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망이다. 어떤 책이든 장점부터 찾고, 빛나는 부분을 살려 기록하고자 노력하는 편이라서, 이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에 대해서도 그렇게 노력했다. 참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대단히 실망하고 말았을 뿐이다.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이라는 제목도 참 거창하고 우리 농업 관계자들의 세미나 결과를 정리해 묶은 책이라는 해설 역시 부담스럽긴 했지만, 왠지, 다채로운 통계 및 현장조사 그리고 여러 현상에 대한 면밀한 분석 따위가 기대될 법했다. 그리고 잘하면 21세기 우리 농업이 나아갈 길에 대한 좋은 답을 얻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책은 과장된 수사와 횡수설거가 난무할 뿐, 마땅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대안’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식량자급률 환경생태보존 유망산업선도, 과연 누구의 문제인가? 책은 서두에서 한국 농업을 ‘천길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직전’이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 농업이 완전 붕괴될 경우 발생할 세 가지 문제를 제시한다. 첫째, 식량자급 위기. 둘째, 농업의 다원적 기능 상실. 셋째, 미래 산업발전에 필요한 선도적 기능 상실. 네이버 지식검색 수준의 상투적인 내용을 늘어놨다는 것도 딱한 노릇이지만, 각 문제에 대한 진단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게 문제다. 튀는 것 하나만 꼬집자면, 21세기에 나노 생물학이 유망할 것이라는 전망 끝에 “농업은 생물학적 원리를 바탕으로 진행되어왔다. 이런 점에서 농업은 앞으로 생명을 기르는 산업으로서 가장 선도적인 산업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건 논리적 오류일 뿐만 아니라, 나노기술이 이미 수년 전부터 의료ㆍ제약분야에서 발생시켜온 부가가치 규모에 대한 무지 내시는 무시의 산물처럼 보인다. 당최 문제제기부터가 멋쩍다. 책은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20%로 내려앉은 것에 비통해하고, 농경지가 감소하면 환경생태가 불량해질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이게 과연 농업인의 고민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추수를 마치고 상경하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농민들이 과연 국가적 식량안보나 환경파괴를 걱정하여 그토록 비분강개했다는 말인가? 요는, 이 책이 한국 농업에 대해 고민한다며 서 있는 자리가 ‘한국 농업의 실제현장’을 딛고 있는 보통 농민의 입장과 퍽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는 게다. 책의 입장은 말하자면 애국지사의 자리거나 애국적 네티즌의 자리와 같다. 국가단위 경제에서 농업분야가 차지하는 위상과 기능이 강화돼야한다는 주장은 일견 농업과 농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기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에 대한 사랑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이 한국 농업에 대한 ‘희망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국민농업’은 적어도 책 스스로의 논리상 어긋남은 없는 것일지언정, 상식적으로는 논리적 비약의 허황된 산물일 뿐이다. 나아가 책은 쿠바의 도시농업 성공을 모범사례로 내세우며 ‘국민농업’이 실현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도시에서의 식료품 자급률이 높아지면서 … (국가적) 식량자급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럼으로써 생태농업으로의 전면적인 전환이 가능해지면서 국제 농업자본으로부터 우리 농업을 지킬 수 있는 자생력이 확보된다”는 것이다. 물자유입이 원천 봉쇄됐던 극단적 상황에서 도시농업 활성화가 불가피했던 아바나의 기적이, 물자가 흥청망청 넘쳐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용기가 참 부러울 따름이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인용하더라도 주말농장 활동을 북돋우는 정도에서 참고 있는 다른 책들의 현실성을 참고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주장은 없었을 듯싶다. 그러나 책은 설상가상, 아프리카 부시맨의 일주일 단위노동시간이 열두 시간밖에 안되는데도 여유롭게 살았다는 둥 믿거나말거나 식의 가십거리를 근거로 들어가며 현대인의 대각성과 라이프스타일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리프킨이 『엔트로피』에서 ‘저엔트로피 사회 지향’을 주장한 것에 대하여 레긴이 비판한 바대로, 모든 인간이 욕망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다는 황당한 전제 위에서라면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을 것이다. ‘국민농업’, 현실적이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발상 책은 소말리아가 자급자족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농업부문이 말살됐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파탄의 원인을 정부와 국민이 농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탓이라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물론 그 탓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투기성 국제자본이 작정하고 덤벼들어서 쫄딱 망한 나라 사람들한테 ‘그러니까 진작 농업의 중요성을 알았어야지’라는 충고가 고맙게 들릴지는 의문이다. 일일이 꼬투리 잡겠다는 심보는 아니지만, 북한농업의 생산효율성 감소에 대한 진단도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정작 국가단위 경제체제의 효율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이는 지점에서 책은 뜻밖에도 농업현장의 생산방식을 문제 삼고 있으며, 장차 남한의 기술력이 북한농업의 생산성에 기여할 것이라는 진부한 결론에 빠져버렸다. 저자와 그 동료들이 세미나에서 오히려 일본 도시농업의 사례에 천착했다면 좀 더 현실감 있는 대안을 내놨을까? 우리 농업의 단작화를 우려하며 혀를 차는 대신, 온 나라가 포도밭 천지인데도 고수익을 올리는 프랑스의 사례를 제시했다면 좀 더 재밌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대규모 농경의 폐해를 부각하는 대신, 캘리포니아의 엄청나게 넓은 경작지들이 효율적으로 소유ㆍ경영되는 시스템이나 그곳의 농업대학 교육이 어떻게 전문농업경영자를 키워내고 주정부에서 농민들을 어떻게 지원하고 있는지 소개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까? 귀농을 준비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독자로서도 또한 이 책 『우리 농업, 희망의 대안』이 아쉽게 느껴지는 까닭은, 단지 ‘국민농업’이라는 ‘희망의 대안’이 너무 비현실적이서 온전한 희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차라리 엄청나게 비현실적인 발상이라도 최소한 재밌는 이야기라도 됐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쉬움의 크기가 더욱 큰 까닭은 저자가 다름 아닌 박세길 선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읽고 모순투성이 우리 현대사에 공연히 분노했던 십 수 년 전의 추억이 아직 생생한 것이다. 세미나라는 명목 하에 몇 사람이 간헐적으로 만나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정리한 글일 테니 다소 두서없이 진행될 소지도 있었겠지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를 떠올리며 이 책을 집어 드는 독자들로서는 무언가 통렬하면서도 예리한 텍스트를 기대할 법하지 않은가. 아무쪼록 ‘한국 농업’을 주제로 놓고 고민하기 위해 조직되는 진보적 모임이 더욱 많아지고 활발해지길 기대하며, 아울러 그 고민의 기록 또한 성숙해지기를 희망한다. <끝> |
|
농업, 농사, 농부, 농촌...우리는 흔히 "농"자가 붙은 이 단어들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필요성을 실감하고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모두 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장을 보러가면 수많은 수입먹거리에 밀려 우리 땅에서 나온 우리의 먹거리는 찾기 어려워졌음을 느끼게 된다. 모든 가공식품이 수입 식재료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기감이 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현 대한민국의 식량자급률이 26. 9%라는 것이다. 미국 135.4%, 흐랑스 222%, 이탈리아 80%, 일본 40.4%....무서운 현실이다. 잦은 기상이변으로 10년 후 세계는 식량 부족에 시달릴 것이란다. 식량 확보를 위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는 세상이 다가오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정부나 국민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경제발전을 이야기 할 때는 선진국 어디를 부러워하며 뒤쫓는데, 어찌하여 생명과 직결되는 식량에 관한 문제엔 뒷전인지 걱정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하다.
우리 시부모님이 계신 곳은 우리나라 곡창지대로 유명한 호남평야다. 그곳에서 벼 농사와 여러 작물의 밭농사를 하신다. 마을엔 젊은 사람이 없다. 교육과 경제를 생각해 모두 도시로 이주하고 노인분들만이 남아 힘겨운 농사를 이어가고있다. 이는 현실이다. 이주 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상황도 이해가간다. 매년 줄어드는 농지와 수확량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 것일까? 이대로 식량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일까?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지속 가능한 국민 농업의 모색 [우리농업, 희망대안]'이라는 이 책에서 그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저자는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농업 모임의 토론을 기초로 자신의 주관을 반영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우선, 그 대안이란, 농업을 국민 전체가 이해 당사자로서 먹을거리 문제를 함께 책임지는 국민농업으로 전환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의 힘으로 농업을 지키고 일궈나가야 함을 힘주어 말한다. 이와 맞물려 착한 소비를 생각하게 되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계해 직거래로 농수산물을 공급하고 이를 소비자기 적극적으로 구매하는 미래지향적인 소비행위 또한 지금의 현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농업살림의 길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국민 농업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첫째, 토지 생산력 저하, 생태계 파괴에 따른 자연 방제력 약화등으로 화학확에 기초한 관행농업을 버리고 생태농업을 택하는 것이다. 둘째, 인구의 다수인 도시인들의 농업 참여를 확대 시키는 것이다. 셋째,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뛰어넘고, 농산물이 자유무역 대상에서 제외되어 새로운 생산유통, 소비구조를 만들어 전 국민적인 먹을거리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설계도가 아닐 수 없다. 각각의 제안에 적당한 예를 들며 가능성을 보여주고있다. 책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을 채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 그 결과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구멍 뚫린 제방 뒤로 밀려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물줄기를 막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든 시작해야하지 않을까?
정부와 사회, 지역과 가정이 하나된 마음으로 후손을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시기에 이 책은 경고와 함께 대안도 내놓고 있다. 모두가 읽고 함께 고민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극 추천한다. |
인상깊은 구절"인류 문명사의 전환은 농업의 공업화가 아니하 공업의 농업화로 방향을 잡아갈 것이다. 결국 농업을 경시하는 나라는 21세기 경쟁 구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
"하늘이나 땅의 온기,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대들에게 팔 수 있단 말인가?" (1854년 현재의 워싱턴 주 땅을 팔라고 하는 미국 정부에 대해 시애틀 추장이 한 말) "아침에 펜을 들면 오후에는 밭을 갈라."(호세 마르티. 쿠바 독립의 아버지) 한국 농업은 다 망했다고들 한다. 설사 망하진 않았더라도 머지않아 망할거라고도 한다.
80년대초 대학 다닐 무렵에 미국의 오만과 횡포에 분노하면서도 농업은 그래도 미국처럼 대농이 되어야 된다고 믿었다. 드넓은 평원에 기계로 씨뿌리고, 물주고, 비료주고, 농약주고, 수확하고, 포장하여 수출하는 그런 대농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농이 아닌 소농이 필요하며, 농가의 소득은 국가적 차원으로 보전되어야 하며, 농업 만큼은 자유무역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한국 농업에서 희망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아래 이 책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농업을 희생하는 공업발전,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관행농법, 농가 소득보전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인해 농민투쟁은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했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그런데 막상 선진국들은 농가소득에 대해 국가가 직접 보상해 주고 있으며 보조금도 주고 있고, 개방요구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농업의 보호와 육성을 위해 투입해야 할 비용보다 농업이 붕괴했을 때 치러햐 할 대가 더 크기 때문이다. 또한 식량은 단순히 먹거리가 아니라 무기도 될 수 있다. 남을 치는 무기가 아니라 그것으로 타인의 굴복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무기 말이다. 농업은 또한 식량 생산만이 아니라 다양한 환경보전의 기능도 수행한다. 마치 열대우림이 지구의 산소를 대량으로 만들어내듯이 말이다. 따라서 지은이는 말한다. 농업은 국민 전체가 이해당사자가 되는 국민농업이 되어야 한다고. 국민농업이 되기 위해서는 농민은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하고 다원적 기능을 유지하고, 국민은 농민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 농업은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그저 몇 년 생산하고 나서 '힘이 빠져버리는 농토'는 의미가 없다. 윌 조상들이 이처럼 지속가능한 농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논, 분뇨의 재활용을 이용한 '영양의 순환', 그리고 통 중심의 먹거리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공업화와 함께 지속가능한 농업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논은 아파트 단지로 변하고, '똥'은 더러운 것이어서 물과 함게 씻어내야 하며,그 자리를 비료와 농약이 대체한 것이다. 게다가 농업은 생명의 행위가 아닌 자원의 수탈행위이자 자본의 흥정 대상이 되었다. 농업의 세계화란 그 그럴싸한 포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쥐약이 되어가고 있다. 국제 농업자본, 즉 5대 곡물 메이저는 세계 곡물거래량의 60%, 미국 내 곡물 거래량의 85%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의 종묘회사도 이제는 더이상 우리 것이 아니다. 모두 다 곡물 메이저의 자회사로 편입이 되었다. 이들 곡물 메이저는 단순히 곡물의 유통만 독점하는 것이 아니다. 종자회사의 인수를 통해 전세계 종자를 지배한다. 익히 들러온 바와 같이 2세를 생산하지 못하는 종자가 바로 그것이다. 게다가 다른 나라의 씨앗에 대해서까지 특허 출원을 하여 제3세계의 농민은 자기 나라이 시앗에 대해 특허료를 내야 한다. (정말 말도 안되는 현실이다.) 세계가 생산하는 식량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굶어죽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기아와 비만의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소마리아는 70년대까지 식량자급이 가능했다. 그러나 1981년 IMF의 구조조정 뒤 국가적인 기아상태에 직면하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나라는 엉망진창의 상태에 놓여있다. 쿠바는 구 소련과의 우호관계를 밑바탕으로 부등가교환을 통해 경제적으로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다. 즉 100원의 농산물을 주고 700원어치의 석유를 받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의 경제봉쇄를 받으면서 상황은 돌변했다. 악화된 경제 상황 속에서 식량 자급의 길은 유기농과 도시농업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원치않게 지속가능한 농업을 실험했고 그것이 성공했던 것이다. (최근 신문에서 카스트로가 쿠바의 경제실험이 실패했다고 한 보도가 있기는 했다.) 비료와 농약을 ㅅ용하지 않음으로써 지속가능한 농업, 유기농업을 추구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작물의 공생관계나 천적을 이용한 병충해 방지가 있다. 단작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 윤작과 혼작을 해야 한다. 관행옹법으로 농사짓 던 땅이 지력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바로 우리에게는 쿠바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같은 유기농업, 도시농업, 지역순환농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놉업은 대농이 아닌 소농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기후변화를 볼 때 한반도의 농업은 앞으로 그 양상이 많이 바뀔 것이다. 당장 사과만 보더라도 10-20년 안에 장수 사과, 경북 능금이라는 말이 업서질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강원도에서 사과를 재배하는 것이 좀 어렵다고들 한다,. (물론 사과 재배에 성공한 농가 있다고 한다. 강원도 홍천에...어쩌면 강원도나 북한 지방에서만 사과가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생협과 학교급식, 도시민과 농민의 교류가 우리 농업에 필요하다고 지은이는 본다. 그런데 학교급식조례에 '우리 농산물'이나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문구를 넣는 것이 WTO규정 위배라고 한다. (세상에나!) 아울러 소유권과 사용권이 분리된 농지공유제가 필요하며 농지소유 상한제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 상한제가 폐지되면서 도시민의 시골 부동산 투기와 소농의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의 공시지가 총액은 2300조원이라고 한다. 국내총생산액 GDP 778조원의 3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그만큼 땅값이 뻥튀기 되었다는 말이다. (이 땅값이 10%만 떨어져도 우리 경제는 난리가 날 것이다. 땅값은 끝없이 올라가야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부동산 부자들의 입장에서는 절실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한국은 이제 고령사화에 진입했고 초고령사회 진입이 얼마 남지 않았다. 2050년이면 60세 이상 국민이 38%에 달한다고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연과의 교감을 회복하는 것이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세 마르티의 말을 빌려보자. "어린이들은 대지에 관한 지식을 길어야 한다.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연에서 배우는 것만이 실질적이며 풍부하다. 아침에 펜을 들면 오후에는 밭을 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