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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은 이성을 통제하며 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건 완벽한 착각이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사회생활에 부적응자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순수한 열정과 양심을 도덕이란 그릇에 가득 채우기만 하면, 그리하여 ‘진심’이면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한 인간의 미약한 선의 출발, 그것의 진정성이 일파만파 퍼지길 바라며.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공생하는 관계와의 조화란 어디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나는 쓰라린 좌절감과 패배감으로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도대체 善이란 무엇인가! 공익의 선조차 소수 기득권을 보호하는, 허울 좋은 망토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배분적 이익이란 의미는 퇴색되었고, 다수의 보편적 행복을 위한 노력은 거대한 속물집단을 양산해낼 뿐이었다.
아직도 가난한 육체는 검은 자본과 욕망이 나뒹구는 도로 위를 배회하며 우리의 정신을 끊임없이 교란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공익의 선이란 개념에 무감각해지고 악에 만성화되어버린 세상을 지적하며,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향해 자성을 촉구했던 한 기자가 있다. 사회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김 기자는 칼럼을 썼고, 다시 그 칼럼을 모아 한권의 에세이집을 출간했다. 소설가 김훈. 그의 비장한 독론篤論에 적혔던, 11년 전의 세상은 더하면 더했지 작금의 현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건강한 부모의 마인드가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입영명령을 받았지만 평발사유를 들어 병역을 면제받으려는 아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당당히 지고 올 것을 독려하는 아버지. 병역기피현상은 일반화되었기에 아버지는 아들을 책망할 수가 없었다. 비굴한 뒷거래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숱하게 져버린, 저 난무하는 로열집단을 책망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괴롭고 힘들다고 해서 너도나도 발뺌한다면 가족과 조직과 사회와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사회란 언제나 신성한 열정과 의무란 노고의 반석위에 서는 법. 아버지는 말한다.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족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p20).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부모상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야 어느 부모가 다르겠냐만, 나는 그렇다. 삶이란 자신이 진 지게 안을 채우게 될 희로애락을 면면히 경험하는 것이며, 부모는 자녀에게도 그러할 권리를 마땅히 줘야 된다고 말이다. 의무義務란, 어쩌면 이것을 기반으로 우리의 정신과 사회를 윤택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믿는다. 한 아버지의 건강한 마인드가 대물림되는 한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고. 외모지상주의가 야기한 도덕적 분노에 공감하며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아이러니 중 이질적인 것에 대한 반감과 선망이 있다. 우리는 흔히 미인(미남)을 볼 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부럽다거나 닮고 싶다는. 반면 추녀(추남)를 봤을 땐 정반대다. ‘왜 저렇게 생겼을까?’라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부터 심하게는 손가락질까지 서슴지 않는다. 게다가 지나치게 비만하거나 마른 사람을 접했을 때의 반응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뚱보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은 혐오와 모멸로 가득하다. 남자들은 대체로 못생긴 여자보다 뚱뚱한 여자를 더 싫어한다. 오직 외모로만 여자를 판단하는 남자들 사이에선 ‘못생긴 여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뚱뚱한 여자는 용서가 안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 12년 전, 개그우먼 이영자 씨는 지방흡입수술로 체중 감량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파문이 일자 연예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일이 있었다. 그 사건에 작가는 분개했다. 에스라인의 여자만을 우대하는 미적 사회기준에 부합하는 행위를 했을 따름인 한 여자를 향해 각종 매체와 세상이 가차 없이 질타를 퍼부었기 때문이다. 운동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거짓말로 도덕성시비까지 걸린 그녀는 인기연예인이자 공인으로서 더욱 용서받을 수 없다는 반응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미용과 화장품산업, 가전제품산업과 주류산업, 패션 디자인계를 비롯한 현 대량소비시장은 예쁘고(멋지고) 잘빠진(잘생긴) 여자(남자)를 광고모델로 앞세운 과열경쟁으로 대중의 미적기준을 흐려놓고 있다. 언제부턴가는 아예 얼짱이나 완소남, 완소녀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순식간에 우리의 미의식을 잠식해버린다. 사물화(상품화)된 미남미녀를 선망하고 그들을 닮아가려는 우리 사회는 이제 그들만의 별천지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다. 잘난 사람들만 판치는 세상에서 못난 사람은 거치적거리지 않게 찌그러져 있거나 성형수술을 감행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다. 결국,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이 처한 사회 안에서 그 사회가 요구하는 바에 맞추며 살기를 바라지 않던가.
아름다운 소리를 걸친 말의 허망함
언어의 순결은 사실에 바탕한 진술과 의견에 바탕한 진술을 구별하고 사실을 묻는 질문과 의견을 묻는 질문을 구별하는 데 있다. 그것은 민주적 의사소통의 전제조건이다. 98년의 말들은 이 구별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놓았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말은 무기로 변한다. 무기로 변한 말은 적에게 허상을 부여하고 그 허상을 친다. 그때 적의 언어도 똑같은 전략에 따라 무장된다. 그렇게 해서 전면전을 치르는 말들의 신기루가 당대 현실 위에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아무것도 소통되지 않는다.(p67) 세상을 뜬 말은 헛말이고 빈말이다. 세상을 뜬 말은 세상에 붙어사는 말보다 힘이 세다. 그 헛것이 세상을 휩쓸어간다. 그러므로 그 헛것은 헛것이로되 헛것이 아니다. 그 헛말들은 세상이 아파서 세상을 뜬 말들이다. 논리적인 신음이란 없다. 아픔은 언어화되지 않는다. 다만 쑤실 뿐이다. 헛말들이 세상을 휘젓고 다니는 힘은 그 아픔에서 온다.(p71)
말에 대한 속담이나 격언이야말로 정말 많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등등. 내 입을 한번 벗어난 말言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이 소리가 되어 누군가의 귀에 들려지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책임에는 무심한 편이다. 그저 소리를 뱉어내는 자체에만 목적을 둘 뿐, 결과에 대한 판단 역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적당히 무마하려는 게 고작이다. 변명과 거짓말과 빈말, 혹은 농담이란 무기는 우리의 말言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관계 맺기를 꺼리는 나는 비교적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 스스로 갇혀 공상언어놀음에 빠져 산다. 내뱉은 말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그만큼 감소하는 것이다.
만약, 목울대를 빠져나갔던 과거의 잡설을 모두 회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들을 분리수거할 것이다. 그런 다음 재활용의 여지가 있는 것들만 모아 가슴 속에 처박아두었다 감성의 자양분으로 써먹을 것이다. 후회란 이렇듯 이미 내 입을 떠난 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그러나 이들의 군집이 정치적으로 악용될 때 사회는 난장판이 될 공산이 크며, 그를 조장하는 언론의 횡포는 이미 포화지경이다. 물론 그 피해자는 언제나 사회의 약자였다. 작가는 말言 중에서 유독 정치(사회)적 언어를 집중적으로 언급한다. 1998년 미국 클린턴대통령과 르윈스키와의 섹스스캔들, 같은 해 13번이나 소집돼 회기만도 310일에 이르렀으나 여야논쟁대립만으로 최악의 생산성을 초래했다는 혹평을 받아야했던 우리 국회에 대해서, 그리고 세상사에 휩쓸리는 말言과 자연의 흥망성쇠에 대한 회한과 상념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 나온 명문장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비극적인 3인칭이었다.(p79) 농담이란 달력을 채우는 한바탕의 ‘삶’
나는 아직 죽음을 내 실존의 불가피한 귀결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내가 고백할 수 있는 삶의 인식이란, 삶은 살아 있는 동안의 느낌의 총화일 뿐이라는 정도다. 비천한 생사관일 테지만, 그 너머를 말한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몸의 실존을 배반하는 거짓말일 것이다.(p134-5)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죽어야 한다는 보편적 종말이 나의 개별적이고도 구체적인 죽음을 위로할 수는 없다- 죽음은 살아 있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불가피성이기 때문일 것이다.(p135)
2008년에 운전면허를 땄다. 진탕 눈물바람을 하며. 겁 많은 내 손아귀에서 연신 헤죽거리던 핸들의 그 방자함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촉각을 곤두세우고, 전/후면경과 양 사이드미러를 수시로 바라봐야 하는 것도 내게는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사방에서 휙휙 앞서나와 달리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기를 반복했고, 시속 60km미만을 유지하며 그야말로 나는 도보보다 조금 빠른 조깅운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목숨을 담보로 스릴을 즐기는 폭주족들을 내 기준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비명횡사할 수 있는 그 위험천만함을 즐기다니... 죽음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가졌던 나로서도 그 당시의 죽음이란 장대비를 쓸어내는 와이퍼의 바쁜 손짓과도 같았다. 바짝바짝 다가오는 듯한 죽음에 소름이 끼쳤다고나할까. 운전강사는 나의 그런 불안과 공포감을 번번이 지적하다 못해 면박을 주었고, 서러운 마음에 그때마다 난 눈물을 찔끔거렸다. 그렇게 어렵사리 딴 면허는 장롱면허가 되었고,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운전대를 잡지 않고 있다. 오늘이 2013년 2월 5일, 내일모래 사이 구정 설을 맞아 전국에 교통대란이 발생할 것이다. 새해 첫 명절을 맞이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처럼 한곳에 모여 반가움과 기쁨을 속살거릴 수 있는 연휴. 그러나 귀성길 정체현상은 고향을 향한 설렘과는 지독히도 무관하여 크고 작은 교통사고를 야기한다. 귀경길 또한 마찬가지. 교통사고 사망률 세계 1위인 이 작은 나라의 도로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사망자들의 죽음을 목도하는 우리 역시 그 사망 대기열에 끼여 있다. 거북이 서행으로 반나절을 도로 위에 헌신한 결과, 누군가는 살아 가족과 상봉의 기쁨을 만끽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통곡을 안기게 된다. 이렇듯 똑같은 상황에 극과 극의 생사를 넘나드는, 이 불가피한 순간의 반전이 바로 대명절의 풍경이다. 2002년 2월 9일부터 12일까지 설 연휴기간 동안 경찰청은 전국에서 2,28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73명이 숨지고, 2,510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했다고 밝혔다.(p137) 작가는 죽음이라는 일상적 허망함에 대해 말한다. 운명이 아닌 보편화된 사회현상이 돼버린 죽음의 소식은 더 이상 아무의 죽음도 아닌 것처럼 들린다, 죽음이 그렇게 사물화될 때 삶 또한 우연성 속에 방치된 사물로 전락한다... 나는 당신들과 내가 살아 있다는 사태가 한바탕의 농담처럼 느껴졌다(P136~7)라고. ‘보고 싶다’는 감정은 단순하기 때문에 처절한 것이다
국토 분단의 후유증은 아마도 끝 모를 ‘그리움’일 것이다. 남한에서의 억눌린 울음을 그나마 진통시켜주었던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분단과 그리움의 고통을 절규했던 수많은 트롯 가요들(p139)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속내를 나는 능히 감지하고도 남는다. 신세대들은 들어 보도 못한 트롯가수들, 남인수나 고복수나 현인의 한 소절만도 못한 자본주의 국가에 나동그라진 남한의 이산가족을 달래주었던 네 박자 뽕짝. 구성지게 꺽이는 음 하나하나에 담긴 그들의 애환이, 마침내 2000년 8월 15일, 6.15 공동성명의 첫 실천사업으로 평양과 서울에서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졌을 때, 그들은 통일까지도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시기상조였을까. 우리의 소원이었던 통일은 희망으로, 소망으로 자꾸 주저앉더니, 종래는 너무나 막연하고 멀어져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국전쟁세대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 감격의 순간을 목도한 그들에게 트롯이 언제까지나 향수와 애잔함의 대명사이듯 통일 또한 염원하는 자들의 눈물의 역사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도 간다. 앞으로 가는 시간과 뒤로 가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끼여 있다. 그것이 삶의 순간들이다. 모순에 찬 삶은 그래서 여전히 신비하다.(p1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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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자전거 레이서라 불리우기를 더 좋아하는 작가 김훈.
이 책은 소설에서는 직접적으로 느끼기 어려운 '김훈 式 세상보기'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의 소설이 '서사적' 이라면, 또 그의 기행문식 에세이 '자전거 여행' 시리즈가 다분히 '서정적' 이라면 이 책은 그의 또다른 산문집 '밥벌이의 지겨움'과 함께 '시사적' 이라는 범주로 도식적으로나마 구분해 볼 수 있다.
자전거 레이서 김훈, 그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애정어리고 따듯하다. 일상의 작은 일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큰 현상까지 그는 결코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어느 한 '쪽'으로의 쏠림 없이 객관적이고 또 감상적이기 보다는 분석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 지혜로운 '작가' 다.
이 책은 읽는다고 '김훈' 이 어느 쪽인지, 또 읽는 독자 스스로가 어느 쪽인지 알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어느 '쪽'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고 강요당해야 하는 건지, 그 어느 '쪽'에 있다면 다른 '쪽' 과 달라야 하고 '옳고 그름'을 서로 가려야한 하는 지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한번 더'의 생각이 모여 세상을 얼마나 바꿀지는 또 다른 문제라 할 지라도..^^
"나는 개별적 삶의 구체성을 배반하거나 천대하거나 또는 그것을 추상화해 버리는 모든 이론과 정책은 모두 사기극이라고 믿는다. 도덕은 인간의 개별성과 개별적 존재의 구체성 위에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무너진 공가 속을 기웃거리며 떠난 사람들이 버린 가재도구를 뒤적거릴 때 분노와 슬픔으로 치가 떨렸다. 공가를 떠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되었나. 도대체 누가 그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졌다는 말인가. 경제발전의 학설과 위기극복의 정책들은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한 적이 있었던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더 이상 가짜 희망을 말하지 말라. 민주주의와 위기극복의 이름으로 인간의 구체성을 추상화하지 말라. 추상화된 언어의 합리성은 뻔뻔스럽다. 그 추상성이 권력의 힘이고, 그 뻔뻔스러움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약육강식의 질서를 완성해 가고 있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개 발자국으로 남은 마을」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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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풍화이며 견딤이며 또 늙음이다.(279쪽) 김훈의 문장 중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삶을 아우르는 문장 중 이렇듯 단아한 문장은 보지 못했다. 이 얼마나 많은 것을 포용하는 문구인가. 처음 이 글을 대했을 때 단 한 문장으로 인생이 요약될 수 있다는 것에 경이감을 금치 못했다. 수십 번을 읽고 또 읽어보고, 되새김질을 하면 할수록 이 문장이 주는 무게감은 남달랐다. 이처럼 김훈의 글은 단아하다. 단아하면서도 진중하다. 더불어 서늘한 날카로움도 품었다.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묘사를 한 줄에 구겨넣은 그의 문장은 마치 이름난 장인이 수십 번의 담금질을 거쳐 만들어낸 명검을 달빛을 벗 삼아 불멸의 밤을 여러 날 보내며 숫돌에 갈아 시퍼렇게 날을 세운 그런 칼을 보는 듯하다. 단 하나의 불필요한 조사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글은 언제나 읽는 이를 긴장하게 한다. 그런 김훈의 글은 소설보다는 수필에 더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를 대표하는 소설인《칼의 노래》는 그의 글이 가지는 단아함이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과 잘 어울렸다. 장군의 난중일기를 수 십 번 읽고서 써내려갔다는 그의 글은 장군의 필력을 닮았다. 감성을 극도로 억제하고 덤덤하게 써내려간 난중일기처럼 김훈의 글은 단아함 그 자체다. 중국의 시인 겸 수필가인 자오리홍은 수필은 정情, 지知, 문文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즉, 작가의 진정 어린 태도情와 사물에 대한 작가 고유의 인식과 견해知, 그리고 작가만이 개성 있는 표현방식인 문체文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고루 갖춘 수필을 만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고 했다. 하지만 김훈의 글은 이 세 가지가 다 겸비되어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수필이고 소설이고를 가리지 않고. 김훈의 글이 가진 치명적 매력은 최근 발표된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래도 김훈 글의 매력은 수필에 있다. 그것도 김훈의 작가데뷔 초기에 써진 작품들에 대한 평이 좋다. 그중 출판사 부도로 인해 절판된 “자전거 여행”은 김훈 수필의 절정이다. 김훈의《칼의 노래》가 그의 소설 중 최고로 친다면, “자전거 여행”은 수필집 중에서 최고이다. 이 책은 김훈의 “자전거 여행”의 중고 책을 구하기 위해 서울시내의 중고 서적 방을 순례하던 길에 덤으로 구해진 책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는 지나간 시간의 아픈 기억의 잔재가 추억처럼 기록되어 있다. 예전의 몸의 상처가 세월이 지나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는 것처럼 지나간 우리네 시간 속 애달픈 기억들이 다시 되살아온다. 1998년 IMF사태,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서 거리로 나온 실업자들, 그 해에 치러진 대선, 개그우먼 이영자 사건, 미국과 한국간의 SOFA협정을 비롯하여 어느 화재현장에서 순직한 소방관에 대한 글, 늘어나는 러브호텔에 대한 단상, 변해버린 대학졸업식 풍경,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의무인 군대 기피에 대한 것과 허무한 말만이 오가는 사회의 풍토 등에 대한 그만의 시각이 서술되어있다. 지나간 시간 속에 존재했던 우리네 삶의 모습들이 많은 이야기가 되어 있다. 모두 다 아픈 기억들이고, 잊혀져간 상처들이다. “세상은 읽혀지거나 설명되는 곳이 아니고, 다만 살아낼 수밖에 없을 터이다(머리말 중에서)라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지나간 시간 속에 우리가 살아냈던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일체의 감성을 배제하고 눈앞에 보여지는 현실을 담담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은 역설적으로 더 자극적이다. 그래서 더 슬프고 암담하고 암울하다. 더 가슴이 아려온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때의 모습과 지금 사회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더 후퇴한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 시절 모두를 서글프게 한 사회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모두를 울분 짓게 한 그때의 사건은 잊혀 졌지만 모습만 바꾼 유사한 사건들과 사회면을 장식하는 힘 있는 자들의 비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은 시간이 가면서 발전을 해간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한 편 한 편 글을 읽어가며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 답답함은 글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밥벌이의 지겨움에 치여 우리가 외면하고 살아온 이사회의 진면목이 보여주는 암담함이다. 그의 글은 차갑다. 더불어 날카롭다. 한겨울 북풍한철이 몰아치는 밤, 산행길에서 마주한 그런 달빛이다. 날카로운 수십 개의 바늘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달빛은 가슴에 한으로 남는다. 김훈의 글은 그런 날카로움과 한을 간직한 문장이다. 한글을 처음 익히는 초등학생이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정성껏 글을 쓰듯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한자 한자 꾹꾹 눌러서. 질긴 고기를 씹듯 김훈의 문장은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이 김훈의 글이 주는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한 작품을 쓰고 나면 자신의 이가 전부 주저앉을 정도의 공력을 드리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도 그가 글을 쓰면서 들이는 정성의 십분의 일정도의 공력이라도 들여야 한다. 그래야 그의 글이 주는 진면목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김훈의 글에 대한 독자의 기본적인 예의다. 결코 함부로 읽어낼 수 없는 글, 한 문장에 온 천하를 담을 수 있는 넓은 가슴을 가진 그의 글, 그래서 그의 문장이 좋다. 그의 작품이 좋다. 밥의 생물학적 본질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것은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며 안 먹으면 죽는 것이다. 밥 세끼의 문제를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그 본질의 비논리성을 지적할 수는 없었다.(31쪽) 국가는 추상적 질서이고 헌법은 장식적 규범인가.(102쪽) 직무는 기능이며 직위는 신분이다. 직무는 용(用)이고 직위는 체(體)인 것이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체가 없으면 용이 작동되지 않는다.(107쪽)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맹자는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안케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같은 그 중요성이 같은 것이다. 길은 원래 주인이 없고 오직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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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내용은 좋습니다 근데 출판사의 얄팍한 상술에 좀 기분이 나쁘네요. 평소에 김훈작가님의 글을 좋아하여 사서 보는데 전 새로 나온 책인줄 알았습니다. 근데 아니더군요 이전에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로 나온책을 제목과 목차 몇개 바꿔서 그럴듯하게 내놓은 책이더군요. 양장본으로해서 가격도 올리구요 집에 있는 책과 비교해보고 정말 기분나빴습니다. 3-4년전에 읽었던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그리고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제 불찰도 있지만 적어도 이전책의 개정판이란 말만 있었어도 다시 책을 구매하여 2,000원의 반품비를 내게 되지는 않았을텐데요 출판사의 상술 불쾌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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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보다 글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초등학교때부터 그랬다. 남 앞에 일어서서 발표하는 시간은 얼굴부터 빨개졌으니깐.... 대신 글로 옮겨적어 그것을 보고 발표를 하게되면 위안이 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하게되는 말과 그 분위기는 여전히 낯설다. 그러니 자연스레 듣게 되고.... 메모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베이다보니 난 어느새 말 잘하는 사람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부럽다. 글의 종류도 많지만 특히 마음 속에 콕콕 박히는 듯 아픈데 그 글들 이면에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을 만나는 것은 감사며 축복임을 알게된다. 무엇을 말하려지 그 의도가 분명해 읽는 사람에게까지 전해지는 순 알맹이 글들. 그 글들을 따라가면 어느 순간 내 자신과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 그래서 더 마음 한 켠 불편하면서 신기하게도 아로새겨진다. 김훈 작가님의 책이 그랬던 것 같다. 작은 자연하나까지 무시하지 않았고, 사람을 보듬고, 삶을 들여다봄으로 이 시대와 사회를 담아내는 그 솔직한 이야기들이 참 좋다. 보편적인 누구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너와 나, 우리들의 이야기들이기에 더욱 와닿는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소개된 책 중 한 권이었던 김훈 작가님의 에세이집,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를 찾아 읽었다. 에세이집이라서 해서 책의 의미와 깊이가 가볍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라는 것을 나는 김훈 작가님의 책을 접한 후에야 알았다. 모든 많은 책들이 그렇게 무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21세기가 시작 된 후의 봄여름가을겨울 삶의 단편들이 싣려져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본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충분히 엿볼만하고....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 누구나 관점과 생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아득할 것만 같았던 2001년과 2002년...... 대한민국의 정치 외교 경제 사회 문화들을 엿볼 수 있었다. 이치에 맞지않는 행동들이 얼마나 많았고, 또 거기에서 파생된 억울함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생각들이 나눠지고 어느 한편으로 쏠리고, 본질도 다르고 흐려지고..... 대책없이 누르고 아파하고..... 대한민국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가진 자는 더 가질려고 발버둥치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까지 뺏기고..... 그러면서 산은 푸르고 강은 흐르고 일상은 아무 일 없듯이.... 아마 책이 아니었다면 나랏일에 대해 알고 싶지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저 시간이 흐르듯 지극히 개인적 일상 속에서 평범하게 오늘도 밥벌이를 하고 있을지 모르지^^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이 평범하지만 왠지 모를 뭉클한 구절을 통해, 나라를 너무 사랑하는 장삼이사의 한 평범한 국민의 모습,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나라의 국민으로 마땅히 감당해야 될 책임감있는 모습, 진정한 자식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굳건한 아비의 모습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진정한 리더십으로서의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렇듯 한 개인의 삶에 미치는 글의 파급력은 얼마나 큰가? 인식을 하게 되고, 그것은 관심이고, 소통인 것이다. 그래서 김훈 작가님의 문체가 나는 참 좋다. 위의 구절처럼........ 깨어있는 사고와 건강함이 묻어나는 책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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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시사칼럼을 엮은 에세이 집이다. 흡사 예전에 조선일보의 만물상이라는 이규태님의 코너가 어렴풋이 생각이 났다. 어린시절 조선일보 애독자 이시던 아버지로 인해 조선일보를 접하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매일 빠짐없이 본 칼럼이 만물상이었다. 여러가지 사회현상을 짧은 글로 재미있고 논리적으로 써 내려갔는데... 이 글이 아마도 유일하게 정치적인 색깔이 없는 글이었던거 같다.
본 책을 접하게 된 것은 책은 도끼다의 박웅현 저자의 짧은 소개글 이었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껴서이다. 어떤 정치적인 색깔보다는 민중의 입장(?) 아니 사실에 입각해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민중의 힘겨운 삶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금과는 동떨어진 이야기 일수도 있으나, 과거의 일은 현재에도 되풀이되서 발생하고 있고... 이는 변화되지 않는한 미래에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그래도 더 좋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러곳에서 애쓰는 분들이 많이 있어, 계속적으로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위에 계신 분들의 변화가 얼마나 이에 동참해 줄까가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전체적으로 네가지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각기 다른 이야기가 한 편으로 엮어져 있다. 무슨 잣대로 이렇게 묶었는지는 저자에게 물어보라... 연계성이 있는 글도 있고... 없는 글도 있다.
첫장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의 제목에 내용은 다소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느낌의 전달보다는 사실(?)의 전달로 인해 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글들이다. 그의 글들은 머리를 심하게 찍어내어 울림을 느끼게 해준다.
두번째 장은 '너는 어느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는 한가지 사실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잣대랄까... 언론에서 비춰주는 모습과 진실의 상반된 상황...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의 모음이다.
세번째 장은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에서는 현재의 삶을 과거와의 연계성으로 비춰주기도 하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뿐만 아닌 생물의 관점에서도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네번째 장은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며는 여자에 대한 사회인식을 과거와 현재의 사건과 상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고 잇다.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을 정리해 보았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뒤로도 간다. 앞으로 가는 시간과 뒤로 가는 시간 사이에 우리는 끼여 있다. 그것이 삶의 순간들이다. 모슨에 찬 삶은 그래서 여전히 신비하다."
"까치들은 개털을 물어다가 둥우리의 안쪽을 꾸미는 내장재로 쓴다. 시멘트로 처발라진 도시에서 까치들은 건축자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수박이 두 쪽으로 벌어지는 순간 '앗!'소리를 지를 여유도 없이 초록은 빨강으로 바뀐다. 한번의 칼질로 이처럼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시키는 사물은 이세상에 오직 수박뿐이다."
"자두의 생김새는 천하의 모든 과일들 중에서 으뜸으로 에로틱하다.자두는 요물단지로 생겼다. 자두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적 에로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두의 향기는 육향에 가깝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이 산이요. 만 갈래가 모여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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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만에 한국 책다운 책을 봤다.
빌려서.. 아껴가며 읽었다.
김훈선생님을 원래 좋아했짐나...
그의 칼끝같은 글들 때문에 더 즐거웠다.
책을 읽으면서.... 웃었다.
책의 남은 분량이 점점 얇아질 수록.... 아쉬웠다.
해외에 있다보니.. 이런 글을 읽을 때.. 더 값진 느낌이다.
내 한글 실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같은 줄을 두 번씩 읽어야 이해 되는 부분이 많았다.
간만에........ 머리와 가슴이 배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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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은 도끼다>를 통해 알게 된 김훈 작가의 에세이집이다. 개인적으로 다 읽고 난 뒤에 약간의 허무감이 드는 소설집이나 읽는 내내 훈계와 깨달음을 번갈아 느껴야 되는 자기 계발서보다는한 사람의 여러 가지 생각을 알 수 있는 산문집이나 에세이집을 좋아한다. 동시대의 같은 현상을 보고도 다른 사람의 논리적인 생각을 읽게 되면 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숙연해지고 겸손해지게 되면서 또 다른 측면을 볼 수 있게 된다. 예전에 김훈 작가님의 강연을 들으러 갔을 때의 느낌과 작가의 글을 접했을 때의 느낌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 당시엔 정치 관련 문제에 대해 물어봤을 때 별다른 말씀 없이 관련 발언을 안 하려고 하셨는데, 7년전 선생님의 글에는 정책이나 무책임한 관료들을 향해 따끔히 말씀해주시는 부분에서 통쾌함을 느꼈다. 시인의 눈과 작가의 눈은 작은 부분까지 놓치는 점이 없어서 그 시각을 빌려서 감성적인 부분들을 얻을 수 있어 즐겁다. 수박을 잘라 먹는 부분에서의 정확한 묘사가 전혀 다른 세상의 것으로 다가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까 싶어 신기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고, 자두의 에로스적인 면을 읽을 때는 자두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상야릇함을 느꼈다. 작가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놀면서(?) 만난 우리나라 여러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지역명과 이름이 실명으로 쓰여 지면서 말해주는 일화는 너무나 친근한 느낌이 들어 가까운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아 편안하게 다가왔다. 세 살 때 열차 지붕에 올라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 했고, 힘들었던 우리 역사와 함께 삶을 살아오시며 그 정서를 가지고 계신 저자와 같은 분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조금 무서워짐을 느꼈다. - 길은 모든 굽이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챙겨서 가는 길이 좋은 길이다. - 자전거는 사람의 두 다리에 걸리는 힘을 분산해야만 겨우 산을 넘는다. 느리게 가지만, 사람과 기계장치와 풍경을 모두 챙겨서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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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책은 김훈 세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생각의나무, 2002)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센터를 둘러볼 때면 "안 읽은 책이 너무나 많구나..." 라며 좌절한다. 그러다, 이 책을 보고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 했다. 김훈 전작을 읽었다며 큰 소리 쳐온 나인데, 안 읽은 책이 있었다니! 망설임 없이 집어 들고 나왔다.
조용한 1호선은 독서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빠른 속도로 '김훈 문체'에 빠져들었다. 간결한 문체를 좋아하는 나는, 김훈의 애독자다. 자신이 믿는 진실을 밀어 붙이는 힘과 속도. 그것은 김훈식 글쓰기가 주는 가장 큰 매력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를 읽으며, 나는 김훈이 보여준 '글의 뿌리'를 발견했다. 무슨말인고하니. 그간 읽은 김훈 작품의 기원을 발견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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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공차기' '축구를 좋아하는 까닭'에서는 산문집 <공차는 아이들>(생각의나무, 2006) '자전거타기' 에선 에세이 <자전거 여행>(생각의나무, 2007) '여자 여자 여자' '또 여자 여자 여자' 단편 <언니의 폐경>(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그리고 '양희은'에 대한 단상에선 양희은씨와 함께 출연했던 낭독의 발견을 봤다.
좋아하는 작가의 초기작을 읽는 기쁨을 느꼈다. 3시간 만에 완독하고, 빛나는 문장을 정리했다.
(이번주 금요일 상상서평단 모임에서 김훈의 신작 '내 젊은 날의 숲'을 이야기한다. 김훈 세설을 만난 건 우연일까 필연일까!)
[발췌 - 김훈 세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나이를 겨우 먹어가니까.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이라면 몰라도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말이란 그다지 많지 않고 또 쉽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쓸쓸했지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세계는 무수한 측면을 갖는다. 그 측면마다 하나의 독립된 시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들여서 겨우 어떤 진술을 시도할 때 그 진술과 반대되는 또 다른 진술이 성립되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회의가 나이 든 사람을 말더듬이로 만든다.
사전에 나와 있는 말들 중에서 끌어다 부릴 수 있는 말들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듯이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고작 한 움큼이다. 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그리고 그 가난이 오히려 편안하고 가지런하다."(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중)
" '사실'이 갖는 층위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사실'은 그것을 관찰하고 전달하는 자의 주관 속에서 재편성되고 재해석되며 의미를 부여받거나 의미를 박탈당한다. '사실'이 객관적이고 '의견'이 주관적이기에 앞서서 '사실'을 만지고 거기에 다가서는 인간의 시선이 이미 주관적이다.
단순한 교통사고나 화제사건, 살인사건조차도 그 전후 맥락과 의미 내용을 완전무결하게 객관적으로 전달 할 수는 없다. 나는 '사실'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의견' 앞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사실과 의견은 적대적이다.
의견은 사실을 비틀고, 사실은 의견의 틀 안에 갇히지 않는다. 인간의 현실은 인간의 가치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자유는 분리되지 않는 의견과 사실을 기어코 분리시켜 놓으려는 가혹한 부자유의 소산인 것이다. 언론은 가치나 의견을 일체 떠난 세계의 알몸을 드러내 보여야 한다. '너는 개자식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인가'에 답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결국 부자유다. 이 부자유를 스스로 수용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다."('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중)
"자전거를 타고 달릴 때, 속도와 사람의 관계는 순결하다. 속도와 힘은 오직 다리품을 팔아서만 나온다. 자전거는 엔진이 없다. 자전거의 엔진은 사람의 심장과 허파와 두 다리다. 힘은 인간의 몸에서 나온다. 자전거는 인간의 몸의 한계를 넘는 속도를 낼 수 없지만, 몸의 한계 안에서는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이다. 자전거의 기어는 사람의 몸속에서 태어나는 힘을 여러 가지 유형으로 재조립해서 뒷바퀴에 전한다. 기어는 도르래의 원리에 톱니의 원리를 결합시킨 기계장치다. 힘을 전달하고 변형시킨다.
자동차는 나쁘고 자전거는 착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미 자동차 없이는 이 세상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전거의 덕성은 그 속도와 힘이 사람의 몸의 허용치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이다. 속도는 능률이고 절약이며, 많은 젊은이들의 꿈이지만 속도의 본질은 공간으로부터의 소외다. 저렇게 빠르게, 어디로들 가는 것인가. 가는 과정을 저렇게 다 버려도 되는 것인가. 자전거는 사람의 두 다리에 걸리는 힘을 분산해야만 겨우 산을 넘는다. 느리게 가지만, 사람과 기계장치와 길과 풍경을 모두 챙겨서 간다. 자동차를 타고 고속으로 달릴 때 우리는 자전거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는 것이 마땅하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중)
"나는 젊은 양희은을 좋아했고 지금도 자주 듣는다. 양희은의 목소리는 힘있고 맑다. 양희은 목소리의 힘은 세계를 안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밖으로 밀쳐내는 공격적인 힘이다. 그리고 양희은의 맑음은 잡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배타적인 맑음이다. 그래서 양희은의 맑음은 부드럽지 않고 거세다. 힘있는 말과 소리는 멀리 간다. 양희은의 힘과 맑음이 합쳐져서 때때로 건전가요풍의 창법을 이루는 대목을 나는 좋아하지 않지만 양희은의 목소리는 멀리가서, 이른바 삶의 전망이라고 할 만한 것에 닿는다. 그때 양희은의 목소리는 세상을 열어젖히는데, 거기가 양희은의 가장 좋은 순간이다." ('개발바닥의 굳은살을 들여다보며'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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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읽고 나면 김훈이 혹시 다른 이들로부터 ‘너는 어느 쪽이냐고’ 질문이라도 받았었나 싶다. 그렇지만 같은 제목의 글을 산문집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원래 2002년에 묶여 출간되던 당시의 산문집 제목은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였다고 하니 애초에 그런 생각으로 산문집을 엮은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산문집 추간 이후 작가의 이념적 혹은 당파적인 위치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을 향하여 김훈식의 독설을 퍼부은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나의 글을 읽고 ‘너는 어느 쪽이냐’ 라고 묻지 말아라, 라는 제스처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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