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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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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간 중간에 나오는 괄호 안의 숫자는 내용과 관련된 이 책의 페이지 숫자입니다^^   1. 기독교는 회피적인가? 세계 형성적인가?   저자는 종교를 크게 일상적 삶에서 등을 돌려 고상한 실재로 나아가려고 하는 ‘회피적 종교’와 일상적 삶에 열등한 것이 있지만 그것을 개혁하려고 애쓰는 ‘형성적 종교’로 분류한다(25). 초대 교회는 로마의 사회 질서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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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중간 중간에 나오는 괄호 안의 숫자는 내용과 관련된 이 책의 페이지 숫자입니다^^

 

1. 기독교는 회피적인가? 세계 형성적인가?

  저자는 종교를 크게 일상적 삶에서 등을 돌려 고상한 실재로 나아가려고 하는 ‘회피적 종교’와 일상적 삶에 열등한 것이 있지만 그것을 개혁하려고 애쓰는 ‘형성적 종교’로 분류한다(25). 초대 교회는 로마의 사회 질서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애초에 ‘세계 형성적 기독교’였지만 그런 경향이 사라졌다가 16세기 초기 칼뱅주의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다(21). 기독교가 세계 형성적이라는 기본 전에는 동감한다. 기독교인은 세상과 구별되지만 분리된 존재는 아니다(고전 5:10). 어둠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물러가며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면 음식에 맛이 생기는 것처럼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사는 기독교인은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초대 교회가 과연 로마의 사회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는지는 의문스럽다. 저자는 이 부분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그리고 만약 초대 교회가 로마 사회에 영향력을 주었다면, 그것이 초대 교회가 목표로 한 것인지, 아니면 신앙을 지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인지도 궁금하다. 이 둘은 결과적으로는 같은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르다. 건강이 나쁜 사람이 건강 회복을 위해 운동을 했는데 몸짱이 된 경우하고, 영화 배우가 배역을 위해 의도적으로 근육을 만들어 몸짱이 된 경우하고는 결과적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목적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초대 교회가 과연 당시의 로마의 압제에 대해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 저항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신약 성경에서 그러한 증거를 쉽게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는 계속해서 성경을 읽으면서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칼빈의 제네바 개혁이 과연 오늘날 교회의 사회 개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제네바에서는 제도 교회의 교인이 곧 시민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50). 이 경우의 사회 개혁은 교회 개혁과 맞물려 있어서 지금의 사회 개혁과는 성격이 다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이 성도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말씀의 원리를 실천하도록 강조했다는 사실에는 동감한다. 어쨌든 기독교는 사변적 철학이 아니라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삶의 체계이며,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2. 현대 사회 분석을 위한 이론

  저자는 근대 세계체제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으로 우선 근대화 이론과 세계체제론을 소개하고 있다(61). 모든 사회가 근대화를 이룰 수 있으며, 한 사회의 근대화 수준이 낮은 이유는 전적으로 그 사회 자체 있다는 것이 근대화 이론이다(62). 세계체제이론은 세계가 하나의 사회 체제로 되어 있어서 서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65). 저자는 후자의 이론이 옳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근대 세계체제는 미시 사회 구조에서 합리화의 증대, 분화의 증가, 귀속주의의 감소, 가치 일반화의 증대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84). 이런 특징으로 인해 선택의 폭과 자유가 확장되었지만 오히려 불평등은 더 심화 되어 인간의 행복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86-87). 선택의 폭이 넓다 보니 항상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이 항상 남게 된다. 또한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삶의 방향이 급격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려야 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주어지는 자유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저자의 사회 구조 분석을 읽으면서 교회사에서 뛰어난 신학자로 일컬어지는 바울, 어거스틴, 칼빈은 성경과 함께 이방 세계에 대해서도 정통했다는 말을 들은 것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 아군의 전투교본 뿐만 아니라 적전술도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도 떠올랐다. 성경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 분석을 위한 신학적 이론으로 저자는 해방 신학과 신칼뱅주의를 소개한다(96). 저자는 이 두 이론에 대한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해방 신학은 구원에 강조점을 두면서 자결의 중요성을 주장하지만, 정복에 의한 자유는 그들의 관점과 충분히 융합될 수 없다. 암스테르담 학파(신칼뱅주의)는 창조에 강조점을 두면서 정복에 의한 자유의 중요성을 주장하지만, 역시 그들의 관점에 자결의 자유는 충분히 융합되지 못한다(143).” 두 관점 모두 약점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더 포괄적인 비전을 모색한다. 그것이 바로 ‘샬롬의 비전’이다. 샬롬은 하나님, 다른 인간들, 자연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관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145-146). 샬롬은 윤리적 공동체로서 정의1)가 필수 요소이지만,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책임있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윤리적 공동체 이상의 것이다(146-147). 샬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정의를 위한 싸움과 삶을 풍요롭게 하는 개발 둘 다 필요하다(150). 저자는 성경 특히 이사야에 나오는 샬롬을 통해서 해방신학과 신칼뱅주의의 장점 모두를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일단 샬롬의 비전은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서 도출된 관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평화를 말하되 세상의 평화와는 다르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과 정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가 근거로 들고 있는 샬롬은 궁극적으로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148). 애초에 샬롬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최우선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불신자에게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샬롬이 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샬롬의 비전을 가지고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 불신자들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 그리스도인이 샬롬의 비전을 가지고 사는 모습이 불신자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일까? 아니면 비록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은 맛보지 못해도 다른 인간들, 자연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기쁨은 맛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만약 후자라면 다른 인간들, 자연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샬롬 때문에 하나님과의 샬롬을 추구하지 않게 할 가능성이 없겠는가? 마치 암 환자에게 계속 진통제만 줌으로써 암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약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의문은 생기는데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3. 현대사회 문제에 대한 분석

  저자는 이론적 틀을 마련한 다음 그 틀을 가지고 현대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우선 빈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제만으로는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다. 빈곤의 문제가 자유방임적 정치 체제와 이윤 추구에 의해 생긴 경제 체제라는 구조에 기인한 문제이기 때문이다(166). 구조를 바꾸어 가난한 자를 도와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8).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은 시혜적 차원이 아니라 마땅한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은 공로가 될 수 없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견해는 통해서 혹시 그동안 내가 약자를 돕는 것을 통해 자신의 공로를 쌓으려고 한 적은 없었는지 반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가난한 자를 돕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실천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 관계에 유리한 쪽으로만 행동한다는 것이다(177, 195).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는 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다음으로 다루는 문제는 민족주의이다. 일부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국가에게 당한 억압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211). 이 때 민족주의란 한 민족이 자신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 그 자체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217). 반대로 자기 존재에 너무 몰입하여 자신의 영광을 최고의 선으로 높이는 방식의 민족주의가 있는데 미국의 민족주의가 이에 해당된다(218). 자기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되면, 그 충성심은 샬롬을 파괴하는 우상 숭배와 같아져서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226). 그리스도인들은 민족 간의 갈등을 줄이는 일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또 하나의 민족을 잊어서는 안 된다(235).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주의는 더 강화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사회를 보면 민족 문제 앞에서는 불신자나 신자나 별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불의에는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생각을 신자들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이주 노동자 문제를 살펴보면 우리 역시도 민족주의를 가지고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그리스도인도 이 문제에 책임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도시의 미학과 관련된 문제이다. 미학이라는 주제가 생소해서 그런지 이 부분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 도시가 심미적으로 추한 모습이 된 것은 공공 계획에 대한 저항과 사생활 중심주의에 기인한다는 지적은 아주 통찰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263). 물론 경제 성장에 더 중요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공공 계획과 규제가 실시된 지역 마자도 심미적 차원에 대한 고려가 적은 경우도 많다(264). 이 논의 말미에 저자는 감각적 즐거움이 결여된 도시에서 사는 것 자체가 일종의 빈곤이라고 말한다(27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런 즐거움을 맛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저자의 주장에 크게 동감이 되지는 않았다.

 

4. 기독교 사회 참여의 독특성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와 관련된 책을 읽을 때 항상 가지게 되는 의문이 있다. 불신자들의 사회 참여와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가 그 내용이나 방식으로 볼 때는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 장을 할애해서 다루고 있다. 기독교인의 독특성은 그 동기가 다르다는 견해도 있고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견해도 있다(285-286). 저자는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일과 예배의 순환 구조가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287). 세속주의자와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차이는 예배2) 참여에 있다는 것이다. 예배가 바로 우리가 하는 활동의 진정성을 입증해주기 때문이다(289). 예배가 없다면 우리의 일 자체가 변질되며 기쁨이 사라진다(303-304). 물론 자비와 정의의 사역이 없으면 예배의 진정성도 위태로워진다는 점에서 예배와 사역은 서로 진정성을 확증해 주는 관계이다(303-304). 그리스도인의 독특성으로 예배를 언급한 것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사회 참여는 그 동기나 내용 자체에 있어서도 세속주의자와는 뭔가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자는 교회가(그리스도인 개개인이 아니라) 세상의 불의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싸우는 기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도 잘 모르겠다는 답을 내리고 있다. 이 문제도 평소에 많이 고민하던 문제인데 명확한 답변이 없어서 조금 아쉬웠다.

 

4. 기독교인의 학문

  마지막 장의 내용은 사실 이해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아마도 핵심은 이런 것인 듯하다. 실천 지향적 이론을 위한 것이든, 법칙론적 이론을 위한 것이든 모든 학문은 사회적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학자는 사회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32).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학문을 할 때는 반드시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의 울부짖음을 듣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333). 그러할 때 우리는 자기기만을 철저히 벗겨내는 성경의 선지자적 말씀에 제대로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339).

  신학을 하면서도 가끔 사변적 신학에 대한 유혹을 받게 된다. 교회와 세상의 현실과는 무관한 주제들에 심취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현실과 무관한 사변적 신학 역시도 교회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사변적 신학에 몰두하는 그 시간에 내가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교회와 세상의 현실을 등한히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로 인해 교회와 세상의 현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책임을 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삶의 모든 행동과 결정이 결코 교회와 세상과 무관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억압받고 약한 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주

1)

저자는 ‘정의’를 ‘자신의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144). 이러한 정의가 성경적으로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심으로 의를 이루셨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저자가 이 ‘정의’ 대해 별도로 책을 쓴다고 하니 기다려보아야겠다.

 

2)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에서는 ‘예배 의식’에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은 ‘선포’,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것은 ‘예배’라고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말씀을 듣는 것이나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 모두를 ‘예배’라고 부른다. 혼돈을 막기 위해 책에서 ‘예배’라고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다른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q******n 2010.05.14. 신고 공감 1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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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회참여에 관한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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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특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안전을 확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정한 안보에 이르는 길은 정의다.       1. 요약 。。。。。。。                                저자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종교’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회피적 종교와 형성적 종교가 그것. 특별히 기독교 안에서도 이 두 흐름이 발견되는데, 중세 기독교와 종교개혁 이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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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특권을 유지하는 동시에 안전을 확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진정한 안보에 이르는 길은 정의다.

 

 

 

1. 요약 。。。。。。。                        

 

     저자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종교’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회피적 종교와 형성적 종교가 그것. 특별히 기독교 안에서도 이 두 흐름이 발견되는데, 중세 기독교와 종교개혁 이후의 루터교 일파는 큰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전히 회피적(내세 지향적) 종교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칼뱅주의로 대변되는 개혁주의자들은 세계 형성적 종교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자 한다. 저자는 개혁주의자의 후예로서 현대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에 관해 논하고 있다.

 

     저자가 보기에 현대 세계는 빈부격차의 문제, 근시안적 민족주의로 인한 문제, 도시환경에 있어서의 무질서 등 불의와 억압으로 가득 차 있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저개발 국가들을 ‘주변국가화’ 시키고 있고, 강자들은 약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샬롬 중심적 세계관’을 그 대답으로 제안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개혁자와 비 그리스도인 개혁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다시 던진다. 둘 모두 사회의 ‘개선’ 혹은 ‘선의의 발전’을 위해 일한다면, 그리스도인의 독특함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 독특함을 예배에서 찾는다. 단순한 예전이나 교회 밖의 삶을 위한 주유소쯤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함을 접촉하고, 그분으로부터 기쁨과 안식을 얻을 때 정의와 샬롬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2. 감상평 。。。。。。。                        

 

     우리나라처럼 좌우의 갈등이 첨예한 나라도 많지 않으리라. 슬프게도 기독교 안에도 이러한 갈등 혹은 구분이 존재한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조금이라도 비판할라치면 단숨에 좌파니 뭐니 하는 비난을 해대고, 하나님의 주권이나 영혼구원을 강조할라치면 보수니 우파니 하며 단정 짓는다. 인간 영혼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과 개혁을 말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주변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런 미심쩍은 비난과 지적을 단숨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철학적, 신학적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저자는 소위 보수 쪽에 속하는 개혁주의 혹은 칼뱅주의 안에 이미 세계 변혁적인 비전이 담겨져 있음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신학적 전제에 충실할 때, 그들은 이 세계에 정의와 샬롬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참 매력적이다. 내 평생의 작업도 바로 여기에 놓여 있으니까.

 

 

     슬픈 현실은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지 20년이 훨씬 더 넘었음에도, 책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전히 세계는 강대국들이 설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인종적 갈등과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사회의 변화를 올바로 집어내지 못하고 그저 번영과 강자를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있으니 심각한 일이다.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많은 비난이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기인하는 것임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고.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이 세계 형성적 기독교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시키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형성해 놓은 이 세계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종종 그 자체로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기독교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가져야 할 비전은 훨씬 더 크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모두 시야에 넣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성경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사회참여에 관한 고전이라는 책 소개가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훌륭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세상을 품는 큰 꿈을 꾸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이달의 사락 p*********n 2010.05.0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