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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제1장 "망자에게 인도되어" 만 잘 견디면 나머지 500 여 페이지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오에의 대표작이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 틀림없다. 내가 2007년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책으로 선정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이 소설에서 상당 부분을 샘플링했다고 확신하며, 그의 작품 전편에 흐르는 고독 또한 오에의 그것과 닮아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 절망 속에서의 죽음, 파리의 힘, 그리고 다니가와 슌타로의 두려운 진실...) 그러나 하루키가 소설 전반에 걸쳐 로맨틱한 고독을 느끼게 한다면, 오에는 극도로 절망적인 고독을 느끼게 한다고나 할까.
오에가 추구하는 영혼의 구원은 막바지에 다소 김 새는 경향이 없지 않으나, (나는 언젠가 오에가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더 많은 말들을 추가해주기를 바란다.) 적어도 그는 독자로 하여금 불안함과 당혹함을 느끼게 하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이런 소설이 1960년대 중반에 쓰여졌다니, 황병기의 미궁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작곡되었음을 알았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다.
번역도 고려원 시절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 이 난해한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자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앞서 밝힌 것처럼 1장만 잘 견디면 나머지는 쉽게 읽을 수 있다. 내 경우 처음의 절반 부분을 읽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면, 나머지 절반 부분은 두 시간만에 다 읽어버렸다. 번역자들도 혀를 내두른다는 1장은 오에의 독특하고 난해한 문체에 적응하는 연습이라고 생각하자.
(다만 1장에서 얼굴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고 벌거벗고서 항문에 오이를 쑤셔넣은 채 목을 매 자살한 친구의 시신 앞에서 그의 할머니가 독백하는 장면은 고려원 판에서는 "사루다히코처럼." 이었으나, 이번의 웅진판에서는 "사루다히코 같이" 라고 바뀌었는데, 이는 "사루다히코 같구만." 으로 번역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루다히코는 빨간색의 일본 전통 가면이며, 손자의 시신을 보다가 문득 사루다히코 가면이 떠올랐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들과 살아있는 작가들을 싫어한다고 밝힌 무라카미 하루키도 오에 겐자부로 만큼은 좋아한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그가 이 소설을 읽었음에 틀림 없고, 특히 제목과 우물의 이미지는 자신의 작품에도 차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제목 : 만엔원년의 풋볼 → 1973년의 핀볼, 우물 : 마른 우물에 내려가서 잠을 자는 태엽 감는 새의 주인공과 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화자, 그리고 그를 내려다 보는 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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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대표소설이라고 한다. 일본스러운 소설인데, 샤르트르를 전공했다는 저자의 학력 때문인지 프랑스적이기도 한 소설이었다. 가족안에서의 문제를 민족적 문제로 끌어올린다. 그 민족의 갈등에는 조선인 부락, 그 중에서도 슈퍼마켓 천왕이라 불리우는 자와의 갈등이 중심에 있다. 골짜기의 일본인들은 조선인 부락을 공격했다. 그들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일까, 자괴감 같은 거. 요즘에도 이민족을 배타시하고 모함하고 그러는데, 이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이다. 특히나 조선인은 부지런하니까, 가만히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폭력이 중심에 있다. 과거 증조부의 아들도 폭동을 일으켰으며 죽었다고 믿고 있다. s형도 조선인 부락과의 싸움에서 죽었다고 생각한다. 동생 다카시는 폭력적인 인물이다. 화자인 나는 폭력적이지 못하다. 그는 폭력은 잘 못된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화를 낼지 모르는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조선인 부락과 싸우는 것도 수치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생 다카시는 폭동을 일으킨다. 증조부 아들도 그렇게 했고, s형도 죽었는데,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서 풋볼팀을 만들어 훈련했다. 아내는 우울기가 있는 여자인데, 다카시의 활력적인 모습에 매료되고 점점 상태가 호전된다. 나중에는 동생 다카시와 사랑을 나누고 함께 살기로 했는데, 남편인 나는 묵묵히 참기만 한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추진제. 수치. 지금도 한일전을 하면 우리는 절대 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수치를 당했기 때문일까. 그렇게 자신을 끌어올리고 싸우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폭동이나 폭력적인 행위도 그 중심에는 수치가 있다고 한다. 조선인 이민족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없다는 수치. 친구는 머리와 몸을 빨갛게 페인트칠 하고 오이를 항문에 박고 자살했다. 왜 그렇게 죽은 것일까. 그리고 뒤에 나오는 염불춤과 지옥도. 세상이 지옥이라는 말인가. 동생은 자살했는데, 어떤 소녀를 강간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썻다. 그 소녀를 강간한 후, 머리를 돌로 짓이겻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생이 일부러 그렇게 했다고 생각한다. 조선인 부락에게 지는게 수치스러워 그들을 폭동이라는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몰아내려 한 자신이 수치스러웠던 걸까. 자기 파괴행위로 스스로 소녀의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강간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동생은 죽기 전에 진실을 말했다. 자신이 백치였던 여동생을 임신시켜 자살로 몰고갔다고.
사람이 파리가 되어 간다. 파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 안에 있는 파리. 소설 파리대왕이 생각났는데, 파리가 우리의 영혼을 좀먹는다고 한다. 폭력은 욕심과 성충동에서 오는 것일까. 여자와 곡식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상상력의 폭동을 일으키게 한 것일까. 폭력적이지 않으면 집단에 의해 수치를 당하고, 정당하지 못한 폭력적인 모습은 비열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모멸에 이르게 되었다. 슈퍼마켓 천왕에 의해 집이 헐리게 되는데, 지하에 작은 방이 있었음을 알게된다. 폭동을 일으켜 싸우다 죽은 줄 알았던, 증조부 아들은 그곳에서 숨어 살다가 죽었던 것이다. 그는 별로 폭력적으로 살고 싶지 않았는데, 세상에 의해서 만엔원년의 폭동을 주도했던 것이 아닐까. 공동체에 의해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그 억압적인 풍토.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 게 지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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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아는 체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싫어하는 나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일본의 현대 작가들의 작품은 많이 읽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쿠다 히데오 정도다.
하지만 남미의 작가나 유럽의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정서적으로 공유되었고 작품 내 소재로 조선인 부락이나 슈퍼마켓 천황으로 백승기씨가 등장하기 때문에 글과 문장이 어려워 이해의 갈증을 겪을 때 어느 정도 그 갈증을 해소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한다.
특히 그 찝찝하고 불편한 찌꺼기가 다른 곳도 아닌 가정사(史)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대를 이어오며 더 아프고 심각하게 또는 더욱 불편하게 유전된다.
아이의 죽음 이후 정서적 분리가 되어 있던 아내에게서조차 남동생 다카시와의 설명할 수 없는 반목과 분리를 지적받는다.
그들의 증조부 세대가 만엔원년에 일으킨 봉기 때에도 증조부와 그 증조부의 동생 사이에 존재했고, 태평양전쟁 후 조선인부락의 습격을 일으킨 그들의 형제 S에 대한 기억에서도 지울 수 없고 좁힐 수 없는 커다란 구멍 같은 갈등이 존재하고 있다.
결국 개인의 문제는 그것을 극복하고 치유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출발한다. 그래야 지속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있을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75년 김지하 시인 탄압에 항거하여 오다미노루 등과 함께 동경 긴자거리에서 48시간 단식 투쟁 결행"
"1994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 아사히상 수상. 천황이 수여하는 문화훈장 거부"
"2004년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비판" (p.52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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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일본에서 오에의 악문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너무 길다. 길어도 좋지만 읽지 않아도 괜찮을 말들 설명들이 가득하답200쪽에서 250쪽으로 줄인데도 괜찮을듯한 소설이다. 오히려 응축한다며 전율하며 소름을 느끼며 읽을 것이다. 역시나 일본 전후 문학의 색이 강하고 그 자체가 매력이 된다. 인간이 지닌 마음의 죄, 고백, 가책. . . 생각하게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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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훌륭한 서평과 리뷰글들이 넘쳐나는 책을 읽고난 후에는 그것을 문학적으로 정리하고 '평가'할 생각이 들지 않게 된다. '평가'하고자 하는 마음은 곧 '개인적인 감상'을 하겠다는 훨씬 단순한 쪽으로 방향전환이 되고 만다. 이 책을 완독하기 전에 그러한 텍스트들을 보았고, 작성한 사람들의 문장력과 해석력을 질투하였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나서 새삼 깨달았다. "진짜는 소설 안에 있다". 서평들은 그 책 안의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온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서평 안에서 "아이덴티티를 찾고자 투쟁하는 인물상"와 같은 글을 보고 감탄했던 감정이, 소설 본문 안에서 "아이덴티티"를 발견한 순간에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기도 했다. "평론이 아니라 원작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장 걸맞는 책이 이 『만엔원년의 풋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만엔원년의 풋볼』은 읽어내려가는 것 조차 어려운 책이다. 때문에 어떤 잣대를 들이대어 평가하는 것보다도 먼저 그것을 마주하고 있을 때의 감상이 머릿 속에 지배적으로 떠오르게 된다. 수많은 수식어, 형용어, 비유적 표현 등이 주인공 내면의 세계과 그가 바라보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그것에 억눌려 사건의 흐름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어 읽는 이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순수문학이 곧잘 비판받는 이유인 "어지러운 문학적 표현에만 치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시선을, 적어도 이 『만엔원년의 풋볼』을 읽으면서는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만큼 서술적 표현만이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측면에서도 강한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만엔원년의 풋볼』은 패전 이후의 급변기 시대를 사는 일본 젊은이들의 정신을 '개인적 아이덴티티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환원시킨 작품이라고 평한다. 어느 시대에나 '강권'은 있었고, 그에 저항하는 것이 반복되는 민중의 역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실행하는 인간'과 '관찰하는 인간'. 이 소설의 주인공 미츠사부로는 '관찰하는 인간'이고 그의 동생 다사키는 '실행하는 인간'이다. 다카시는 100년 전 만엔 원년 때에 '강권에 대한 저항을 실천한 인간'이었던 증조부의 동생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100년 후인 지금에 강권 세력에 저항하는 젊은 폭동들의 지도자가 된다. 또한 과거에 골짜기 부근 조선인 부락을 침략했다가 조선인에게 살해된 친형제 S형의 정신을 영웅시하고 미화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그의 존재감을 확실시하고자 한다. 미츠사부로는 이런 동생이 탐탁치 않게 여겨진다.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미츠사부로는 '관찰자'의 입장을 철저히 고수하고 있는데, 이는 미츠사부로가 걸어온 삶 속에서의 개인적 체험들로 인해 그가 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카시가 저항하는 강권 세력은 골짜기 마을의 슈퍼마켓 체인의 우두머리인 조선인 백승기이다. 그는 골짜기의 경제세력을 장악하여 이득을 취하면서 골짜기 주민들의 반감을 사는데, 여기에는 자신들의 생권을 쥔 자가 과거 노예로 일본에 들어온 조선인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굴욕감이 더해져 있다. 다카시가 젊은이들을 모아 풋볼팀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이용해 슈퍼마켓의 물품들을 약탈하는 소동을 벌이면서 사건은 점점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이윽고 다카시가 마을 조선인 처녀를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누명을 스스로 뒤집어 쓰고 자살하고 만다. 미츠사부로는 다카시가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하면서 다카시와 번목을 거듭하지만, 다카시가 엽총으로 자살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내면에 갖고 있는 지옥을 뛰어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카시가 죽고나서야 미츠사부로의 '관찰자'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성립된다. 큰 골자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이 책에는 수많은 소재와 상징물들이 등장하고 있어, 위의 간략한 요약만으로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골짜기 마을에 팔려와 노예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이 세력을 장악하게 되는 것과 거기에 대해 쩨쩨하고 치졸한 패배감만을 씹는 일본인들의 모습은 패전 이후 일본의 상황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골짜기 젊은이들이 너무나도 쉽게 외지인인 자신에 의해 단합하는 모습 또한 어리석은 것이라고 다카시 본인도 미츠사부로에게 고백하고 있다. 다카시와 미츠사부로는 학생시절에 일어났던 안보투쟁 학생운동 사건을 겪은 세대이다. 이 때도 다카시는 학생운동에 '참가'하는 쪽이었고, 미츠사부로는 도리어 이때의 폭력으로 인해 '한 쪽 눈을 잃은 불구'가 되는 피해자가 쪽이었다. 다카시는 학생운동 이후 미국으로 도망치듯 떠나가 스스로의 지옥을 경험한다. 미츠사부로는 자식이 백치가 되어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는 일, 친구가 형언할 수 없는 모습으로 자살하는 등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삶에 대한 기력도 의지도 상실하게 된다. 이렇듯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외부의 바람에 의해 흔들리게 되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또한 인간은 다카시가 말한 것 처럼 '누군가에게 말해버리면 자살하거나 미쳐버리거나 하게 될 절대적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개인이 외부세계와 관계하는 데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준다. 다카시에게 있어서 그것은 누이 동생과 근친상간을 하고, 그녀를 자살로 몰아넣게 한 죄책감이었다. 다카시는 이 죄책감에 이끌려 자기파괴적 성향을 드러낸다. 골짜기의 폭동이 처참한 말로를 맞이할 것을 알면서도 폭동을 주도했고, 끝에는 스스로 살인의 누명을 쓰려고 악을 쓴 후엔, 그 절대적인 비밀을 형에게 '사실대로 말한 후' 자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처럼 『만엔원년의 풋볼』은 끊임없는 세계와의 상호작용, 개인 내부와의 싸움 등을 섞어낸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 행동양식의 근원을 탐구하면서 소설의 개연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가장 위대한 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일본 민속 신앙적 요소인 '염불춤'이라는 것이 상징적으로 등장해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어, 마사오 미요시라는 평론가가 이 소설을 "자전, 역사, 정치학, 심리연구, 가족사, 소설, 신화를 전부 엮어낸 대규모의 창작"이라고 한 것이 과언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다. 많은 상징적 요소와 갈등이 넘쳐나, 이 책은 읽고 난 후에 가슴 속에 남는 것이 많은 책이다. 다양한 감정들이 '형언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가슴 안에 잔잔히 파도치게 된다. 그건 다카시라는 인물이 읽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 갖고 있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어두운 면'을 긁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미츠사부로가 읽는 사람 또한 마음 속에 갖고 있을 무기력함을 가장 처참한 형태로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츠사부로의 친구의 괴이한 자살 형태도 가슴 속 응어리와 울분을 상징화하여 원색적 인상을 남긴다. 요컨대 시대도, 상황도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현실과 다르지만은, 이 소설은 인물들이 내외부적으로 갖고 있는 갈등의 요소를 읽는 사람에게 계속 상기시키는 에너지를 갖고 있다. "나는 무엇이고",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에 대한 질문은 세대를 넘어 멈추지 않고 윤회한다. 『만엔원년의 풋볼』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때에, "아시아 권의 이웃인 한국과 중국으로서는 다시 한번 좌절의 충격을 맛보았다." 고 동아일보는 전했다. 그렇지만 『만엔원년의 풋볼』에서 조선인 부락의 조선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미츠사부로의 독백을 읽으면 도리어 마음 한켠을 위로받은 기분이 드는 것이 흥미롭다. 그런가하면 오에 겐자부로보다 조금 늦게 등단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계속해서 노벨문학상 수상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왠지 『만엔원년의 풋볼』발표 후 긴 시간이 지나서, 새로운 형태의 씁쓸한 감각을 현실 세계에 구현화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고백하자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다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면, 그야말로 "최초의 좌절과 충격"을 맛보게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오에 겐자부로는 어느 인터뷰에서 책을 다 읽고 한 번 더 읽는 독서법을 권했다. 『만엔원년의 풋볼』은 어렵기 때문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을 거듭해 읽는 것은 '텍스트를 읽는 활동'을 '도락' 수준에서 한층 더 끌어올릴 거라 생각한다. 「"신생활이라, 나의 '풀의 집'은 어디에 있는 거지? 하고 나는 동생에게 비아냥거렸지만, 신생활이라는 말이 나를 뒤흔들어 놓기 시작한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중략)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신생활을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풀의 집'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문제야" 하고 나는 절실한 기분으로 말했다. 문자 그대로 푸르고 낯익은 냄새가 나는 '풀의 집'이 필요하게 느껴졌다.」 「"봉기를 진압하는 측으로 돌아선 증조부님이 봉기를 위해서 민병 훈련법을 동생에게 전해 주었을 리는 없잖아요? 적끼리 공모해서 소동을 일으켰을까요?" "어쩌면" 하고 나는 의식적으로 냉정하게 말했으나 나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가 짜증으로 날카로워지는 것을 듣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나는 증조부의 동생에게 영웅적인 저항자의 후광을 입히고 싶어하는 동생에게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그가 이미 일본에 귀화했는지 모르지만 조선인 사나이에게 천황이라는 호칭을 부여해준 것은 이 골짜기의 사람들이 하는 일답게 뿌리 깊은 악의에 차 있군요. 그러나 어째서 아무도 그 일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간단하지요, 미츠씨. 골짜기 사람들은 20년 전에 강제로 숲에 벌채 노동하러 온 조선인들에게 지금은 경제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새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또한 그러한 감정이 은밀하게 쌓여 일부러 그를 천황이라 부르는 원인이 되었겠지요. 골짜기는 말기 증상이라구요!" "정말 말기 증상일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어두운 기분으로 인정했다. 그 곳에는 분명히 뿌리 깊은 말기 증상의 징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슈퍼마켓의 천황이란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인가 아닌가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나로서는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할 수 없군요, 미츠씨. 그 사람의 장사하는 방식에 관해 말자하면 악질인 것은 도리어 그 사람보다 골짜기의 인간들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결국 궁지에 몰리는 것은 골짜기 사람들이지요."」 「"당신의 증조부님과 고치에서 만난 적이 있는 존 만지로가 다시 간린마루 호를 타고 미국을 향한다는 소문을 증조부님의 동생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숲의 저쪽 어민의 아들이 그러한 신천지를 향해 살면서 모험하고 있는 시절에, 자신은 좁은 골짜기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고통으로 느꼈을 겁니다. (중략) 그래서 풀릴 수 없는 불만에 사로잡힌 그는 마을의 청년 그룹의 리더로서 특별한 훈련을 기획하거나, 농민들의 대표를 자진해서 번에 배차은을 요청하기도 하는 반체제적인 행동가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S형의 행동에는 만엔원년을 염두에 두고 결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점이 있었어요. 내가 만엔원년과 1945년 여름을 결부시키는 것은 단순히 견강부회라고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을 주지)」 「"진짜 사실을 얘기할까요?" 하고 말했다. "이것은 젊은 시인이 쓴 한 구절이에요. 그 무렵 그것을 늘 입버릇처럼 하고 있었죠. 나는 한 사람의 인간이 그것을 말해 버리면 타인에게 살해당하든가 자살하든가 머리가 돌아 버려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괴물이 되어 버리든가, 그 어느 것인가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인 사실을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그 진실된 사실은 일단 발설하고 나면 재조정이 불가능한 신관을 작동시킨 폭탄을 품 안에 끌어안게 되는 것 같은, 그러한 진실된 사실이라구요. 형은 그러한 사실을 타인에게 얘기할 용기를, 살아있는 인간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략) "만일 사실을 말해 버린 인간이 살해 당하지도 않고, 자살도 하지 않고, 어딘가 정상적인 인간과는 다른, 극도로 혐오스럽고 위험한 존재로 변하는 일 없이 계속 살아나갈 수가 있다면, 그것은 직접적으로, 그가 말한 사실이, 실은 내가 생각하는 의미의, 불타들어가는 폭발물과 같은 진짜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에요. 그뿐이라구요. 형."」 「"하지만 다카, 너는 위기 때마다 반복하여 어리광을 부리지만, 결국에는 항상 빠져나갈 길을 준비해 두는 인간이야. 여동생의 자살 때문에 벌을 받지도 않고 치욕도 당하지 않고, 시치미 떼는 얼굴로 살아 남은 날부터 ,그게 너의 습성이 되었던 거야." (중략) "미츠 형, 형은 왜 그렇게도 나를 미워하고 있는 거죠? 왜 그런 증오를 내게 계속 갖고 있는 거냐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