물론 초기작가로서 메타포의 유치함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스 속의 속살이 너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감내한다면 도스또엡스끼 류의 깊은 맛이 나는 풍성한 이야기 잔치를 맛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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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치 히토나리의 책 <냉정과 열정>을 수년 전에 읽었다. 그 책이 왜 우리집으로 들어왔는지 기억도 가물하지만, 예쁘게 생긴 책이라 읽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왜 떠들썩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 책도 선물 형식으로 우리집에 들어왔는데, 읽고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나만 그런 걸까, 하고 리뷰를 뒤져보니 다른 이는 참 좋게 읽은 듯하다. 그냥, 이 작가와 나는 코드가 잘 맞지 않나 보다 하고 생각한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앞으로 더 많은 리뷰가 올라올텐데, 그들이 다 좋게 읽으면 혹 내가 혼자 안드로메다에 사는 건가 생각될 수도 있겠다. 중학교 1학년, 도오루는 자아분열을 앓고 있고,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남자의 정신을 가진 시라토와 여러모로 공감한다. 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일련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도오루와 시라토는 현실과 겹쳐져 있는 죽음의 세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그들의 상처입은 영혼은 서로를 완벽히 사랑하는 몸짓으로 치유된다. 이런 내용이다. 모모에서 자주 등장하는 회색이라는 말이 악의 화신으로 언급되고, 그것이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으로 연결되면서, 몇 가지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역시 도식적이고 얕다. 무엇보다, 나처럼 보수적인 성향의 아줌마에게는 좀 어색하다. 중학생이 읽으면 공감의 폭이 크려나... 그러나 그들이 읽기에는 좀 난해하다. 문장을 풀어가는 방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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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었던 츠지히토나리의 작품과는 조금 색달랐던 이야기.
전혀 생소한 이야기인것 같다고 생각됐다가도 작가 특유의 사랑표현은 변함없었다.
문체도 길고 글자도 작고 내용도 많고 그래서 읽는데 약간의; 버거움은 있었지만 2부 끝부분부터 3부쯤 되니까 그 다운 문장들과 진행속도도 다시 빨라져서 좋았다.
도망만 쳐봤자 아무것도 변하는건 없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수반된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있다는걸 아는 순간과 내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바가 커지는 것. 그로인해 받는 상처들.
시라토를 향한 도오루의 마음이 조금 내마음 같았다.
인생이란, 모두가 말하듯이 멋진것일까, 아니면 나쁜 꿈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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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히토나리의 편지...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의 '안녕, 방랑이여'라는 작품을 읽은 후에는 그의 책에서 나는 멀어져 갔다. 개인차가 있는 것이니 그의 팬이라면 나를 나무라지 않기를(뭐 이 글을 읽어주는 분도 없으리라) 그 이후에 그의 책은 손이 안 가는 편이었는데, 한 학생이 나에게 읽어보라고 억지로(^^) 줘 버리는 바람에 읽어야 했다. 3월 달에 그렇게 나에게 온 책은 정확히 3월 22일 부터 읽기 시작하여 5월에서야 다 읽어진, 중간 중간 다른 책을 외도하면서 의무감으로 읽어야 했다.
그 언젠가 '하드 보일드 원더 랜드(일각수의 꿈)' 이라는 다른 분의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어둠이 싫어 졌다. 책을 읽는 동안 정말 빛 하나 없는 눈 앞에 무엇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걷는 기분으로 주인공과 함께한 이후로 어둠을 상상하기 싫어졌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런 어둠의 공간이 나오는 책은 멀리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 주인공이 또 다른 학교를 가는 공간이 그런 어둠을 또 다시 들춰내 버렸다. 물론 '하드~'와 비교하자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그 옛 기억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나고 말았다. 츠지 히토나리는 회색으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지 몰라도... 난 그래도 세상은 살만 하니까 라고 하면서, 회색 세계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기에, 못 마땅함이 남은 책이었다. 나야 이제 뭐 하나 바뀔 수 없는 딱딱하게 굳어 버린 늙은 머리를 가진 상태라 상관 없지만, 게임과 영상등으로 현실 세계와 가공의 세계를 혼동하게 되어 가는 요즘 젊은 사람들(29살 청년이 어버이날에 자기 엄마를 죽였다는 글을 보고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왠지 현실과 가공의 괴리감에 요즘 사람들이 이상해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야 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은 무엇을 제시해 줄 것인가.. 나는 이러지 말아야지? 아니면 나도 외로운데 이렇게 되는걸까? 등등등... 이 책을 먼저 읽고 나에게 줬던 여중생은... 그냥 애가 자기 혼자 그런거에요 정신이 이상해요.... 라고만 해 버렸는데...
난 빛 하나 없는 어둠도, 회색도 싫다.. 물론 비가 오는 밖은 지금 회색이지만 봄가뭄을 씻겨 내려가는 회색이라는 생각에 지금 밖에 회색은 싫지만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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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GPS가 장착된 휴대전화를 움켜쥐고 오직 그것만으로 세계와소통하고 있었다. 모두가 공유하는 정보,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동을 찾아 자신만의 세계로 잠겨들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책상 밑에서 더듬 더듬 휴대전화를 조작하며 가상의 외계를 향해 자신을 발산하는 것 밖에는 살아있다는 실감을 얻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 36Ρ 에서
* 3년전 중학생의 유괴 납치 및 시체유기 사건이 일어났던 중학교에서 3년 후 다시 한 아이가 실종된다. 세상과 언론의 들썩임은 물론 아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공포와 불안에 젖어들게 되는데...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학교괴담 소설 같다. 그래, 맞다. 이 소설은 학교 괴담 소설이다. 그리고 사회괴담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정신갖고 올바르게 살아아기 힘들게 만드는 세상과 학교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모습이 바로 괴담 그 자체일지도 모르니까. 주인공 도오루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앓는 중학생으로 자신의 눈에만 보이고 대화하고 함께 생활하지만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히카루와 살아간다. 도오루의 같은 반 친구인 시라토는 '성동일성 장애' 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남자의 마음과 영혼을 가진 아이다. 이야기는 그런 둘의 만남과 학교안에서 벌어지는 유괴살인 사건이 소설의 중심축으로 진행된다. 20대도 30대도 아니고 10대의 이야기를 하는데 몸과 마음의 괴리를 앓는 소년 혹은 소녀와 마음의 분리를 앓는 소년이 주인공이라니... 학원물에 흔히 등장하는 빛나는 청춘 따위 없다고 해야 할 만큼 내용은 산란하고 어둡고 심란하다. 하지만 빛나는 10 청춘이라는 것은 일면 어른들이 바라보는 시선에서의 환상일 수도 있다. 나 역시 10대 시절이 그렇게 빛나기만 하던 꽃같은 시절은 아니었으니까. 마음속을 파고드는 외로움 자신속에 숨겨둔 어둠과 공포, 주체할 수 없는 나쁜 감정들을 어떤 식으로 제어해야 하는지 자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그리하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이 10대의 모습은 어쩌면 지금을 살고 있는 10대의 진면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둘의 모습은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어려운 그저 낯선 인간들로 다가왔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때로 그토록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삶은 지나칠 정도로 풍족해 졌지만 또한 못견딜만큼 살벌해지기도 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나 전자 기기 속에서 희망을 찾고 삶의 방법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런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만큼이나 살벌하고 어둡고 괴롭지는 않겠으나 또 그렇지 않다고도 딱잘라 말하지 못하겠다. 시대는 발전한다고 말하지만 인간 역시 발전한다고 말하기 어렵고 지금의 십대들이 그리고 더 어른 아이들이 과거보다 행복한 시대에 살고 있다고도 역시 말하기 어렵다. 책은 만화같은 느낌이었다. 좀 우울한 만화, 도오루의 환상과 현실이 뒤얽힌 내용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은 늘 그래왔던 것 같다. 이야기의 바탕엔 언제나 삶의 공허와 고독 외로움이 묻어나는 이야기를 해왔으니까. 행복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쓸쓸함이 느껴지는 작가 중 하나니까. 피아니시모 피아니시모 '매우 여리게 매우 여리게' 라는 뜻이다. 잘 이해하기도 어렵고, 불편하고, 불친절하고, 우울하고, 괴로운 그러나 외면할수만은 외로움과 어둠에 관한 책이었다. - 다락방서 허뭄 |
| 지금까지 읽었던 츠지 히나토리의 작품들을 생각해보면 참 트렌디한 느낌의 연애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이 작품 만큼은 그 범주와는 많이 다른 듯... 한 중학생에게 투사한 사건들을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개인적으로도 공감했던 것은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책인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