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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롤님의 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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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거탑>을 보면서 자주 <매치포인트>를 떠올린다. 어쩌면 장준혁은 <매치포인트>의 크리스 같은 인물인 것이다. 외과의사로서 실력이 좋아서(또는 운이 좋아서) 잘 나가는 개인 병원 원장 딸(임성언)을 만나 결혼까지 했지만 사실 다른 여자(김보경)가 있고, 끊임없는 성공에의 욕망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성공을 위해서는 외과의사로서의 소임도 저버릴 수 있는 장준혁은, 그야말로 '나쁜 놈'이다. 하지만 이 '나쁜 놈'은 명인대학병원 일반 입원 환자를 천대하는 대신 세계외과학회장 부인의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내면서 앞으로 더욱 승승장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명인대학병원에 입원했던 그 환자가 죽지만 않았더라도 당분간 장준혁의 상승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최도영은 장준혁과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의대 학부 시절 장준혁과 1, 2등을 다투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장준혁과 같은 야망은 없다. 같은 조교수급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장준혁이 드넓은 집에 살면서 외제차를 끄는 데 비해(이런 생활이 가능한 것은 엄청난 부자인 장인의 덕도 있겠지만) 최도영은 자그마한 집에 살면서 가끔 가족들과 피자를 먹으러 나가는 수준이다. 환자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아끼면서 진료하지만 그에게는 "이 정도 대학병원 의사라면 척 보면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핀잔과 "최도영 선생님은 너무 느리신 것 같아."라는 수군거림만 있다. 사려깊은 치료 뒤에 최도영에게 남는 것은, 치료가 잘 되었을 경우라면 '의사니까 당연히 해야지.'라는 이도저도 아닌 평가, 또는 치료가 잘 되지 않았을 경우라면 '대학병원 의사가 이것도 못해?'라는 야유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명인대학병원이 원하는 의사는 누굴까. 당연히 장준혁이다. 조직은 최도영처럼 앞 뒤 막히고 느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구나 장준혁이나 크리스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내 경우, 중학교 때 공부 잘 하던 친구 중에 꼭 시험 날 아침에 다른 친구들과 말뚝박기를 하는 녀석이 있었다. 자기는 시험 전날까지 공부를 다 마쳐놓고, 시험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 자라도 더 보려는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이다. 친구들은 그의 얄미운 행동을 욕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근방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결국 서울대에 갔다. 서울대에 가서도 자신이 진학한 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퇴, 수능을 다시 치러 의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남들 공부 방해하며 자기 실력 쌓은 녀석’은 한 번은 무너졌으면 좋겠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고 심지어 승승장구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이 우스운 이유는 그가 과장이 된 지 불과 얼마 만에 ‘교만의 정석’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만의 정석' 끝에는 의료사고 관련 재판으로 시작되는 장준혁의 고난과 몰락이 예정되어 있다. 겨우 과장 자리에 오르고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행동하는 장준혁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정말 재수없다'고 분개하거나 '너 그래봤자 곧 바이바이다'라고 고소해한다. 하지만 주지하듯이, 현실에서 정말 똑똑하고 얄밉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장준혁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 있는 장준혁이나 크리스 같은 사람들은, 남을 짓밟으면서도 항상 자신을 돌아볼 줄 안다. 그들은 자신이 그 위치에 섰을 때 어떤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추후 어떤 방향으로 더 나아갈 것인지에 마스터플랜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만약 장준혁이 드라마 주인공이 아니라 ‘정말’ 오늘 이 현실을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장준혁은 똑똑하고, 든든한 지원자들이 힘을 보태주고 있으며, 어떻게 사람을 부릴지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이 <하얀거탑>의 장준혁처럼 순식간에 교만해지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가 교만해지기 전에 능력있는 주변 인물(장인, 동창회장 등)들이 그를 붙잡아 줄 것이다. 현실의 장준혁은 다시 그들을 발판 삼아 과장보다 더 높은 곳으로 발돋움할 것이다. 그 발돋움의 과정에서 또 다른 사람들을 짓밟을 수도 있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머리를 굴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도영은? 현실에서라면 내내 '그 모양 그 꼴'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환자 말마따나 '대학병원 의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진료한답시고 뚫어져라 초음파 사진이나 보고 있거나, "검사를 더 해봐야겠습니다."라는 말만 반복한다면 짜증이 날 만하다. 병원 입장에서는 앞으로만 가기도 바쁜데 자꾸, 그건 아니라면서 발목을 붙잡아대면 그의 미래는 암담하기만 할 것이다. 그가 얼마나 환자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족처럼 보살피는지는 병원 입장에서는 평가 대상이 아니다. 그걸 알아주는 건 고작 아무런 힘도 없는 존재(진주 엄마, 이윤진)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알아주는 그 진정성은 '의사' 최도영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투박하지만, 장준혁 같은 인물을 악으로, 최도영을 선으로 규정해보자. 현실은 더 이상 권선징악하지 않는다. <하얀거탑>도 이미 악이 승승장구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현실을 알고 있다. 장준혁은 솟아오르고 최도영은 진다. 약삭 빠르고 빠릿빠릿한 사람이 승리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원작대로라면 이제 장준혁은 몰락의 길을 걷고, 최도영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게 될 것이다(이것이야말로 반전 아닌가!). 하지만 앞서 말했듯, 현실에서라면 장준혁 같은 '고수'들은 <하얀거탑>의 장준혁처럼 유아적인 실수는 하지 않는다. <하얀거탑>이 굳이 장준혁을 실수하게(또는 '교만의 정석'을 밟게) 만드는 것은, 권선징악이라는 구시대의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하얀거탑>은 리얼한 드라마가 아니다. <하얀거탑>의 리얼리티는 여기서 분열한다. <하얀거탑>은 15억 짜리 세트와 연기 본좌급의 배우들을 통해 최고 수준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면서도 듣기 좋고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하얀거탑>은 잘 만든 교훈극일 뿐 그 이상 현실에 천착하지는 못한다.
산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 <하얀거탑>의 메시지는 명료하고, 현실을 정확히 지적한다. 그렇다. 우리는 늘 정치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마지막에 그 욕망을 채우는 자는 언제나, 착한 사람이 아니라 운 좋은 사람,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에 대한 저의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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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이 갑자기 오만해져버린 이유는 9회 감상기에 적었습니다. 그도 원래는 최도영처럼 착하게 살아보려 했는데 이 세상이 자신의 순수함(노민국에게 사퇴해달라고 무릎꿇은 것... 이보다 더 순수한 요구가 어딨습니까?)을 알아주지 않자 돌변해버린겁니다. 그 이후 9~10회에서는 자신의 직감만 믿고 오만함으로 가득찬 모습만 보여주지만 할 건 다 합니다. 쿠데타로 집권했으므로 의국을 정리하고, 홍상일과 오남기를 구슬리는 등 뛰어난 두뇌를 잘 활용하지만... 뇌물 카드 미확인, 권순일 환자 개무시등 뼈아픈 실수를 저지릅니다.
장준혁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는 평범한 외과 의사였습니다. 다만 그의 의사적 성향이 항상 같이 나온 최도영과 정반대라서 특이해보였을 뿐입니다.(일반인이 생각하는 이상적 의사상은 최도영같은 모습이 아닐까요?) 자신의 의술이 발전하면 언젠가 자동으로 외과 과장이 될거라 믿었으으므로 그전까지 정치같은건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런데 이주완 과장이 그를 밀어내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와인바에서 술병을 놓칠정도로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이어지는 살아남기위한 발버둥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일으킵니다. 많이 발전한것 같았던 9화에서도 뇌물 카드를 확인하지 않는 기초적인 실수를 범합니다. 따라서 도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의 실수 관리능력은 매우 부족합니다. 원래 전공이 이쪽이 아닌데 당연한거죠.
우리가 사는 사회도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성공하려고 작정하고 모든것을 계산하는 사람과 장준혁같이 어쩔 수 없이 뛰어든 사람 이렇게 두 부류가 있을 겁니다. 도롤님께서는 전자의 부류만 생각하신 듯 합니다. 그래도 장준혁은 많이 발전한 편입니다. 오남기를 그렇게 간단하게 구워삶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물론 많이 작위적이기도 했습니다.)
장인어른, 유필상, 부원장등이 장준혁을 도와줄거라 생각하시는데 절대 아닐겁니다. 그들은 장준혁을 이용만 하고 있습니다. 6회에서 장인이 장준혁에게 그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자기들을 버리고 떠날거라 라고 그랬었지요. 실제로 7회에서 장인어른이 부원장에게 그런 의미로 운을 띄우자 부원장은 바로 무시하고 떠나버립니다. 장준혁을 도와줄 사람은 현재로선 최도영뿐인데 장준혁 자신이 거부를 하고 있으니 도와줄 사람은 없는 겁니다.
최도영에 대해서는 도롤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제 최도영같은 의사가 병원에서 오래 못버틸 테죠. 국내판에는 설명되지 않는데 일본판에서는 최도영의 연구성과가 워낙에 뛰어나서 부원장이 내치고 싶어도 못한다는 설정이 있다고 하네요. 이것 보면 그는 '의사'보다는 '연구원'이 어울릴듯 합니다.
리얼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리얼하지 않은 드라마... 간단히 보기에는 이보다도 더 현실을 실제같이 모사한 드라마가 없을 것 같지만 결론은 전통적인 '권선징악'으로 볼 수 있습니다. 60년대에 씌여진 소설이라서 결국 교훈극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장준혁의 파탄이 이 드라마의 결말이라면 그것이 정답일겁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 드라마가 끌어온 주제를 보면 에필로그식으로라도 '부원장은 원장이 되고 병원은 더욱더 비리가 난무하게 된다.'라는 결론을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밑바닥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잘살아보려고 노력했던 장준혁은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지만 원래 잘살던 사람(부원장)은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며 더 잘살게 되는 세상. 이보다 더 현실을 잘 묘사할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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