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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소설의 제목이 보통명사로 쓰일 정도로 문화적인 영향이 대단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연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 “롤리타” 라는 단어를 접해 본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소설을, 그것도 굳이 영문으로 읽은 가장 큰 동기 중 하나는 바로 그런 나의 무지를 타파하기 위함이었다. After all, Dante fell madly in love with his Beatrice when she was nine, a sparkling girleen, painted and lovely, and bejeweled, in a crimson frock, and this was in 1274, in Florence, at a private feast in the merry month of May. And when Petrarch fell madly in love with his Laureen, she was a fair-haired nymphet of twelve running in the wind, in the pollen and dust, a flower in flight, in the beautiful plain as descried from the hills of Vaucluse. p. 19 『롤리타』의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소아성애자이다.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소설 내내 “nymphet”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으며 그 치명적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자신을 때로는 인용구와 같이 유명한 문인들에 빗대, 때로는 불우했던 자신의 첫사랑의 경험에 빗대 끝없는 자기합리화에 매진한다. 그렇다고 그를 한낱 음침한 변태성욕자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험버트는 미망인인 샬롯이 한눈에 반할 만큼 수려한 용모의 유러피언이며 박학다식한 지식인이고, 롤리타와 미국 전역을 여행하고 다닐 만큼의 재력도 있다. 애초에 『롤리타』는 성애에 중점을 둔 에로소설이 아니라 주인공 험버트의 유아론(唯我論)적 이중성을 다루는 소설이다. 중요한 건 롤리타가 아니라 험버트라는 이야기다. 소설 속의 험버트와 롤리타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의붓아버지와 의붓딸의 관계이긴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정말 미묘하다. 장면 장면에 따라 육욕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연인의 관계이기도, 친구의 관계이기도, 또 정말 부녀의 관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하는 편이 옳은 것 같다. 그들 사이에는 다만 롤리타를 향한 험버트의 병적인(morbid) 집착만이 있을 뿐, 교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험버트에게 있어 롤리타는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유아론적 자아의식에 형성된 하나의 이상향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이상향은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점차 허물어지고, 롤리타가 험버트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nymphet”의 ‘연령한계점’인 14세를 넘어설 즈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괴리감으로 나타나게 된다. 험버트의 경험을 빌리자면, 이는 마치 커튼 뒤의 굴곡진 실루엣이 실은 더러운 남자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의 그 경악감인 것이다. Part 2에서 퀼티에 의한 롤리타의 ‘납치’(실상은 자의에 의한 탈출이지만), 그리고 그 퀼티를 쫓아 복수하는 전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꽤나 유머러스하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친 롤리타나 그녀와 결혼한 딕이 아니라 왜 퀼티에게 복수한단 말인가? 퀼티에게 건네는 시 형식의 ‘사형선고서’ 또한 험버트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주요 포인트다. ‘선고서’ 내내 험버트는 자신의 순수함(innocence)를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험버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가령 험버트가 롤리타와 재회하는 장면에서의 기술을 보자: I could not kill her, of course, as some have thought. You see, I loved her. It was love at first sight, at last sight, at ever and ever sight. p. 270 이것은 비록 험버트의 이중적인 자아의 지껄임일지언정 그의 본심이기도 하다. 험버트는 육체적인 관계를 넘어 롤리타를 ‘사랑했다’. 심지어 마의 14세를 넘어서까지도. 한편, 『롤리타』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러한 자극적이고 독특한 스토리뿐만이 아니다. 저자 나보코프의 서술 방식은 여러 모로 참신하다. ‘독자’와 자유자재로 대화하며 블랙 유머(가령 괄호와 느낌표를 이용한 반어법이라든지)를 마음껏 구사하는가 하면, 서장에 이미 험버트와 롤리타의 비극적인 운명을 밝혀 놓는 주도면밀함도 보인다. 작중 주인공의 가명인 험버트 험버트는 “Humbert the ~”하는 식으로 수십 차례 변형되어 사용되고, 롤리타의 원래 성(姓)인 Haze(아지랑이)는 그 자체로 강렬한 캐릭터성을 부여한다. 그 밖에도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가 돋보인다. 국문 번역본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지만 번역하기가 참 힘들었을 것 같다. 여하튼 롤리타에게 접근하기 위해 미망인과 결혼한다는 전개부터가 블랙코미디다. 그리고 『롤리타』가 진정 험버트의 ‘비극’이라면 비극을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블랙코미디만 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나보코프의 서술법은 매우 정교하고 세심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그 어떤 자질구레한 사항도 놓치지 않고 설명을 하는데,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가령 험버트와 롤리타의 첫 만남 같은 장면처럼 긴장감이 넘치는 장면에서는 그 효과를 톡톡히 발휘하지만,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미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똑같은 스케일로 정밀묘사를 하는 부분은 솔직히 좀 난해하고 지루했다. 특히 저자는 여러 유명한 문학작품들에 비유를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부분은 주석 없이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그리고 내가 읽은 펭귄 클래식 판본에는 물론 주석 같은 건 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불어 부분은 그냥 넘어갔는데, 뭔가 놓친 것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불어가 짜증난다는 롤리타의 작중 지적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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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의 롤리타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교양수업을 들으며 참고도서 목록에 있던 이 책을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전까지 막연히 들어보기만 했던 롤리타라는 이름에 대한 말초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고, 문제작이라는 평을 들으며 나온 책이 어떻게 문학사에 길이 남게 된 고전이 되었는지에 대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번역투가 문제였을까. 책 내용은 그다지 흥미가 없었고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오글거리고 느끼한 표현들이라고 생각했는지 다 읽지 못한 채 그만 둔 기억이 있다. 이후 문학동네에서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한 번 롤리타를 만나게 되었고, 주석 등을 참고해서 이 부분이 왜 의미가 있는지, 어떤 언어유희가 사용되었는지 등을 알게 되며 처음보다 한층 재미있게 읽게 되었다. 이때 일독을 하고 원서 읽기에 대한 욕심이 생겼던 것 같다. 롤리타 원서는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판본이 있다. 영문판이라면 내용이야 동일하겠지만, 다양하게 시도된 표지 디자인을 비교해보는 것도 큰 재미 중 하나이다. 맨살을 드러낸 여자 아이가 풀밭에 누워있는 사진을 쓴 이 펭귄북스책은 다소 민망하긴 하지만 행사가에 판매 중이라 구입하게 되었다. 번역본을 먼저 읽고 읽는 것이라 어느정도 읽기가 수월한 면은 있지만 미묘한 유희적 표현이나 비유 등은 주석없이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여전히 있다. 기회가 되면 영문판 주석본도 같이 읽어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