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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일상을 공유한다는 전제 하에, 한 두 해의 시간은 오래 지나도 애틋한 추억을 쌓기에 가장 알맞은 기간이다. 한 철 내지 한 두 계절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단계에 가깝다. 적어도 한 계절을 두 번씩 겪을 때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아가게 되고, 함께하는 일상이 몸에 배어든다. 비단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뿐 아니라, 생활하는 장소에 대해서도 그렇다. 각자의 삶에 분주한 이웃에서부터 느리게 모습을 바꾸는 식물, 바람, 햇빛까지 이 정도 시간이 흐르기 전엔 여행하듯 낯설다. 두 해 정도는 되어야, '시절'이라는 단어로 불리며 추억하게 되는 것 같다. 한 시절의 제목은 그 시기에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의 이름이 되곤 한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이모부의 구판장이 있는 대관령에 머물렀던 주호에게도, 그 2년 여의 시간은 열여덟의 소녀 연희로 가득하다. 일본으로 어머니가 떠난 후, 국가대표까지 올랐지만 몰락해버린 스키선수 아버지를 따라 대관령 온 연희는 일본에서 태어난 오빠와 할머니 댁에서 살게 된다. 돈을 벌어야 했던 연희는 학교 대신 구판장 맞은편의 수선집에서 일했고, 연희의 외로움을 남의 일로 여기지 못한 주호는 그녀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건넸다. 대관령에 내려온 목적을 분명히 품고 있었던 주호는 자신에게 연희가 큰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희를 잊고 지낸 21년이 흐르고, 연희의 친오빠가 연락해 오고 나서야 그 시절이 온통 연희였음을 알게 된다. 그 시절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훨씬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추억의 보정일 수도 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향한 미련 때문에 가능한 한 아름답게 기억하려는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함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달라진 환경에서는 같은 마음도 다르게 보인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은 지나온 덕에 영향력을 잃은 일들이 그 당시엔 인생을 뒤흔들 것처럼 중요한 일이었을 수 있다. 그때 가려지고 외면당한 감정들은, 이제야 미처 보살핌 받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것들은 왜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지, 그래서 미련을 품고 마는지 흔히들 묻는다. 어쩌면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인간에게 감정의 뒤늦은 발견과 따라오는 미련은 필연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추억들은 그렇게 쌓이는 것인지도.
"이봐 지식인. 아무것도 안 하고 계속 밥만 먹으면 그건 또 무슨 맛이겠어. 즐기며 노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의미 있게 해주고, 일은 또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 시간을 기쁘게 기다리게 하고 설레게 하지." (161쪽) "멀리 대관령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바다 너머에 있는 세상을 생각하게 하는데, 오늘 처음 가까이 가본 바다는 그냥 눈앞의 바다만 생각하게 해요. 그래서 먼 바다와 가까운 바다가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175~176쪽) "이제 이거 날 줬으니 네 거 아니고 내 거 맞지?" "예." "그래. 이제 이거 내 거야. 내 건데 나는 너처럼 무얼 잘 보관하지 못하고 네 오빠처럼 잘 잃어버려. 그러니까 이거 네가 내 대신 잘 보관해줘. 네가 보관하고 있어도 내 거니까 앞으로 절대 누구에게 주면 안 돼. 언젠가 내가 달라고 할 때까지 네가 지금처럼 보관하고 있는 거야. 알았지?" (1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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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해서 잡게되는 장편소설 중에 한권입니다. '삿포로의 여인' 저자: 이순원 책표지에 이런 내용의 글이 인상깊습니다.
마가목을 주제로 했던 일본노래 '나나카마도' 에 가사입니다. 70년대 대관령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가목을 주인공 연희가 일본으로 갔던 그 거리에 가득히 심어져 있었던 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요? 이번에는 주호가 삿포로로 떠나게 되는날 도로의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마가목을 본 순간 그 붉은 열매가 더욱 고혹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걸 손안의 탄력으로 느끼며 대관령에서 자란 아이가 말 하나 글 하나 배우지 않은 채 이곳에 와 살아도 이 나무 때문에 외롭지 않을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겨울이 되면 익숙한 눈이 내리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마지막은 세드앤딩으로 끝나게 되어 차가운 이 겨울에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옵니다. 첫 페이지를 열고 읽어 내려 가다보면 주인공 주호와 연희가 처음 만나게 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제 열 여섯이 된 주호는 이모부에게 가기 위해 횡계 터미널에 들러 버스를 기다리게 되고, 술을 먹고 횡패를 부리는 한 아저씨 (유강표)를 보게 됩니다. 그 곁에 일곱살 남짓의 외모가 이국적인 여자아이가 풍선을 들고 술취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만치 문 밖에서 지켜보는 엄마로 보이는 이국적 모습의 여자 역시 말없이 술취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릴적 어린 주호의 인상깊게 남아있던 기억. 그것이 바로 주호와 연희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어느덧 대학교 3학년이었던 주호는 이모부가 운영하는 강원도 대관령에 구판장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학자금을 위해 돈을 융통해 볼 생각이었지만, 이모부의 권유로 포목점에서 2년동안 일을 하게 됩니다. 연희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한채 포목점 옆에 있는 '미라노 패션' 라는 이름의 수예점에서 수선 일을 합니다. 어느날 바짓단을 손바느질로 줄이려는 주호의 모습에 이모는 미라노로 데리고 가 수선을 하면서 이국적인 아이 연희를 대면하게 됩니다. 주호는 구판장에서 틈틈히 공부를 하며, 늦게까지 불이 켜져있던 미라노의 여자아이가 조금씩 신경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촌 여동생 미옥이가 미라노에 자주 놀러가면서 연희가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주호는 연희에게 책 두권(데미안,세계명언 2000집)과 '마음산책' 쓰는법을 알려줍니다. '마음산책' 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는 이 책은 오전에 명언 한가지를 적어보고 저녁에는 내가 했던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써도 된다고 말해 줍니다. 연희는 늘 '연희야' 라고 낮지만 부드러운 주호의 따듯한 말을 들으며 조금씩 가까워짐을 느낍니다.
구판장이 지물포 도배,장판 일까지 하게되면서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주호가 구판장일을 하면서 알게되는 '길 아저씨' 조수한명 없이 혼자 장판과 도배를 하는 길(이름:조은길) 아저씨는 주호보다 열 여섯살이나 많은 주호 아저씨는 일주일에 3-4일 일하면 어디론가 여행을 다는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인문, 천문, 지리, 동식물, 스포츠, 레저를 포함해 이 세상에서 모르는게 없을 것 같고, 어디 한 군데 붙들려 있지 않은 강릉과 보헤미안 같은 존재였습니다. 길 아저씨는 대학생 주호를 장난삼아 '지식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호는 그런 길 아저씨가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 아저씨와 주호, 연희가 함께 바다로 연어 플라이 낚시를 가게 됩니다. 처음으로 바다를 보게 되는 연희는 마냥 행복해 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잡게 되는 길 아저씨의 70센티의 어마어마한 연어를 잡게되어 식당으로 가서 멋진 저녁을 함께 합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연희는 차창밖 바다를 바라보며 일본으로 간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연어 낚시를 다녀온 10월 중순 주호는 연희와 함께 마가목 열매를 따러 소풍처럼 황병산을 다녀옵니다. 마가목은 오뉴월 흰 꽃이 소복하게 피어 가을에 찔레처럼 빨간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마가목이란 이름 역시 봄에 새싹이 돋을 때마다 잎이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솟아난다고 해서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연희와 주호의 2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흘러흘러 어느덧 주호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 마지막날, 연희와 함께 마지막 바다를 보러 다녀온 후 쓸쓸하게 끝나게 됩니다. 헤어지는 것에 두렵고 슬퍼했던 연희를 안아주지만, 서울로 돌아가 나머지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주호의 의지대로 아무일 없이 두사람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주호는 신문사 기자로서의 자기 임무를 해내가고 있을 무렵, 연희의 친 오빠 '유명한'이 찾아오게 됩니다. 연희에게 대관령 스키 선수였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찾아주고 싶다며 기자인 주호에게 부탁을 하게 됩니다.
자료를 찾아가며 2년간의 대관령 기억들을 찾아가면서 잊고있던 연희의 기억들이 떠올라 주호는 연호가 그리워지게 되며 연희와 연락이 닿아 지금은 편지가 아닌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합니다. 주호가 서울로 올라갔던 그 날 이후 주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편지 사실을 알게 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뒤늦게 조금씩 알게되는 연희를 향했던 마음을 연민과 그리움. 연희 편지를 통해 조금씩 그 어릴적 마음들을 알아가고 있을 무렵, 답장을 보낸 편지가 수신확인이 안되고 편지함에 일주일동안 잠들어 있고, 5일이 지난 다음날 연희오빠 '유명한' 이 주호를 찾아와 저녁 식사를 하며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유명한'은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연희를 어떻게 생각했냐는 거듭된 질문 속에 어두운 낯 아래로 연희가 몇달전부터 췌장이 안좋아 병원에 입원했었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동안의 주호와 나눴던 편지 이야기들은 입원을 거부하며 집으로 돌아가 썼던 편지들이었습니다. 주호의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통화조차도 할 수 없이 병이 악화된 연희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동안 편지 곳곳에 있던 앞으로 하고 싶다는 말들이 숨은 그림처럼 배더 있다는것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지금 누구와 함께 있냐는 말에 '어머니하고 남편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독자 입장에서 안타깝게 들려오기도 합니다. '유명한'을 만나고 온 며칠후에 격한 마음에 두통의 편지를 연희에게 보내어 봤지만 역시 편지함에 그대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올때쯤 다른 설명없이 '유명한'에게 우편물이 하나 옵니다. 작은 상자안에는 손으로 바느질을 해 만든 동전주머니가 들어있었고, 1972년 삿포로 동계올림픽 기념주화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주화를 싸고있던 종이에는
그 시절 연희의 글씨였다. 어머니가 일본으로 돌아가기전 오빠와 연희에게 똑같이 쥐어주던 동전. 언젠가 주호에게 주고 싶다며 건네던 그 동전을 주호는 이렇게 소중한 것은 '네가 나 대신 잘 보관해줘' 하며 연희 손바닥에 접어말아 다시 되돌려 주었던 그 동전이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오므려 어린 연인이 보낸 마지막 선물을 꼭 쥐어들었다.
지금이 아니라, 그녀가 열일곱살이었고 내가 스물네 살이었던 그 시절의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는 비로소 자신 역시 순정했던 시간 한 작은 아이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 비로서 이렇게 내게 긴 여운을 남기며 나는 마지막 장을 덮었다. 쓸쓸하고 덧없이 외롭기만 했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을 보는 듯 나 역시 그 시대 그 모습으로 돌아가 주변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되어 그 어릴적 모습을 되짚어보며, 어쩌면 철없이 놓쳐 버렸을지도 모를 소중한 인연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어쩌면 주호, 연희 같았던, 어쩌면 '길 아저씨' 같았던 그런 사람들. 세상 일에 힘들어 한치 앞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반딧불처럼 그 시절의 따듯한 그 마음들이 떠올라 문득 올 겨울 나도 대관령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마가목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가목에서 빨간 열매를 보고 얼마후면 눈이 내린다는 이 책에 글귀처럼 오늘처럼 영하로 떨어진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도 혹시나 눈이 올까 싶어 하늘쪽을 바라보게 된다. 복잡한 손익계산을 떠나 우리가 잠시 어릴적 기억들을 되짚어보면 하얀이를 드러내며 아무걱정없이 미소지었던 그 어린날의 내 모습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모처럼 따듯한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이 시간이 행복하고 감사하다. '삿포로 여인'으로 동리문학상을 받게 된 이순원 작가님께 감사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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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자 박주호를 찾아온 손님이 꺼내놓은 이야기는 손님의 존재처럼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사랑인지 모르고 그렇게 보낸 아이. 부끄러운 경험의 끝에 존재 했던, 흰 팔목에 파란색 풍선을 매단, 이국적인 여인의 옆에 있던 아이가 다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공부할 돈을 벌기위해 이모부가 운영하는 구판장에 있을 때였습니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여성을 닮은 어린아이는 어느새 열여섯의 숙녀가 되어 구판장 옆 양장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연희에게 많은 의지가 되어주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들이 담담하게 펼쳐집니다. 길 아저씨, 연어, 마가목에 대한이야기와 유강표와 시라키 레이, 오수도리 산장의 이야기가 대관령과 삿포로를 배경으로 안타깝지만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시절 지나치기만 했던 감정의 정체를 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아차리고 인사를 건넵니다. ‘일본여자 딸’과 ‘서울 대학생’이 서로에겐 ‘연희’와 ‘주호’였음을 그제야 깨닫습니다.
그저 눈 아프기만 했던 책 표지를 겨울날의 눈부신 설경으로 만들어주는 글입니다. 새하얀 설경을 배경으로 손에 헬멧을 든 주호와 그 옆에 털모자에 스키장갑을 낀 연희가 절로 그려지네요.
“쓰면서 궁금한 것도 있어요.”
“내가 어떤 날 오빠 얘기를 쓰듯 오빠도 내 얘기를 쓸까 궁금해요.”
“오빠한테 내가 오빠 얘기를 어떻게 썼는지 보여줄 수 없지만 오빠가 내 얘기를 어떻게 썼는지는 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저는 오빠 얘기 많이 썼는데, 오빠는 제 얘기 아주 조금 썼을 거 같아서요.”
“오빠는 여기 있어도 더 넓은 세상을 생각하지만, 나는 여기 동네밖에 모르는데요. 아는 사람도 동네 사람밖에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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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사랑과 꿈에 관한, 삶에 대한 이야기. 누구나 가슴에 아련한 사람 하나 정도는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펼쳐보시길 권합니다. 읽고 나면 대관령의 산세가 보고싶고, 동해의 거친 바다가 그리워 지며, 삿포로의 가로수가 궁금해지게 될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번 겨울 강원도로 여행을 떠납니다. (더불어 이순원씨의 19세도 추천!!! 이 소설에도 아름다운 대관령이 나오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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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선생을 알아왔다. 고백한 적은 없지만, 선생을 이룬 것 중에 내가 은밀하게 샘내는 것이 있다. 선생의 대관령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있다고 해도 선생처럼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선생은 선생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관령을 말한다."
황정은 작가의 추천사가 인상깊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내내 줄곧 그 말에 수긍하게 되었다. 평소에 여러 책을 접하면서 항상 생각하던 것이 있는데, 소설가에게 모든 경험은 극복의 대상이든 소중한 것이든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것이다. 이순원 작가의 경우, 그 경험은 '고향'이란 곳에 있으며,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이전에 읽어봤던 작가의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첫사랑'과 '고향'은 중요한 코드로 등장하며, 둘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은 동일하다. 되돌아갈 순 없지만 아련한 추억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각자의 생활을 겪으면서 잊게 되었던 그것들은, 어느 순간 우연히 물꼬가 트인듯 흘러나온다. 하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또 하나가,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는 첫사랑인지도 몰랐던 '연희'와 대관령을 떠돌았던 기억도, 그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오수도리 산장과 길 아저씨에 대한 기억들도, 그들과 나눴던 모든 대화의 기억들도 '고향'과 '첫사랑'이라는 이름 속에 아로새겨진다. 왜 잊어버렸는지 모를 아련한 기억들과 순정한 시간들은 대관령의 따뜻한 풍경 속에서 그려진다.
사랑했던 누군가나 고향의 어떤 사람들이나, 누구 하나 더 부각되는 것은 없이, 작가는 순수하고 다정하게 그 추억들을 차곡차곡 꺼내보인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하고 흘러갔던 것들에 대해 슬퍼하거나 회한하는 마음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다독인다. 단 하나 안타까운 시선이라면, '연희'의 아버지이자 한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유강표'라는 존재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쉬움은 소설 속에서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감정이지만, 그것 또한 극복의 여지가 있기에 아주 슬프지만은 않다.
과하지 않은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차분하게 쓰여진 글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읽힐 것 같다. 특히 대관령의 풍경과, 일본의 삿포로의 풍경이 다른듯 겹쳐지는 절경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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