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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평화수업? 평화를 배워? 왜?'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름대로 '평화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평화'를 구하고 살았는지, 세상의 수많은 '평화를 깨뜨리는 것'에 대해서 무디어져 있었는지 나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듣는 뉴스 속에서 '평화로운' 소식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 꼭지나 있을까말까. 그렇듯 평화롭지 않은 수많은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사랑, 평화와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잊어버리고 어이 없이 죽어간, 안타깝게 죽어간 생명들에 대해 무심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그렇게 무심한, 이기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한 나를 부드럽게 다독여 마음을 바꾸라고 가르쳐 주었다. 큰 소리로 힘을 주어 네가 그렇게 평화롭지 못한 건 잘못이라고 따끔히 말하는 것보다 조용하고 깊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 책에서 소개된 비폭력주의자들이 세상을 향하여 초라하게(!) 대응하는 것처럼. 처음엔 너무 힘이 없고 영향력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그것이 더 큰 힘을 지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평화'의 힘인 것이다.
나는 세 살 딸아이의 엄마인데, 아이를 키우면서 놀라는 건, 애써서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폭력'에 대해서는 너무도 쉽게 습득이 된다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무심히 하는 행동, 말에서 배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손을 내질러 내 팔도 때리고 내 다리도, 심지어는 뺨도 때리기도 한다. 물론 나쁜 의도가 아니고 자기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순수한(?)' 반항이지만, 그런 폭력들이 쌓이고 쌓여 폭력에 무딘 아이가 될까 염려하는 마음이 들었다.
세상을 살면서,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남들 하는 공부는 다 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머리를 채우는 일에 급급하다가 마음을 채우는 일이 뒤쳐지는 것이 안타깝다. 물론,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지만, 이 책을 읽은 지금은, 그런 지식들보다 마음을 배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평화'를 배우지 못하고 지식을 쌓은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점점 더 차가워져만 가는 것 같다. 어른들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다.
어른이 된 지금, '차가운' 세상을 너무 많이 경험했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그런 냉랭함 속에 버려지지 않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평화'를 가르쳐야한다. 이 책이 좋은 도움이 될 것이다.
비단 선생님만이 아니라, 누구를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지닌 사람이라면-엄마든지 아빠든지 사회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 누구든지- 꼭 읽어야 할 소중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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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먼 맥카시 선생님의 평화 수업을 읽으면서 평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저 신앙적인 의미의 평화만을 알고 있던 나에게는 의미 있는 수업이었다.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힘, 평화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릴 적부터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선생님만을 만났던 나에게 선생님이란 존재는 독재자와 같은 의미였다. 비단 나만 불행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닐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해진 규율에 따르지 않으면 처벌 받는 학교 – 머리 길이는 어디까지, 옷은 어떤 식으로, 가방이나 신발 기타 외적인 것도 자기의 개성대로 선택할 수 없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법이고 감히 아니라고 말하는 학생은 기본 예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 받았다. 그런 분위기에서 교육 받았으니 편안하게 사는 방법은 체제에 순응하는 것, 독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교육의 부작용일까.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서도 당당하게 항변하질 못하고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책에서는 두 종류의 교사를 설명한다. 학생들 위에 군림하려는 교사와 학생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힘을 찾아주기 위해 애쓰는 교사. 문득 예전에 보았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선생님이 떠올랐다. 내게는 영화 속 인물이었다. 감동은 받았지만 내 인생에 영향을 주기에는 미미했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깨달았다. 어린 시절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책을 통해 훌륭한 콜먼 맥카시 선생님을 만난 것처럼 평화를 배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는 걸 말이다. 평화는 배워야 한다. 저자가 소개한 간디, 저넷 랭킨, 도로시 데이, 조디 윌리엄스 등등을 통해서, 우리 나라의 평화주의자는 알아봐야겠다. 그만큼 평화라는 주제가 낯설고 무심했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소리를 내기가 힘들고 어른들의 토론은 아이들의 몸싸움보다 유치하고 수준이 낮다. 상대방의 의견과 주장을 느긋하게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상대방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말을 자르고 자기 의견만을 주장한다. 이것은 TV토론이나 국회 회의를 얘기하는 것이다. 진짜 칼만 안들었지 언어 폭력, 전쟁과 같은 토론장을 보게 된다. 사회 엘리트라는 사람들이나 평범한 나, 모두가 평화에 대해 무지하기는 마찬가지다. 평화에 대해 배운 적이 없으니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모른다고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를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어른들의 책임이다. 가정 안에서 아이들에게 평화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에 새겨진 평화야말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나 먼저 평화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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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후배 소개로 읽게 되었는데, 간단히 말해 정말 좋은 책이다 !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제 4살 된 아들을 둔 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학교를 다닐 때쯤이면 학교에 평화수업이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지은이는 말한다. 글을 배우지 않으면 글을 읽을 줄 모르듯이 평화도 마찬가지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솔직히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었는데 고맙게도 내게 중요한 부분을 일깨워주었다. 교도소 평화수업에서 수료생들의 말이 인상깊었다. 만약 자신이 어렸을 때 이런 수업을 받았다면 아마도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한편, 이 책은 무지 재미나기도 하다. 그건 지은이의 수업 방식 때문인데 그야말로 너무 재밌고, 너무 좋은 수업 방식이다. 특히 낙제할 수 없는 퀴즈와 100달러 퀴즈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시험이나 성적이라는 몽둥이를 이용한 두려움에 의한 교육이 아닌 마음의 열망으로부터 나오는 교육, 아이들의 진짜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교육 ! 교육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은 꼭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창가의 토토>와는 또 다른 차원의 감동 교실이야기다. 그리고 좀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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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읽을 줄 알면서 왜 갈등은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할까?” 이 책의 지은이는 이런 의문점을 갖고 출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책을 읽을 줄 아는 것은 글자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평화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평화수업을 하기 시작한 이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크고 작은 갈등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어떤 사람은 폭력적으로 해결한다.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사람은, 마치 글자를 배우지 못해 책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평화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글자를 배우면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문제를 폭력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도 평화를 배우게 되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이런 믿음을 갖고 수십년동안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며,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인상깊은 구절 : 116쪽) 그동안 인류가 저질러 온 전쟁의 역사, 특정 민족에 대한 대량학살과 살인, 배우자와 아동 학대, 낙태, 음식으로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것, 사형 집행 따위를 생각해보면 비폭력적으로 갈등을 푸는 기술은 마치 외국어로 천체 물리학을 배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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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모든 정치 지도자들도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불화와 싸움이 끊이지 않는 가정에서도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바람과 달리 왜 세상은 평화롭지 않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지은이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글 읽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글을 읽을 줄 모르듯, 우리가 평화를 배운 적이 없고, 서로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푸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평화를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콜먼 맥카시는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로서 주류 언론에서 평화와 사회적 정의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 오랫동안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오랫동안 ‘평화란 가르칠 수 있는 주제일까? 평화란 가르치면 배울 수 있는 주제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있었다. 그러던 1982년 어느 날, 자신의 아들이 다니고 있는 워싱턴 D.C의 가난한 공립 고등학교인 <담장없는 학교>에서 1일 교사로 글쓰기 수업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날 글쓰기 수업을 마친 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의미 있었다’고 담당 교사에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교사는 ‘다음 학기부터 정식으로 글쓰기를 가르쳐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는 이런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보다는 오히려 평화를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처음으로 <담장없는 학교>에서 평화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평화 수업은 한 장소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행 청소년들이 모인 소년원, 교도소, 부유한 지역의 사립 고등학교, 가난한 지역의 공립 고등학교, 빈민 지역의 소외된 흑인 학교, 대안 학교, 대학의 우등반 학생들, 명문 대학의 로스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퍼져나갔다. 평화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그가 찾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 책에는 지난 19년간 5천 명이 넘는 학생들과의 평화 수업 중에 겪은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다. 주로 2000년 가을 학기, 6곳에서 이루어진 평화 수업 이야기가 9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소개되어 있고, 지난 19년간의 평화 수업 에피소드들도 함께 실려 있다. 교실에서 펼쳐지는 학생들과의 재미있고 감동적인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웃다가 이내 가슴 뭉클해지고, 다시 무릎을 치게 된다. 맥카시의 지난 19년간의 평화수업 여정은 평화란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 또한 학교, 가정, 사회의 폭력이 심해져가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이 책에는 평화와 비폭력에 관해 깜짝 놀랄 만한 사실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간디, 마더 테레사, 마틴 루터 킹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하지만 평화를 위해 애쓴 도로시 데이, 저넷 랭킨, 억울하게 사형 당할 뻔한 사형수, 죄수에서 평화 교육자가 된 어느 죄수, 히틀러에 비폭력적으로 맞서 승리한 프랑스의 샹봉 마을 이야기까지 놀라운 이야기들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 전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이 배워왔지만, ‘평화를 위해 애쓴 사람들, 평화로 승리한 사람들’ 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맥카시만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수업 방식은 읽는 이들에게 또 다른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어렸을 때 나도 맥카시 식의 수업을 받았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 ‘우리 아이의 선생님도 맥카시처럼 재미있고 기발한 수업 방식으로 가르쳐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다.
그는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평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스스로 판단하게 하고, 마침내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내게 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평화를 배워가는 셈이다. 그 결과 그의 수업은 늘 활기차고 재미있다.
또한 그의 수업에는 OX 퀴즈, 100달러 퀴즈, 낙제할 수 없는 퀴즈, 빨간 자동차 녹색 자동차 게임을 비롯해 재미있으면서도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발하고도 독특한 방식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더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맥카시만의 기발한 수업 방식을 빌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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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국이 싫다. 미국 사람도 싫다. 심지어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미국 사람이라면 왠지 꼬아서 보게 될 정도다. 그만큼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의 환경, 경제, 정치, 평등, 인권에 끼치는 해악에 분노하며, 또 자기가 몸담은 국가가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는 그 국민들까지도 싫어진 것이다.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비뚤어진 세계화, 일방주의 때문에 지구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울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리고 그러한 고통을 외면하며 자기들끼리 호의호식하는 백인종들이 정말 싫었다. 나는 이유 있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 내가 좋아하게 된 한 미국인이 있으니 바로 콜먼 맥카시다. 그는 평화를 가르치는 시람이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며 또 다른 이들에게도 그렇게 하자고 독려하는 사람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평화를 외치고 실천한 사람은 많이 있다. 그중에는 간디, 마더 테레사, 루터 킹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사람들도 많다. 그런 유명한 위인들은 저마다 의미 있는 교훈을 주었지만, 그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콜먼 맥카시가 했다면, 그건 바로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나라, 미국을 앞으로 이끌어 나갈 어린 학생과 젊은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가 어느 학교에 강연을 나갔을 때, 강연 주최자가 수업 내용으로 평화만 다루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다면서 평화와 함께 폭력을 정당화 하는 입장에 대해서도 논해 달라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12년에서 16년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법에 대한 수업을 들었으므로 이미 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배워 오히려 한 학기 동안 평화 수업을 하는 것은 균형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고 답했다. 정부가 평화를 원한다면 모든 정규교육과정에 평화 수업이 개설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평화를 가르치는 과정과 방법들을 읽으면서 평화를 배운다는 것은 반대로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들이 바로 형체 없는 폭력이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강연에 쓰이는 교재를 학생들에게 권하면서 그 책의 가격을 묻는 학생들에게 "자네가 알아서 정하게"라고 한 것. 학생들은 의아해했지만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강의에 쓰이는 책은 어쩔 수 없이 사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어떤 값이 매겨져 있든 수용할 수밖에 없다. 사소한 일 같지만 학교 측의 강압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휘둘린 것이다. 부당한 것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기는커녕 그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폭력과 강압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또 크게 공감한 것은 '애국심'에 관한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미국인으로가 아니라 세계인으로 살라고 가르친다. 이는 어설픈 세계화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인용한 톨스토이의 에세이 집 <전쟁, 애국심, 평화>에서는 "개인의 자기중심주의와 국가의 자기중심주의는 같은 것이다."고 말한다. 조지 부시는 "우리 미국은 신에 의해 선택받은 나라이며 세상의 모델이 되는 권한을 역사로부터 위임받았습니다."라고 떠벌렸다. 과연 웃지 않고 들어 넘길 수 있는 말인가. 나는 웃긴다. 좀 다른 말을 하자면 나는 우리가 말하는 애국심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꽤 오랜 시간을 깊이 고민하다 결국 '집단이기주의'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까지 서경식 교수의 책 <난민과 국민 사이>가 큰 도움이 되었다. 자국의 이익을 바라는 것이 애국심이라면, 그게 개인의 이기주의와 다를 점이 무언가. 월드컵 경기 때마다 뭉치고 서로 부둥켜 안음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것은 좋은데 만약 월드컵 경기 때 우리나라 말고 상대 국가인 토고를 응원한다면 아마 돌덩이를 맞을 것이다. 심형래가 디워를 만들어 낸 것도 심형래 개인의 능력과 노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거나 치하하기보다는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베일을 씌워 그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워드, 황우석도 마찬가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 못지 않게 애국심에 광기어려 있다. 이런 정서가 파쇼와 다를 것은 또 뭔가. 한 많은 세월 탓이라고? 만약 '애국심'이란 단어에 깊은 울림을 부여하려면,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결속력을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 국민이라는 이유로, 혹은 한민족이라는 이유로 억압받고 핍박받은 자들, 현재까지도 그로 인해 고통받는 디아스포라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하는 것 아닐지. 그들을 진정한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고 힘을 주는 것이 진정한 나라 사랑 아닌지. 우토로에 지원해 주기로 하고 발뺌하는 정부를 보면서, 그러면서도 애국심이라는 황홀한 단어로 국민의 힘을 끌어 모으려는 모순된 상황을 보면서 난 그렇게 느껴졌다. 한 많은, 핍박받은 세월이 우리를 이렇게 뭉치게 했다면, 왜 지금 현재까지도 한 많게 사는 재일 조선인들을 먼저 돕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에 대한 관심은 들끓었다가도 금세 사라지지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은 그렇게 냄비 끓듯 끓었다 금세 사라지는 것이 아닌데도... 이 책에서 저자는 "애국심은 좋은 애국심, 나쁜 애국심이 있을 수 없다. 애국심은 나쁜 것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세계인으로 살라. 는 말은 '애국'이라는 미명 아래 저질러진 숱한 전쟁과 폭력을 막는 큰 명제가 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강하고 크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사형제도에 대한 이야기, 동물 사랑에 대한 이야기 등 평화의 주체와 대상도 다양하고 저자가 강연을 이끄는 방식들도 모두 평화로운 방법과 재미, 유머를 전제하고 있어서 나 또한 그의 수업을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또 한가지 깨우침은, 자칫 평화라고 하면 부딪힘을 피하고자 모든 걸 수용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거라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단호히 "이건 옳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게 평화를 지키는 방법이라는 것. 그것이 국가 체제를 유지하는 법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올해 내가 읽었던 책 중 최악은 <*크릿>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책의 서평에 내가 그 책에 반대하는 이유를 적었기에 여기서는 굳이 서술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런 책보다는 이 <19년간의 평화 수업>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