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뼈대를 먼저 만들고 살을 붙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살을 발라 뼈대만 남기거나 뼈대 위로 조금의 살만 남겨 놓는 이가 있다. 이 살은 대체적으로 맛있어 보인다. 허나 과유불급이라 했다. 아무리 맛있어도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체한다. <논개>는 뼈대 위에는 맛있는 살만 붙이거나 남겨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논개는 어느 방향인가. 최근 읽은 양쯔쥔의 <사자개>를 볼 때보다 더 큰 아쉬움이 무럭무럭 꽃핀다.
배나무로 따지자면 곁가지를 치지 않아 성장을 저해시키거나 배꽃을 제대로 따지 않아 열매가 달리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다. 김별아는 어떤 곁가지를 처내야 하고, 언제 배꽃을 따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다.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인정받는다, 는 것을 몸소 터득한 것이리라. 어쨌든 지나친 미사여구나 현학은 감탄의 대상은 될 지언정 마음의 감동은 얻지 못한다. 때로 그 감탄을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감동이라 믿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속을 수 없어 애석하다. 게다가 작중개입은 또 얼마나 남발하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이런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정도로 그 외 다른 것에서 감동을 얻었다면, 아마 이리도 표독스레 책을 노려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당대의 사회상을 아무리 떠벌려 보아도 작중 인물들 사이의 관계나 사건의 개연성은 희끄무레하기만 하다. 선명하던 인물이 갑작스레 희미해지다가 죽어 버리기도 하는 등 전반적인 구성 자체에 강약의 조절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에 곁가지를 잘라내지 못하고 머뭇거린 결과다.
김별아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허송세월하기만 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찾아오길 강렬히 고대했다고 한다. 그 순간 찾아 온 <논개>가 그를 흥분하게 했으리라. 작가는 그 흥분을 가라 앉힌 후, 이야기를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그러다보니 강약조절에 실패하게 되고, 그것을 미사여구로 감추게 되었으며, 결국 어정쩡한 모양으로 남은 것이다.
그의 말처럼, 논개는 누구나 다 아는 인물이다. 허나 동시에 누구나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논개라는 기생이 왜적을 껴안고 강에 뛰어 들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논개가 누구인지 그 왜적이 누구인지 왜 같이 뛰어 들어야 했는지 또 어떤 시대였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그것을 소재로 삼기에 부담스럽지만, 동시에 소설적 허구로 재창조하기 편해진다. 그럼에도 <논개>는 허장성세에 불과하게 되어 버렸지만, 그렇기에 안타까움을 면할 수가 없다.
어쨌든 이러한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논개의 죽음 하나만은 선명하다.
적의 장수를 껴안은 논개가 기우뚱 떨어진다. 그 모습이 분분한 낙화를 떠오르게 한다. 김별아는 그것을 이팝나무 꽃마냥 너즈러진다, 했던가. 시인 조지훈은 <낙화>에서 '꽃이 떨어지기로서니 / 바람을 탓하랴' 라고 말했다. 바람 불지 않아도 언젠가 생을 다해 떨어질진대, 바람을 탓해 무엇하느냐는 의미일게다.
논개가 충절을 위해 죽음을 맞았는지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음을 향하던 논개가 낙화할 때에 슬프고 괴로워하되 누구든 무엇이든 탓하지는 않았으리라. 霖 |
|
** 읽으면서 애달팠던 구절 하나, 감상 하나 **
눈이 크면 큰대로 팔자 드센 게 아니라 잘 보이니 좋은 것이고, 귀가 크면 남의 속삭임이나 듣고 다녀 음흉한 게 아니라 작은 소리도 잘 들리니 좋고, 코가 높으면 상스러운 것이 아니라 냄새 잘 맡으니 기특하고 입이 크면 상놈에, 손발이 크면 도둑놈이라 하여도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받으니 착한 데다, 넘어지지 않고 잘 걸을 발이라 흐뭇하다. 그러니 참, 어머니의 사랑은 어리석다. **
논개를 읽으면서 가장 끔찍했던 건 우리나라를 침범한 왜적이 아니었다. 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너와 나의 구별이 너무나 뚜렷하여 한 나라라는 것마저 망각해버린 내 민족, 내 동포의 모습, 그것은 참혹 그 자체였다. 그토록 삼강이 어떻고 오륜이 어떻고 충과 의가 또 어떻고를 입에 달고 외던 사람들이 전쟁이 나자마자, 백성과 노비들의 피고름을 쥐어짜 모은 재산을 움켜쥐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간 사이, 꽉꽉 비틀리고 탈탈 쥐어짜진 백성들은, 비치적비치적 일어나 내 가족과 내 나라의 강토를 지키기 위해 뼈만 앙상한 손아귀에 변변찮은 무기를 그러쥔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러할 것처럼.
죽는 편이 날까? 하지만 그러면 아이들은? 늙은 어머니와 힘없는 아버지는 어떡하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차라리 사치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먹어야 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고, 전쟁이 참혹할수록 여자의, 어미의 손을 필요한 곳은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 여자는 더 강해진다. 땅을 일구던 따뜻하고 다정한 흙손 그대로 칼과 창을 잡고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 불쌍한 남자들과 토실토실한 엉덩이로 골목길을 질주하고 고운 꽃을 따 먹으며 자라나야 할 나이에 굶주림과 공포에 지쳐 눈만 커다래진 불쌍한 내 아이들을 위해 여자는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든 하고 할 수 없는 일까지 기꺼이 한다.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건 원래부터 하던 일이 아니던가.
논개라고 하면 교과서나 위인전에서 왜장을 안고 물에 뛰어든 기생이라 나와 있었고, 그보다 더한 무엇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런 구닥다리를 소설로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더구나 없었다. 그런데 마치 보자기처럼 곱게 보이는 표지가 참 갖고 싶었다. 그렇게 논개를 읽으면서 문득 깨달은 것은, 난 논개를 많이 들은 것에 비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공부하려고 읽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소설이니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지는 모르겠다. 다만, 논개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몰락한 양반이던지 기생이던지 최경회의 후실이던지는 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잔다르크처럼 하늘의 계시를 받아 우국충정의 애국심이 마구 솟구치는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한점의 흐트러짐 없이 외곬의 길을 가는 날 때부터 남다른 인물도 아니었다. 왠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저 보고 싶은 걸 보려고 잠깐 허튼 짓을 하기도 하고,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마음 앓이도 하는 보통 사람이었고, 사랑과 함께 죽어야겠다 마음먹고 그것을 실행할 만큼, 딱 그만큼만 용기 있는 여자였다.
후세의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간에, 역사적인 사실이야 어떠하든 간에, 이제부터 내 안에 그녀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대로 그래서 죽음을 향해 뛰어든, 보통 사람이 되었다. 난 그녀가 이제는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마도 이미 행복해졌을 거 같다. |
|
그렇지 않아도 논개라면 지난 황우석 사태 때 누군가 논개를 인용하는 것을 본 바 있다. 난자를 제공한 그들이 누구냐 어떤 이들이냐를 묻는 질문에 한 관계자가 "그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 없으며 그저 논개같은 분들이라고만 해두자"고 했던 기사를 보고 분노했던 적이 있다.
난자를 제공받은 경로가 투명하고 떳떳했다면 그리고 그 난자를 제공한 이들이 흔쾌히 아무런 대가없이 제공한 것이었다면 떳떳이 밝히고 박수를 받아야 할 터인데 굳이 숭고한 희생까지 들먹여가며 그 사실을 은폐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을까,가 1차적인 것이었고 숭고한 희생을 거론함으로써 그들의 현재 상태나 피해 정도를 외면하려 했다는 것이 두번째였다. 게다가 어처구니 없는 것이 바로 논개를 은유적으로 사용했다는 점. 아직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써 희생한 사람과 비유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죽으란 말이냐, (게다가 논개라니 '어디 감히'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논개에 대한 신격화는 내 맘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언술에서 나는 그의 말로써도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 부분들과 억지스러운 결합에서 오는 어색함 때문에 내내 그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논개에 대한 관심은 내내 한가닥씩 갖고 있었는데, 마침 <미실>로 새로운 여성상을 구현해 냈던 김별아가 논개를 쓴다고 했서 출간 전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머리말부터 '2005년의 겨울'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나는 작가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막연히 기뻐했다.
그 당시의 사태와 그 인터뷰에서 내가 그저 분노에 그쳤다면 김별아는 그의 언술을 뒤집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논개를 인용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논개를 통해 구축된 신격화 그 모든 것들을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 해체하는 텍스트 역시 기존의 전거들을 십분 활용하는 장기를 선보인다. 논개에 관하여 이토록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는지 몰랐다. 물론 그 자료들의 진위 여부는 논외다. 소설 자체가 바로 허구니까 허구를 허구화하는 것은 허구를 창조해내는 것만큼 예술가에게는 매력적인 일이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클라이막스라고 생각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의병을 일으켜 병사들을 이끌고 장수로 온 수백 명에 이르는 최경회 군대를 직접 오가며 호궤하는 논개이다. 이제 곧 환갑을 맞는 백발이 성성한 최경회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논개가 넓디넓은 평야에서 바람을 맞으며 재회하는 모습은 그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마다 벅찬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어릴적 배신한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미워하는 사람도 없는데다, 손도 야무지고 못하는 것도 없는 만능의 논개는 별로 인간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게 흠이다. 논개보다는 그 어미인 박씨나 최경회보단 그의 부인 김씨가 더 생생하게 와닿는다. 그들이 나와 더 비슷하며 내 주위 사람들과 흡사하다. 나라면 김씨나 박씨를 친구삼을 것이다. 그러나 논개 역시 사랑도 하고 분노도 하고 한없이 작아지기도 하는 한 사람의 여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
|
논개.. 우선 처음 놀란것은 이 논개라는 이름이 (놓은 개/낳은 개) 라는 천한 이름으로 해석이 된다는 거였다 논개를 읽으면서 예전에 보았던 역사 스페셜이 많이 생각났다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논개와 같은 기생들을 특집으로 처음에 논개의 죽음에 대한 묘사부터 나오는건 정말 새로웠다 적장과 죽기전까지 싸워가며 결국은 죽음으로 몰아넣던 사투를 어렸을 적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지만 여느아이 안부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당찬 아이.. 이 책은 물이라는 소재를 크게 다루고 있다 처음에 관노로 일하려다 우물물에 빠져 죽을 뻔한 일부터 전체적으로 너무 사실적이어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김별아 라는 작가를 처음 만나게 된 논개라는 소설.. 느낌이 너무 좋다.. |
|
사실 이 책의 저자가 김별아가 아니었으면 그토록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는 지 모른다. 주인공 논개에 대하여는 그동안 수없이 소설,영화 및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적어도 진주의 관기로서 왜장과 함께 남강으로 투신한 영웅임을 알고 있어 그다지 신선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보수적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진위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많은 '화랑세기'에서 '미실'이라는 여인을 김별아만의 해박한 역사지식과 대단한 글솜씨로 현대 소설의 주인공으로 재탄생시킨 저력을 보고 김별아의 소설이라면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욕망이 들었다.역시 이 책을 읽은 후 처음에 가졌던 기대에 부응하듯 김별아의 대단한 필력은 녹슬지 않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은 엄청난 사회 및 정치적 혼란을 겪게되고 또한 제도적 모순에 눈 뜬 사회피지배계층의 의식자각으로 새로운 역사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된다. 특히 엄격한 유교정책의 일환으로 여성들에게 요구되어진 정절 내지 순결은 남성 입장에서는 엄청난 특혜이자 권리이지만 여자에 대하여는 죽을 때까지 지켜야하는 구속적인 함정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모순속에서 논개는 이 책속에서 그동안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관기가 아닌 한 남자만을 평생 사랑하기로 약속한,즉 끝까지 의(義)를 지킨 여자로 다시 태어난다.
일찌기 아버지의 죽음으로 파산당한 양가집에서 태어난 논개는 어머니와 함께 부득이 한 관청 의 수장인 최경회밑의 관노로 들어가지만 우여곡절속에 결국 오랜 지병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최경회 처의 부탁으로 그토록 마음속으로 연을 품어온 최경회의 첩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그 두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시기하듯 시대적 혼란은 여지없이 그 둘을 갈라놓는다. 결국 최경회는 의병을 일으켜 진주성에 입성하고 김시민의 진주대첩에서 엄청난 패배를 하여 절치부심하던 왜병들은 명과의 화해 후 일본으로 퇴각 도중 복수심에 불타 진주성을 재차 공격 하기로 하였다.정예부대인 왜적에 대하여 오합지졸에 가까운 의병들은 사실상 전투상대가 되지 않았으니 결국 진주성안에 있던 모든 군사들과 백성들은 도륙의 길로 접어들어 피비린내나는 시체의 주인공이 되었다.
적에게 잡혀 적군의 수장으로 알려지면 머리가 잘려져 일본으로 보내지는 수모를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강물에 뛰어든 최경회의 죽음을 목격한 논개는 함께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수치스러움을 씻기 위하여 상상을 초월한 행동을 하게 된다.그것은 살아남아 정조를 지킨 정절녀가 아니라 차라리 세인들에게 관기라는 오명을 받아도 왜장수와 함께 강물에 뛰어들어 먼저 간 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 이 정도(正道)라 생각한 것이다.세속적이고 허울좋은 정조보다는 그녀가 최경회에게 보여주려던 의(義)가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혹 일부 독자는 논개의 실체가 관기냐 아님 몰락한 양반집안의 딸이냐를 놓고 따질 수 있지만 소설의 본질 상 역사속의 인물을 작가의 생각에 따라 얼마든지 허구상이나마 재해석되어짐을 이해할 때 그러한 논쟁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다만 책 내용이 주인공의 주관적 견해에 따라 그려진 것 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공감을 가지고 함께 느끼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
|
프롤로그 - prologue, 어쩌면 특별한 인연...
에피소드2 - 신안주씨이야기
에피소드3 - 거부할순 없는 숙명
남의 허점과 약점을 잡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자에게 눈먼 세상은 너무도 쉽고
본문의 일부이긴 하지만 이러한 점들을 살펴보면 본래 힘있고 재물을 가진 자들이
에피소드4 - 추억은 사랑을 닮아...
사랑,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소급되었다. - 본문299쪽에서-
그 어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보다 더한 단어가 있을지...
|
|
논개하면 "일본 장수를 끌어안고 물 속으로 뛰어든 기생"이란 간단한 말로 국사책(?)에 나와있다. 하지만 논개가 왜 강물로 뛰어들었는지에 대해선 나와 있지 않고 그저 애국심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 배운 기억이 난다.
위로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오빠가 죽고 어렵사리 얻은 딸은 남다른 사주를 타고 났고, 천하게 이름을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믿음에 '개를 낳다'란 뜻의 논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작은 시골 마을에 훈장으로 근근히 살고 있지만 늦게 본 자식인만큼 이쁨을 받으며 살아가던 중 아버지가 죽게 된다. 그 후 난봉꾼 시동생으로 인해 인생이 꼬인 논개는 평생의 은인이 되어줄 최경희와 친구이자 배신자인 업이와의 만나게 된다.
그녀는 황진이처럼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며 때때로 길이 없다 생각되어 지는 곳도 그 길이 옳다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고자 하는 여인이었다. 이제껏 충으로만 알았던 그녀의 희생을 작가는 과감하게 충이 아닌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게 옳든 그르든 역사 속에 가려져 있던 논개라는 한 인물을 꺼내 살포시 내 놓은 작가의 용기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푸른 빛의 하늘로 날아올라, 가마아득한 허공에 몸을 부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