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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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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 KİTAP :: Orhan Pamuk인터넷을 하다보면 수많은 [표절작] 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블로그 꾸밈이 예뻐 그대로 따라 쓴다든가, 업로드 된 사진의 이국감에 반해 같은 기종, 같은 장소, 같은 각도로 찍어 본다든가, 기발한 UCC에 자극 받아 패러디란 치사한 명목으로 대량 카피 한다든가, 출처도 불분명한 이미지 밑에 어딘가에서 스크랩한 아포리즘을 꾸며 놓는다든가, 타인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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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 KİTAP :: Orhan Pamuk

인터넷을 하다보면 수많은 [표절작] 들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블로그 꾸밈이 예뻐 그대로 따라 쓴다든가, 업로드 된 사진의 이국감에 반해 같은 기종, 같은 장소, 같은 각도로 찍어 본다든가, 기발한 UCC에 자극 받아 패러디란 치사한 명목으로 대량 카피 한다든가, 출처도 불분명한 이미지 밑에 어딘가에서 스크랩한 아포리즘을 꾸며 놓는다든가, 타인이 소유한 목록을 자신의 위시 리스트에 슬쩍 끼워 넣으며 타인의 공간을 그 존재의 장소로 인지하기 이전에 하나의 카탈로그로서 활용한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서 타인의 생각을 훔쳐 보는 것임에도, 타인을 따라하는 것에, 타성적이고도 반복적인 덮어 씌우기에 점차 [자신] 은 소멸 되어 간다.

비단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On-line)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OFF된 세상에서는 오히려 더 처절하고 치열하다. 누군가 하기 때문에 진학을 결정하고, 누군가 하기 때문에 통장의 규모와 아파트 평수를 걱정하고, 누군가 하기 때문에 노후를 설계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가 타인의 의지인지 불분명 해지고, 타인의 꿈이 자신의 꿈인지 확신하기 어려워진다. 온전히 나로서 갖고 있는 것을, 머물러 있는 것을, 여태까지 쌓아온 것을 매일 같이 부정하고 결핍감을 호소하며 더 나은 것을 갈망 해야만 한다. [무리] 에 끼길 혐오 하면서도, 자신만의 표현 이라고 앙칼지게 소유권을 주장 하면서도, 그 안에 있는 것이 과연 [진정한 나] 라고 소리칠 수 있을까?

가까운 친척이자 저명한 칼럼니스트인 제랄을 순수하게 동경하며 안온한 삶을 살았던 갈립은 어느날 자신의 아내 뤼야(꿈 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는 사건에 부딪히게 된다. 그녀가 남긴 흔적들 속에서 그녀가 갈만한 곳을 추리하며 점차 갈립은 아내가 자신보다 더 나은 이상을 바랬다는 것을 감지하고 비로소 자신의 이상이었던 제랄과 그녀가 동반 실종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제랄의 칼럼 속에 그들이 갈만한 실마리가 숨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갈립은 그가 쓴 모든 글들을 샅샅이 읽고 그 칼럼이 제공 되었던 사건, 장소,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기 시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갈립은 자신이 절대적으로 믿고 영웅으로 여겼던 제랄의 허와 실을 파악하고, 그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이 제랄이 되어, 그와 그의 글을 창조하며 살아가기로 마음 먹는다.

파묵은 글쟁이로서, 자신이 아무리 글자를 새롭게 조합해도 그것이 선대 글쟁이들의 영향을 받은 모방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조하며 [인정 받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이고(1부 p153) 읽는 독자에 따라 자기 해석적인지, 열렬한 독자의 피드백이 황홀 하면서도(2부 p177) 그 일방적인 책임 전가가 얼마나 타성적인지를(2부 p211) 한탄하며 토로한다. 그러나 그 모든 딜레마를 벗어날 수 없다면 개인 하나하나가 [크리에이티브] 로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위대한 작가] 로서 사소한 사물 하나를 재해석 하고 표현 하는 것만이 타자를 통한 진정한 [자기 창조] 임을 역설한다.

동시에 그는 터키인이자 이스탄불 시민으로서, 자국의 다채로운 문물을 [일상의 비참함(1부 p183)] 으로 여기고 새로운 서양 문물을 흡수하고 카피하는 터키인들에게, 아니 어쩌면 글로벌 이라는 허울 좋은 부제로 스스로의 고유성을 포기해 가는 곳곳의 민족들에게 풍부한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나열하며(2권 p281) 경고한다. 지하 동굴에 묻힌 수많은, 먼지를 덮어쓴 터키 마네킹들은 터키인들의 자화상이자 우리네의 닮은꼴이다. 우리네 유산을 시시해 하다 못해 분통을 터뜨리며(1부 p197) 검증 받지 못한 외제를 찬양하고 갈데 없는 박탈감을 해소할 무언가를 기다리며(1부 p255) 초조해 하는 것은 어디 터키만의 일인가? 너무 많은 의미가 쏟아져 나와 난감할 지경이라고 너스레를 떠는(2부 11장) 그의 이스탄불 사랑에서 우리는 또 그 이국 문물을 상상하고 동경하는 것에만 그치고 말 것인가?

이 책은 문화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자 자아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고, 또 다른 이야기를 생산해 내는 끝없는 블랙홀 같은 책이다. 난해하고 어지로운 [매직아이북] 이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오히려 윤곽이 보이지 않듯이(1부 p138), 조금은 거리를 두고 실눈으로 바라보면 한가지의 의미도, 두가지의 의미도 (2부 p124) 있는 그대로 까다롭지 않게 읽어낼 수가 있다. 거기에 글자의 힘, 크리에이티브의 힘, 그 [신비] 를 깨달은 독자는 이 책에 영향을 받아 또 글을 쓸 것이다. 시시한 사물이 생명력을 띠고, 온갖 의미와 이야기를 담은 텍스트로서 읽혀지고, 그 창조 작업으로서 독자는 [작가] 가 되어간다. 모방자(1부 p143) 파묵(제랄)을 동경한 우리는 제랄의 인생을 사는 갈립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한창 독서하기와 글쓰기에 회의 하고 있던 중에 이 책을 읽게 되어 개인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갈립의 친구 사임처럼(1권 p109) 닥치는 대로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고, 제랄과 갈립처럼 [읽는] 것에 집착하고(2부 p54), 에펜디 왕자처럼(2부 p267) 작가들의 어구를 내 지식인 마냥 인용하기에 급급했다. 하다못해 이런 책 감상문조차 [좋은 글] 쓰기에 연연해 좀더 나은 아마추어 글과 자신의 글을 비교하며 쓸데없이 좌절하고, 읽히고 뽑힐 글을 위해 작위적고도 통속적인 문장을 조합하기도 했다. 그 위화감을 못견뎌 자신만의(라고 착각하고픈) 솔직한 표현을 드러내면,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문장에 장인 베디의 마네킹 마냥(1부 p100) 무시 당하는 수모를 감내 해야 했다. 나는 사실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병에 걸린 사람(2부 p60)에 해당되는 건 아닌가 하며 스스로를 아파했다.

그럼에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타인의 꿈에 나를 맞춰야 한다는 현실에 쫓기며(1부 p121) 나와 같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다는(1부 p149, p156) 자기 최면적 용기를 위안 삼아, 내가 살아온 삶을, 생각을, 내가 있는 곳을, 그 모든 것을 표현해 내고 드러 내려고 한다. 설령 타인에게 보여지는 [눈]을 의식하고(1부 p171), 그것으로 또 고통 받고 깨진다 해도, 그럼으로 인한 변태는 그전의 순수한 나는 아니더라도 내가 되고자 하는 [그]가 됨으로, 그 순간에 다다렀을 때, 그것이 진정한 나임을 깨닫고 받아 들이게 될 것이다. (2부 p135) [황량한 사막의 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 사이의 바위, 아무도 보지 않는 계곡의 나무(2부 p283)] 가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고립] 이 됨으로 나자신이 된다는 패러독스를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선(line)위에서, 지금의 자신을 표현하라. 더 가지려 하지 않는, 더 가지고 있지 않는, 언제나 모자른 자신을 표현하라. 표현 못할 병을 가졌다면 기꺼이 선대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으라. 모방은 잘못된게 아니다. (1부 p220) 그들의 습득을 겸허히 참고하고 배우라. (1부 p130) 보는 것은 또한 타인을 이해 하는 것이다. 설령 되고 싶은 자신이 타인에게 이미 있다 하더라도 시기와 성급함으로 내것을 없애지는 말라. 그 딜레마의 사이에서 표현의 [신비] 를 깨우치라. 모든 글의 소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 개인의 인생만큼 경이로운게 또 있을까. 그것을 표현해 내는 글쓰기 말고는.

 
YES마니아 : 로얄 q****e 2007.07.13. 신고 공감 11 댓글 2
리뷰 총점 종이책
매혹의 도시 이스탄블로 안내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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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네 번째 소설 <검은책>은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는 홀수장은 제3자의 눈으로 갈립의 행동을 뒤쫓고 있으며, 짝수의 장은 갈립의 사촌형 제랄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글(혹은 칼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참을 읽어나간 다음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립의 아내 뤼야는 백부의 딸이니 사촌간인 셈입니다.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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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네 번째 소설 <검은책>은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는 홀수장은 제3자의 눈으로 갈립의 행동을 뒤쫓고 있으며, 짝수의 장은 갈립의 사촌형 제랄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글(혹은 칼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참을 읽어나간 다음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립의 아내 뤼야는 백부의 딸이니 사촌간인 셈입니다.

 

홀수장의 주인공 갈립이 출근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가지 집에 있던 뤼야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종적이 묘연하고, 사촌형 제랄 역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어서 갈립은 사라진 아내와 제랄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제3자적 위치에서 뒤쫓아 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두고 갈립은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고 적고 있기도 합니다. 독자는 갈릭의 뒤를 따라 이스탄블 시내 곳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만약 이스탄블에서 잠시라도 살아보았더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났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하지 못하니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손끝이 겨우 보이는 안개 속에서 앞선 사람을 놓칠까 바짝 붙어가다 보면 좌우로 무엇이 지나가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제3자가 가끔씩 갈립을 놓치는 모양으로 설명이 생략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3장의 말미에 뤼야가 남겼다는 작별편지를 발견했다는 서술을 건너뛰고 있는 장면이라던가 열아홉 단어로 되어있다는 편지도 ‘가족들에게 잘 말해’, ‘네게 곧 연락할게’라고 조각내어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뤼야의 종적을 찾기 위하여 찾은 친구 사임의 집에서 갈립의 행동이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갈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뤼야에게 전화를 했다. 어쩌면 밤늦은 시간까지 사임의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113쪽)” 분위기가 미스터리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임은 다양한 출판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갈립은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통하여 뤼야의 전남편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한다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행적을 뒤쫓는 남자가 심야에 길거리에서 만난 삐끼에 이끌려 퇴역배우를 흉내내는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제랄의 컬럼은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터키의 역사를 비롯해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랄이 작가가 자신을 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글쓰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칼럼니스트들을 통하여 소개하기도 합니다. 도덕보다는 재미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제랄에게 전하는 이들의 충고는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따로 메모를 해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일부를 인용해보면, “즐겨 쓰는 속담, 관용구, 격언, 일화, 농담, 시행, 금언을 모아두라.”, “주제를 택한 다음 글에 왕관을 씌울 적당한 금언을 찾지 말고, 금언을 택한 다음에 이 왕관에 걸맞는 적당한 주제를 찾으라.”,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기 전에는 책상에 앉지 말라.(130쪽)” 등등입니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하여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검은책> 역시 <하얀성>과의 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내가 이렇다 할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떠나 버리자, 작가에게는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 아내가 떠나기 전에 그는 서로의 삶을 바꾼,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독자들이 ‘역사적’이라고 했던)을 썼다고 한다.(236쪽)” 여기에서 말하는 여기에서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은 파묵의 전작 <하얀성>을 암시한다고 하는데, 아내가 떠난 작가에서 갈립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어 제랄과 갈립이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검은책> 1권에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홀수장과 짝수장이 교체되면서 터키의 역사로부터 현대의 사회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엮어 넣고 있어 이야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미스터리한 상황입니다. 이렇듯 풀어놓은 이야기가 2권에서는 어떻게 모아져 정리될지 기대됩니다.

y*****2 2012.12.26.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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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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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도 쉽게 흡입이 되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서평을 스려고 해도 시작을 어덯게 해야 할지 잘 감이 안잡히는 책이 있다.재미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그런 책들이 있는데 오르한 파묵의 이 책이 그러하다.    오르한 파묵은 지난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국내에 인지도를 높인 작가이다.  물론 "내 이름은 빨강" 이나 "하얀 성" 등을 통해서 이름은 들어왔지만 이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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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어도 쉽게 흡입이 되지 않는 책이 있는가 하면 서평을 스려고 해도 시작을 어덯게 해야 할지 잘 감이 안잡히는 책이 있다.재미여하를 막론하고 그냥 그런 책들이 있는데 오르한 파묵의 이 책이 그러하다. 

 

오르한 파묵은 지난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국내에 인지도를 높인 작가이다.  물론 "내 이름은 빨강" 이나 "하얀 성" 등을 통해서 이름은 들어왔지만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났다. 이미 이 책의 표지와 제목만으로도 그 내용에 대해서 상당히 궁금함을 유발시키고 노벨상 수상작가라는 점 또한 이 책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좀 낫설다는 느낌이 든다. 터키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서 그런지 아님 이해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술 술 읽혀지지 않았다. 생소한 단어들은 주석이 달려있지만 그래도 읽기가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던것 같다. 파묵이 이소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뱔견했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이전에 소개된 작품들을 읽어보지 못해서 이 작품과의 다른점에 대해서는 알수가 없어 조금 아쉬웠다.

책의 후반부에 갈수록 몰입도가 높아졌고 터키 소설이라서 그 나라의 문화나 생활상등을 어느정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점은 장점이다.  2권을 구입하지 않아 이스탄불의 좀 더 다양한 것들은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a*****k 2007.08.22.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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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지만 매혹적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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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지만 역시 쉬운 책이 아니다. 그의 다른 책도 일반 소설의 두 배 이상 시간을 투자해야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다. 읽을 때도 읽고 난 후도 생각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읽히고 어려운지. 가장 큰 이유는 낯선 이름들과 지명 탓이 아닐까 짐작하여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에서도 속도가 확연히 올라가지 않는 것을 보면 그의 문장 구조와 이야기 구성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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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은 했지만 역시 쉬운 책이 아니다. 그의 다른 책도 일반 소설의 두 배 이상 시간을 투자해야 읽을 수 있었는데 이번도 마찬가지다. 읽을 때도 읽고 난 후도 생각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읽히고 어려운지. 가장 큰 이유는 낯선 이름들과 지명 탓이 아닐까 짐작하여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장면에서도 속도가 확연히 올라가지 않는 것을 보면 그의 문장 구조와 이야기 구성 때문인 듯하다. 깊이 빠져 한참 읽었다고 페이지를 확인하면 몇 장 보지 못한 것을 보면 그 속에 풍부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듯하지만 그 정확한 실체를 잡기가 쉽지 않다.


책을 읽다 많이 생각난 작가와 작품이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다. 가끔 카프카가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율리시스’의 기분을 많이 느꼈다. 역자의 후기를 보면 나와 비슷하게 느낀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갈립이 도시 이곳저곳에서 뤼야를 찾아 헤매는 장면과 그 실체를 찾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몽환적인 분위기가 이런 느낌을 강하게 준 듯하다. 현실의 진행과 병행되어 나오는 제랄의 칼럼이 단서를 던져주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파악하기는 너무 어렵다. 복잡하게 와 닿는 이름과 지명과 옛 이야기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섞여 그 실체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파묵의 책으로 세 번째 읽는다. 이전 책도 쉽지 않았고 지금도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읽을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안개 속에 조용히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면 약간 손을 내밀었다 한 발 더 다가가면 멀찍이 달아난다. 텍스트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하나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다지기 전에는 쉽게 그 전체를 알기 어려운 소설이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완전한 틀을 알지 못하더라도 각 방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매혹적이다. 매력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그것을 하나로 엮어내고 풀어내는 능력이 아직 나에겐 부족하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매력을 전부 느끼지 못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함께 자라 결혼한 아내 뤼야가 사라진다. 사촌 형이자 뤼야의 이복오빠인 칼럼리스트 제랄도 사라졌다. 주인공 갈립은 뤼야를 찾기 위해 이스탄불을 뒤지고 다닌다. 제랄과 뤼야가 함께 있다는 예감을 가진 갈립은 제랄의 칼럼을 읽고 단서를 추적하며, 나중엔 제랄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 속에 이스탄불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신화와 전설과 이야기와 문화 등으로 살을 채워 넣는다. 그리고 나타난 결말.


단순히 줄거리만 따진다면 별 것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을 생각하면 미로 속을 헤맨 듯하다. 이스탄불의 풍경, 소리, 냄새로 가득한 미로 같은 소설이란 문구에 딱 맞는 소설이다. 미로 찾기는 출구를 찾는 것이 주목적이지만 그 과정이 주는 어려움과 힘겨움이 재미를 주는 놀이다. 이 소설에서 곳곳에 숨겨진 이런 난관들을 즐길 수 있다면 엄청 재미난 소설이 될 것이다. 역자가 주석을 단 것을 기억하고, 소설 속 이야기와 역사를 이해한다면 아마 더 재미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에 읽어온 다른 나라의 소설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낯선 곳의 이야기다. 그들의 역사와 인물과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재미를 충분히 누리기 힘든 소설인 것이다.


나는 아마 다음에 또 파묵의 소설을 들고 있을 것이다. 쉽게 들지는 못할지 모른다. 그 실체를 알 수 없지만 매혹적이고 이국적이며 미로 같은 이스탄불을 생각하면 반드시 그를 생각할 것 같다. 그리고 파묵의 소설을 한 번은 제대로 재미를 느껴보려고 차분히 책을 읽어나갈 것이다. 그 때도 모두를 이해하고 전체를 알지 못하겠지만 이전에 느끼지 못한 재미를 발견하고 즐길 것이다. 갑자기 이스탄불로 떠나고 싶다.

f***2 2007.07.04.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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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맛본 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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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지 못하고 반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시간의 부족? 5권의 책을 14일동안 대출할 수 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 어쩔때는 엉터리 속독법처럼 책위를 날듯이 (정말 나쁜 독서법이라 생각되지만-_-;) 빠르게 읽어내려가기도 한다. 나에게 그 기간은 결코 부족한 기간은 아니였다. 취향의 문제? 빌리는 책 자체가 결국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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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을 읽지 못하고 반납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시간의 부족?

5권의 책을 14일동안 대출할 수 있다. 나는 성격이 급한 편이라서 어쩔때는 엉터리 속독법처럼 책위를 날듯이 (정말 나쁜 독서법이라 생각되지만-_-;) 빠르게 읽어내려가기도 한다. 나에게 그 기간은 결코 부족한 기간은 아니였다.

취향의 문제?

빌리는 책 자체가 결국 처음 접하는 책이다 보니 읽다가 '이건 아니잖아!'싶은 책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취향을 떠나서 시작한 책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다.

그래서 대출한 책중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내게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르한 파묵"의 책 <눈>을 빌렸을때의 나는 채 10장도 읽지 못하고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다.

별일 아닌데 그 책이, 그리고 결국 읽지 못하고 반납해버린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10장정도밖에 접하지 못한 <눈>이 였지만 재미있었고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잔뜩 호기심을 유발했던 초반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나를 멈추게 한 알 수 없는 힘.

그러고 나자 "오르한 파묵"에 대한 이야기가 들릴 때 마다 어쩐지 죄지은 느낌이 들었다.

겨우 책 한 권을 읽지 못했을 뿐인데 마음이 불편하고 안절부절이다.

그래서 결국 <내 이름은 빨강>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결코 반납할 수 없도록 당당히 구입을 해서 읽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심하게 1권만을 구입했다.

아직은 당신이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는 나의 작은 불신탓일까?

그렇게 당당히 구입해 둔 <내 이름은 빨강>마저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계속 나의 독서순서에서 밀려났고 그렇게 "오르한 파묵"에게는 계속 미안한 마음 가득하게 시간이 흐르다가 드디어! <검은 책>으로 오르한 파묵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이번 만큼은 다른 책을 다 제쳐두고 읽겠다는 강한 의지로 나는 <검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동안 나의 마음이 그토록 불편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작가의 작품을 계속 방치해둔 탓이었다!

 

검은 책

처음에는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나를 긴장하게 만든 탓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어려울 것 같은 문체와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은 순식간에 날아갔다.

이 유쾌하고 그러면서도 감상적인 사랑스러운 소년같은 느낌의 작가와 그가 들려주는 묘하면서 날카롭고 다정한 이야기속에서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또 한 명의 멋진 작가를 발견했다는 행복감과 또 한 권의 멋진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행복감을!

 

검은 책은 다양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뤼야를 찾으려고 애쓰는 갈립의 이야기와 제랄의 칼럼이 한 편씩 교대로 소개되면서 서로간의 비밀을 밝혀주기도 하고 힌트를 던져주기도 하며 때로는 미스터리 소설 같은 느낌을,

제랄의 칼럼속 이야기는 현실비판과 풍자가 난무해서 내가 소설이 아닌 어떤 신문의 칼럼을 읽는 듯한 착각을,

그리고 뤼야와 갈립 두 주요인물들은 한 작가에게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맞나 싶을 정도로 뚜렷한 차이의 개성이 가지고 있다.

여기에 가보지 못한 터키의 문화, 풍경, 정치, 그리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가미되어서 이 책은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읽어도 어떤 독자가 읽더라도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한 작가의 내면에 너무도 다양한 여러 명의 오르한 파묵이 존재해서

그걸 표출해 내기 위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 이 멋진 작가의 작품들을

이제 모두 만나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s*******r 2007.08.13.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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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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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손 깃을 스치면서 사라져가는 벽돌의 감촉은 옛 일에 대한 회상을 알려주기에 안타까운 시간만을 대변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리고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과거로의 회귀는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기다림만을 전해 주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문득 깨달음이 오면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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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길을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손 깃을 스치면서 사라져가는 벽돌의 감촉은 옛 일에 대한 회상을 알려주기에 안타까운 시간만을 대변해 주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데 자신만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리고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과거로의 회귀는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기다림만을 전해 주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문득 깨달음이 오면 혼자라는 사실에 몸서리를 치기도 합니다. 우린 어쩌면 다른 누군가가 꾸는 꿈속에서 사는 사람들 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검은 책은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습니다. 하나의 주제를 향해 치닫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1인칭과 3인칭이 교차되면서 수많은 터키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찾는 미로 같은 책입니다. 파묵의 이러한 글에는 작가가 원하는 인생에 대한 관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탄불의 영혼을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문화의 충돌과 교차에 관한 새로운 상징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가 검은 책에서 나타내고자 했던 갈립과 뤼야, 그리고 제랄를 통한 교차적인 이야기의 전개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해답과 고향에 대한 의문이 무척 잘 묘사 되어 있습니다.

 

보스포르바 해협, 비잔틴과 오스만, 기독교와 이슬람의 혼돈이 서려있는 고대의 도시 터키,찬란한 이스탄불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강대국들의 소유권 쟁탈이 벌어진 전쟁터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점에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이스탄불의 문화를 태동 시켰으며 파묵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고향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다시금 터키 문학에 눈을 돌린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강한 회귀로 풀이됩니다.이러한 파묵의 작품 속을 헤매대 보면 만나게 되는 인간의 보편적인 주제들이 이스탄불 속의 이국적인 사랑에 대한 불꽃처럼 마치 바로 앞에서 일렁거리는 듯합니다.

 

문화는 한 나라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은 타 민족에게 강한 의지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었던 감정은 우리의 문화였습니다. 파묵이 미국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신을 찾는 모험을 강행했을 때에는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한 강한 욕구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 문화는 개발과 창조보다는 모방과 답습에 치중하고 있는 듯합니다. 너와 내가 아닌 제3자가 된다는 의미는 주체적임을 떠나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결국 정체성은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파묵의 작품은 한번 읽어서는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하지만 그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실로 변하지 않는 소중한 사랑과 우정을 나타내는 인간의 외로움을 보여주었고 이스탄불을 통한 진정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k****4 2007.07.1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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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에 대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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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어법이 어휘가.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뒤로 갈수록 낮선 어법과 낮선 세계관에 익숙해질수록 초반의 어색함이 매력으로 바뀌는 책입니다.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과도 어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집필 작업을 한다는 저자답게 책 한권 한권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노벨상을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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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어법이 어휘가. 책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뒤로 갈수록 낮선 어법과 낮선 세계관에 익숙해질수록 초반의 어색함이 매력으로 바뀌는 책입니다. 같은 저자의 다른 책들과도 어법이 다르다고 합니다.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집필 작업을 한다는 저자답게 책 한권 한권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노벨상을 받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냥 좋은 책일 뿐이야. 그래서 약간의 집중이 더 필요한 것일 뿐이야..” 그렇게 저자가 노벨상 수상 이후 자신의 삶과 문학이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 것처럼, 책을 읽는 나도 그의 작품을 선입견없이, 다른 평자들의 비평에서 벗어나서 나의 독법으로 읽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책은 중의적이고 충분히 다의적이기에 읽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저자라면 자신이 책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과 책의 스타일 자체가 바로 한 틈의 어긋남도 없이 맞물려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생각마저도 떨쳐내려 노력했습니다. 책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그냥 책 그대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할 무렵 책의 중반을 넘어서면서 어둠 칙칙하던 책의 이미지는 한층 밝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이스탄불의 공기에 그만큼 적응이 된 것일까요. 저자의 어법에 적응해 이스탄불의 거리를 돌아다니기가 한층 자유로워진 것일까요. 근대를 맞이한 터키의 복잡한 심리적 분위기에 그 사이에 동조가 되어 버린 것일까요. 책의 후반부는 마치 익숙한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전혀 다른 어법으로 전혀 다른 세상을 대상으로, 서구와 다른 삶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굳이 판에 박힌 방식으로 말하자면, 터키인의 방식으로 본 정체성 찾기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와 수많은 복선들이, 이야기 곳곳에 나오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창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책은 의외로 굉장히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긴 책을 구성하는 거대한 용골뿐 아니라, 부분 부분 모두가 “정체성...”이라는 것을 합창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체성이라는 문제는 문학에서 낮선 주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주제는 전혀 낮선 모습으로 느껴집니다. 그것이 바로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터키라는 상황에서 저자의 방식으로 말하는 그 특수성이 신선한 힘으로 느껴지고, 동시에 그 보편적인 주제가 가지는 흡인력이 또 독자를 휘어감는 이중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듯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제가 무슨 말을 구구절절이 하겠습니까. 그저 책을 잘 읽었노라고, 그리고 이렇게 주제넘은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벅찬 감동을 받았노라고... 그리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s***g 2007.07.09.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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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 오르한 파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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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의 인물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순수소설입니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나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됩니다. 대개 소설 속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특정 인물이 등장하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중에는 결국 이야기의 전개가 언급했던 추리소설과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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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의 인물이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순수소설입니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이나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을 읽고 있다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됩니다. 대개 소설 속에서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특정 인물이 등장하면, 그 소설은 추리소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나중에는 결국 이야기의 전개가 언급했던 추리소설과 비슷한 모양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 뤼야, 그리고 함께 사라진 칼럼 작가 제랄. 그들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이스탄불 시내를 배회하는 변호사 갈립. 소설은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며 추리소설의 추리와 추적을 보는 듯한 출발을 보입니다. 그런데 추리소설에도 고유의 원리와 원칙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은 채, 이야기는 계속해서 샛길로 빠집니다. 소설을 추리소설이라 여기고 보면 그렇다는 겁니다. 추리소설로서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고, 이유를 분명히 밝혀두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을 피합니다. 하지만 갈립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조사하고 추적합니다. 그런 과정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비로소 저는 깨달았습니다. 추리소설을 이해한다는 것과 추리소설을 집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구나! 아니다! 그저 『검은 책』은 오르한 파묵의 소설이구나! 라고.

 

 

    소설은 갈립의 조사와 제랄이 기재한 칼럼을 병행해서 보이는 구조입니다. 제랄의 칼럼은 암호와 공식, 일종의 글자 게임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립의 추적 또한 추적하는 대상이 누군지 잊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순히 배회하며 시간을 보냅니다. 서로 완전히 무관할 것 같은 글과 행동. 그래서 소설은 단지 하나의 실종 사건이라는 가느다란 실을 갖고서 무언가를 잔뜩 꿰매어 어렵사리 붙여 놓은 이야기보따리 같은 느낌입니다. 강한 수집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데 엮어둘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으로.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선 매번 한 권의 소설로 하나의 박물관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수집력을 보입니다. 『검은 책』에선 이스탄불 시내의 풍경을 수집품처럼 담았습니다. 이웃의 모습, 길거리의 여러 가게, 신문사, 나이트클럽, 극장 등, 시대의 풍경을 담으려한 노력이 보입니다. 갈립이 시내를 이유 없이 배회했던 이유는, 가능한 많은 것을 수집해 담으려 했던 파묵의 집착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갈립의 입장을 빌려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은 곧 자기가 사는 곳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고, 그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의혹을 푸는 해결의 실마리라 말하려 합니다. 그래서 소설은 관찰을 통해 발견한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곧 이스탄불의 얼굴이 되고, 도시의 지도가 된다는 말을 슬쩍 흘립니다.

 

 

    파묵의 소설이 흔히 그렇듯, 소설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일 순 없다.’라는 말은 터키 사회가 점차 터키의 순수함을 잃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터키는 터키라고 할 수 없단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상과 문화, 거리의 풍경, 생활양식까지, 모든 것이 터키의 것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스탄불의 모습을 비밀스럽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신비라는 이름의 도시, 이스탄불을 부정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무언가로 인식하는 동시에 특별할 것도 없는 익숙한 무언가를 보는 것이라는 놀랍고 신비로운 경험.

 

 

    그건 다시 도시의 풍경에서 인간 그 자체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했던 것과 반대로, 갈립은 ‘나는 결국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계속해서 합니다. 집단과 달리 개인이 정체성을 찾는 일은 민족을 이해하면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결국 같은 이상을 꿈꾸며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 크게 의견충돌을 보이는 상황. 그건 소설에서 전화상으로 격렬한 논쟁을 보인 갈립과 마호메트의 상황과 같다고 봅니다. ‘당장 주소를 대시오!’라는 외침은, 곧 이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총과 칼의 주먹다짐만큼 강한 분리를 만들어 냅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글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검은 책』은 소설 스스로가 암호화하고 있어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만약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떤 공간이 있고 그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면, 파묵의 소설은 독자들보다 파묵 자신에게 더 가까이 있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의 마지막에 잠깐 파묵 자신이 불쑥 소설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검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사실 그 전까지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소설을 읽는 내내 혼란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다 무슨 이야기이고, 결국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라며 어렴풋한 느낌과 분위기만으로 대충 짐작하며 읽어야 했습니다. 결국 『검은 책』은 추리소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추리하며 추적할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건 민족의 정체성이라고 봅니다.

 

 



 

    추리소설에서 세부 사항은 항상 어떤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면서 말이다. (1권, 80쪽)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삶이 다른 누군가의 꿈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야. (1권, 121쪽)

 

 

    사람들은 대부분 대상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의 본질적 특징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장자리나 구석에 있고, 그래서 주의를 끄는 부차적인 특징을 보고 알게 되지. 이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은 확연히 드러나게 하지 않고 칼럼 한구석에 쑤셔 놓곤 해. 물론 아주 꼭꼭 숨겨진 구석은 아니야. 아이들을 속아 넘기는 것 같은 숨바꼭질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그곳에서 찬은 것을 아이들처럼 곧장 믿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야. 게다가 최악의 것은, 글의 나머지 대부분에 내포되어 있는, 바로 코앞에 보이는 그 확연한 의미와, 약간의 인내와 지능만을 요하는 숨겨진 우연적 의미도 인지되지 못한 채 신문이 내던져진다는 사실이지. (1권 138쪽)

 

 

    “왜냐하면 모든 살인은 다른 살인의 모방이기 때문이지. 모든 책이 다른 책의 모방인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난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생각을 안 하는 거야.”

    (…)

    “하지만 가장 형편없는 살인에도 가장 형편없는 책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한 면이 있지!”

    (…)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살인이 아니라 책이 전적인 모방인 거야. 그러나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모방에 대한 모방이지. 책을 설명하는 살인과, 살인을 설명하는 책은 보편적인 호소야.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때만이 희생자의 머리에 곤봉을 내리칠 수 있기 때문이지. 창조성은 대부분 분노 속에,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그 분노 속에 존재해. 하지만 분노는 이전에 다른 사람에게 배운 방법을 매개로만 우리가 행동을 개시하게 만들어. 우리가 쓰는 칼은 똑같은 진실을 배반하지. 우리가 살인의 의식과 세부 사항을 다른 데서, 다시 말하면, 전설과 이야기와 회고록과 신문에서 배운다는 진실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문학에서 살인에 대해 배우는 거야. 가장 순수한 살인조차, 실수로 혹은 질투 때문에 저지른 살인조차 모방, 문학적 모방이야. 범인이 무의식적으로 행했다 해도 말이야. 내가 이에 대해 글을 써야 할 것 같지 않아?” (2권, 28쪽)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소.”

    “당신은 그 말을 아주 많이 썼지만, 그것을 나처럼 느낄 수 없을 거요. 그 사실을 나만큼이나 이해할 리가 없소. 당신이 ‘신비’라고 했던 것은, 이해하지 못한 채 알고만 있던 것이며, 알지도 못하면서 글로 썼던 것이오. 사람이 그 자신이 되지 않고선 누구도 이 진실을 발견할 희망을 품을 수 없기 때문이오. 진실을 발견했다면 그건 아직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의미인 거요. 두 가지가 동시에 옳을 수는 없소. 이 역설을 이해하겠소?”

    “나는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기도 하오.” (2권, 218쪽)

 

 

    “왜냐하면 그 시기에는 오로지 독서만 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오로지 내가 읽은 것의 환상만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육 년 동안 오로지 내가 읽은 책의 작가의 사상과 목소리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2권, 267쪽)

 

 


 

크롱의 혼자놀기 : http://ionsupply.blog.me

 

 

 

 

 

i*******y 2012.11.16.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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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한 파묵의 캐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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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노벨 문학상을 터키 작가가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오르한 파묵을 알게 되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유럽과 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에 있는 터키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내 이름은 빨강'과 '하얀성'을 읽어 보았고, '검은책' 세 번째 읽는 그의 소설이다.   '검은책'은 시기적으로도 '하얀성'과 '내 이름은 빨강' 사이에 있으면서, 다른 특징들도 두 책의 중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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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노벨 문학상을 터키 작가가 받았다는 소식과 함께 오르한 파묵을 알게 되었다.

2002 월드컵 이후  유럽과 아시아, 이슬람과 기독교의 경계에 있는 터키에 대해 관심이 있었기에,

'내 이름은 빨강'과 '하얀성'을 읽어 보았고, '검은책' 세 번째 읽는 그의 소설이다.

 

'검은책'은 시기적으로도 '하얀성'과 '내 이름은 빨강' 사이에 있으면서,

다른 특징들도 두 책의 중간쯤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난해했던 '하얀성'의 난해함과, 챕터 마다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바뀌어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빨강'과 비슷한 독특한 기술 방식을 동시에 가졌다. 

 

사실 오르한 파묵의 글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소설 처럼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서 가볍게 쓰윽 읽으면서 내용이 파악되는 책은 아니다.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글은 가시 많은 생선 처럼 쉽게 넘어 가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니 문득 캐논 (음악) 이 떠오른다.

('캐논' 음악의 한 형식으로 같은 주제를 돌림 노래 처럼 각 파트가 순차적으로 연주하면서 변화를 주는 형식이다.  대표적인 곡이 파헬벨의 캐논.)

 

'검은책'의 제 1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 '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고,

제 2 주제는 '사물의 진짜 의미가 무었인가?' - '사물에 숨어 있는 의미는 무었인가?' 이다.

이 두개의 주제가 주인공 갈립과 제랄의 관계에서, 갈립이 만나는 사람들의 말에서, 제랄의 칼럼에서, 갈리의 추적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 된다. 

이 반복 속에서 소설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갈립이 제랄의 흔적을 찾아 내야 했던 것 처럼..)

r****3 2007.08.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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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곡차곡 단서 찾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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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삐뚤어진 심성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화제가 되는 책은 한참이 지난후에야 찾아서 보는습관이 있다. 그러한 작가중 하나가 바로 오르한 파묵.오르한 파묵을 처음 접한건 내이름은 빨강이었는데, 제목부터가 끌리기도 했었고 그의 수상경력도 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정말 내이름은 빨강을 본 후 느낀것은 완전 좌절좌절 . 하지만 도서관 한켠에 보인 오르한 파묵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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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삐뚤어진 심성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지나치게 화제가 되는 책은
한참이 지난후에야 찾아서 보는습관이 있다. 그러한 작가중 하나가 바로 오르한 파묵.오르한 파묵을 처음 접한건 내이름은 빨강이었는데, 제목부터가 끌리기도 했었고 그의 수상경력도 나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정말 내이름은 빨강을 본 후 느낀것은 완전 좌절좌절 .


하지만 도서관 한켠에 보인 오르한 파묵의 이름과 검은책이라는 제목의 책은 또다시 나의 도전의식을 자극했고 나는 또다시 유혹에 이끌려 책을 빌렸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갈립의 아내 뤼야. 갈립은 아내를 사랑했기에 아내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때문에 비슷한 내용의 소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오자히르가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소설 초반부 부터 이야기가 뒤죽박죽 나오는데 몇장을 읽고 나서야 그것이 제랄의 칼럼과 갈립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설은 제랄의 칼럼이 무언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하지만 나역시도 갈립처럼 아무런 메시지도 얻지못해 초반부에 답답함을 유지 할수 밖에 없었다. 또한 제랄의 칼럼을 읽는 것은 가끔 지루 하기도 해서 정말 갈립의 이야기가 나올때는 반가웠고 책읽는 속도도 확연히 달랐다.


제랄은 왜이렇게 비비꼬아 적어놨는지.책속에서는 제랄이 평소에 칼럼속에 비밀키를 심어둔다는데 그런 비밀 암호를 풀수 없는 우리로서는 괴롭기 짝이 없다.  때문에 1권을 읽을때까지는 영문도 모른채 머리를 쥐어 짜며 칼럼을 읽다가 2권부터 점점 풀리는 실마리를 쫓아가게 되었다. 그마저도 헉헉 허덕이며갈립과 뤼야의 흔적을 겨우겨우 잡으려 했다. 역시 제랄의 칼럼만으로는 절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으며 그의 성격을 나타내주는것은 갈립과 그주변 친적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일종의 증언을 통해서이다.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책을 두번이상은 읽어 봐야 할것 같다. 

오르한 파묵은 이스탄불을 사랑하는 것 같다. 비록 작품 두개를 읽긴 했지만 이스탄불의 거리 하나하나를 조명하는그의 입담은 , 이스탄불을 속속들이 알려준다.
터키의 문화가 아직 낯설기 때문에 간간히 등장하는 음식 이름이나 지명, 사람들의 생활 모습은 눈으로 그려 지지 않지만 책을 통해서 터기의 냄새, 촉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 인터넷에서 터키의 사진을 보며 아! 내가 정말 생각했던 터키와 비슷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이러한 터키의 감각을 전해준것은 오르한 파묵의 책이었던 것이다.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하나하나 읽어 보고, 읽어 가면 어느덧 터키의 역사, 문화, 현장이 터키라는 큰 주제의 퍼즐로 완성되어 맞추어 질것 같은 느낌이 든다.
 

s***7 2009.02.25.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