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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말할 수 있지만, 아무나 말하지 못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명체이며,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들이 우리 주변에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명확한 답을 할 수 없다. 아니 아직 생명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다. 물론 수많은 정의로 생명을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비밀은 다 파헤쳐지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모를지도 모르지만. 우리라는 생명체는 세포로 되어 있고, 세포 속의 DNA나 RNA가 생명의 작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더 미시의 세계에서는 원자로 되어 있는 텅 빈 공간이 생명체이다. 이 공간 속의 세상에 물질과 생명의 비밀과 기원을 숨기고 있다. 아무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 난제에 대하여 슈뢰딩거는 자신의 도구(물리학)로 설명하고자 한다. 멋진 시도이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궁금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생명에 대한 생물학자와 물리학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많은 분야의 과학은 발전해왔다. 특히 생물과 관련된 분야에서는 수많은 실험으로 다양한 사실이 발견되고, 최근에는 유전자를 조작한 인공생명체를 만드는 등 엄청난 지식을 쌓아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던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분명 이 책은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책의 하나이다. 제목부터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정신과 물질, 살아 있는 세포의 물리적 측면이다. 저자는 이 강연을 하고, 책을 만든 이유를 “누군가 과감하게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감수하고 사실들과 이론들을 종합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밝히고 있다. 이 거대한 주제, 생명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그의 말처럼 누군가 해야 할 일, 어쩌면 수많은 비난과 찬사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일을 그는 했다. 철학자나 도인들이 아닌 슈뢰딩거가 생명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 책은 물리학으로 표현하는 철학책 같다. 또 수학이나 공식을 아주 작게 사용한다는 점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이 강연(책)의 의도를 “생물학과 물리학을 넘나드는 근본적인 생각을 물리학자와 생물학자 모두에게 분명히 전달하는 것이다.”라고 밝힌다. 생명체는 유기체의 핵심적인 부분에 있는 원자들의 배열과 그 배열들의 상호작용과 통계적인 구조의 특이성으로 인해 이해하기 어렵다. 원자는 왜 이토록 작은 것일까? 이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원자적으로 세상을 본다면 우리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는 많이 달라 보일 것이다. 어디에 기준을 두고, 어떻게 보느냐가 현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 같다. 보통 우리들에게는 거대한 우주와 작은 원자를 이해하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이런 세계를 연구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현상을 이해하기도 급급하다. 인간의 흔히 생각하는 존재라고 많이 표현한다. 그럼 생각이란 어떤 작용일까? 자신이 질서 있는 존재로 감각지각, 경험 등을 통해서 인지한다는 것이다. 그럼 인식이란 것은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또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까? 물리학과 물리화학의 법칙들은 루트 n분의 1의 상대오차범위 안에서 부정확하다고 본다. 모든 특성의 차이는 실제로 불연속적이고, 그 자체가 아니라 특성의 차이에 기인한다. 생명체를 “모든 생리학적 과정은 세포 내부에서 일어나든 세포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계하든 거기에 엄청나게 많은 단일 원자와 단일 원자 과정이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았다. 현재 분자생물학이라고 불리는 단계에서 나노생물학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다. 이 다음이 원자 생물학시대가 될지는 의문이다. 양자역학은 자연에 실제로 있는 모든 종류의 원자집단을 근본원리들에서 출발하여 설명하는 최초의 이론이다. 작은 계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한 배열에서 다른 배열로 그리고 비교적 안정적인 한 배열에서 다른 배열로의 전의된다. 계의 상태는 때때로 불확정성이 있기에 휠씬 더 복잡하다. 원자들의 재배열은 유전자의 작은 구역에만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다양한 재배열도 있을 수도 있다. 분자는 필연적으로 안정성을 가지고, 클수록 이성질체의 종류는 더 많아진다. 돌연변이는 ‘뛰어넘기’의 변화이며 중간형태들이 없다. 유전물질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까? 우리가 아는 물리학 법칙들은 통계적인 법칙이다. 물리학 법칙들은 사물이 무질서로 향해가는 자연적인 경향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생명은 물질의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이다. 어떻게 보면 규칙성이다. 구조는 규칙성을 잃어버리면 붕괴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본질적은 특징으로 보통 자기증식, 변이, 대사를 꼽는다. 생명의 기본 조건인 물질대사는 성숙한 유기체인 경우에 에너지 보유량은 물질보유량과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근처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끊임없이 자신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죽음으로 향해 나아가는 경향성을 지닌다. 죽음을 멀리하기 위해 우리는 음의 엔트로피를 끊임없이 끌어 들임으로써 생존해 나간다. 유기체가 살아있는 동안 불가피하게 산출하는 엔트로피를 유기체 자신에게서 성공적으로 떨어내는 것이다. 사물들은 카오스적인 상태에 접근하는 경향성이 있다. 우리의 삶은 에너지에 의해서 좌우된다. 음식에너지는 역학적 에너지로, 열로 사용된다. 열을 방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엔트로피의 잉여분을 처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생존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어야 하고, 몸에서 열로 발산하거나, 운동으로 소모해야 한다. 어쩌면 인간이란 단순한 존재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생식세포 속의 ‘지배적인 원자들’의 집단 속 원자 몇 개만 위치가 바뀌어도 유기체의 거시적인 유전형질이 뚜렷하게 변한다. 생명체는 유전자의 지배를 받지만, 이 유전자들은 원자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다. 그럼 인간이란 존재는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생명체는 그 삶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행동할까? 아니 자기의 정신을 얼마나 지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스스로를 스스로에 의해서 움직이고, 생각하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그러기에 이 여러 가지 활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아닐까? 내가 자연법칙에 따라서 ‘원자들의 운동’을 통제하는 당사자이다. 의식은 결코 복수로 경험되지 않고 단수로만 경험된다. 의식은 몸이라는 제한된 구역에 있는 물질의 물리적 상태에 의존하며 그것과 직접 연결된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 전체가 한 단위를 형성하며, 그 단위가 다른 어떤 사람의 단위와도 다르다는 명백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단위를 ‘나’라 부른다. 과연 그 나란 무엇일까? 당신은 당신이 나라 부르는 것은 사실 그 자료를 모아두는 바탕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를 지배하는 정신과 물질. 생명과 더불어 우리의 최대 의문은 아마 정신이 아닐까? 생명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었지만, 정신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 조금씩 뇌에 대한 연구로 인해 밝혀지고 있지만, 정신이란 존재는 아직도 오리무중인 상태이다. 정신이란 것이 물질의 한 작용(현상)이 아닐까? 그는 이런 정신을 약간은 풀어헤친다. 정신이란 것은 일단 우리의 의식이 존재해야 생성되는 것 아닐까? 그럼 우리의 의식을 물리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지각과 기억으로 구성된다. 어떤 종류의 물질적 과정이 의식과 직접 연결될까? 뇌와 신경은 개체가 변화하는 조건에 반응하여 적절히 행동을 바꾸기 위해 사용하는 특수한 매커니즘(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매커니즘)이 아닌가. 의식은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에 의해 자신을 환경에 적응시키는 신경계의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의식은 살아있는 물질의 학습과 관련된다. 또한 살아있는 물질의 노하우는 무의식적이다. 우리는 과거를 짊어지고 살고 있다. 지금의 반응은 과거에 쌓아놓은 반복학습(기억)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우리는 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럼 의식이라는 것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을 돌아보라. 우리에게 무엇이 변하고 무엇은 변하지 않는지를. 의식은 진화와 함께 있는 현상이다. 이기주의는 종의 보존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 덕이며 모든 종류의 공동체에 파괴적인 악덕이다. 개미나 벌이 아닌 우리 인간은 겁쟁이에 불과하고, 무엇보다 이기적인 존재이다. 우리의 두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물론 교육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이기적인 면을 이타적인 면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 없는 집단이란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근본적인 본성은 이기적이기만 한 것일까 진화과정에서 돌연변이는 계통 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나 순수한 우연에서 비롯된다. 물론 행동은 선택에 영향을 끼친다. 생물은 생존과 직결된 특수한 행동으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특수화된 종들로 분화한다. 종은 어느 방향으로 가면 생존의 확률이 높은지 알아채고 그 방향을 추구한다. 여기서 행동은 진화과정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완벽함으로 가는 길은 완벽함을 벗어날 수 있고, 위험요소도 항상 상존한다. 인간에게는 가야 할 길이 멀리 있는지 아니면 이미 진화의 마지막에 다다라서 멸종의 단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인간의 발전은 기계화와 바보화로 진행되기에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미 인간들이 환경적 저항과 도전에서 벗어나 안락한 생활에 파묻혀 변화의 여지가 점점 적어져 인간이 개체적으로 이미 진화에 끝에 서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의 긴 진화의 과정은 여기서 끝이 날까? 우주로 나아가는 길이 우리의 진화의 진행을 이끄는 열쇠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이 멸종될까 과연 이 세계 즉 자연에 이해가능성 원리와 객관적 원리가 있을까? 과학의 유일한 목표는 대상에 객관화 원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 옳고 적절하게 진술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세계는 무채색이며, 차갑고, 말이 없다. 그렇다. 현상은 존재할 뿐이고 일어날 뿐이다. 우리는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우리가 물질이 정신에 혹은 반대로 정신이 물질에 작용하는 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몸 속에서 인격을 발견할 수 없다. 당신은 인격을, 극심한 고통을 영혼내부의 난감한 근심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자연적 대상(혹은 물리적 계)에 대해 그것과 접촉(물리적 상호작용)하지 않는 한 어떤 사실적인 진술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받아들이려 하는 환경자체가 우리에 의해 특히 환경을 관찰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에 의해 변형된다. 주관은 감각하고 생각하는 존재이고, 주관과 객관은 단지 하나이다. 존재하는 세계가 주어지고, 또 지각되는 세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아 그 자체가 세계상, 우리의 자아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일까? 자아는 전체와 동일하고 따라서 전체 속에 한 부분으로 들어 있을 수 없다. 정신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단지 기억과 예상을 포함한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로 이 사실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 뇌는 결국 뇌 소유자의 생명을 존속시키는 역할만 한다. 뇌가 자연선택에 의한 종분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생명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자연은 목적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체험 역시 공간-시간상 속에 부재할 수밖에 없다. 공간과 시각 속 어디에서도 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과학의 발견이 완고한 미신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점진적인 관념화, 자기의 지각과 그것의 원인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경험과 생명과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몸의 소멸 이후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시간은 우리 모두를 좁은 한계 속에 명시적으로 가두는 가장 가혹한 주인이다. 우리의 감각 믿을 만한가? 우리는 눈으로 노란색을 보고 그냥 노란색이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물리학자는 노란색 빛을 단색이 아니라 다양한 파장들의 조합일수도 있다고 본다. 관찰자의 색 감각이 현상의 물리학적 본성에 대해 최소한의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관찰자가 완전히 장치로 대체된다면 관찰자는 어떤 지식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결국 관찰자의 감각이 개입해야 한다. 우리가 얻은 이론적인 상은 직접적인 감각지각으로 얻은 다양한 정보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러나 이론은 감각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이며, 느끼는 것도 우리지만, 우리는 아주 좁은 범위의 지각과 감각밖에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나 생명을 풀고 해석하려 한다. 원자의 작용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유전자에 의해서 단순히 실행을 하는 개체가 인간인가? 과연 유전자는 우리의 어느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현재 밝혀나가고 점점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생명체, 인공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도전 그것이 신의 영역인지? 단순한 현상인지는? 나중의 일이다. 우리와 같이 인간을 있게 하는 것은 염색체와 문명화된 인간적 환경 둘 다 이기에 우리는 상호 이해 없이 영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란 존재는 끊임없이 주변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어떤 철학자의 글보다 명쾌하다고 할까? 그렇게 어렵지 않은 그의 설명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물론 이 글이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한 이 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아직도 이만한 생각을 풀어내는 사람은 적다. 이 책이 나온 이후,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것 같다. 물리학자들은 작용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원자적으로 보면 우리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과 우리의 모든 행위는 무슨 의미를 지닐까? 자의적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지금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기에 그 의미를 찾고, 만들면서 만족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우리의 시야의 폭이 좁은 것은 인정하지만, 소멸할 때까지 행복하고 우리의 자손들도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한다. 과학은 밝혀지고 확인된 사실 외에는 믿지를 않는다. 그러나 과학이 새로운 종교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 * 엔트로피는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인 양으로 절대 0도에서 엔트로피는 0이다. * 이 책을 좀 더 이해하고 싶은 분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년 - 지호 2004”,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이 강연 이후의 발전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 나는 리뷰어다 이벤트에 참여하는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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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의 물리학자가 쓰다 - 슈뢰딩거는 왜 이 책을 썼을까
1944년 슈뢰딩거가 57세일 때 출간된 이 책의 목표는 생명체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물리학으로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입니다. 당대에 생물학과 물리학은 서로 접점 없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던 듯해요. 그렇지만 생물학에서 유전 물질을 탐구하는 것과 물리학에서 원자를 탐구하는 것은 각 영역에서 근원 물질을 밝혀내려는 점에서 지향점은 같은 셈이죠. 근원 물질은 점차로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때마침 물리학에서는 양자 역학의 태동으로 원자의 신비가 하나 둘 밝혀지고 있었고, 양자 역학을 기술하는 미분방정식을 고안한 슈뢰딩거는 그런 양자 역학의 창업주중 한 명이었어요.
양자역학은 자연에 실제로 있는 모든 종류의 원자 집단을 근본원리들에서 출발하여 설명하는 최초의 이론이기 때문이다. p.99
양자 역학이 원자 집단을 해명하는 데 성공했다면, 비록 그 구조와 규칙성은 다르더라도 유전 물질의 해명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1927년 하이틀러와 런던이 양자 역학을 이용하여 수소 분자의 공유 결합 형성을 규명한 것도 슈뢰딩거의 도전을 고무시켰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유전자가 공유 결합을 통해 안정한 구조를 가진 분자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 맺고 있죠.
우리는 통일적이고 포괄적인 앎을 향한 강한 열망을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 (…)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참된 목표를 영원히 잃지 않으려면) 누군가 과감하게 오류를 범할 위험을 감수하고 사실들과 이론들을 종합하는 시도를 감행하는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15
슈뢰딩거는 포괄적인 앎을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에 맞지 않게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 분야들이 서로 관여하지 못하는 상황을 딜레마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영역에 정통하는 것도 힘든데 다른 영역까지 정통하기는 힘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슈뢰딩거는 본인이 기꺼이 오류를 범할 각오로 종합을 시도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슈뢰딩거의 겸손과 무관하게 근원 물질 규명에 조금 더 앞서고 있던 물리학이 생물학과의 접선을 시도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또한 다른 분야에 대한 글을 시도하면서 필연적으로 갖게 될 오류의 위험이나 전문성이 가진 완강한 배타성을 슈뢰딩거 정도의 거물급이면 버텨낼 수 있었을 듯싶습니다. 실제로 DNA를 발견한 왓슨과 크릭이 이 책을 읽고 유전학 연구를 시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얘기죠.
물론 슈뢰딩거는 대가의 권위를 내세워 그저 가볍게 떠오르는 아이디어만을 조합하여 이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물리학자답게 이 짧은 논문에 당대의 생물학과 물리학의 성과를 종합하여 유전 물질, 즉 유전자에 대해 치밀하게 추론해 나갑니다. 이 책이 쉽게 읽히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죠.
유전자는 작다 - 우리의 몸은 원자와 비교할 때 왜 그토록 클까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우리 몸의 전제는 질서를 유지하는 거시계라는 것입니다. 이 전제는 두 가지 질문을 함축하고 있죠. 우리 몸이 과연 질서가 있는 물질이냐는 것과 우리 몸은 왜 그토록 커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생각이나 의지, 지각 등이 고도로 질서 잡혀 있으므로 이에 대응되는 우리의 몸 역시 매우 질서가 있어야 하고 물리 법칙을 정확히 준수해야 한다고 추론합니다. 따라서 우리 몸이 이렇게 질서 있는 존재라고 하면, 우리 몸의 크기 또한 웬만큼 작아서는 안 되는 것이죠.
원자 한 개의 충격도 감지하는 민감한 유기체에서는 왜 실현될 수 없는가? (…) 모든 원자가 항상 완전히 무질서한 열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 오직 엄청나게 많은 원자들이 함께 행동할 때만, 통계적인 법칙들이 그 집단의 행동을 원자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증가하는 정확도로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런 식으로 사건들은 참된 질서를 얻는다. p.28
중력 법칙이나 쿨롬 법칙을 증명할 때 비틀림 저울을 사용하는데, 측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 가늘고 긴 실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가늘고 길어지면 주변 분자들과의 열적 충돌로 인해 도리어 부정확도가 더 커지게 되죠. 슈뢰딩거는 이 예를 통해 우리의 감각 기관들 역시 일종의 측정 장치이므로 너무 민감해지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자 집단으로 이루어진 거시계의 ‘평균적’ 질서를 설명하는 고전 물리학은 통계 역학입니다. 슈뢰딩거는 곧장 양자 이론으로 달려가지 않고 상자성과 브라운 운동, 확산 현상을 예로 들며 통계 역학이 어떻게 원자 집단의 무작위적인 운동으로부터 질서를 산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질서의 정확도를 대표하는 오차는 계를 이루는 입자의 개수가 커질수록 줄어듭니다. 특히나 이 정확도가 입자들의 개수에 단순 반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제곱근에 반비례한다는 것은 강조될 만합니다.
유기체가 내적인 삶과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에서 매우 정확한 법칙들의 혜택을 누리려면 크기가 비교적 커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 제곱근의 기호는 요구조건이 매우 강하다. 1,000,000은 매우 큰 수이지만 1/1000의 확률로 오차가 일어나는 것은 정확도가 압도적이라고 할 수 없다. p.37
그러나 ‘유기체 속에서 매우 질서 있고 규칙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유전자의 크기는 고전 물리학이 안정성을 보장하는 크기보다 훨씬 작습니다.
정상 크기의 세포에서 측정한 염색체의 길이를 그 띠들의 개수로 나눔으로써 유전자의 부피가 한 변의 길이가 3000옹스트롱인 정육면체의 부피와 같음을 발견했다. (…) 따라서 유전자 한 개는 100만개 혹은 몇 백만 개 이하의 원자만 포함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통계물리학에 따르면 이 수는(√n 규칙을 생각할 때)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을 가능케 하기에는 턱없이 작다. p.55
이토록 작은 수의 입자를 가진 유전자가 오랜 세월에 거쳐 일정한 질서, 즉 ‘표현형의 패턴’을 변함없이 산출하는 것은 슈뢰딩거의 말대로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전자는 더 작다 - 돌연변이는 양자 역학의 힌트인가
슈뢰딩거는 유전학의 중요한 연구 결과들을 검토하면서 극도로 작은 유전자가 어떻게 안정하고 영속적일 수 있는지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약 40년 전(1902년)에 네덜란드의 드브리스는 완벽하게 순종인 집단의 자손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이를테면 1만 개에 두세 개꼴로 작지만 ‘뛰어넘기식으로’ 일어나는 변화를 가진 개체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뛰어넘기식’이라는 말은 (…) 불연속적이라는, 그래서 변화한 극소수의 개체와 변화하지 않은 개체 사이에 중간 형태가 없다는 뜻이다. p.63
작고 연속적인 변이는 유전되지 않지만 ‘불연속적인’ 돌연변이는 유전됩니다. 슈뢰딩거는 이 뛰어넘기식의 돌연변이 유전을 양자이론의 ‘귀뜸’으로 듣습니다. 돌연변이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슈뢰딩거는 티모피예프가 1934년 발표한 X선 돌연변이 법칙을 종합하여 돌연변이의 원인이 “생식 세포의 어떤 ‘임계’ 부피 내에서 일어나는 이온화” 과정임을 확신합니다(p.76). 이온화는 오직 해당되는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방출했을 때만 가능하죠. 그러니까 이온화 에너지는 양자화된 에너지입니다. 결국 돌연변이가 양자 역학적인 과정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추론 과정에서 유전자는 염색체의 크기와 유전자가 산출하는 특성의 차이로 추정한 크기보다 더 줄어들게 됩니다.
원자 사이 거리의 10배에 불과한 정육면체. 즉 염색체의 특정 지점을 중심으로 ‘원자 10개의 거리’ 이내에서 이온화가 일어나야만 돌연변이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p.77
100만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된 수천 옹스트롬(10^-7m)의 유전자는 이제 1000개 정도의 원자로 구성된 수십 옹스트롬(10^-9m)의 크기로 확 쪼그라들었습니다. 이제 고전물리학의 설명은 아예 명함도 내밀 수 없게 됐습니다. 어떻게 이 작은 크기의 “유전자가 열운동의 무질서화 경향성에 의해 흐트러지지 않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독특한 입술을 몇 백 년 동안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최저 준위는 원자핵들이 서로 근접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 상태에서 원자들은 분자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강조할 것은 분자가 필연적으로 안정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p.86
슈뢰딩거는 유전자가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유일한 대안임을 확신합니다. 게다가 수수께끼였던 원자들 간의 결합이 양자 이론으로 규명되어 원자와 원자가 서로 근접하여 최저 준위 상태가 될 때 안정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분자는 유기체의 질서를 보장할 만큼 충분히 안정한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분자 상태에서는 열적 원자 진동에 의한 미세한 에너지변화가 무시될 수 있으며, 동일한 원자 집단이 다른 구조를 가지면서 안정성을 가지는 이성질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습니다. 틀린 예언이긴 하지만 이로부터 어쩌면 돌연변이가 이성질체에서 다른 이성질체로 전이되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고도 추측하게 됩니다.
생명체는 복잡하다 - 어떻게 그 작은 물질 조각이 복잡한 암호문을 포함할 수 있는가
매우 작은 유전자가 비교적 안정한 까닭은 양자 이론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해명이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크기의 유전자, “즉 수정란의 핵이 유기체의 미래 발생 전체에 관한 복잡한 암호문을 포함할 수 있는” 걸까요(p.104)? 슈뢰딩거가 보기에 이것은 수수께끼 축에 끼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연합체 속에 아주 많은 원자들이 있어야만 무한대에 가까운 배열들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105
슈뢰딩거는 점과 선, 단 두 종류의 기호로 4개까지 조합했을 때 30개의 부호를 산출하는 모스 부호를 예로 듭니다. 또한 5종류의 서로 다른 원자 25개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의 수가 대략 62,330,000,000,000가지임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암호문에 대응시킬 목적이라면 그다지 많은 원자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유전 암호문은 그 자체로 발생을 일으키는 작용인의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유전 암호문을 임의로 조합된 기호들에 비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또한 우리는 단순한 선형 배열만 생각했다. 우리가 보여주려는 것은 단지 유전자가 분자라는 이론을 채택할 경우 그 작은 암호문 속에 고도로 복잡하고 세분화된 발생 계획과 그 계획을 실현하는 모종의 수단을 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p.105
신중하고 치밀한 슈뢰딩거는 이 단순 조합의 아이디어를 강하게 밀어 붙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 유전자는 선형 배열이 아닐 수 있습니다(실제로 DNA는 이중 나선 구조죠). 더욱 암시적인 것은 유전 암호문이 ‘작용인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달랑 설계도면만 있다고 집이 지어지는 것은 아니겠죠. 설계 도면을 보고 집을 짓는 사람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슈뢰딩거가 생각하는 유전자는 암호문뿐만 아니라 암호문으로부터 발생을 일으키는 모종의 힘이 내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델브뤼크의 분자 모델 어디에도 유전물질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암시는 없는 듯하다. 사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세부적인 정보가 가까운 미래에 물리학에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p.115
델브뤼크 모델은 문턱 에너지에 따라 돌연변이가 일어나는 데 필요한 기대시간을 맥스웰-볼츠만 분포 함수의 역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이 돌연변이 공식을 자연 돌연변이와 인공적인 X선 돌연변이에 관해 알려진 사실에 적용하여, 분자로 추정된 유전자의 안정성과 돌연변이의 불연속성을 검증합니다. 델브뤼크 모델은 검증을 잘 통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유전자가 어떻게 작동하여 발생을 일으키는 지는 단서조차 얻을 수 없습니다.
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한다 - 생명체는 어떻게 평형상태로의 파멸을 모면하는 것일까
그러나 슈뢰딩거는 유전자의 영속성과 돌연변이가 현재의 물리학 법칙을 따르고 있으니, 유전자가 어떻게 작용하여 발생을 일으키는가를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물리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델브뤼크 모델의 검증으로부터 얻은 유일한 결론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죠.
고전물리학 법칙들은 특히 낮은 온도에서 양자이론에 의해 수정된다. 생명도 특히 두드러진 한 예로 보인다. 생명은 물질의 질서 있고 법칙적인 행동이며, 그 행동은 물질이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행하는 경향성에만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질서에도 부분적으로 기반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 p.117
많은 입자들로 구성된 거시계라고 해도 절대 온도 0도에서는 양자 이론에 의해 열적 요동을 멈추고 질서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거시계가 0도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것처럼 생명체는 기적적으로 상온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질서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죠.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물리학은 ‘상온에서’ 질서로부터 질서로 이행하는 생명체의 ‘기적적인’ 경향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결론을 명료히하기 위해 슈뢰딩거는 그 유명한 엔트로피의 개념으로 생명체의 경향성을 분석합니다. 생명체의 경향성이란 평형상태로의 파멸을 모면하는 것입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르면 닫힌계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해야 합니다.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어 더 이상 변화되지 않은 상태가 바로 열역학적 평형상태죠. 죽어 있는 유기체가 흙이 된 상태, 즉 질서에서 최대의 무질서가 된 상태가 바로 평형상태입니다. 그러니까 평형상태로의 파멸을 모면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법칙을 위배하는 것입니다.
슈뢰딩거는 어떻게 엔트로피의 법칙을 위배하면서 생명체가 일정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검토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명하게’ 생각하는 “물질을 교환한다”, “에너지를 먹는다”는 대답은 모두 터무니없습니다. 고백하자면 저 역시 로저 펜로즈가 추천사에서 쓴 것처럼 “에너지를 얻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고 별 생각 없이 생각하고 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슈뢰딩거의 논증처럼 섭취 전후 물질 보유량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보유량 역시 일정하게 유지되죠. 우리가 음식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다고 착각하는 것은 열이나 열에너지를 에너지로 보지 않아서일까요? 여하튼 물질이나 에너지 교환이 생명체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유기체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음의 엔트로피’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p.120 유기체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질서를 (즉 상당히 낮은 수준의 엔트로피를) 유지하는 것은 환경으로부터 끊임없이 질서를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 고등 동물들은 더 혹은 덜 복잡한 유기화합물로 이루어진 극도로 질서 있는 상태의 물질을 먹는다. 동물들은 그런 물질들을 이용한 후 훨씬 퇴화된 형태로 배출한다. p.124
엔트로피는 열역학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와 동등하게 통계물리학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가 음의 엔트로피를 끌어들이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열역학적 파멸을 늦추는 기적적인 능력을 통계물리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명하고 시시하지만’ 엔트로피 공식에 달랑 음의 부호만 붙이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슈뢰딩거는 부언에서 “단순한 열역학적 고찰로는 우리가 물질을 목탄이나 다이아몬드덩어리 형태로 먹는 것이 아니라 “극도로 질서 있으며 다소 복잡한 유기화합물 상태”로 먹어야 하는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는 시몬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p.125). 음의 엔트로피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빠른 연소를 통해 발생되는 열은 그저 방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산물인 이산화탄소로부터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낼 수는 없는 것이죠. 슈뢰딩거는 “음식의 에너지 함유량이 중요하다는 시몬의 지적”을 인정하면서 음식물을 섭취하고 열을 방출하는 것이 “우리가 물리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엔트로피의 잉여분을 처분하는 방식”이라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p.126).
양자 역학 뿐이다 - 생명은 물리학 법칙들에 기반을 두는가
좀 더 확신이 필요했는지 슈뢰딩거는 7장에서 유전자의 질서와 작동 기작을 설명할 새로운 물리학 법칙에 관해 다시 검토합니다.
질서 있는 사건을 산출하는 ‘메커니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통계적인 메커니즘’과 ‘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메커니즘, 그렇게 두 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 우리는 유기체 내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 (…) 그 원리는 다름 아닌 양자이론의 원리라고 나는 믿는다. p.134-5
슈뢰딩거는 이 결론을 강화시키기 위해 시계와의 비유를 시도하죠. 거시계인 시계는 절대 온도 0도가 아니어도 열운동의 방해를 이기고 동역학적인 질서를 산출합니다. 톱니바퀴 등으로 질서 있게 구성된 시계가 규칙적인 시간 간격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따지고 보면 시계가 질서를 산출하는 것 역시 “어지간한 온도에서 열운동의 무질서화 경향성을 극복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한 런던-하이틀러 힘들에 의해 모양을 유지하는 고체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보다 훨씬 작은 유전자가 양자 이론의 지배를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굳이 절대 온도 0도가 아니어도 동역학적인 질서를 산출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선형 방정식인 반면 통계 역학의 지배를 받는 거시계는 비선형적입니다. 슈뢰딩거는 유전자와 같은 생명체의 근원 물질이 양자 역학에 의해 기술될 수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지만, 어떻게 미시계의 선형적인 특성이 거시계의 비선형적인 특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직 알려진 게 없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선형적인 미시계가 비결정론적인 특성을 보인다면 비선형적인 거시계는 결정론적인 특성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의 몸속에서 일어나며 또한 그 존재의 정신적 활동, 자기의식 등에 대응하는 공간 시간적 사건들은(그 사건들의 복잡한 구조와 물리학과 화학의 공인된 통계학적인 설명을 고려할 때) 엄격하게 결정론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통계 결정론적이다. p.143
그러나 통계적인 결정론은 소박한 귀납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 같습니다. 돌연변이가 일어날 확률이 70%라고 해서 돌연변이는 통계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 확률이 50%라고 하면 어떤가요? 해석 문제는 아직까지도 양자 역학이 품고 있는 철학적 문제입니다. 때문에 슈뢰딩거가 통계 결정론으로부터 얻어낸 ‘우주는 하나’라는 귀결은 하나의 관점 정도로 이해해야할 것 같습니다. 우주가 하나의 시공간으로 얼어붙어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의 맥락처럼 보이지만 스피노자의 범신론적 뉘앙스가 훨씬 강한 것 같습니다.
생물학에서의 보다 현대적인 귀결은 이렇습니다.
DNA에서 단백질 생성에 이르는 기본적인 과정에서조차 DNA의 서열 정보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고, 원본의 정보는 흩어지고 온갖 잡음만 뒤섞였다. 지금은 이것이 정보가 흐려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창조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DNA나 유전프로그램에게 조종당하는 입장이 아니다. 생물체의 발생 과정은 매 단계마다 항상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로 비춰진다. - 조진호. 게놈 익스프레스. p.345
유전자는 DNA로 확정할 수 없고, 특정 프로그램으로 환원할 수도 없다는 것, 생명체와 환경이 끊임없는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창발’하는 과정 자체가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창발성은 우리가 밝히고자 했던 ‘현상’이 아닌가요. 어떻게 DNA에서 비롯된 정보가 온갖 잡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정보를 산출하는지, 무엇보다 어떻게 그 정보와 질서가 ‘자발적으로’ 산출되는지를 말입니다. 슈뢰딩거의 통찰이 나온 지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신의 양자역학에 따라서 지금까지 성취된 것 중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걸작”(p.141)의 신비에 몇 걸음 더 다가가지 못한 듯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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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진화생물학자들에게 영감을 준 슈뢰딩거의 책이다. 영향을 주었을지 느끼게 해준다.
너무나 광범위함에도 물리학을 모르는 일반대중을 위해 물리학이 어떻게 생명탄생에 연관이 되어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에 관련분야의 있는 이들이라면 상당한 자극을 받겠다는 것을 사실 무슨말인지 80%가량은 이해가 안되는 나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끄적거려본다. 두고 두고 반복해서 읽어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함께 실려있는데, 모처럼 책값이 아깝지 않은 책이다.
플라톤, 칸드 등이다.
있었던 것이 나에게도 있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을 주었다고 해야할까? 좋은 책들은 끊임없이 인용되고, 그 책에서 다른 책들을 읽게 만드는 힘이 있는것 같다. 사진을 다시 보게 만든다.
열역학 제2 법칙, 엔트로피에 대한 자료를 찾아만 두었다. 기초과학의 중요성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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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과학영재고에 합격해서 신문에 났다는 지인의 자랑을 듣고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웬지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건 우리 아이들 보다 똑똑해서 생기는 샘 만은 아닌 듯 하다. 기억에서 아른거리는 이 책을 다시 들추니 '모든 스스로 생각하는 정신이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한 역자의 말이 눈에 들어온다. 과연 역자의 말대로 책을 덮고 나니 명확한 정리 보다는 고민거리가 더 많아 졌다. 생각을 깊게 만드는 책이다.
저자가 '이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생명의 참된 신비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여러 학문 분야의 이론들을 종합하려는 시도가 저작의 이유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책은 물리학 뿐 아니라 생물학 등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주제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인간의 염색체가 48개라는 등 현재의 지식으로 봤을 때 명백한 오류(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들이 있다고 하여도 여러 학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명쾌한 설명은 책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생명이란 무엇인가]와 [정신과 물질]의 두 주제로 되어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슈뢰딩거는 먼저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의 통계적 질서에 대해 설명한다. 즉, 원자들 개개는 무질서한 열운동을 할 뿐이고 원자의 숫자가 매우 커야 확률적인 질서를 갖는다는 통계물리학적 설명으로 시작한다. 곧 이어 슈뢰딩거는 '확률적인 질서를 갖기에는 너무 작은 수의 원자들로 이루어진 유전자가 어떻게 영속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생명체 내부에는 물리법칙과 다른 법칙이 적용되고 있는가? 흔히들 그렇다고 대답하지만 저자는 다르게 말한다. 유기체는 이제까지 물리학자들이 맞닥뜨린 상황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생명체 내부에도 물리법칙이 적용된다고 단언한다. 즉, 유전자는 '분자' 또는 '비주기적 결정'이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어도 원자들의 무질서한 열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구조는 양자물리학의 법칙을 정확히 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생명은 환경으로 부터 '물질대사'를 통해 음의 엔트로피라 불리는 '질서'를 추출함으로써 존속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유기체가 평범한 물리학 법칙들로 환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살아 있는 물질이 '질서에서 질서를 산출하는' 원리에 기반을 둔다하여도 이 원리가 초 물리학적인 것은 아니다. 유기체가 고체로, 유전물질을 이루는 비주기적 결정으로 되어 있어 열운동의 무질서를 대부분 벗어남으로써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 듯이 보이지만 그 법칙은 다름아닌 양자물리학의 법칙인 것이다.
두 번째 에세이 [정신과 물질]은 매우 철학적이다. 사실 철학적이라기 보다는 과학과 철학의 경계에 대한 주제라고 보여진다. 기존의 철학과 종교에서 주장하는 것들에 대해 과학이 답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슈뢰딩거의 견해라고 할까.... 이 에세이에서 슈뢰딩거는 감각과 의식, 과학의 객관화 원리, 진화, 정신의 단일성, 종교, 감각의 신비 등을 거론하며 과학자보다는 철학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그 동안의 철학적 논쟁들 중 현대 물리학이 입증한 것들에 대한 정리라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 하다. 자연법칙의 엄격한 인과율에 대한 불확정성 원리, 주관과 객관이라는 이원론에 대한 오류의 지적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은 물질과 생명과 정신에 대한 저명한 물리학자의 통합적인 논의다. 저자는 비록 다소 철학적인 견해도 피력하였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과학적인 답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책을 읽고 머리는 더 복잡해 졌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분명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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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빈 슈뢰딩거. 파동 역학에 대한 슈뢰딩거 방정식, 그리고 양자 역학적인 확률적 사고의 모호함을 사고 실험으로 제시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하며, 1933년에 파동학과 양자역학에 대한 공로는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현대 물리학자. 그가 생물학의 소재인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발표한 적이 있다는 것과 그 저서가, 유전자 발견 이전의 물리학자의 저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는, 이 책을 소화하는데 그리 중요치 않다. 단지, 현대 이론 물리학자인 그가, 유전자 발견 이전에 이렇게 정교하게 생명에 대한 물리적 고찰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먼저 알고, 책을 접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먼저, 책의 말미에 있는 자전적 의미의 글인 “내 삶의 스케치”에 있는 슈뢰딩거 자신의 고백을 소개하여야겠다. “내가 『종의 기원』을 거의 다 읽고 아버지가 식물학에 빠져들자 우리의 토론은 달라졌다. 적어도 생물학 수업에서 진화론이 여전히 배척되고 (당시는 1950년대이다) 종교 선생들은 그것을 이단으로 칭할 것을 높은 사람들로부터 권고 받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는 확실히 달랐다. 당연히 나는 곧바로 다윈주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지만, 친구들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조심스러웠다”. 현대 물리학자가, 그것도 종교적 색채가 강한 보수층 자녀로서, 유전자의 발견이나 유전자를 통한 연구를 통해 “론”자를 거의 빼버리게 된 진화에 대해 1950년대에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은 필자로 하여금 두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 번째는,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역시 다윈의 진화가 얼마나 강력한, 생명에 대한 과학적 모델인지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될 것이며, 두 번째는 진화에 대한 수용이 1950년에 물리학자가 물리학적 근거에서 생명에 대한, 현대 과학으로 보면 거의 진실에 가까운, 저술을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그의 소품 3개,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 그리고 “내 삶의 스케치”를 옴니버스식으로 담고 있는 책이다. 이제, 그의 생명론에 젖어 보기로 하자. 물리학적 지적향연을 맞이할 준비들을 하셔야 할 것이다. DNA 의 발견이 있기 전이었던 슈뢰딩거의 저술 시기를 고려하면, 그는 멘델의 유전 법칙의 영향을 받는 어떤 물질과 통계역학, 열역학을 동원하여 생명체의 기본 단위라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본 물질은 일반적으로 세포라 할 수 있지만, 슈뢰딩거의 고급스러운 물리적 해석을 따라가다 보면, 대 물리학자가 이야기하는 기본 단위라는 것이 분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양자 역학과 통계 역학을 이용하여, 그것은 분자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물리적으로 풀어 나가는 그의 논리는 자명하다. 원자의 단위로 들어가면 물질의 성질이 존재할 수 없고, 양자 역학이 지배하는 원자의 성질을 고려해보면 그의 논리는 상식적이기까지 하다. 양자역학적, 통계역학적 확률이 지배할 수 없는, 실존하는 생명체를 표현하는 기본 단위는 당연히 원자일 수 없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물리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저술에서, 대가의 아름다운 물리적 향연을 느낄수 있다. 중간 부분에 나오는 돌연변이에 의한 진화를 수학적으로 논하는 장면에서, 물리적 격리라는 사실이 야기할 수 있는 진화에 대한 또 다른 메카니즘을 무시하는 경향을 살짝 발견하였지만, 수학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물리적 격리라는 메카니즘은 해밀턴, 도킨스라도 표현하기 어려웠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의 위안을 해보며, 대 물리학자의 저술에 동의를 표한다. 뒤따라오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저술에서 슈뢰딩거는 감각과 실체라는 철학적 주제를 현학적으로 현란하게 묘사해 나간다. 서두에 나오는 그의 글을 인용해 보자.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어떤 특징들이 있기에 그렇게 특별하고, 세계를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 어떤 물질적인 과정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과정이 그렇지 않은지 알아낼 수 있을까? 더 간단히 이렇게 묻자. 어떤 종류의 물질적 과정이 의식과 직접 연결될까?” 1950년대에 물리학자가 자문한, 정신, 즉 의식에 대한 질문이다. 경이롭지 아니한가? 50여년이 지난 지금, 뇌과학과 신경학의 발전과 더불어, 현대 과학이 인간의 정신, 즉 의식에 다가가고 있지만, 50여년 전의 한 물리학자의 질문에 완벽한 (과학적으로 완벽한 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지만, 이해를 돕기위해 사용한다) 대답을 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 슈뢰딩거는 어쩔 수 없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플라톤, 칸트, 아인슈타인을 인용하면서 다분히 철학적으로 주제를 풀어나간다. 그렇다고 과학적 사변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윈 이론과 함께 의식의 진화와 실체와의 감각기관을 통한 연결을 다루고 있는 그의 논리는, 물리학자의 글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영역의 확대를 자연스럽게 꾀하고 있다. 감각기관의 진화에 대해 좀 더 할애를 하였으면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지만, 이 글이 쓰여진 시대가 50여년 전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혀를 내두를 뿐이다.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마지막 글인 “내 삶의 스케치”에서 과학적 사고와 종교의 양립에 대해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체 물리학과 반도체 소자 물리로 학위를 받고 관련 개발 업무를 14년째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을 발견하였다면 오버일까? 슈뢰딩거의 명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필자의 이력이, 이런 상상을 저해하지만 상당히 비슷한 면을 발견하면서 느낀 희열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거성중에 한명인 슈뢰딩거의 천재성을 느끼면서, 그가 생명에 대해, 그리고 정신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한 50여년 전의 명저가 주는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평으로 리뷰를 끝내고자 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실로 즐거운 경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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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만을 리뷰한 것입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흔히 생명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대체로 생(生, life)과 죽음(死, death)을 대조하여 말하거나 존재론적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성경을 믿는 이들은 생명을 신이 주신 고귀한 숨결 또는 에너지라고 할지 모른다. 이러한 것들은 철학적이며 추상적인 개념들이다. 그것은 단지 삶의 의미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 현상에 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밝히긴 어렵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 현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 구조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과학적으로 생명에 대해 고찰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책은 1943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행한 강연을 기초로 저술한 것이다. 그는 이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살아 있는 세포의 물리적 측면」의 관점에서 다양한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해 나간다. 저자는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 성분인 염색체가 그 크기가 매우 작아 주변의 열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음에도 비교적 안정적이며, 대를 이을 수 있는 영속성을 가지게 되는 까닭이 그 내부의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에 있다는 것을 예측했다. 말하자면, 비주기적 결정 구조를 가진 유기체는 열운동의 무질서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구조가 있으며 그것 역시 양자역학의 물리학 법칙을 따를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것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유전자야말로 살아 있는 세포의 핵심 성분이며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유전자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야 한다〈제임스 왓슨, 이중나선, 31p, 궁리〉」라는 과제를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의 책에 영향을 받은 프란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은 1953년에 유전자의 구조가 주변 분자(물 분자)들의 공격(브라운 운동)에도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중나선」 구조임을 밝혀내게 되었다. 그가 과학 발전에 기여한 것과는 별개로 생명을 바라보는 그의 견해는 마지막 장의 후기를 제외하고 철저하게 과학적이다. 자신이 가진 과학적 지식과 세포와 염색체에 대해 밝혀진 사실을 단서로 검증과 추론을 해나가는 모습은 마치 범행 단서를 바탕으로 범죄자의 특성을 추론해 나가는 CSI의 프로파일러와 같은 느낌을 준다. 더불어 장 중간에 앞 장에서 말했던 논의의 오류가 발견되면 그것에 대해 수정을 하는 노학자의 겸손함도 보여준다.
잘 모르는 분야를 학문적으로 접근할 때, 자신을「소박한 물리학자」로 낮추면서도 이 유기체의 생명 현상에 대해 기여를 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진리를 탐구하는 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물론 후기의 주관적 견해는 그의 앞 장의 과학적 태도와 상치되지만,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고찰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유기체 내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한 과학적 태도와 겸손함은 뉴턴이 죽기 전에 썼다던 이 글에서도 발견된다.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이용하는 ‘양자역학과 통계 물리학적 접근법’에 대한 그의 친절한 예시와 설명은 이 책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이나 ‘열운동에 의한 질서와 무질서(엔트로피)’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 책 자체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대중 강연이 바탕인 만큼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예시를 통해 내용을 전달한다. 특히 양자역학의 원자 배열과 영속성을 가지는 유전물질을 비교하는 부분은 유전 물질이 엄청나게 작으면서도 열운동의 흐트러뜨리는 힘을 견딜 수 있는 구조가 분명히 존재함을 예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소설도 아닌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으면서, 이 책이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또는 그보다 앞서 ‘양자역학’과 ‘통계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이론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하게 된다. 특히 프로이트의 등장 이후 마냥 합리적이지만 않은 인간이라는 종을 이해하려고 대중의 무의식이나 심리를 탐구하려던 그때, 「양자역학」이라는 20세기를 여는 하나의 학문이 열리려던 그때에, 이 이론이 인문·사회를 다루는 학자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을까? 뉴턴 역학에 따라 시작되어, 「세상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세워진 과학적 합리론이 수많은 인문주의자와 사회학자, 정치가들의 손에 의해 사회에 비판 없이 적용되었음에도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던 그때,
라는 이 통계 물리학적 이론은 가히 충격이며, 역사의 진보 과정과 시간과 공간 위에 존재하는 집단과 개체에 대해 진지하고 폭넓은 고찰을 하는 데 힘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면 희열을 느낀다. 또한, 그가 말하는 수많은 가설과 이론 그리고 예측은 그동안 과학적 지식과 교양을 위해 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비단, 왓슨의 『이중 나선』뿐 아니다. 염색체 섬유를 「유기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같은 책, 141p.)」 라고 말한 부분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양자 뛰어넘기’와 돌연변이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말한, 「이성질체의 에너지 준위와 에너지 문턱, 양자 뛰어넘기를 위해서는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같은 책, 92p.)」라고 말하는 부분은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핵심이 되는 패러다임 사이에 존재하는 불연속성이나 역사를 유기체적 관점으로 볼 때 진보에 대한 관념을 떠올리게 한다. 논란이 많은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가 언급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이 아니더라도,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같은 불교적 관념이나 칼 융이 말하는 의식의 '원형'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마지막 장의 후기는 그의 과학적 태도와는 다른 지극히 주관적 견해이며 (서구의 합리주의나 인간 소외 현상에 갈증을 느끼던 지식인들이 인간을 이해하려는 새로운 대안으로 삼았던) 동양의 종교나 신비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러나 과학자임에도 인간의 의식과 정신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고찰을 하려는 그의 자세는 물질에 기반한 과학을 보다 유연하게 해주며, 생명이 「물질을 기반으로 한 의식을 가진 존재」임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1 물론 이 겸손한 노 학자가 이런 후기를 쓰면서 발생할 논란을 예상치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생명이 가진 이 기묘한 메커니즘이, 지금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길 바라는 노 학자의 기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리라 생각한다. 생명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니까.2 책을 덮고 자신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우연과 필연을 거쳐 탄생한 이 우주와 생명과 그리고 인간,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그가 마지막 장에 말한 후기는 칼 세이건이 그의 책에서 말한 이 대목을 인간 정신의 영역까지 확대한 것이리라. 혹 누군가 칼 세이건의 책을 펼치고 코스모스적 대(大)우주를 상상했다면,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펼쳤을 때에는 카오스적 소(小)우주를 상상해보기를 바란다. 문득,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보라」던 윌리엄 블레이크3가 떠오른다... 〈2016. 01. 12.〉
주. 1 형이상학적 고찰 또는 그의 종교적 성찰이 담겨 있는 마지막 후기를 두고 「물질에 기반한 과학을 보다 유연하게 해준다」는 말을 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많은 고민을 했다. 수많은 과학계의 거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과학의 언어는 물질과 운동에 질서를 부여하며 가설과 검증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이러한 그의 자세는 과학자의 자질로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 또는 의식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생명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물질의 다른 축인 '정신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고민하고 가설을 설정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당시나 지금의 과학으로는 검증할 수 없는 단계라 하더라도 말이다. '보다 유연하게' 해준다는 말은 마치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자론에 기반한 가설과도 같은 것이다. 고대의 그러한 가설이 18세기 돌턴에 이르러 이론화 된 것처럼 언젠가는 정신의 영역 역시 그러한 가설의 검증이 일어날 것이라는 노 학자의 철학적 사색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그게 맞든 맞지 않든 간에 그는 논란을 만들어 냈고 후대에 이르러 데모크리토스처럼 '슈뢰딩거는 말년에 이르러 정신에 관해 하나의 가설을 말했다'라고 기록될 수 있을테니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더불어 '유연성'의 또다른 측면으로 물질 이상의 인간 정신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현대에 이르러 인간 정신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려는 노력이 심리학이나 뇌과학 등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것을 과학 영역의 확대 또는 유연함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2 이 말은 다음을 일부 패러디 한 것이다.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한다면, 지금은 짙은 암혹 속에 감춰져 있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에 빛이 비쳐 그 안에 숨어 있는 진리의 실상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부족하다. 누가 자신의 일생을 하늘을 연구하는 데만 온통 바친다고 하더라도, 우주와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다루기에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 짧고 부족하다. ...... 진리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 먼 후손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주 뻔한 것들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었음을 의아해 할 것이다. ...... 수없이 많은 발견이 먼 미래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서 밝혀야 할 그 무엇을 우주가 무궁무진으로 품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 우주가 혹시라도 그러한 우주라면, 우리는 그것을 한낱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출처는 〈세네카, 『자연학의 문제』 제 7권 1세기〉이며 칼세이건 『코스모스』의 머리말이기도 하다. 3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년 11월 28일 - 1827년 8월 12일)는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다. 아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예언)』 일부이다. Auguries of Innocence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순수의 전조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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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슈뢰딩거가 지은 책이다. 내게는 내 학문을 지탱하는 뿌리같은 느낌이 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당연히 많은 식물학자, 동물학자, 미생물학자가 고민하는 주제이다. 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건대, 이 책만큼 그 본질에 가까이 다가간 책은 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분 즉 슈뢰딩거 선생님께서는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양자역학의 양대 거두 중의 한분이시기 때문이다.
이분의 주요 업적은 파동함수, 확률함수로 통계물리학의 기초를 다지셨다는 것이다. 통계물리학을 이야기 하려면 또 한분인 볼츠만 선생님을 빼 놓을 수 없지만... 모든 분야, 생명을 다루는 의학까지도 심하게, 아주 심하게 통계학에 경도된 요즘, 통계학을 학문과 일상에 적용하게 한 양자역학과 열역학의 기초가 되신 분의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은 특별하다.
통계학이 모든 학문을 지배하게 된 것은, 결국 데카르트식의 목적론과 기계론이 더 이상 현실에서는 완전무결한 이론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반증한다. 아인슈타인이 보강해서 훌륭하게 발전시키기는 했지만, 뉴턴 역학 역시도 목적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통계라는 것은 그 자체가 일단 100% 정확한 뭔가는 없다는 전제하에서 발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심스럽고 조금은 겸손하지만 도전하는 학문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다윈의 진화설과는 다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 대한 것과 에딩턴의 시간의 화살 이론으로 생명을 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일단 첫째 이론을 보자면, 난 이렇게 생각한다. 에델바이스가 고산에서 살게 된 것은, 다윈의 이론대로 어떤 존재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장 살기 좋은 곳을 골라서 그 지역을 자신의 터전으로 만든 에델바이스의 '주체적 선택'이었다고.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같은 진화적 관점이라도 다윈이 운명론적이고 수동적인데 반하여 라마르크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면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에딩턴의 '시간의 화살'은, 프리고진의 소산구조나 복잡계 이론을 생명체, 유기체의 질병과 치료하는 이론에 적용하려는 내게 어떤 번뜩이는 영감을 준 구절이다. 246쪽을 보면, '(볼츠만의 설명이) '시간의 화살'이 미시적인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에 관여하지 않음을 밝혔다는 점에 있다.' 이를 생명체에 대입시켜 보자면, 인간은 나이들고 늙고 죽는다고 하여도 세포 하나하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대가의 생각은 존중할 필요가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이론은 슈뢰딩거의 생각과는 달리, 대단히 뛰어난 이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역자의 말대로 '모든 스스로 생각하는 정신이 스스로 생각하기 위해' 이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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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물리학의 대표선수가 쓴 주관적관념론의 철학서. 사물이 복수로 인식되는 데 반해, 정신은 단수로서만 인식된다는 주장이 참으로 새롭게 느껴진다. 신비주의자가 주장했다면 단순히 코웃음으로 넘길만한 주장들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입에서 나오니 뭔가 심오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여겨진다. 결국은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으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읽어야 할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