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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이 드러내는 생각, 취향, 세계관에 매번 동조하는 건 독자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독자이기만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동의를 보낼 수 없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서두, 전개를 접할 때, "여튼 시작했으니 끝은 보아야지."하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읽어 나갈 수도 있겠습니다.
"교환 살인"은 번역 제목이고, 어쩌면 이 제목이 스포일러 노릇을 할 지도 모르겠다는 찜찜함이 내내 가시지 않았는데요, 다 읽고 나서는 그거 괜한 기우였다 싶었습니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여실히 드러내는 결말의 처리가 인상적이었고, 이런 중편이 아니라 더 압축된 단편이었으면 그 효과가 더 강렬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출판 연도는 1963년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책을 읽으면서 체감한 연대 배경은 1950년대 중후반 정도였습니다. 매카시즘, 비트 제너레이션 등 작가가 애써서 상징적 환기물을 배치한 느낌이었는데요. 이런 장치나 미장센은 아껴 놨다가 다른 작품에 쓰고 이 작품은 분량을 더 확 줄여서 플롯의 밀도를 높였다면 더 낫지 않았을지. 여튼 역자분은 이 작품을 접하고 자신만 읽기 아깝다 싶어 그 이른 시기에 한국어로 번역해서 더 많은 국내 독자들에게 노출하고 싶었겠죠. 해문 시리즈는 이런 소박한 동기에서 번역된 중단편들이 많더라구요.
"교환 살인"은 이런 구미의 장르물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저 일본의 추리문학에서 자주 소재로 쓰이는 범죄 패턴입니다. 실제로는 범죄자들 사이에 "신뢰(가장 사악한 형태의)"가 지켜지기 어렵기 때문에 이 역시 "책 속의 범죄"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여튼 이 작품이 여실히 드러내는 건, 평범한 자가 살인을 저지르고 이를 눈에 안 띄게 은폐하기가 이처럼이나 손쉽겠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과 지금은 두 가지 정도 큰 변화가 가로막고 있죠. 첫째는 강압, 폭력(눈에 안 띄는 고문) 수사가 사라졌고(미국이나 우리나 - 그런데 이건 범죄자 입장에서는 유리해진 상황입니다), 둘째는 곳곳에 CCTV 설치가 촘촘히 되어 있고, 과학 수사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는 것입니다(이건 그네들에게 불리한 점이죠). 여튼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소위 "완전 범죄"를 완수하기 위한 인물들의 시도는 현대에서는 대번에 좌절될 만한 것들이 상당수입니다. 물론 독자는 그런 제약도 다 감안하여, 주어진 룰 안에서 이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수사망을 빠져 나갈지를 지켜 보는 거죠.
"교환 살인"을 모티프로 삼은 시초격 장르물이라면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Strangers on a Train>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 작품에서라면 인물들의 의도가 실현될 여러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도 하겠으나, 이 소설에서는, 제 생각으로는 사건 전후로 자주 만난 행적이 남들 눈에 뜨였을 것 같고, 직업상 서로 아는 처지인 찰리와 윌리이기도 하니, 꼼꼼한 경찰 당국자라면 의심의 눈초리를 충분히 보냈겠고, 결국은 들통이 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더군요.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허술한 티가 적잖이 납니다.
주인공 윌리뿐 아니라, 사건의 또다른 축인 도리스도 비난 받아 마땅한 인간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윌리보다 더 심각한 악당입니다. "그 남자만 바라보고 앞으로 몇 십년을 더 살아야 한다니 미칠 것만 같아요!" 마치 삼류 재연드라마에서 보는, 막장 인생의 전형을 대표하는 것도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윌리는 또 윌리라고 쳐도, 여자 등장 인물 이름을 "도리스"로 지은 걸 보고 작가가 이들에 전혀 애착을 갖지 않았구나 짐작이 되더군요. 그렇다면 우리 독자가 편하게 취해야 할 태도는, 마음껏 풍자의 대상이 될 이들의 슬랩스틱, 운명의 장난에 놀아날 비참한 꼴을 즐기기만 하면 되겠습니다.
윌리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온 시턴 사장이 계약을 제안할 때, 윌리가 "대리인을 두고 있으므로 앞으로는 직접 연락하시면 안 되겠습니다."라고 알려 주는 것도, 개별 캐릭터의 도덕성을 일단 떠나 신뢰가 기본 바탕이 된 미국 사회의 탄탄한 성숙도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과연 이런 경우, 한국인들은 얼마나 계약서 문면의 조항을 지킬까요? 멀쩡히 준수해야 하는 형사 법규도 감시하는 눈만 없으면 그 유월과 위반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하나 재미있게 본 게, 에시가 윌리의 방에서 거금(당시로서는) 600달러를 들고 도망간 후, 일부라도 돌려 주고 나머지는 써 버려서 없다고 고백하는 그녀를 용서해 주는 장면입니다. 법학에서는 이런 걸 두고 중지미수(여기서는 이미 기수입니다만) 이론에서 "황금의 다리"라 부릅니다만, 한국에서는 어차피 돌아가도 더 혼 날 것 아예 탕진하고 계속 회피하자는 식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죠. 이런 소소한 장면을 뭐하러 넣었을까, 제 생각엔, 살인까지 저지를 무도한 인간형은 아니었다는 걸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웃기는 대목 하나 더 소개하자면,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태도를 두고 "만약 사람을 죽이고 나서 죄의식 때문에 자백하고 싶어 미쳐버릴 것 같으면 어쩔 생각이에요?"라고 묻자, "그놈 미치광이지, 그놈이 원한 건 자백이 아니라 벌이요, 벌. 정신분석학적으로 매저키스트라 할 수 있지."라고 찰리가 대답하는 대목입니다. 이에 윌리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정말 반가웠다."고 속으로 중얼대는데, 원래 무식한 인간들(배우라고 무식한 게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제대로 된 배우라면 당연히 독서를 통해 고전 명작을 많이 소화해야죠. 거칠 코스를 안 거쳤으니 그모양 그꼴들인 게 당연합니다)이니 어쩔 수 없는 반응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도리스와 윌리의 성애 묘사는 시대가 시대라서인지 말초적인 색이 없고, 독자에게 떠올리려고 작가가 의도했을 장면은 수위가 높았겠으나 결과로 나타난 그 묘사는 밋밋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실소가 나오던데, "...그들이 벌인 행위는 사도-마조히즘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다." 같은 문장을 보면 말 다했죠.
요 비슷한 구성의, 아이러니한 반전을 보이는 작품이라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농담입니다), 이분보다 한 세대 가까이 후배인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No Comebacks(단편)> 같은 게 있겠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는 게, 왜 포사이스의 이런저런 작품들은 그렇게나 완성도가 높은 데도 영화화가 이리 더디냐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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