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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을 위한 비평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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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 eines Kritikers :: Martin Walser최근에 한 평론가가 세간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언행의 시시비비를 떠나 한 매체의 이상 과열 현상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창작가과 평론가 사이에는 항상 공생의 메카니즘이 존재 하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여기에 그 창작물을 대리 판매하는 업자와 소비하는 일반 대중이 개입하며 창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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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 eines Kritikers :: Martin Walser

최근에 한 평론가가 세간의 표적이 되었다. 그의 언행의 시시비비를 떠나 한 매체의 이상 과열 현상이 없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창작가과 평론가 사이에는 항상 공생의 메카니즘이 존재 하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여기에 그 창작물을 대리 판매하는 업자와 소비하는 일반 대중이 개입하며 창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를 호도하여 공생을 대립으로 역전 시킨다. [시장] 의 원형 경기장에서 이들이 편을 갈라 싸우는 동안 자신이 선지자임을 자처하는 적그리스도와 같은 거짓 평론가들이 난립하고, 이윽고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인지 판별력을 상실해 종반엔 그들의 말이 모두 다 진실 이거나 진실이 아닌 암묵의 카르텔로 마무리 된다. 여기서 주체여야 할 창작가는 이러한 이그러진 리얼리즘을 증오 하거나 포기하며 자아의 세계로 천착할 근거, 혹은 궁여지책을 찾는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독일 최고의 펑론가 라고 일컬어지는 에를-쾨니히가 살해 당한다. 가장 최근 그에게 비평 당한 작가 한스 라흐가 유력한 용의자로 꼽히지만, 그와 별 연관은 없었지만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던 인문 작가 미햐엘 란돌프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고 그를 석방 시키기 위해 사건 당시 관련 인물들과 정황을 자발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스 라흐에게 동정심을 표하지만 그가 그들 자신을 위해 범인이 되길 바라는 소망 역시 숨기지 않을 만큼 모두 피해자 에를-쾨니히를 증오하고 있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격상 시키기 위해 작품을 폄하 하거나 가치를 매겨 주는 속물적이고 작위적인 평론가에 대한 복수 심리가 한스 라흐에 대한 옹호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터뷰를 통해 평론가가 얼마나 허상적이고 초라한 존재인지 낱낱히 파헤쳐 지고, 한스의 저작을 통해 무책임한 비평으로 작가의 세계가 얼마나 쉽게 붕괴 되는지, 그럼에도 그들이 그 고통을 뚫고 완벽한 창작으로의 열망을 품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작가는 죽어도 비평가는 살아난다. 창작가가 있음으로 존재 하던 기생적 평론가가 어느덧 숙주를 먹어 치워 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불완전 하다는 진리 아래 평론가가 평론 당할 수 있다면, 그의 발언에 대해 그의 헛점, 불완전한 기반을 두고 반박할 수 있듯이 역으로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렸을 때부터 구속감에 시달렸던 사람은 모든 이념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평론을 할터이고, 자기 가치에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지적 허영으로 포장된 평론을 할터이고, 소수자로 핍박 받았던 이는 자기 경우에 빗대어 편들기 평론을 할 수가 있다. 그들이 각자 쌓는 논리의 성은 나름 견고 하지만 그 어디나 자신 스스로가 미처 돌아보지 못한 빈틈이 있기 마련이다. 그 빈틈이 자신의 근거임에도 불구하고 망각 했거나 부정함으로 스스로 만든 논리의 성이 쓰러질 리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설령 그 빈틈을 인지 하더라도 자신의 빈틈을 메꾸기 보다 상대의 빈틈도 있을거라 짐작하고 파고들 궁리에만 몰두 한다든가, 자신의 빈틈에도 덫을 놓는 교활함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악평을 악평으로 응수하는 경우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상호 존중은 간데없고 치사한 인신 공격도 서슴치 않으며, 악평을 한 평론가는 악평을 들음으로 자신이 악평을 해도 된다는 권리를 되찾아 흐뭇해 한다. 지금 입방아에 오르는 평론가가 독설이라 하기에도 저속한 말도 개의치 않고 쏟아 내는 것을 보아할 때, 이런 자기 권리를 보호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짐작 해본다. 무시하면 될 것을 왜 응대 하는가 하고 의아함을 보이는 사람도 적잖이 있지만, 어쩌면 그는 소통 자체를 포기하지 않고 의견 대립으로 문제 제기를 환기 시키려는 의도 일런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이기적 자기 권리 찾기에 불과 할런지도 모르지만.

서평을 쓸 때마다 매번 고민한다. 작가의 의도를 100% 이해 했다고 단언할 수가 없는데다 스스로 자격요건도 불충분 하다고 생각해서 사실 [서평] 이라 하기에도 난감하다. 독후감, 독서일기 라고 하면 차라리 어감이 안심 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발언에 더 큰 자유를 얻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막되먹은 단정적 발언이든 불가해한 것을 짐짓 너그럽게 이해 하려는 듯한 발언이든 싫든 좋든 자기 자신의 레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을 지적 척도로만 매겨지는 레벨로만 인지하고 필사적으로 그럴듯한 문장 조합을 하는 이도 있지만 거기에서조차도 그가 갖고 있는 개인적 컴플렉스가 발각되기 십상이다. 한가지 매체를 두고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보려는 심리로 쓰여진 글은 피할 수 없는 자기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론에 있어서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온전히 끌어내되, 어떤 기반에서 그런 테제가 마련 되었는지도 스스로 되짚어 봐야 한다. 재미 있었건 없었건, 좋았건 싫었건, 악평이건 선평이건, 문장 짜집기형 글이건 자기 고백형 글이건 그것이 우려진 그릇이 양은 냄비인지 뚝배기인지 솥인지 주전자인지를 파악 해둬야 한다. 따라서 자기 주장이 인정 받길 원하는 것은 자기 기반이 인정 받길 원하는 심리로 인지 해야 되고, 자기 기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인정 받기 위해서는 타인 존중이 불가피 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서로가 쌓은 성으로 영원히 반목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단절하여 각각의 성안에 갇혀 고립될 수만도 없다. 상대의 이견이 존재함으로 내 이견의 타당성을 얻는다는 패러독스를 이해하고 상호존중적 소통의 시도를 포기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도무지 일체할 수 없어서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산다는 논리가 세상에 너무 많다고들 탄식한다. 분명 표면적으로는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있다. 논리에 자비의 온기가 스며들길 바라는 것은 내 개인적 생각이고 바람 이겠지만, 자기 논리의 온전성을 위해 상대를 죽여본들 자신의 완전함이 보완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하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롯 되는지도 모른다. 누구와도 일치할 수가 없어서 다 죽여야 한다면 홀로 남은 논리가 그 무슨 소용 있을까. 다같이 살 길은 존중과 배려, 그리고 타인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변화 시키려는 자신의 의지가 아닐까.

+

여기까진 작품에 대한 어떤 선입견 없이 작중에서 얘기 하고자 하는 비평가의 태도에 대한 고찰과 의견 이었지만, 작품 뒤에 수록된 작가 마르틴 발저에 대한 배경을 참고 하고나면 작품 자체를 재독하여 달리 해석 해야 한다는 뜻밖의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자국의 우익론자에게는 옹호 받아도 대다수 세계인들에게는 지탄 받는 그의 정치적 태도에 공감을 한다면 한국인으로서 일본의 우익에게 공감 한다는 것과 엇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에 은유된 작품에 열린 마음으로 접근 하는 것에 장애가 생기게 된다. 또한 그의 다분히 감수성에 기대는 치밀한 애국주의 마케팅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비난 하자면 그조차도 우리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에 차마 고개를 들어 차별과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다. (※ 본편을 읽기 전에, 오로지 작품으로서만 순수 비평을 하고자 하면 해설서 참고 없이, 작가와 작품을 유기적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면 해설서를 참고 하고 읽는 편이 좋겠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전자로 일독을, 후자로 재독을 하는 것이 작품을 다면체적으로 보는데 더 도움이 되리라 본다)

자신의 소속 때문에 발언의 폭에 한계를 느껴야 하는 것은 씁쓸 하지만, 한가지 간과하고 넘어갈 뻔 한 것을 그나마 새삼 각인한 것은, 작가 역시 비평가 못지 않게 양비양시의 균형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이름이 아니라 창작 역시 세상에 대한 비평적 사고에서 비롯 되는 것이니만큼, 자기 주장에 있어 대립 되는 주장을 수용 하고자 하는 각오를 말함이다. 그것을 마케팅에 이용을 하든 응용을 하든 작가의 재량 나름 이겠지만 그로 인한 성과에서 자기 천착의 합리화만 찾는다면 창작가로서 도태의 길에 들어설 뿐이지 않겠는가. 발저가 한스 라흐, 혹은 마니 마니를 통해 주장하는 창작가의 완벽으로의 추구와 고뇌를 이해 못함은 아니지만, 세상의 이해가 자기와 같지 않아 올바르지 않다는 않다는 사고는 오만하고 편협할 뿐이다. 그럼으로 그 역시 그가 그토록 바라는 자유의 틀을 스스로 경계 짓고 마는 것일테니까. 

 

YES마니아 : 로얄 q****e 2007.08.23. 신고 공감 2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미디어를 아는 선봉 작가의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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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이 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를 짚어보는게 순서인걸로 보인다. 나는 베스트셀러나 남들 다 보는 책 겨우 따라 읽기 바쁘고, 인정하기 싫지만 영화,음악,미술,문학 등 범예술계도 경제논리와 각 분야별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막 인정하기 시작한(깨닫기야 진작이지만), 책읽기 초보 딱지를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독자 중 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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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이 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를 짚어보는게 순서인걸로 보인다. 나는 베스트셀러나 남들 다 보는 책 겨우 따라 읽기 바쁘고, 인정하기 싫지만 영화,음악,미술,문학 등 범예술계도 경제논리와 각 분야별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막 인정하기 시작한(깨닫기야 진작이지만), 책읽기 초보 딱지를 떼어내려고 발버둥치는 독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 수준이라 서점 둘러볼 때에도 신간코너는 대충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7월엔가 눈길을 붙잡은 '어느 비평가의 죽음'은 왠지 심상치 않아 보였고,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던 '살인자의 건강법'을 염두에 두고 과감히 주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책꽂이에 들어가긴 했는데 결코 가볍게 읽을게 아님을 알았기에 더더욱 쉽게 읽을 엄두를 못내다가 이제는 신간이 아닌 이 책을 이제야 읽게됐다.

 

비평가를 공격하는 글을 비평하려면, 내공이 그 소설가와 비슷해야 할텐데 내가 이렇게 비평 비슷한걸 하자니 부끄럽지만, 그러면서도 하고있다니 이건 무식한게 용감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독자의 수준에 따라 온갖 방향으로 나올 수 있는게 이 책인데, 단순화해서 문학,사회,언론 어디까지 보이느냐에 따라 상중하로 구분하자면 본인은 '하'이다. 세가지 외에도 또다른게 보이는 독자가 있다면 내공이 상당한 독자(단순히 독자일뿐만은 아닐게다)인거다. 솔직히 나도 위에 언급한 세가지를 다 읽고 나서 뒤에 붙어있는 해설을 읽은 후에야 안 것인데, 이 해설이 차라리 본 내용 앞에 있었으면, 진작에 더 깊은 이해를 하면서 한층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원래부터 독문학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아니고서야 이 책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해설없이는 처음부터 힘들단 얘기다.

 

처음부터 완벽한 이해를 할 수 없었던 나같은 평범한 외국인 독자들까지 생각하면서 씌여진 책은 물론 아니겠지만, 작가가 스캔들 일으킬 것을 처음부터 작정하고 쓴 책이란 것만은 확실하다. 작가의 각계에 대한 명백한 선전포고와 같은 이 책이 문학인가 아닌가를 규정하는건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작가가 의도한 논쟁은 일찌감치 시작되었고, 원하든 원치않았든 논쟁에 휘말린(?) 독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의도를 이뤄낸 작가의 미소지음에 어쨌든 한 몫 해준 것이다.

 

문학작품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아보이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역사,정치,언론경제 등 사회의 온갖 영역을 들쑤셔가면서 비평 자체를 어렵게 만들어놨는데, 여기에 대고 문학이 아예 아니라느니 해버리는건 정면공격을 회피하는 비겁한 자세일 것이다. 작가라면 누구나 고민할만한 포인트를 이름있는 그가 과감히 총대를 메고 들이댐으로써, 묻어두면 곪아버릴 상처와 같은걸 표면화,양성화,가시화 했다는 점에서 그 선구적 의식만으로도 이미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하는 자보다 앞서있는, 대단한 것이다.

 

더 깊이 이러쿵저러쿵 적는건 스스로 작품을 읽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 아닌, 뒤에 해설을 읽고나서야 드는 생각이기에 스스로가 감히 논할 자격도 안된다고 하겠다. 좀 비굴하지만;; 별점은 문학으로서의 작품성에 대해 준다는 기준으로 해야겠기에 마냥 많이 주지는 못하겠다. 대단한 책과 훌륭한 책은 엄연히 다르니까. 내공이 이미 충분한 독자에게는 간만에 제대로 지적향연의 동기를, 나같은 초보독자에게는 레벨업 할 기회를 주는 그런 책이라 하겠다. 와~ 그다지 깊게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다섯 문단이나 썼다니, 과연 이렇게 할 말 많게 만드는 책인 것이다!

 

P.S. 혹시나 저의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저처럼 무식하게 용감해서이든, 의식있는 작가처럼 과감한 선구적 정신으로든 짧게나마 리뷰들을 많이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상대작이 비평하기 만만치 않긴 하지만 주변에 읽은 사람도 없고, 다른 분들의 생각이 많이 궁금하다.^^

b*****r 2007.09.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