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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필시 가까워진다 -하니프 쿠레이시의 『친밀감』 시인 김수영은 한 시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꿔버렸다.” 처음에 이 구절의 의미는 내게 이렇게 다가왔다. 혁명에 온전히 투신하지 못한 세대의 자조적인 목소리라고.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혁명보다 방을 바꾸는 것, 다시 말해 한 개인이 익숙한 틀 속에서 살다가 새로운 삶을 찾기는 혁명보다 어려운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안온한 방을 버리고 혁명을 향해 결연히 투신하는 자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러한 자가 필요했었던, 그런 시절. 그러나 오늘날 혁명은 많은 이들이 기피하거나 회의하는 개념으로 전락했고, 다들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몸부림칠 뿐이다. 영국 작가 하니프 쿠레이시의 소설 『친밀감』은 혁명도 못한 채 방을 바꾸기를 갈구하는 한 남자의 하룻밤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제이는 날이 밝는 대로 간단히 여행 가방을 꾸려 친구 빅터의 집으로 갈 예정이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과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번민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습에 대한 시시한 반항으로 점철되었던 젊은 날, 부모님과의 갈등, 속절없이 놓쳐 버린 사랑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한다. 젊은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던 ‘자유’였다. 68혁명의 바로 다음 세대인 이 40대 남자는 반항의 몸짓을 청춘의 상징으로 여기며 성장했다. “아이를 갖지 않는다면 일부일처제는 필요 없다는 믿음”(30쪽)을 지녔던 제이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6년동안 같이 살았던 여자와 두 아이를 결연히 떠날 결심을 한 것이다. 잠든 아이들과 여자를 바라보면서 제이는 회상에 젖는다. 아내 수전은 회사에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고 두 아이들은 사랑스럽다. 그러나 제이는 수전 말고 사랑하는 여자-니나-가 있다.
단지 니나에 대한 사랑이 평온한 가정에서 도피하도록 충동질하는 것은 아니다. 68혁명 이후의 영국 사회에서 제이는 반항적이고 급진적인 좌파였다. 알튀세르와 마오쩌둥, 트로츠키의 삶을 꿈꾸던 그들이 가정을 이루고 기성세대가 된 현재는 과거와는 달리 평온하고 견고한 질서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젊은 시절 많은 이들이 혁명과 변화를 꿈꾸었으나 중년이 된 현재에 그들은 각자 “어떤 이들은 좌파로 남았고 다른 사람들은 성 정치로 퇴각했으며, 몇몇 이는 대처리스트가 됐다.”(83쪽) 무력한 이 중년들에게 남은 것은 적응이지 혁명이 아니다. 제이는 결혼생활과 육아에서 ‘친밀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여자와 자식들은 그의 꿈과 친말감을 억압하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는 이제 떠나려고 한다. 계획은 없다. 니나와 함께 지낼 수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녀마저 그를 떠나고 없다. 그렇지만 제이는 떠나려고 한다. 자족적인 새로운 삶을 찾아서.
이 소설은 한 세대의 그늘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신들의 세대는 어떠냐는 질문을 던진다. 변혁운동의 끝물이었던 제이의 세대가 중년이 된 뒤에 겪을 수밖에 없는 환멸과 새로운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좌절을, 당신들도 겪고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이 소설은 단지 영국의 40~50대의 풍경에 머무르지 않는다.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고스란히 다시 군부독재의 잔존 인물들에게 빼앗겼던 386세대, IMF를 전후로 청춘을 통과했던 세대들이 지금 겪고 있는 상실감을 되새겨 본다면, 제이의 도피는 영국의 한 세대의 자화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혁명도 못하고 방도 바꾸지 못한 세대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적인 질문이 다가온다. 우리의 젊은 세대는 어떠한가. 우리 세대는 혁명이나 변혁을 전혀 꿈꿔보지 못한 채로 겁에 질려서 안온한 ‘개인의 방’을 갖는 것만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우리들이 중년이 되었을 때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체제에 대한 저항과 의문을 가져보지 못한 채로 기획된 질서에 편입되기 위해 청춘을 보낸 후에, 미래에 다가올 환멸을 우리는 어떻게 대비할 수 있을까. 어쩌면 무너질 환상마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대와 저항의 경험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우리 세대들은 각자 격리된 채 멈춰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자신의 방을 갖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것은 타인과의 친밀감과 맞바꾼 밀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멈춰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필시 가까워질 수 있다. 도피를 기획하는 한 남자의 내면풍경이 단지 불륜과 무책임의 풍경으로 전락하지 않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이고자 했으며 타인과의 친밀감을 갈구했던, 청춘의 기억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진실로 슬프고 아픈 것은 방황과 상처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와 견고한 현실에 대하여 회의하지 않는 삶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역설하고 있다.
거기에 삶은 없다. 세계는 우리의 상상으로 이루어진다. 눈은 생기를 돋우고 손으론 형태를 빚는다. 갈구해야지 풍성해진다. 의미는 부여하는 것이지, 샘솟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며, 그 너머는 없다. 새로움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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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풀어내기에 앞서 ‘친밀감’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지내는 사이가 아주 친하고 가까운 느낌’이라는 의미라는군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순간에 타인과의 사이가 아주 친하고 가깝다고 느낄 수 있을까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죠. 그래서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어딘가 마음 한 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또 그 문제의 대부분은 이 친밀감에 관한 것일테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부터 마음 편한 인간관계를 친밀감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불확실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 움직이고 있어요. 하니프 쿠레이시는 자신의 책 ‘친밀감’에서 톰 건의 시 ‘움직이는’을 빌어 이렇게 말합니다. ‘멈춰 있지 않으면 우리는 필시 가까워진다’고. 저는 이 말이야말로 인간관계에 대해 가장 잘 정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곧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깝다’는 개념은 ‘멀다’는 그 대조군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개념은 반드시 동일 대상, 동일 시간에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멀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가까워지는 사람도 반드시 생겨납니다. 또 멀어졌던 사람과 다시 가까워지는 일도, 가까워졌던 사람과 멀어지는 일도 생길 수 있지요. 다시 말해서 나와 사람들 간의 거리의 변화의 총량은 같지만, 그 사람들 개개인에 대해 반드시 그 총량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에요.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쯤 되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떠올릴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