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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에 따르자면, 그녀가 ‘안으로 닫아 건 내 상처’는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로 인한 것인데, 그 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나는 좀 궁금했다. 단순히 세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불행한 사건들과 사고들에 대해 시인으로서 느끼는 예민한 공범의식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죄는 뭔가 좀더 내밀하고 개인적인 비밀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여겨졌다. 그녀의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 실려 있는 다음 시에서 나는 그 실마리를 찾았다. 다디단 진물 내 몸속의 벌집에서 벌들을 꺼내려고 햇살이, 봄 햇살이 자꾸 나를 짓무르게 한다 꿀벌이 날던 내 안의 벌집은 죽은 지 오래인데 햇살의 섬모가 목덜미를 타 오르고 엄마, 발이 많은 벌레들은 떠날 곳이 많아 저렇게 슬픈 걸까? 어린 내가 꿀의 단맛을 맛보려고 잘 닿지 않는 빗장뼈에 간신히 혀를 댄다 뱀은 다리를 몸속에 가두는 데 일억 년이 걸렸다는데, 늙은 내가 부스럼을 긁어내며 가만 나를 바라본다 엄지손가락을 빨며 어린 내가 흰나비를 쫓아가고 근이 쑥 빠져야 꽃이 핀단다, 엄마가 내 어린 유두를 쓸어내리며 부스럼 약을 발라준다 오빠가 죽지 않았으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겠지요 어린 내가 묻고 늙은 내가 물끄러미 죽은 나를 바라본다 내 몸속의 날갯짓들을 살려내려고 햇살이, 봄 햇살이 자꾸 내 가슴을 간질러, 오빠가 죽은 해 아버지가 심었다는 늙은 복숭아나무가 자꾸 진물을 흘린다 봄 뱀이 둥치 아래 허물을 벗어놓고 사라지고 아픈 가지 끝에서 호랑거미가 거미줄을 뽑고 여전히 나는 발과 다리가 시리지만, 햇살 알레르기를 앓는 붉은 반점 몇 낱이 내 가슴에 열꽃을 피웠다 엄마가 다시 태어나려는지 꽃 진 자리가 환장하게 가렵고, 늙은 복숭아나무의 시름, 그 다디단 진물 옆을 벌들이 난다 (46~47쪽, 「다디단 진물」 전문, 이탤릭체 필자 강조) 일반적으로 시는 소설과는 달리 좀더 사실에 입각한 작가의 경험을 다루고 있기에 진실의 함량이 훨씬 더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시에서 진술된 하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3년 동안 홀로 지내면서, 자신의 몸속에 약동하는 우주적 생명력이 깃들어 있으며 또한 그 몸은 온갖 대상들로 몸을 바꾸며 변전(變轉)하는 거대한 우주적 순환의 일부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안으로 닫아 건 자신의 상처를 기꺼이 수락한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속에 은밀하게 품고 견디어내느라 짓물러터진 그 상처를 세상으로 향하는 길에 표지판으로 삼아 세워 놓기까지 한다. 그래서 그녀가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라고 노래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내밀한 죄의식을 극복하고 세상을 향하여 다시 걸음을 내딛는 성숙한 시인의 굳센 다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해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온 도화 아래 잠들었다가 깨어난 시인은 이제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또는 내 몸속에 잠든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은 그녀가 이 세상 그 어디로 눈을 돌리더라도 어김없이 마주치게 되는 미만(彌滿)한 죽음의 모습이다. 죽은 새, 시들어 떨어지는 낙화, 산불에 타 죽은 고로쇠나무, 무지막지하게 가지치기 당해 고사한 가로수 따위 자연물뿐만 아니라 캄보디아 킬링필드, 가난한 섬나라 미혼모 소녀들이 낳다가 죽은 아기들, 어쩔 수 없이 총탄과 폭약을 선택해야 했던 팔레스타인 자폭 테러리스트들, 죽음보다 못한 끔찍한 삶을 강요당한 일본군 종군위안부들 등 인간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목격하는 죽음의 목록은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천 살이나 먹은 처녀인 내 등 뒤에서 한시도 떠난 적 없는 저 거대한 손’(「주홍글씨」) 앞에서 그저 탄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그 죽음에서 조금도 눈 돌리지 않은 채, 깊숙이 바라보고 기꺼이 수락하고 그리고 마침내는 그걸 시로 노래한다. 순환하는 몸의 우주적 생명력으로써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존재 안에 깃들어 있었던 죽음을 이미 극복한 바 있는 시인은 그러한 죽음의 모습들이 다만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열고 있는 서시는 한 마리 죽은 새의 등을 빌려서 그 진실을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등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11쪽, 「등」전문) 새를 습격한 죽음은 분명 치명적인 것이었겠으나 오롯하게 드러나 있는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들까지 어쩌지는 못한다. 자신의 등을 구부려서 흙 속의 누군가에서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죽은 새는 어쩌면 시인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오빠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죽은 오빠로 인해서 시인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죽은 새로 인하여 흙 속에서 새로 태어나게 되는 생명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생명은 바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많은 것들에 힘입어서 조만간 태어나게 될 터이니,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는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리라. 우리는 오히려 업혀 있는 것 아직 많은 그 등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서시 뒤에 이어지는 여러 시편들을 통해서 시인은 아주 분명하게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죽음을 넘어서게 하는 사랑의 힘을 시인은 무척이나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 앞에서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라고 슬퍼하면서도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아욱국」)라고 시인은 자신 있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지니고 있는 사랑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삶을 통하여 무수히 겪은 경험적인 진실이거니와 또한 그러한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인 진실로써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즉, 자신의 탄생이 오빠의 죽음에 빚지고 있다는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45쪽,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전문) 물론 이 시가 그러한 시인 자신의 개인사적 사실을 훌쩍 뛰어넘는 보다 보편적인 삶의 진실과 통찰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음은 명백하다. 내가 오직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게 모르게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또한 뭇생명체들과, 더 나아가서는 생명 없는 사물들과도 긴밀하게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어서, 나는 그들과 모두 함께 더불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 말이다. 공감 또는 연대의식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생각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문제는 그 누구라도 가슴 속에 조금씩은 지니고 있는 이 사랑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리멸렬한 일상의 분주함에 정신이 팔려서 거의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겠다. 또한 드물지 않게 가끔씩 이 사랑을 깨닫고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러한 사랑의 원천인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몹시 가혹하고 그러한 사랑을 펼치는 장이 되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겠다. 남다른 개인사적 사실로 인하여 사랑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깊고 풍부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 우리 시대에 너무나 남용되고 오용되어서 다 낡아빠진 걸레처럼 진부하고 누추한 단어가 되어버린 것이 바로 사랑이라지만, 진정한 사랑은 이처럼 어렵고 소중한 것이다. 귀한 것인 동시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한 것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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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김선우, 「낙화, 첫사랑」 꽃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다. 꽃이 피는 것도 자연이고, 꽃이 지는 것도 자연이다. 때가 되면 꽃이 피듯, 때가 되면 꽃이 진다. ‘낙화(落花)’는 꽃이라면 피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얘기겠다. 시인은 낙화에서 첫사랑을 본다. 떨어진 꽃은 원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한 번 가는 길이 영원히 가는 길이다. 사람들이 왜 첫사랑에 아련해하는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랑에 사람들은 ‘첫’이라는 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유일한 사랑이다. 떨어지는 꽃은 지금 단 한 번뿐인 사랑을 하려고 한다. 시인은 어떤 마음으로 단 한 번 떨어지는 이 꽃을 대하는 걸까?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라고 시인은 쓴다. 아찔한 절벽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가리킨다. 그대가 아찔한 절벽으로 바람으로 서성이는 데도 시인은 그대를 부르지 않는다. 그대에게는 그대가 가야 할 길이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야 하는 길이다. 누가 있어 그 길을 가로막고 나설 수 있을까? 그대 옷깃을 부둥키며 수선스레 구는 건 인간이 하는 일일 뿐이다. 인간은 이별 앞에서 구차하지만, 자연은 이별 앞에서 한없이 담담하다. 떨어지는 꽃잎은 가지에 연연하지 않는다. 때가 되었으니 떨어지는 것이다. 때를 거스르고 자연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시인은 그저 떨어지는 꽃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볼 뿐이다. 그것이 시인이 생각하는 “내 사랑의 몫”이다. 사랑은 상대에게 집착하는 게 아니다. 떨어지는 꽃에 집착한다고 해서 꽃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꽃이 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없듯이, 첫사랑이 끝나야 하는 이유도 없다. 떨어져야 하니까 떨어지는 것이고, 끝나야 하니까 끝나는 것이다. 동어반복이다. 동어반복에 이유를 달면 다시 동어반복이 된다. 아찔한 절벽 끝에서 한 발을 내딛은 꽃을 향해 시인은 손을 내밀지 않는다. 손을 내밀어도 떨어질 것은 떨어진다.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는 말로 이 상황을 표현하면 어떨까? 꽃은 온몸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이 꽃이 가야 하는 길이다. 온몸을 아찔한 절벽 아래로 기꺼이 내던지는 마음을 생각해 보라. 절벽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이 있고, 새로운 삶이 있다. 절벽 아래는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이다. 떨어진 꽃은 절벽=바닥에서 다시 살아날 길을 엿본다. 떨어지지 않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시인은 떨어지는 꽃에서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나’를 본다. 아찔한 절벽을 서성이는 건 바로 ‘나’다. 절벽 아래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삶이 가장 높은 곳을 지향한다면, 죽음은 가장 낮은 곳으로 그 삶을 이끈다. 시인은 지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려고 한다. 떨어지는 꽃보다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으려고 한다. 그러려면 시인은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질러야 한다. 가장 낮게 엎드린 존재가 가장 빠르게 바닥에 닿는다. 바닥에 닿아서 시인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걸까? 바닥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자리라는 점에서 가장 낮은 자리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존재가 어떻게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존재와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은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라고 적는다. 가장 낮은 자리와 가장 높은 자리는 “내 생을 사랑”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자기 생을 사랑한다면 낮은 자리든, 높은 자리든 구분되지 않는다는 얘기겠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없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집착’이 되어버린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은 자기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마음이다. 자기 생을 존중해야 진정으로 다른 생을 존중할 수 있다. 자기 생을 존중하는 걸 이기주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기주의는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강탈하는 것이다. 자기 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 더불어 눈물을 흘린다. 시인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생을 기껍게 받아들인다. 그녀는 죽기 위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그녀는 살기 위해서 바닥으로 기꺼이 떨어진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그대를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받으려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서 그대를 받은 시인이 왜 살아나느냐고? 어리석은 질문이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그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시인과 다르지 않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은 시인은 그대보다 뒤에 바닥에 떨어진다. 역설이다. 죽어야 다시 살아나는 역설을 시인은 가장 낮은 바닥으로 내려간 사랑에서 발견한다. 가장 낮은 곳에 가려는 마음으로 시인은 가장 높은 곳으로 간다. 가장 높은 곳이 가장 낮은 곳이라는 역설이 또 다시 성립된다. 절벽 끝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절벽으로 돌아온다. 절벽 끝에서 뒤돌아선 사람은 이내 바닥으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꽃은 바로 자연이 품은 이 진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시인은 떨어지는 꽃에서 첫사랑을 본다. 죽음조차도 뛰어넘는 사랑이니 첫사랑은 단 한 번뿐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첫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닥으로 먼저 내려가 뒤따라 내려오는 꽃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꽃은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새로운 ‘나’로 변주된다. 죽음 너머에 새로운 나가 있다. 죽음과 마주하지 않으면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로 풀이해도 좋다. 시인에게 낙화는 죽음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한 첫사랑과도 같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2. 그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김선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꽃은 어떻게 피어나는 것일까? 꽃은 그냥 피지 않는다. 한 송이 꽃이 피기 위한 여정은 한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은 탄생하는 순간에 고통을 겪는다. 고통 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일까, 시인들은 한 생명의 탄생에서 모든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을 본다. 꽃 한 송이가 피는 그 힘든 여정을 시인 또한 떨리는 마음으로 경험한다고나 할까? 꽃이 피는 걸 보며 시인은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라고 이야기한다. 생명과 생명은 같은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생명이 아프면 다른 생명이 아프다. 생명은 저마다 자기 몸을 지니고 있지만, 그 몸들은 지구(나아가 우주)라는 그물망 속에서 서로서로 뒤얽힌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설이 괜히 나왔겠는가? 지금 나를 낳은 생명은 언젠가 내가 낳은 생명일 수도 있다. 모든 존재는 개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연으로 이어지고 이어져서 존재한다. 시인은 어느 땐가 꽃 한 송이였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아득한 마음으로 피어난 그대=꽃을 본다.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가 날아든다. 나와 다른 존재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이 아득한 순간을 시인은 그대와 더불어 느낀다. 다른 존재를 온몸으로 받은 시인은 몸이 뜨거워진다. 그대와 시인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었다. 둘이면서 하나인 생명의 역설로 시인은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활짝 연다. 꽃이 꽃이기만 하고, 시인이 시인이기만 하다면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내 끊어져버린다. 꽃은 꽃이면서 모든 생명이다. 생명은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어떨까? 그러니 꽃 한 송이 피어나는 순간이 예사로울 리 없다. 꽃 한 송이가 피는 순간은 생명 전체가 탄생하는 순간과 다르지 않다. 부분 속에 전체가 있다. 먼지 하나에 온 세상이 담기는 진리는 개체가 곧 전체 생명이라는 인식 속에서 뻗어 나온다. 그대 몸속으로 꽃벌이 날아들면 시인 몸속으로도 꽃벌이 날아든다.
나와 그대는 하나라는 맥락으로 시인은 세상을 본다. 그대가 꽃을 피우면 하나로 이어진 시인 또한 꽃을 피우는 일에 자연스레 참여한다. 몸은 따로 있어도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해도 좋다. 생명과 생명이 맺은 인연이란 이렇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 몸에 새겨진다. 마음이 있고 몸이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음과 몸은 하나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마음과 몸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어떻게 내 일, 네 일이 구분될 수 있겠는가? 시 제목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 내포되어 있는 대로, 우리 몸속에는 수많은 타자들이 잠들어 있다. 타자가 없는 ‘나’가 과연 가능할까? 당장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한다. 먹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몸 밖에 있는 생명들을 음식으로 먹는다. 사는 일 자체가 먹는 일에서 시작해 먹는 일로 끝나는 셈이다.
‘나’는 수많은 생명들로 하여 비로소 탄생한다. 어떻게 보면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이 꾸민 모자이크와 같다.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생각은 이리 보면 헛되고 헛된 망상일 뿐이다. 문명이란 게 인간을 중심에 세우고 자연을 바깥으로 내쫓으면서 생기지 않았는가? 인간은 문명의 바깥으로 내몬 자연을 자기 마음대로 파괴한다. 자연을 파괴한 대가로 인간은 편리한 삶을 얻었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으로 나눔으로써 인간은 언뜻 자연 위에 군림하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문명은 세운 인간은 과연 자연을 정복한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을 정복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인간은 자연에 속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을 무기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할 수 있을까?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파괴될 수밖에 없다. 자연과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라는 말로 이 상황을 표현해도 좋겠다. 위 시에서 시인은 한 송이 꽃과 하나 되는 순간을 가슴 저린 떨림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자연 속에 있을 때만 이 떨림을 만끽할 수 있다. 문명을 만든 인간이 왜 자연과 더불어 느끼던 떨림을 잃은 걸까? 그렇다. 인간은 문명으로 자연을 정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인간은 자연과 소통하는 영혼을 잃어버린다. 시인이 말하는 ‘내 몸속에 잠든 이’는 바로 이 영혼이 아닐까?
자연(타자라고 말해도 좋습니다)과 하나가 되는 영혼을 잃어버린 인간은 그예 자신을 만든 근원을 부정하려고 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자연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당연하다는 듯 자연을 파괴한다. 인간의 삶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연은 가차 없이 제거된다. 조류독감이 유행하면 인간은 ‘살처분’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동물들을 산 채로 땅에 묻는다. 꽃이 피는 순간에 기꺼이 참여하는 영혼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누군가는 그런 영혼을 상상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기도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꿈으로 그칠 따름이다. 김선우 시인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자연과 소통하는 영혼을 여전히 꿈꾸고 있다. 그녀는 자기 몸을 열어 사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든다. 사물 하나하나에 길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려면 우리 또한 온몸을 열어 길을 내야 한다. 꽃이 피면 시인이 온몸을 떠는 이유를 우리는 이렇게 알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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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여진 문학 작품은 사람의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기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우주적 세계상(像)을 개인적 세계상(像)으로 바꾸어 다시금 우주적 세계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끝임없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한다. 그중에서 ‘시’라는 것은 가장 깊은 철학적인 사유임과 동시에 가장 풍성한 문학적 감성과 가장 집약적이며 창의적인 문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문학은 잘 모르고, 시도 잘 모르지만 종종 문학이 주는 감동에 빠질때가 있다. 시라는 것은 특히 자기만의 특별한 색깔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의 세계관으로 가지의 언어를 창조할 때 정말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감성에 긴 여운을 남긴다. 자기만의 눈을 가지고 자기의 문학세계를 창조하는 시인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제치고 그것을 경험케 해주는 한 세계의 창조자와 같다.
많은 시인들 중에 ‘김선우’라는 시인이 들어온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쁜얼굴에 깊고 넓은 여성스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이였다. 그리고 그의 시는 그녀의 그러한 이미지를 정확히 반영해 주었다. 가장 육체적이고 관능적이며 원초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만 천박한 느낌이 들지않고 가장 인간의 날것을 표현해주는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여러매체를 통해서 시를 쓰는 작업과 소설 쓰는 작업과 에세이를 쓰는 작업을 비교하면서 시를 쓰를 작업은 하나의 제의적 작업에 가깝다고 했다. 시를 쓰기전에 충분히 자신의 몸으로 시적 대상으로 부터오는 충만한 감성이 몸으로 느껴질때 그제서야 자신의 시가 잉태되고 결국 몸으로 출산한다고 했다. 그녀의 시세계는 독창적이면서 아름답고 원초적이다. 떠돌아 다니는 세계상(像)을 자신의 개인상(像)으로 분명하게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 시인은 우리 문학계의 큰 자신임이 틀림없다. 그녀의 얼굴과 목소리와 그녀가 잉태하여 출산한 시는 그녀가 이미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음을 보여준다. -민둥산/김선우-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로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이런 관능적인 시 언어들은 그녀의 몸이 얼마나 시적 대상과 밀접하게 어울려 떨리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지적 대상을 맞이하는 신전이 될 때 시를 잉태한다는 것은 그녀의 관능적인 시 언어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녀는 천상 시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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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조용히 잠들고 싶은..
에코-페니미즘 시인 ‘김선우’의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전작들이 ‘여성의 몸’으로 말을 하는 특징이 있었다면, 세 번째 시집에서는 ‘몸의 일부’가 아닌 ‘온 몸’으로 말을 건낸다. 시의 제목이자 시집의 제목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번에는 아예 자신의 몸속에 넣어서 일부가 아닌 전체로써 뻗어나가며 이야기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예전 보다 좀더 깊이가 있는 듯 하고, 내밀한 울림이 느껴지는 것일까? 시집 전체에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다.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아욱국)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 사랑은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 된다. 해설의 김수연씨는 이러한 생을 이어주는 사랑에 대해, “이번 시집의 의미는 삶의 비극과 그 비극을 초월하는 목숨의 사랑으로 전향된다”라고 말한다. 비 그친 후 세상은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간밤 바람 소리 솎으며 내 날개를 빗기던 이 누구? 큰 파도 닥칠까 봐 뜬눈으로 내 옆을 지킨 언덕 있었죠 날이 밝자 언덕은 우렁 각시처럼 사라졌죠. 아니죠. 쓰러졌죠.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해요 비 그친 후 세상은 하루의 반성은 덧없고 속죄의 포즈 세련되지만 찰기가 사라졌어요 그러니 안녕, 나는 반성하지 않고 갈 거예요 뾰족한 것들 위에서 악착같이 손 내밀래요 접붙이듯 날개를 납작 내려놓을래요 수 세기의 겨울이 쌓여 이룬 가을 봄 여름이에요 비 그친 후 쓰러진 것들의 냄새 가득한 사랑이여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어요 이 빛으로 감옥을 짤래요 쓰러진 당신 위에 은빛 감옥을 덮을래요 나는 울어줄 손이 없으니 당신의 감옥으로 이감 가듯 온몸의 감옥을 접붙일래요 - 잠자리, 천수관음에게 손을 주다 우는(p.48)- 구어체로 운율의 형상화가 돋보이는 시다. 쓰러진 것들이 쓰러진 것들을 위해 울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멸해 가는 것들은 울고, 짜고, 덮고, 접붙이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재생’되어진다. 즉, ‘소멸’은 완전한 사라짐이 아닌 사랑을 통한 재생으로 회생되어진다. 그래서 수많은 겨울이 쌓여 가을 봄 여름이 되는가 보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 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p.45)- 사랑이란 이렇게 나뭇가지를 뚫고 올라오는 아픔과 같은 것일까? 상처 난 곳에는 열이 발하듯, 꽃망울이 밀어 올라오는 자리의 생채기 주변은 당연히 뜨거울 수밖에. 나와 그대가 하나 되는 과정은 꽃이 피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의 댓가는 이토록 뜨겁고 아득해져야 하는가 보다. 꽃 속에 날아든 꽃 벌의 잉잉-거림 처럼, 내안에 날아든 당신.내 몸속에 잠든 당신. 그러나 그것은 당신이 내게로 날아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당신에게 날아간 것일지 모르겠다.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던 것처럼. 시집 전체가 녹녹하다. 간만에 내린 비로 잔뜩 물먹은 도시처럼, 시집 전체가 사랑으로 촉촉이 적셔져있다. 세상 사물을 관찰하는 시인 특유의 감성과 운율을 형상하는 감각이 돋보인다. 또한, 에코-페미니즘 시인이라는 평가 걸맞게 ‘슬픈 여성의 삶’에 바치는 시들도 눈낄을 끈다. (제비꽃밥, 열네살 무자, 바라본다 꽃피는 등)
2008.08.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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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상상력 : 생명 앞에서 떨다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시집 전편에 구현된 세계를 작가의 현실과 동일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작가가 살아온 현실은 항상 시의 세계를 주조하는 바탕이 된다. 한 권의 시집이 두 권의, 세 권의 시집이 되면서 시 속에 표현된 세상은 그만큼 중층적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낸다. 김선우의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 지성사, 2007)는 김선우라는 한 시인(개체)의 내면에서 새롭게 구성된 세계라는 점에서 이전 시집들의 세계를 넘어서지만, 동시에 이전의 시집들에서 구현된 시적 형상을 다시금 불러낸 세계라는 점에서 이전 시집들의 세계와 공명한다. 이처럼 시는 시인의 내면을 표현하되, 시인의 외부로 끊임없이 나아가며 경계에서 경계로 이동한다. 시집의 첫 시가 마지막 시와 어울릴 때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세상을 의미화한다. 한 편의 시로 한정되면서, 또 다른 시의 세계로 뻗어나가는 시적 양상은 실상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대상 자체가 지니고 있는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선우의 이 시집은 첫 시와 마지막 시의 배치를 통해 시인이 갈망하는 세계를 암시적으로 표현한다. 시집의 권두시인 「등」에서 시인은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 죽은 새”에 주목한다. 검은 등만 오롯하게 남아 있는 죽은 새에게서, 시인은 그러나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 흙속의 누군가에게 /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찟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모습을 발견한다. 죽은 새에게 ‘죽음’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과정으로 이해된다. 흙 속의 누군가는 죽은 새를 ‘먹는’ 존재이지만, 한편으로 죽은 새를 새로운 탄생으로 이끄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죽은 새는 ‘죽은’ 것인가? 마지막 시 「대포항」을 보자.
항구에 막 닿은 ‘대양호’에서 여자가 제 키만 한 방어를 받아 내렸다 활처럼 몸을 당긴 등 푸른 아침 바다가 지느러미를 퍼덕거리며 물방울을 쏘아올리는 사이 환한 비린내 여자의 아랫배를 지나 내 종아리까지 날아와 박힌 푸른 물방울 화살촉을 조심스레 뽑아든다 손금 위에 얹힌 물방울 하나 속에서 수천의 방어 떼가 폭풍처럼 울고 오냐 오냐 여자가 큰 칼을 빼들어 방어의 은빛 아가리를 내리쳤다 오냐, 내가 너를 다시 낳으마. 여자가 등 푸른 물속으로 치마를 걷으며 들어간다 여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수천 마리 은빛 방어들, 정오의 태양으로 헤엄쳐 간다. - 「대포항」 전문
죽은 새 한 마리가 수천 마리의 은빛 방어들로 변환되는 순간은 “여자가 등 푸른 물 속으로 치마를 걷으며 들어”가는 순간에 이룩된다. 김선우 시를 관류하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의 상상력이 극명하게 발현되는 이 시에서, 죽은 존재들은 ‘여자’라는 생명의 장소를 경유하여 새로운 탄생의 지점으로 나아간다.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는 경계의 장소에는, 그 경계를 넘나들며 죽음과 삶을 관장하는 ‘여성적 존재’가 있다. 김선우 시는 이러한 여성성의 장소에 이르는 길을 시로 표현한다. 죽음과 삶이 순환하는 여성의 공간에서 살아 있는 존재와 죽은 존재는 ‘순환의 고리’ 속에 묶인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지모신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주저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세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일까, 첫 시와 마지막 시 사이에 배치된 100여 편의 시들은 무엇보다도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끊임없는 혼돈(고통)을 겪어야 하는 존재들의 삶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우선 인간의 도구적 이성의 포악함에 희생된, ‘약한 존재들’의 고통스런 삶을 묘사한 시편들에 주목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제비꽃밥」은 과거와 현재라는 대립적인 상황을 통해 인간 세상의 어두운 일면을 시화한다. 어린 시절의 “첫 입맛의 신비”로 감각되는 시인의 기억이 과거의 상황이라면, 이스라엘의 미사일 폭격에 대항하기 위해 “소꿉 종지에 총탄을 담는” 소녀의 모습이 현재의 상황을 이룬다. 시인은 “내가 그 땅의 딸이었다면, 전쟁과 폭격 속에 난민의 유배지를 떠돌아야 한 그 땅의 아들이었다면 나 역시 폭탄을 몸에 감고 검은 외투를 입었을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살육의 장면(기억)들이 소녀들로 하여금 총을 잡게 한다. 강하기 때문에 총을 잡는 게 아니라 약하기 때문에 총을 잡을 수밖에 없는 역설, 이러한 상황 앞에서 시인은 “만지지 말고……, 총탄 같은 거……, 꽃밥을 지어……, 이담에……, 네가 컸을 땐……”이라며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소녀가 큰다면 소꿉 종지에 총탄을 담지 않아도 될까? 그래서 소녀의 오빠(아빠)들도 총을 잡지 않게 될까? ‘말줄임표’ 속에 담겨 있는 간절한 마음은 그것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우려감과 어울려 묘한 시적 긴장감을 발산하고 있다 하겠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시화한 「열네 살 무자(舞子)」 역시 고통받는 약자를 위무하려는, 대지모신으로서의 시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열네 살의 소녀가 이유 없이 겪어야 하는 삶의 절절한 고통을 시인은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여 시의 세계로 표출한다. “이건 아주 오래된 오늘 얘기”라는 시구처럼 위안부 문제는 과거에 이미 종결된 문제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위안부 문제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국익’이라는 차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본다면, 위안부 할머니 개개인의 고통스런 삶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죽어 사라진 사람들의 혼령을 불러내서라도 가슴 속의 한을 풀어내려는 시인의 시적 행보가 의미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열네 살의 무자는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소꿉 종지에 총탄을 담은 소녀의 삶으로 다시 현현되고 있다. 역사적 비극의 반복 앞에서 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인이 쓰는 한 편의 시가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가만히 있어야 할가? 시인은 말한다, 내가 밥이 되어 그대의 몸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혼례의 밤이 왔지 나는 배가 고팠네 서둘러 고개를 넘는데 접시만 한 불덩이가 앞을 가로막았지 배 밑에 품은 야윈 새끼도 보여주었네 (……) 오도가도 못하는 고갯길, 육탈한 해골들이 바람을 끓여 빚은 혼례의 술이 넘쳤지만 다리 한 짝 팔 한 짝 엉덩이 한 짝, 베어주면 줄수록 나는 배가 고팠네 초례청에서 기다리던 오래 전 죽은 달들이 내 허기를 기어들고서야 알았네 초승이거나 그믐이거나, 구름 속이거나 밖이거나, 살거나 죽었거나 내 몸속으로 들어와 나를 살린 것들 다 이렇게 두려웠겠구나 만월이었고 혼례의 밤이었네 온몸을 가득 채운 여러 겹의 허기가 참을 수 없이 슬퍼져 그대 몸속으로 통째 걸어 들어갔네 온몸을 통째 으깨어 먹였네 - 「여러 겹의 허기 속에 죽은 달이 나를 깨워」에서
굶어 죽어가는 호랑이 입속에 스스로 몸을 던진 붓다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취하고 있는 시다. 굶주린 호랑이의 둥그렇게 벌린 입 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감으로써, 내 몸을 살린 것들이 느꼈을 두려움에 공명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대지모신의 손길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이번 세 번째 시집에 주된 모티브로 나타나는 ‘밥’의 상상력이 미치는 지점도 자신의 한몸으로 타자들의 생명을 이어주는 대지모신의 상상력과 다르지 않다. 「그 많은 밥의 비유」에서 시인은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라고 노래하고 있고, 「사골국 끓이는 저녁」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너의, 몸속의 소”를 발견하고 있다. 살림과 죽음이 반복되는 상황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삶과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환기한다. 그러니, 시인 역시 그대 몸속으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듯 / 바싹 몸 붙여 그대를 부쳐 먹을”(「부쳐 먹다」) 수도 있는 것이다.
밥의 상상력은 이런 점에서, 관계의 상상력으로 이어진다. 밥을 먹음으로써 ‘나’는 주위의 사물들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내보인다. 그러니까 사물과의 관계가 있음으로써 ‘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깨끗한 식사」에 표현되는 대로, 우리는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다. 시인은 그러한 상황을 다른 것의 생명을 죽이는 순간의 “떨림을 잃었다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바, 밥의 상상력은 바로 여기서 생명 앞에서 펼쳐지는 떨림의 상상력, 요컨대 겸손한 마음의 세계로 이어진다.
사물 앞에서 떨린다는 것은 사물이 발산하는 생명의 파동에 시인이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일어나는 공명의 순간이라고 돌려 말할 수 있다. 공명하지 못하는 존재가 사물의 심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대지모신으로서의 시인의 상상력이 출발하는 지점은 이처럼 사물과의 공명이라는 ‘하나 되기’의 과정이 이룩되는 순간이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 그대가 피는 것인데 / 왜 내가 이다지 떨리는지” 모르겠다고 고백하는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라는 시의 화자도 그러하지만, 그대의 한(恨)을 풀기 위해 곡비(哭婢)를 자청하는 대지모신의 모습을 다룬 「칠월의 일곱 번째 밤」의 시적 화자 역시 살아 있는 몸을 받음으로써(죽임으로써) 새로운 탄생의 길을 스스로 활짝 열어 놓는 「대포항」의 대지모신과 다를 수 없다. 타자(사물)들의 고통과 하나가 되어 타자들의 고통을 위무하려는 김선우 특유의 시학이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한 가지 의문을 덧붙이며 글을 마치고 싶다. 사물과의 ‘하나 되기’는 주체가 사물 속으로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사물과 하나 되는 순간에도 주체는 사물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사물 속으로 사라진 주체, 다시 말해 사물과 하나가 된 주체가 과연 고통 받는 영혼을 치유하는 영혼의 길잡이(대지모신)가 될 수 있을까? 사물과의 ‘하나 되기’에 대해, 그리고 그 하나 되기에서 펼쳐질 시적 떨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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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노래꽃 / 문학비평 . 시읽기 2025.1.13. 노래책시렁 417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7.6. 우리나라를 곰곰이 보면, “시를 쓰자”고 할 적에 주춤하는 분이 수두룩하고, 뭔가 멋을 부려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글을 쓰자”고 할 적에 멈칫하는 분이 많고, 글은 아무나 못 쓴다고 여기곤 합니다. “하루를 쓰자”나 “오늘을 쓰자”고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이 보내는 하루야 늘 똑같은데 쓸거리가 있느냐고 하나같이 발을 빼더군요.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돌아봅니다. ‘시집’입니다.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고 밝히는 글이라고 느낍니다. ‘시집’이라면 책이름도 이렇게 붙여야 한다고 여기고, 우리 오늘도 우리 하루도 우리 삶도 아닌, 머리로 지은 틀에 따라서 갖은 꾸밈길(수사법)을 부려야 한다는 보기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나 글을 굳이 이렇게 써야 할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왜 ‘삶글’도 ‘살림글’도 ‘사랑글’도 아닌 ‘문학·예술·문화·창작·수사·기교·시작’을 해야 하는지 곱씹을 일입니다. ‘문학잡지 발표’를 해야 하기에 써야 한다면, 이미 모든 문학은 죽었습니다. 아줌마 아저씨가 하루노래를 그리기를 바라요. 가시내 머스마가 오늘노래를 부르기를 바라요. 노래가 흐르는 나라가 아름다워요. 노래가 없는 나라는 메마른 허허벌판이에요. ㅅㄴㄹ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낙화, 첫사랑/12∼13쪽) 중음(中陰)의 보드라움, 몽유하는 혼들이 숨구멍처럼 열렸네요 오, 예뻐요. 빗방울처럼 제각각 몸을 둥글린 시간들 / 우리가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와도 / 씨앗들 퍼지네요 (뻘에 울다/40쪽)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김선우, 문학과지성사, 2007) 이 시집이 세상에 보내진 이후 → 이 노래책이 나온 뒤 → 이 노래책을 낸 다음 3 당분간 시를 떠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 한동안 노래를 떠날지도 모르겠다 → 살짝 노래를 떠날지도 모르겠다 3 청탁받고 발표하는 관행으로부터 떠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글을 여쭈고 내는 틀을 떠나려고 한다 → 글을 바라고 싣는 틀거리를 떠날 셈이다 3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 흙에 사는 누구한테 무언가 먹이는 듯한 11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 떨어지는 그대를 앞지르겠습니다 → 곤두박는 그대를 앞지르겠습니다 12 지구의 시간은 계절 밖을 떠돌았을 것이니 → 푸른별 하루는 철을 벗어나 떠돌 테니 17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이데 → 그런데 내가 더는 안 떠는데 20 세계의 바깥이 아니라 안쪽을 선택한 아기에게 축복의 말을 주는 듯했네 → 바깥나라가 아니라 안쪽을 고른 아기를 기리는 듯했네 25 번쩍이는 장대한 콘크리트 유적지 → 번쩍이고 드넓은 잿더미 → 번쩍이고 커다란 잿덩어리 33 홀홀한 이슬의 손이 어느 날 → 뒤숭숭한 이슬손이 어느 날 → 가벼운 이슬손이 어느 날 38 중음(中陰)의 보드라움, 몽유하는 혼들이 숨구멍처럼 열렸네요 → 보드라운 쉰날, 꿈에서 노는 넋이 숨구멍처럼 열리네요 40 우리가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와도 → 우리가 오직 날개 무게로만 와도 40 시들지 않는 신접살림이 → 시들지 않는 꽃살림이 41 혼례의 밤이 왔지 → 꽃가마 밤이 왔지 → 꽃살이 밤이 왔지 50 극점에 도달하면 비워야 하는 것이 지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 끝에 닿으면 비워야 하는 푸른길이기 때문이다 55 분분한 꽃잎들, 내가 그들의 엄마였다면 눈물로 말렸겠지만 → 나풀대는 꽃잎, 내가 꽃잎 엄마라면 눈물로 말리겠지만 → 흩날리는 꽃잎, 내가 꽃잎 엄마라면 눈물로 말리겠지만 62 벼랑 위 홑겹 줄지어 늘어선 집들 → 벼랑에 홑겹 줄지은 집 → 벼랑에 홑곁 늘어선 집 75 내가 곡비(哭婢)로 하늘머리 이고 서서 오작교를 내놓아라, 큰 곡을 부르나니 → 내가 눈물종으로 하늘머리 이고 서서 까막까치길 내놓아라, 크게 부르나니 → 내가 우는종으로 하늘머리 이고 서서 까막까치다리 내놓아라, 외치나니 78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 고단할까 걱정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걱정없어요 → 고단할까 근심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멀쩡해요 87 돌담 속 너의 꽃잠 만진 적 있지 → 돌담에서 네 꽃잠 만진 적 있지 → 돌담 네 꽃잠 만진 적 있지 95 인생은 아직 진행 중이에요 → 삶은 아직 흘러요 → 오늘은 아직 나아가요 → 하루는 아직 번져요 118 나를 보고 있는 중에도 나만 보지 않고 → 나를 보는데도 나만 보지 않고 121 사골국 은하에 밥 말아 → 소뼈국 누리에 밥 말아 → 뼛국 바다에 밥 말아 121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