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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서 셰익스피어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그의 희곡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한 그의 생애와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스티븐
그린블랫의 평가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즉, 종합적인 평전인
셈이다. 단 한 차례도 셰익스피어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셰익스피어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셰익스피어가 다른 이(예를 들어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든가 옥스퍼드
백작이라든가, 여러 명의 합작품이라든가)라는 견해에 대해서는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오로지 셰익스피어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16, 17세기 영국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복원된 셰익스피어의 생애가 의심 없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심정상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스티븐 그린블랫이 복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지금 얻어낼 수 있는 증거를 통한, 가장 그럴듯한 셰익스피어이다.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복원시킨 셰익스피어가 어떻게 셰익스피어가 되었는지, 즉 어떻게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위대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극작가가 되었는지를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내고 있다.
스티븐 그린블랫이 복원해내고 있는 윌(Will) 셰익스피어(제목 “Will in the World”의 will은 우리말 제목처럼 ’의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스티븐 그린블랫은 책에서 자주 셰익스피어를 그냥 ‘윌’이라고 지칭하고 있다)의 생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런던에서 걸어서 2,3일 거리에 있는 스트랫퍼트의 고급 가죽장갑을 만들어 팔던 존 셰익스피어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은 전기적 사실이다(그래서 “장갑, 외피, 가죽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종종 등장하는 소재”가 된다, 93쪽).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명문가문의 딸과 결혼을 하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시의회 의원, 조합장, 시장의 지위까지 오르지만, 어떤 불분명한 일로 내리막을 걷게 되고, 그로 인해 명민하고, 감수성 많은 아들 윌 셰익스피어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 지점에서 수많은 개연성 있는 상상력 중 하나를 발휘한다. 셰익스피어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재건의 염원’. “복구의 염원은 셰익스피어의 생애 내내 그를 뒤쫗았다.” (138쪽)
‘잃어버린 시절’. 즉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시절에 대해서 스티븐 그린블랫은 카톨릭교도로 북부 지방의 개인 교사로 지냈다고 쓰고 있다. 이는 아버지의 몰락과도 연결이 되며, 아주 드문 문건에서 유추해내는 셰익스피어의 은밀한 비밀이기도 하다. 물론 분명한 증거는 없는 저자의 상상력이긴 하다. 그리고 그런 시절의 경험이 나중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도 그렇게 분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카톨릭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은밀한 태도는 끝까지 그의 작품과 삶에 작용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후 셰익스피어는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스물여섯 살의 임신한 앤 헤더웨이와 결혼한다(역시 전기적 사실이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이 결혼을 셰익스피어가 후회하였다고 보고 있다(이는 스티븐 그린블랫의 추측 혹은 확신이다).
그 유명한 ‘두번째로 좋은 침대’라는 유언 말고도 그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을 가진 셰익스피어가 아내 앤을 상대로 쓴 연애편지나 그 밖의 어떤 글에서도 그런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세 아이와 아내를 두고 고향을 떠나 혼자서 런던으로 떠나버린 남자가 아내를 그지없이 사랑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실제 결혼해서 산다는 게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묘사를 삼갔다.” (216쪽) 그리고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연애, 결혼식, 그리고 후회”
이제
셰익스피어는 런던에 입성한다(어떤 경로로 극단에 들어가고 런던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는지는 역시 개연성 있는 시나리오로 재현된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윌이 입성한 런던이 어떤 곳이었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어떤 기회가 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따라서 이 책은 역사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윌 셰익스피어는 연극 배우로, 극작가로 빠르게 성공한다. 그가 당시의 다른 극작가들과 어떻게 다른 작가였는지,
그가 써내고 무대에 올린 희곡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셰익스피어가 무슨 생각을 하였으며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세계를 향한 의지』는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논란이 될 만한 내용도 소개한다. 바로 사우샘프턴 백작이라는 청년과의 관계다.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가 그와 관련이 있으며, 백작과 거의 애인 관계였을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임스
샤피로가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모험』에서는 적극적으로 배격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듯한 설정이기도 하다. 그러한 동성애적 성향이 어떤 연극에 드러난다고 해서 셰익스피어가
그런 취향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싶다. 또한 신분적 차이를 뛰어넘어 그런 관계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다소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거의 은폐한 셰익스피어의 능력이 역시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역시 셰익스피어는 이중적이다.
스티븐 그린블랫은 특히 『베니스의
상인』, 『햄릿』, 『태풍(템페스트)』의 작품 분석을 통해 셰익스피어 희곡의 진면목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작품들을 썼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서는 그유대인 자체에 대한 자신과 영국인의 의식을 넘어서 ‘타자성에 대한 조롱과 감정 이입의 갈등을 인상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셰익스피어의 경력에서 인상적인 변화를 알리는 기록적인 작품이라는 『햄릿』을 통해서는 내면성에 대한 성찰을 그려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가장 깊이 표현했다고, 『태풍(템페스트)』을 통해서는 고별사이자 은퇴를 대하는 셰익스피어의 태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스티븐 그린블랫이 모든 대목에서 흔히 쓰는 수법은 다소 의심스럽다. 처음에는 전기적사실에 덧붙이는 가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는 그 가정을 합리화하는 부분적인 증거를 대고, 그리고는 그 가정을 고정시킨 후 셰익스피어의 삶과 작품을 해석한다. 가정과 사실을 혼동시키고, 작품을 결합하는 이런 방식은 적지 않은 반론을 가져올 수 있을 듯 하지만, 윌 셰익스피어를 이해하는 훌륭한 하나의 방법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차피 세부적인 것은커녕 너무나 많은 것을 모르는 셰익스피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제한된 증거를 통해서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상상력이 얼마나 타당하느냐는 그것으로 셰익스피어를 잘 이해할 수 있는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이 『세계를 향한 의지』를 통해서 세익스피어와 삶과 그의 작품을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스티븐 그린블랫의 무리수는 성공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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