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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제목에 호기심이 생겼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서 오래된 생각이 무엇이지? 그리고 생각과 무슨 대화를 한다는 거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서 이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오래된 생각은 고전속에 담긴 사상가들의 생각들을 말하고 고전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그의 고민을 나누고 사색한 것을 고전속의 사상가들과 대화를 나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나도 이책을 읽을 때 글을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작가가 고전을 읽고 고전 속의 오래된 생각들과 대화한 내용들을 토대로 나도 적극적으로 생각하면서 읽어야겠다고 책읽기 방향을 정했다. 책을 읽고 작가의 지식을 받아들이기만 하던 독서와는 다르게 내 삶에 비추어 고민해보고 내의견과 작가의 의견을 비교해가면서 읽다보니 읽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정말 가치있는 시간이었다. 1장에서는 나, 2장에서는 사랑, 3장에서는 관계, 4장에서는 삶에 관하여 작가가 고전을 읽으며 생각한 내용들이 나온다. 각 장마다 관련된 부분에 대해 의견을 말한 사상가들의 이론들이 나오고, 작가가 고전들을 읽고 책속에서 책 밖 주변으로 시선을 넓혀 생각하고 고민한 내용들이 나온다. 사상가들의 오래전 생각이지만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꼭 필요한 내용들은 하나씩 항목을 지어가며 작가가 소개해줘서 도움이 된다. 1장에서는 '나'를 되돌아 보면서 고독, 습관 등에 대해 생각하며 읽었고 나를 좀 더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점들을 찾아내었다. 2장에서는 가족과 결혼에 대해서 고민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관계 부분에서 현재 사회의 문제점들도 생각하며 읽었는데, 우리 사회의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60년전 아도르노가 얘기했던 남성지배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진단이 놀라웠다. 4장의 삶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프롬의 소유적 실존양식, 존재적 실존 양식이 나오는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현재 소유가 중시되는 한국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앞으로 존재 되기로서의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전에 <소유냐 존재냐>를 읽었지만 그때는 단편적으로만 생각하고 프롬이 말하는 소유와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소유냐 존재냐>를 다시 읽어보면서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
4개의 장 중에서 3장 관계에 관해 나온 부분을 가장 의미있게 읽었다. 요즘 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고민이 많았기 때문에 인간관계와 관련된 자기계발서도 몇 권 찾아 읽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부분을 무조건 따라하려고 하다보면 무리만 생겼다. 이 책은 관계에 관해 본질적인 부분을 파고들어가 생각하게 해 주었다. 아무리 인간관계에 관한 조언을 듣고 그것을 개선시키는 방법이 있는 책을 읽어도 내 안에서 잘못된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 힘든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먼저 친구 관계에 있어서 나는 새로운친구를 만들고 싶은 욕심만 있었는데 플라톤의 말을 통해 내가 선한 친구가 되는 것을 고민해야함을 알았다. 좀 더 많은 사람을 사귀려고 하기 보다, 소수라도 덕을 추구하면서 친구를 사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불안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이유가 타인지향적 삶 때문임도 알게되었다. 책에 나오는 O X 질문을 체크해보니 난 명확하게 타인지향형 인간이었다. 나는 다른사람과 다르게 태어나 나만의 장점과 단점이 있을텐데도 다른사람과 똑같이 되려고 애쓰고 있었고, 그래서 언제나 불안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부터라도 자율 지향형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나의 잠재적 능력과 한계를 인식해야함을 깨달았다. 또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거리를 둬야함을 알았다. 리스먼이 말한 대로 거리의 파토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현재 나의 가장 고민인 관계 부분은 책을 덮고도 고민했다. 그전에는 외부적인 요건에만 집중하고 타인의 판단만 믿었던 것 같다. 물론 함께살아가는 세상에서 타인을 배제할 수 는 없지만, 타인과 함께 살아갈때 '나'를 잃지않고 살아야 함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책에서 말한대로 나의 잠재적 능력과 한계를 인식하기 위해 다이어리 한페이지에 나의 장점, 능력, 단점 등을 생각날때마다 하나씩 적으면서 나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가고 있는데, 이 책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어 고맙다. 나, 사랑, 관계,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한권에서 모두 하다보니 각 장의 이야기가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다음에 작가가 사랑이나 관계 이런 분야를 좀 더 집중적이고 다양한 고전들과 함께 다루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때도 책을 읽으며 나도 고전과, 작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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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을 겪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은 소멸의 시간을 아주 오래 연장한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책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닌 글로 표현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가의 생각이다. 고전은 오랜 시간 독자들이 찾아 읽는 책이다.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는 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뭉클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고전 읽기는 어렵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충실한 번역도 중요하다. 같은 책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어떤 책은 쉽게, 어떤 책은 난해하게 읽힌다. 그나마 쉽게 고전을 접하는 방법으론 인문학자들이 고전을 읽고 해석한 책들을 읽는 방법이 있다. 이하준 교수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고전 읽기는 ‘언제나 내게 멈춤과 긴 호흡, 그리고 다시 보기라는 훌륭한 처방책을 내려주었다(7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내게도 다르지 않다. 계획을 잘 짜도 실행까지는 시간이 걸려 힘이 드는데 예상 못 한 삶의 간계들이 툭툭 튀어나와 괴롭힌다. 그럴 때 다 던져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고전을 읽는다고 삶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하준은 고전 읽기에 대해 ‘오래된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의 대화’(12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고전 읽기는 생각을 확장해 해답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준다 러셀은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즐기면서 해야 할 일을 하라’(198쪽)고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삶의 간계들이라면 마음을 편히 먹고 겪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은 불편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중심은 나이지 그들이 아니라는 말한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내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겠지만 가까운 사이인 경우엔 쉽지 않다. 곧장 서운하다는 말이 돌아올 테니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어둠에 숨는 시간이 길어진다. 나는 자율적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 실린 타인 지향형 인간의 심리적 특성 설문(178~179쪽)을 표시해 보니 나는 타인 지향형 삶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나는 자율적 인간이고 싶은(어처면 자율적 인간인 척 하는)타인 지향형 인간이었다. 쇼펜하우어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지만 가끔은 관계를 정지하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들어가 오롯한 자신을 만나야 한다. 외로움이 시간이 아니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른은 과거를 사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멈춘 사람이며, 형이상학적 이념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지배받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자들은 잠들어 있는 어른 전체, 그러니까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 즉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개별적 인간 전체이다. 결국 초인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킴으로써 잠에서 깨어난 사람, 자기 자신을 극복한 사람, 자기 삶을 신이나 종교 이념의 도움 없이 오직 스스로 새롭게 창조한 사람인 셈이다. 니체는 누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와 당신도 초인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삶의 연속적인 과정처럼 ‘과정의 연속’이다.(34-35쪽) 20대의 나는 새로운 일에 시도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용기가 없다. 하기도 전부터 실패를 생각하기도 한다. 직접 겪은 경험, 옆에서 본 타인의 경험은 시도하지 않고 미리 실패를 재단하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는 안 좋은 능력을 주었다. 니체는 니체의 ‘초인’을 꿈꿨던 나는 ‘최후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니체의 초인을 만나며 다시는 정체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옆길에 샜던 걸음을 돌려 다시 걸을 준비를 한다. 여전히 앞은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걸으면서 필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방법론적 의심일 것이다. 한때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먹고사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없을 때 얘기다. 생존은 어떤 문제들보다 우선한다. 그렇지만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행동하지 않는다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특권이다. 이하준은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던진 말은 “당신 생이 끝나는 날까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269쪽)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엔 공짜는 없다. 행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뚝 떨어지지 않는다. 행복도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돌아온다. 관계를 맺으며 사는 일은 피곤하지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삶에 관계 유지는 중요하지만 때론 고독(孤獨)의 시간이 필요하다.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에 가려진, 두꺼운 화장에 가려진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선 그렇다. 또한 고독(孤讀), 홀로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일은 미혹되는 삶에 균형을 잡아준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를 읽는 동안 책에 대한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고전들도 좋지만 니체의 책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 오래된 생각과 대화할 시간을 늘여가고 싶다. 그것은 결국 좀 더 성숙한 내가 되는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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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페낙의 『몸의 일기』는 한 남자가 10대에서 80대까지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 몸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상태를 충실히 기록해온 것인데, 남자는
죽으면서 이 일기를 딸에게 남긴다. 그러니깐 ‘아버지’가 된 한 남자는 평생 쓴 일기장을 딸에게 선물로 남긴 것이다.
죽기 바로 직전에 쓴 일기에서, 남자는 이 일기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시대의 몸은 분석을 하면 할수록, 겉으로 드러나면 드러낼수록 덜
존재한다는 거야. 노출과 반비례하여 소멸되는 거지. 내가
매일 일기를 쓴 건 그와는 다른 몸, 그러니까 우리의 길동무, 존재의
장치로서의 몸에 관해서란다. 사실 매일 썼다곤 할 수 없지. 모든
걸 다 적었으리라고도 기대하지 말거라. 난 매일매일의 느낌을 적은 게 아니란다. 열두 살 때부터 여든여덟 살 마지막 해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일이 생길 때마다―우리
몸은 놀랄 거리를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않지―기록을 한 거란다. 그리고
너도 보면 알겠지만, 몸의 존재마저 잊고 산 삶의 고비마다 한참씩 침묵을 지키기도 했다. 그러나 내 몸이 정신에게 신호를 보내온다 싶으면, 그때마다 매번
손에 펜을 쥐고 놀라운 현상들을 주목했다. 그때그때 형편 되는 대로 최대한 꼼꼼하게 묘사한 거야. (중략) 사랑하는 내 딸, 이게
바로 내 유산이다. 이건 생리학 논문이 아니라 내 비밀 정원이다. 여기야말로
여러 면에서 우리가 공동으로 가꾼 영토지. (p.12)
이렇게 자신의 『몸의 일기』에 대해 딸에게 설명한 아버지는, 이것을
그 누구도 아닌 ‘너’에게 맡기겠다고 한다. ‘사랑하는 내 딸’에게 말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 하필 너냐고? 널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지. (p.13)
이 마지막 일기는 “널 사랑했다.”는
말로 끝난다.
자기계발서가 범람하고 힐링 인문학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의 저자는 고전이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고전을
만고의 진리처럼 이상화하거나 미화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고전의 신비화는 악이다. 고전은 그 글을 쓴 사람의 신도가 되기 위해 읽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식을 쌓기 위해 혹은 문화자본을 드러내기 위해 고시공부하듯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목적을
위해 고전을 읽는 것이라면 차라리 위키백과사전을 읽으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그렇다면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현대 사회는 개인과 사회의 불행을 양산한다. 게다가 사회적 불행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사회이다. 이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서의 경우 결국 이런 사회에서 혼자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노오력’하면 성공한다), 힐링인문학은 ‘멈춰서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현대사회의 특징을 설명하고, 개인이
늘 불안하고 외로운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타인에게 보여주고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 리스먼의 시대에는 일국의 차원에 머물렀다면, 지구화 시대에 그런 것은 무한 확장되고 있다. 개성화, 분권화, 개별화 이질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라이프스타일, 소비와 문화의 공유에 따른 가치와 삶의
방식이 전 지구적으로 평균화되고 동질화되어가고 있다. 이른바 불균형한 공존이다.
만약 리스먼이 오늘날의 한국에 대해 언급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충고
아닌 충고를 했다면, 혹시 다음과 같지는 않을까.
“한국인들이 미국인보다 중국인보다, 아니 어느 나라 사람보다 타인 지향형이라서 놀랐습니다. 아마도 체면문화의 DNA, 관계지향형 유교문화의 잔존, 혈연-지연-학연으로 맺어진 사회관계망의 실효성, 왜곡된 과시 욕구, 부정적인 차별 경험의 일상화, 위계와 서열 문화의 영향, 접대문화에 대한 존중, 한국인들의 독특한 평등주의 심리 등과 여기에 서구 문화적 특성이 결합되어 한국 사람들을 타인 지향형으로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미국인과 달리 한국인의 사회 성격은 전통 지향형, 내부 지향형, 타인 지향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개인들에게서 그런 복합적 양상이
관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중략) 중요한 것은 자율 지향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리두기’가 가장 중요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 거리 두기는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 및 타자 비판도 가능하게 합니다. 발전적 의미에서 말이죠. 자율
지향형 인간이 되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거리의 파토스’가 필요한 것이죠. 밖의 세계, 타자와
거리를 두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어야만 사람은 자신을 보기 시작합니다.” (pp.190-191)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은 산업화된 현대 대중사회의 구조적 메커니즘과 현대인을 분석하면서, 사회적
행동이란 사회적 성격의 반영이고 사회적 성격은 사회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을 통해 사회화 과정과 사회화의 주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저서를 통해서 한국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관찰하고 분석할 뿐 아니라,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거리두기’라는 것에까지 나아간다. 개인이 늘 불안하고 외로운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힐 뿐 아니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대안과 방법까지 제시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관련된 여러 개의 아티클을 인용하면서 쓴 다음과 같은
글은 어떤가?
‘이웃이 알면 어쩌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을 니체식으로 해석하면 권위, 도덕, 규범, 종교의 목소리,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삶 즉 진정한 ‘자유의 삶’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유로운 삶과 관련해 ‘일상의 예속과 정치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촉구한다. (p.84)
이것은 상식 수준에서 알고 있던 ‘에피쿠로스=쾌락’과는 사뭇 다르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쾌락이란 쾌락을 얻는 수단과 방법 그리고 과정들에 모두 쾌락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결과도 쾌락이어야
하는 것인데, ‘진정한 쾌락’은 자유로운 삶과 관련해서 일상의
예속과 정치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쾌하지 않은가? 달리 말해
인간은 일상의 예속과 정치의 예속을 벗어나지 않는 한, 고통이 사라진 평안한 상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시장화된 세계에서 시장화된 개인으로 산다. 이런 사회는
종교마저 시장화되어 심지어 시장화된 개인들은 종교를 통해서도 위안을 받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시장화된
사회에서 개인들은 성격마저 시장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을까?
저자는 에리히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를 통해 ‘실존’에 대해, 소유와 존재, 그리고
삶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롬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는 모든 삶의 양식을 단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심성훈련을 통해 현명하게 살아가자는 식의 공허한 도덕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적 관점의 유사성을 드러내기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빌려 두 실존 양식의 차이를 이루는 경험적 토대’를
찾아보고,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이행에 따른 조건들을 탐색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썼다. 정신분석학적 방식이라는 말에 프로이트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프롬은
프로이트의 개인심리학을 비틀어 ‘사회학화’한 자신의 사회심리학적
방식으로 소유와 존재의 문제를 분석한다.
이를 이해하려면 프롬이 ’사회구조-사회적
성격-개인의 성격’이라는 도식으로 소유적 실존 양식과 존재적
실존 양식을 설명한다는 것을 간파해야 한다. 프롬은 사회구조가 개인들의 사회적 성격은 물론, 개인의 성격에도 강렬한 영향을 준다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그 속에 사는 사회구성원은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요구하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고도로
발전한 산업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의 사회적 성격은 ‘시장적 성격’을
갖게 되고, 그것이 개인의 차원에서 소유적 실존 양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pp.246-247)
『소유냐 존재냐』에서 프롬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적 존재 양식은 불가피하며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현대사회가 가진 문제이다. 프롬은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언어, 문학, 사랑, 학습과 독서, 기억, 대화, 지식 권위 행사, 신앙 등 일상의 전반에서 뿌리내리고 있는 소유적
존재 양식의 증명을 시도한다. 뿐만 아니라 프롬은 서구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조차 예수가 보여준 존재적
실존양식을 버리고 소유적 존재양식의 삶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사회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기 자신’의 존재로 살 수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이하준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집단지성의 힘과 우리 자신들을 믿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해방 이후 경험한 한국식의 천박한 소유적 실존 양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프로이 말하는 ‘개개인에게 생존 근거를 마련하는 것’, ‘합당한 노동조건’, 시장의 빅브라더만을 위한 ‘자유 시장 경제의 포기’를 위해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이러한 결단만이 새로운 당신, 새로운 당신의 가족, 새로운 당신의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소유와 탐욕의
싸움으로 아우성치는 이곳에서 숨을 쉬기위한 변화의 결단이 필요하다.
형식적 합리성의 테두리 안에 질 좋은 삶의 내용을 담아내고, 소유적
삶을 강요하는 사회를 바꾸기 위한 결단을 지금,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프롬식의 ‘인본적인 공동체 사회주의’의 형태를 갖는 것이든, 새로운 한국 사회의 모델을 만드는 것이든
결단은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60년 전
프롬이 병든 사회를 고치기 위해 『건전한 사회』에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 변화를 호소했고, 40년 전 『소유냐 존재냐』에서도 여전히
호소하고 있는 이야기를. (p.254)
성찰 없는 한국적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오로지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만이 절대적 진리처럼 통용된다. 이런 사회에선 배제와 차별에 순응하는 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감정적으로 타인과 서로 연결돼 있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동감과 연대의 선행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이를 주장하기 위해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을 인용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인식하는 방식은, 마치 우리가 남의 몸속에
들어가서 어느 정도 그와 동일한 사람이 되고,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감각을 얼마쯤 이해하게 되며, 심지어 그 정도는 약할지언정 비슷한 감각을 실제로 느끼기까지 할 수도 있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공감은 감정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을 목격함으로써 발생한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고감하지만, 막상 그 자신은 그런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의 입장에 놓았을
때 상상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것이지 그의 마음속에 실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애덤 스미스는 모든 인간은 ‘도덕감정(moral sence)’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도덕감정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감정의 형태를 갖는다면 늘 변화하는 감정이 어떻게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있을까? 애덤 스미스는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도덕감정은 도덕성이
높은 인간이든 그렇지 않은 인간이든 누구나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도덕감정의 실체는 ‘공감’이라고 주장한다. 애덤
스미스는 공감이 연민이나 동정심과 유사한 것이며, 타인이 경험한 감정으로부터 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감이 가능하려면 동류의식(fellow-feeling)—나도
인간이고,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고 느끼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자기애’에 기초한 신중의 덕, 절제, 검소, 근면, 탐욕적
재산 축적 배제, 공정한 경쟁, 사회이 진정한 토대로서의
정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성향도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제도이자 시스템인 줄을 알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닫게 디는 것, 그리고 인간이 ‘도덕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타인에 대한 공감과 타인과의 연대는 가능해진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시대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전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경전으로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재해석되고 맥락화된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인간성은 확장된다. 고전은 사색하고 숙고하는 삶으로
인간을 인도하고 인간 존재 자체를 고양시킨다.
즉, 고전은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 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남긴
일종의 ‘몸의 일기’이다.
절절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록한.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한다.
당신의 별을 보고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의 노래를 불러라.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고 어떤 경우에도 담담하게.
고전을 읽어야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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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가 100시간을 넘어섰다.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합법적 의사방해(議事妨害)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텐데, 주로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거나
기타 필요에 따라 의사진행을 저지하기 위하여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의사진행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국 국회에서는 1969년 이후 거의 50년 만에 필리버스터가 열리고 있으며 ‘테러방지법 반대’를 위한 ‘무제한토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야당이 소위
‘테러방지법’으로 네이밍된 법안을 필리버스터까지 하면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테러를 방지한다는 건 정의로운 일 아닌가?
그런데 이 법안의 무엇이 필리버스터까지 낳게 했을까?
문제가 되는 것은 테러방지법안에
포함되어 있는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독소조항이다. 휴대폰 감청과 계좌 추적을 용인하는 것이 대표적인
내용이다.
더
큰 문제는 대테러 업무의 컨트롤타워를 국정원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국회의 문민통제를 받지 않는 국정원의
권한을 더욱 강화해준다는 문제를 가진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나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폐해에서 이미
드러났듯, 국정원의 강화로 인한 권한 남용이나 인권 침해의 여지가 다분하다. 따라서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소위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야당의 주장이다.
국정원의 권한 강화나
테러방지법이 오용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불미스러운 일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조작한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으로, 1995년 ‘근대 사법제도 100주년 기념 설문조사’에서 현직 판사 315명이 꼽은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기도 하다.
이미 대선에 개입하였을 뿐 아니라 간첩 사건을 조작한 전력이 있는 국정원에
더 많은 감시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국가 안보’라는 미명하에
이뤄졌던 ‘인혁당 사건’ 같은 일이 ‘테러방지’라는 미명 하에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보안법의
경우처럼 테러방지법 역시 오남용의 소지가 있다. 테러방지법은 교묘한 네이밍일뿐 실상은 ‘테러를
빙자한 국정원 강화법’내지는 ‘전국민사찰법’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보수주의자들이
절대적 우방이라고 믿는 미국에서조차 테러방지법을 만들지 못했다. 국가안보와 개인정보보호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지만, 여전히 개인의 자유나 인권을 더욱 중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회 정보위에서 감청 관련 내용을 요구할 수 있지만 제대로 된 자료 제출은 없습니다. 국정원이 자료 제출을 거부하더라도 이를 제재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국정원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남용하더라도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트위터, 페이스북, 아마존 등은 공통적으로 “의회는 법원이 범죄와 무관한 제3자로 하여금 수사기관에 암호 해독 시스템을 내주도록 강제할 권한을 준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정보기관의 개인정보 접근 요청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정치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거리 두기와 비판하기 그리고 자기 사유가
필요하다. 정치는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일이라는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해서는 안 된다. (……)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과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한국에서 공공의 안녕(공안)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변질되는 경우가 잦았다. 그래서
‘공안’은 종종 ‘정국’이라는 말과 합쳐져서 특정 시기에 반대파를 억압하기 위한 집권세력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공공의 안녕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공공의 안녕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목적이 정당하지 않으면 수단이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공’이 누구를 가리키는가? 그 공공이 누려야 할 ‘안녕’의 실체는 무엇인가? 공공의
안녕을 위협하는 실제적 위협이 존재하는가?
설령 그러한 ‘공공’이 절대다수의 실질적 이익을 대변한다고 하더라도 수단이 항상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과연 정당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타인지향형 인간의 공통점은 그 지향성의 근원이 동시대 태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때 타인들이란 자기가 직접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친구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일 수도 있다. (……) 타인 지향형 인간이 추구하는 인생 목표는 타인들이 인도하는 대로 바뀐다. 다만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개인이 이런 식으로 설정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과
그를 위해 타인들이 퍼뜨리는 신호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뿐이다. 이렇듯 타인과의 접촉을 줄곧
유지하는 행위는 철저한 행동의 순응성을 낳는다. (……)
타인 지향형 인간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정치적 정보의
유통에 있어서도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이들은 내부소식통을 선호하고 신뢰하는 경향이 강하다. 리스먼은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토론과 비판에 근간을 두는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다.
- 데이비드 리스먼, 『고독한 군중』
집권세력의 프로파간다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기본인 토론하고 비판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부소식통에 의존하고 타인의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순응하는 자에게 민주주의는 사치이다. 문제는 이러한 타인 지향형 인간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이 선진공업사회의 도시에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데 있다.
우리의
진정한 삶은 미래에 있소. 우리는 미래에 가서야 한줌의 먼지와 몇 조각의 뼈다귀로 변해 새로운 삶을
열 수 있는 거요. 그런데 그 미래의 삶이 언제쯤 열릴지는 아무도 알 수 없소. 어쩌면 수천 년 후일지도 모르지요. 현재로서는 건전한 정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뿐이오. 우리는 집단 행동을 할 수 없소.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개인에서 개인으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줄 수 있을 뿐이오. 사상경찰이 감시하고 있는 한 다른 방법이 없소.
- 조지 오웰, 『1984』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권의 용어만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직장에도 존재하고, 일상생활에도 존재하며, 가정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민주주의는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집권세력이 강요하는
민주주의를 다른 모든 영역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더 이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토론과
비판, 건전한 정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지 않는다면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사회가 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테러방지법은 집권세력이 부과하려는 ‘민주주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테러’이고
그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토론하고, 비판하는 것이 민주적 시민의 역할이다.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때 직장과 일상, 가정에도 민주주의가
실현되며 나아가 정치권에도 시민의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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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계획을 세우며 고전을 권장도서 순서대로 읽어보겠다고 욕심을 부린 적이 있다. 하지만 몇 권 제대로 읽지 못하고 뒤로 미루기를 여러 번 하게 되었다. 모든 고전이 나에게 와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군가가 해석을 해주었을 때에 조금 알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고전 공부의 의욕은 뒤로 미루고, 책을 읽다가 알게 되는 고전을 찾아 읽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 책《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하준. 크리슈나무르티의《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읽고 처음으로 영혼의 조용한 기쁨이라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저서 및 공저 중《철학이 말하는 예술의 모든 것》이 2014년 세종도서 학술부분 우수도서로 선정되었다. 지금은 한남대 교양융복합대학에서 고전, 사회철학,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다. 학생들과 함께 고전을 '지금, 여기의 각자의 시점'에서 현재화하려 시도하며, 고전과 대화를 나누는 카페(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에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사람들은 인문 고전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우를 범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 고전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오늘날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한 시대를 살았던 한 인간의 고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이유로 모든 고전은 나름의 한계가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우리의 삶 속에서 재해석하고 맥락화해아 한다. (12쪽) 지금껏 고전의 권위에 눌려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라고 인식했나보다. 그렇기에 오히려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늘 멀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장막을 거두고 나만의 방식으로 소화해내도록 도움을 준다. 고전 읽기에 대한 막연함을 구체화시켜준다. 저자는 말한다. 고전을 읽는 것은 그저 '오래된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의 대화'라고 말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생각 따라 하기'가 아니며, 누군가의 신도가 되는 것은 더욱 아니라고 강조하며, 현대인이 고전을 어떻게 대하고 받아들일지 하나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나뉜다. 1장 '나에 관하여'에서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니체의 초인, 데카르트의 사유, 밀의 자유,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서의 쾌락, 몽테뉴의 자아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2장 '사랑에 관하여'에서는 프롬의 홀로서기, 칸트의 결혼, 헤겔의 가족, 프롬의 남과 여, 벡의 장거리 사랑, 아도르노의 사랑의 죽음에 대하여, 3장 '관계에 관하여'에서는 플라톤의 우정, 리스먼의 거리의 파토스, 러셀의 질투, 애덤 스미스의 공감, 칸트의 진실, 짐멜의 이방인을 다룬다. 마지막으로 4장 '삶에 관하여'에서는 루소의 숙명, 프롬의 실존, 프로이트의 딜레마, 몽테뉴의 단순함, 키케로의 늙음, 하이데거의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 책의 특징은 개인, 사랑, 관계 등 인간 존재라면 누구나 접한 일에 대해 다양한 고전 사상을 아우르며 사색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저자의 이야기를 통해 들여다보며 나만의 생각을 구축하게 된다. 그저 문자 그대로의 글만 읽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독서의 폭이 넓어진다. 자신의 관점으로 비판하지 않은 독서는 죽은 독서이며, 자기의 언어로 구축되지 않은 세계는 자신의 세계가 아니다. (43쪽)
특히 이 책을 읽으며 '충분히 아름답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법'을 흥미롭게 읽었다. 칸트의 진실을 다루는 장으로 관계에 관하여 이야기를 한다. 여기에는 '거짓말에 관한 몇 가지 철학적 조언'이 나오는데, 거짓말에 쉽게 현혹되는 것은 필요 이상의 과도학 욕구 때문이라는 것과 자기 편익을 위해 불필요하게 인내하고 관용을 베풀지 않았는지도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는 점에 깊이 반성해본다. 나의 미지근한 반응이 작은 거짓말쟁이들을 부추기지는 않았는지, 되짚어본다.
저자는 고전을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입맛에 맞는 것을 읽으면 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나의 입맛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조금씩 맛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이름조차 모르던 음식을 보기 좋게 담아서 펼쳐보여주면 잘 모르던 나의 입맛을 찾게 된다. 그렇기에 이하준 교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우리의 일상 속에 생각보다 다양한 철학자의 사상이 녹아들어 있음을 깨닫고는 나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다. 고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한꺼풀 벗겨내고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고요히 응시하는 시간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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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작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이가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책들을 헤아리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실은 우리 불안의 응답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책을 구매하려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불안을 긍정하게 만들고 정당화시켜 주는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내용이 있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며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경쟁의 고도화와 유연화로 관계가 파편화되고 개인이 점점 고립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인, 바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대해서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불안은 사회에서 당연하며 그러므로 부정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위적 체험이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미움을 받으라고 말해주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불안을 가진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던 대답, '넌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넌 네 자신을 긍정해도 돼!'를 그 책이 쉽고 설득력있게 들려주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해 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자르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말해주는 것을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그 응답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것이 원인이 된 불안 속에 끊임없이 떨고 있냐고 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야마다 히로키에게 묻는다면 거대 이념의 종말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대 이념의 퇴조로 이제 모든 평가를 오롯이 개인이 감내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하와 불안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자면 이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거대 이념의 붕괴 이후 패권을 차지해버린 신자유주의가 명확히 의도한 결과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목적이 오로지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시장에서 당하는 결과에 대해 그것이 의도든 불운이든 사회가 전혀 책임지지 않듯이 그렇게 한 개인이 당하는 모든 위험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또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듯 개인 역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이다. 즉 개인은 이제 사회에게도, 노조에게도 기댈 수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오로지 홀로 파악하고 관리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와 같은 푸코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덩달아 불안도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우리를 너무도 옥죄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긍정해 줄 무언가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상적이거나 허약하지 않다. 생생한 힘으로 구체적이면서 물리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문 또는 그것을 주로 만나게 하는 통로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호사가의 취미라든가 정보 축적만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는 말을 낳은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고대 문헌 학자가 그랬듯이 몇 백년간 지속된 중세의 어둠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낼 힘도 얼마든지 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자기 정당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호 심화되는 이런 질곡이 힘겹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기대야 할 것도 오로지 언어, 담론 밖에 없다. 언어가 불안과 절망을 가져왔으나 구원 역시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수록 읽어야 한다. 그 언어들을 매개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지금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전을 만나야 한다. 탈옥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주인공이 감옥 전체의 지도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이렇게 탈출에는 내가 지금 갇혀 있는 장소를 전체로 조감할 수 있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것을 고전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많이 다르거나 혹은 지금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유인 지라 동시대의 담론들 보다 훨씬 더 내가 갇힌 이 시대의 외곽을 잘 드러내어 그 안에 담긴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우리에게 자유 정신의 힘을 준다'라고. 그 자유의 힘이란 바로 현실이 가진 중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바깥으로 데려가는 힘, 그리하여 객관적인 시야로 시대를 조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우리를 넘어서 나아감과 해방된 공간에서 홀로 던지는 시선이 이하준이 말하는 '대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유를 향한 월담과 해갈을 위한 대화를 체험해 보기에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일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 책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사랑', '관계' 그리고 '삶'인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연속성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나'에서 나아가면 '타인'이 있고, 그 '타인과의 함께'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연쇄와 집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확장의 경로인 것이다. 그 확장의 경로를 따라 철학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철학자의 담론에 저자 자신의 담론을 가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의 담론은 삶에서 우리가 가지거나 만날 수 있는 질문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세계와 윤리에 대해 대부분의 의문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다고 현학적이진 않으며 담론이 추상적 차원에 갇히지 않도록 구체적인 현실 문제와 연계되도록 하고 철학자의 언어도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급적 일상적인 어투로 순화하고 있다. 초심자를 많이 배려하는 책이며 그러므로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입문에 그치진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써의 완결성을 엄연히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으로 고전의 대화가 어디로 데려갈 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을 확장의 경로인 네 파트의 제목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나'는 주체로 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찬양은 고독의 향유를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즐겨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뒤이은 니체의 '초인'은 초인의 의미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정과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라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엄습하는데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동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강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동경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 이런 식으로 왜 먼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밀의 '용기와 관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스의 '외부의 자극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내심의 평정' 마지막으로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숙고'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랑'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먼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롬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적 사랑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이 양자의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체'로 서기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타자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왜곡된 애착에 있다(P. 10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은 칸트와 마지막 아도르노에게서도 확인되며 특히 울리히 벡 부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계를 파현화 시키는 지금 사회의 유연화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때문에 저자는 독립된 주체의 성립을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의 긍정을 통해 자신을 먼저 내려 놓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나 자신의 긍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은 '관계'와 '삶'까지 주욱 이어진다. 현실적인 관계 양상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거기에 과연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재검토되고 '삶'에 가서는 누구나 겪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과 '노년' 그리고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경험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의미 짓는다. 그리하여 경로 전체를 통해 온전히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나로 하여금 그토록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줄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 확고한 자리로 우리를 넌지시 데려간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제안은 꽤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신자유주의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 스스로 항상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데 있고 그런 관리는 우리도 경험상 잘 알고 있듯이 많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의 소비는 어디까지나 과시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 바 있듯이 실제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라캉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조차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비극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견주어 날 볼 수밖에 없고 항상 나보다 뛰어난 존재들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내 모자람과 부족으로 인한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또한 이런 시선은 언제나 우열의 휘장을 두르기 마련이다. 나와의 높낮이에 따라 질시와 경멸의 시선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서 사회적 보호막을 벗겨내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으로 이끌어가려 하는데 이런 개인의 '기업가화'는 그것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그들의 눈이 아니라 온전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층위에서의 나와 만나는 타인에 대한 차이의 긍정 또한 진정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면 기필코 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이런 태도와 노력의 당위성을 조용히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쉬운 내용과 평이한 서술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감 같은 것이 떨어지길 바란다. 언제나 감처럼 부와 성공 같은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것들이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 자신 보다는 늘 외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에 종속되었고 점점 기울어진 중심으로 인해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 지를 고찰한다면 언어가 오히려 현실과 물리적인 것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법만 봐도 자명하다. 지금 우리의 절망을 낳은 것도 기실은 언어고 구원을 위한 진정한 힘도 언어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이 고전이 만능 열쇠인 것은 아니다.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상식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의 내면을 신선한 시야와 사유로 가득찬 처녀지로 바꾸는 데 있어 고전만큼 좋은 자극은 없는 것 같다. 고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시대상의 간격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과학적 진리라고 해도 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형성한다는 것을. 간격은 그 패러다임의 막을 찢고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그리로 자유로운 상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오래된 생각'은 그런 자유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 정당화를 향한 목마름을 진정 가시게 해 줄 우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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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준 교수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오래 전에 보았던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매트리스]라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레오는 [매트리스]라는 세계 속에 갇혀 있으며, 자신이 보는 세계가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레오는 자신이 '실재'라고 믿는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가상의 매트리스에서 빠져 나와 진정한 실재의 세계에서 눈을 뜬다. 영화의 화면이 화려한 도시의 세계에서 갑자기 어둡고 음침한 인체 공장같은 곳으로 전환되며, 그 곳에서 눈을 뜨는 레오를 보여 주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매트리스'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존재론적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이 전부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성공'과 '부'를 이야기 하니, 나도 그 '성공'과 '부'를 향해 쫓아간다. 그러다가 가끔 삶에서 의문점이 생기면 유명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란에서 질문을 해 본다. 현실의 답만을 제시할 뿐,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깊이 있는 답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점점 그런 것들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문명이 만든 매트리스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었던 고전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에 관련된 많은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나 시험을 준비할 때 인문학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얻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고전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고전을 읽으며 그 고전 속에서 치열하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과정들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책의 첫 부분에서 '나'를 찾기 위해 고전들과 씨름했던 과정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나'를 찾으려면 세상과 사람들이 말해 주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 스스로가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란 고전을 소개한다. 이 책은 근대철학의 시작과 같은 '코키도 에르그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악마가 존재하고, 자신이 그 악마가 만든 허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마치 매트리스 영화와 같은 상황) 그렇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절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나 타인이 말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진리로 믿었다. 저자는 진정한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고전으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의 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제시한다. 낙타는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이고, 사자는 세상에 대항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어린 아이는 자신만의 놀이를 만드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초인(위버맨쉬)'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세상이나 타인이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만들어 가라고 말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규정한다. 그러기에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고,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면, 나 역시 나를 실패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책의 중반부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고전들을 언급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나를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면서 나를 없애고 가정의 일부가 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고전들을 인용하며 진정한 사랑은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그런 독립된 인격체로서 계약을 맺는 것이며,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이런 독립된 인격체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헤겔의 [법철학]이란 책을 통해 가정은 정신적 통일을 통해 '인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인륜성'이란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즉 가족이란 세계정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저자는 영화 [카미유 클로텔]을 예로 들며 자유적인 존재가 종속적인 사랑으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언급한다. 결국 상대를 사랑한다면서 그 상대를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닌 종속적인 인격체로 만들 때 그것은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가정에 이런 부분이 많으며, 특히 자녀 양육에서도 이런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삶'에 대한 고전들을 언급한다. 저자는 헤겔과 칸트가 언급한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를 통해 인생이 우리를 속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생은 노력한 부분에서는 실패를 하게 되고, 노력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엉뚱하게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뒤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성의 간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한다.
요즘들어 뉴스와 신문을 보다보면 도대체 무엇인 사실이고, 무엇인 거짓인지 헛갈릴 때가 너무 많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주장을 절대진리처럼 이야기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 맹신하며 따라간다. 그러다가 다음날이면 그 주장이 허위임이 드러나고, 그러면 사람들은 또 반대쪽으로 몰려 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몰려 다니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삶을 치열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쪽으로 쉽게 몸을 맡기며 사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먼저는 저자가 읽은 방대한 고전의 양에 감탄을 했고, 다음은 어려운 고전을 영화 등을 예로 들며 쉽게 이야기하는 부분에 감탄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고전을 통해 남이 말하는 진리가 아닌, 자신이 발견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저자의 글들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발견하는 진리만이 진정한 자신의 진리가 되는 것일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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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0908yeo/220640937455 당신의 별을 보고 당신의 길을 걸으며 당신의 노래를 불러라. 누구 앞에서도 담대하고 어떤 경우에도 담담하게. 책을 펼치며 첫장에 나온 문장이 인상적이었는데 책을 덮었을때 떠오르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라 감탄했다. 작가님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 바가 바로 이 문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점에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하얀 바탕에 의자가 하나 그려진 표지에 끌리기도 했지만 뒷 페이지에 나오는 고전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 때문이었다. 고전의 권위에 짓눌릴 이유가 없고 고전을 읽고 싶을 때 읽고 던져버리고 싶을 때 던져버리면 그만이란 작가의 말에 왠지 책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그동안 신문에서 고전읽기를 강조할 때 마음이 혹하여 고전필독서 목록을 살펴보고 책을 사서 읽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장은 읽고는 있지만 잘 이해가 되지않고 고전을 읽고나서 뭘 해야 할지를 몰랐었다. 이런 나에게 이 책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를 알려주는 지침서같은 책이었다. 이책은 나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고뇌하면서 고전을 통해 자아찾기를 하고 있다. 독자인 나도 작가를 따라가며 함께 고뇌하게 된다. 먼저 나에 대해서는 쇼펜하우어의 고독에서부터 몽테뉴의 자아까지 여러 고전들을 통해 자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사랑해야 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좋은 습관을 통해 덕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읽고 그동안 나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의 목소리에만 귀 기울였던것을 후회하고 앞으로는 달라져야겠다고 느꼈다. 사랑에 대해서는 프롬의 홀로서기, 헤겔의 가족 등의 고전사상들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상대에 대해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상대의 자유와 독립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성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은 사랑의 대상을 동일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가족사이에서도 가족간의 차이를 확인하고 좁혀가는 노력을 해야함을 강조한다. 그동안 가족간에도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나의 의견대로 따라와주기만을 바랐던 점을 반성했고 앞으로는 상대방 자체를 인정해주고 같이 성장할 수 있어야겠다.
다음에는 플라톤, 리스먼, 러셀, 애덤스미스 등의 생각들을 통해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짓친구들이 아니라 덕을 베풀면서 진정한 친구를 사귀어야 하며 여론에 관심을 줄이고 다양성과 개성을 인정하는 자율 지향형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또한 행복을 저해하는 질투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도 추구하는 자혜의 덕을 간직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를 통해서 1장에서 나의 자아찾기 2장에서 나와 가족,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기 위한 자아찾기였다면 이번장에서는 더불어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나의 자아찾기 방법들이 나온다. 사람들과 관계하며 다같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해야 나도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루소 프롬 프로이트 몽테뉴 등의 고전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수동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함을 말한다. 또한 단순함을 추구하며 간결한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을 알려준다. 이부분을 읽고 나서 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며 행복을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너무 많은 것에 욕심내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것을 삶의 목표로 정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책은 전체적으로 고전을 통해 자아찾기를 하고 있다. 나도 이책을 통해 자아찾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나를 제대로 알아보고 나를 사랑하며 나의 길을 제대로 걸어가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어렵게만 생각했던 고전이지만 작가의 고전과의 대화를 따라가다보니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 깨닫는 부분도 많았다. 고전은 구시대의 이론만 있는 어렵고 딱딱한 책이 아니었다. 고전은 나와 주변과의 관계, 삶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의미있는 책이었다. 나 자신이나 삶에 대해 가끔 고민도 하지만 현실 속에서 직접 겪는 부분에 대해서만 했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자아, 삶의 태도 등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고전에 관심이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의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고전에 관심이 있지만 고전이 어렵고 딱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이 책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 지를 알게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전에 관심이 없더라도 자신, 삶 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책을 차례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목록을 보고 필요한 부분부터 찾아 읽어보라고 조언해 줄 것이다. 나도 이책을 순서대로 읽을 필요가 없었다. 나의 고민에 가장 필요한 부분만 찾아 읽어도 해당되는 몇 페이지에서 얻는 부분은 많기 때문이다. 나와 삶에 대한 고민은 이 책을 한 번 읽고 생각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나도 고민이 생길 때마다 고민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 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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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사인 나는 지금 걱정이 많다. 올해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한동안 계속 저학년 담임만 해 온 터라 갑자기 이렇게 고학년 담임을 담당하게 되고보니 과연 어떻게 이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지 도무지 가늠이 안되는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함께 하게 된 이상 무엇인가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 내가 아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를 다행히 봄방학이기도 해서 차분하게 생각해봤다. 그러나 정작 깨닫게 된 것은, 나 자신조차 좋은 삶이 어떠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한 방법 혹은 태도에 대해 적절한 조언을 할만한 준비가 안 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먼저 나부터 거기에 대해 내공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단 도움을 줄 수 있는 책부터 벗하기로 했다. 언제나 책은 내가 가장 먼저 의지하는 든든한 가지였다. 서점에서 책 더미를 훑다가 한 권의 책이 내 눈에 살포시 들어왔다.‘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이었다. 지은이는 이학준으로 한남대 교수라고 하는데 솔직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표지가 참 담백한 것이 마음에 들어 맞선을 보게 되었다. 맞선을 볼 때, 처음 하게 되는 자기 소개 처럼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는지 말하고 있었다. 찬찬히 읽다보니 지은이가 나랑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삶에서 문제를 만날 때마다 헤쳐나갈 지혜를 가장 먼저 고전에서 구했던 것이다. 이 동질감으로 책에 대한 호감이 올라갔다. 그리고 고전은 만능열쇠가 아니며 지나친 신비화는 오히려 악이라는 말 또한 호감 지수를 증가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요즘 너무 ‘고전! 고전!’ 하면서 마치 고전만 잘 읽으면 삶의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것 처럼 강조하는 것에 반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은 어느 정도의 의미여야 할까? 지은이의 생각이 궁금했기에 얼른 문장을 따라 읽어갔다. 지은이는 고전을 대화 상대자로 보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생각과 내 생각 사이의 조용한 대화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 영혼에 소복소복 스며드는 대화를 통해 나의 선입견, 나의 편견, 나 자신의 관념 체계를 벗어나는 자유 정신의 힘을 가져다 준다고 하고 있었다. 이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 역시 앞으로 만날 아이들에게 그런 힘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새 소리 없이 내린 눈이 아침에 우리가 볼 세상을 바꿔 놓듯, 내 말을 강하게 주장하고 억지로 이끌기 보다는 늘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그들을 가장 빛나게 할 수 있는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조용한 대화. 아이들과 그런 대화를 참 많이 나누고 싶었다. 그 소망을 담아 이 책을 구입했다. 여기에 지은이가 널어놓은 오래된 생각들에 도움 받아 나와 함께 할 아이들의 1년 역시 갓 빨아서 정오의 눈부신 햇살 아래 널은 새하얀 천처럼 화사할 수 있도록. 책상에 앉아 코 끝에 감도는 커피의 향기를 느끼며 차분하게 책을 벗했다. 지은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책은 정말로 대화처럼 느껴졌다. 이름만 알 뿐이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던 쇼펜하우어, 니체, 데카르트, 밀. 그 밖에도 서양 사상사에서 유명한 이들에 대해 한 꼭지씩 할애하여 얘기하는데 어디 한 켠에 치우침은 없었다. 그들의 생각을 너무 상세하게 설명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질리게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지은이가 자신의 해석만 강조하여 그들의 말을 아직 제대로 씹어 삼키지도 못하는 나를 따라 오라 재촉하지도 않았다. 모자르지도 넘치지도 않게, 어디까지나 잔잔한 분위기의 조용한 대화였다. 시간마저 소근소근 흐르는 듯 했다. 그래서 전혀 모르는, 아주 낯선 이들의 말조차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다. 거기다 지은이가 그 말들을 실제 우리가 살면서 가질 수 있는 현실적인 고민들과 연결하여 들려주었기에 드라마를 볼 때 ‘어머! 이건 내 얘기야!’ 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하소연에 맞장구 쳐주는 친구만큼이나 살가웠다고나 말해야할까. 덕분에 애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던 목적인 준비를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 참여하여 턱을 손에 괴고 경청하는 사이 빛이라고 할만한 것이 뇌리를 스쳐가는 것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무엇보다 애덤 스미스의 공감과 에리히 프롬, 아도르노의 사랑이 마음에 남았다. 저자에 따르면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에서 공감이야 말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며 사회가 요구하는 것의 전부임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상호작용의 원리가 되어야 함을 천명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내가 아이들과 함께 주고 받아야 할 것이 바로 이 공감이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것을 나와 아이들의 기본 태도로 삼자는 생각을 했다. 더우기 에리히 프롬에 의하면 ‘아름다운 사랑’이란 ‘따로 또 같이’로 ‘구체적 실천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치며 구축되는 것으로 완성이 없는 연속적 운동 과정’이라고 한다. 아마도 서로에 대한 부단한 관심과 함께 상호 공감과 배려를 매개로 ‘2인 3각 게임’을 하듯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며 이미 해답처럼 주어진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함께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물론 프롬은 남녀 사이의 사랑에 대해 말했지만 이런 사랑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나도 아이들과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한편, 아도르노는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을 이렇게 생각했다. ‘사랑의 대상을 동일화의 논리 속에 강제하지 않고 사랑하는 대상의 차이를 인정하고 주체로서 자각하며 그 주체와 구성적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있다’고. 나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고 언제든 감정에 휘둘려 선생님이니까, 내가 너희들 보다 어른이고 많이 아니까 잔말말고 따라야 한다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진정한 사랑에 대한 말은 내게 좋은 충고가 되어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관계 정립에 있어서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러다 보니 설계도 비슷한 것이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교육의 세부적인 사항들조차 다른 오래된 생각들의 힘을 빌려 차츰 가닥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조금은 아이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할 지에 대해 갈피를 잡게 된 것이다. 이제 아주 약간이긴 하지만 앞으로 얼굴을 마주할 아이들에게 덜 미안해도 될 것 같다. 몰랐는데 지금 일어나 창을 보니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 벌써 나무도, 자동차도 하얗게 덮혀있다. 2월말인데 참 신기하다. 위에서 이와 비슷한 눈 이야기를 했기에 더욱 그랬다. 서설(瑞雪)은 좋은 일이 있을 징조라고 하던데... 왠지 올 한 해, 내가 걱정했던 것을 훗날 유쾌한 추억으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예고 없이 와서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세상을 바꿔버린 눈처럼 아이들과 나도 함께 나눈 공감과 사랑의 시간 안에서 멋지고 알차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나는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에게 꽤 많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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