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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réalité)이 어느 순간 거짓(figurec)으로 바뀔 때 어떤 기분일까. 내가 생각하던 진짜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나는 상실감을 느낄까? 배신감을 느낄까? 아니면 아무런 느낌조차 없을까?
몇 년 전에 크게 화제가 되었던 대행 아르바이트가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인사이트에 올라있고 이제는 별다른 화제거리가 되지도 않을 정도로 하나의 일처럼 인식이 되고 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거짓 가족과 거짓 친구를 만드는 일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직업의 하나가 되버렸고, 그 일을 하는 사람도 페이가 좋은 하나의 일거리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나 또한 대행 아르바이트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터라 이제는 거부감 없이 일종의 소일거리가 되버린 셈이다. 과연 거짓을 거짓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지금의 행태가 괜찮은 것일까? 이제는 더 이상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단이 안될 정도로 뒤섞여버린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바른 것일까?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장례식을 찾아다니는 남자에게 또 다른 사람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도 피귀렉이냐고. 우리 식으로 하자면 대행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꽤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나름의 전통과 명분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거대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피귀렉 집단. 자신의 삶의 대부분이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주인공의 좌절감과 상실감에 대한 이야기가 플라스틱 피플이다.
내용도 독특하지만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특이한 구성으로 되있는 것 같다. 주인공은 극작가를 꿈꾼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대본으로 연극이 올라가길 고대하면서 써내려간다. 극본 안의 주인공들이 때로는 글의 이해를 돕기도 하고 흐름을 잡아주기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분량의 극본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의 중요도가 높다고 할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우리 주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대행업이 여기저기서 성행하고 있는 한국에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과연 얼마나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미 거짓된 삶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같은 상황 속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소름끼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모르게 이런 소름끼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거짓된 삶에 많이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과연 이러한 현상이 바로 잡힐 수 있을까.
만화로도 나와있던데 한 번 읽어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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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들이 있다. 너무나 익숙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것’의 표면, 껍데기였을 뿐이었다는 진실. 우리를 뒤뚱거리게 하는 그 진실의 무게가 무수한 허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어둠이 들어앉은 다락방에 올라가 먼지 낀 시간의 시체들을 뒤적여보기도 한다. 그러나 생을 향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먼지를 털어내듯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세계의 폐허 위에 흩어진 허술한 생의 편린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고독 속에서 소리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존재를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사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장소이다. 사회 내에서 개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인과의 접촉을 하게 된다. 무수한 낯선 타인들과의 접촉에서 우리는 때와 장소, 관계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익혀왔다. 적당한 가식은 그래서 사회적 동물의 불가무한 것이 되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새삼스럽게 여겨질 만큼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다. 오히려 한결같이 꾸밈없는 사람 -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은 반사회적인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일상적 가식’에 대한 불감증은 길을 헤매는 집 잃은 개처럼 우리들의 진실이 생의 언저리만을 맴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집(생의 진실)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자각과 함께 혼돈에 빠진다. 생을 흉내내는 허위가 있을 뿐 생은 없는 것이다. 진실의 부재. 생의 부재. 이것이 사회적 동물들의 진실이다.
‘나’는 단 한 편의 희곡도 완성해본 적이 없는 서른 살의 희곡작가다(소설의 장과 장 사이에 그의 희곡이 실려있다). 딱히 열정적으로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그의 주된 일상은 신문의 부고란에 실린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식의 형식이나 분위기에 대한 평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슬픔에 잠긴 채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르는 고인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 속에 빠졌다.” (p.20)
‘나’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부모님, ‘나’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동생, ‘나’에게 성적 환상을 심어줄 만큼 매혹적인 동생의 애인 안나, 그리고 예술 후원자이자 친구 부부인 쥘리앵과 클레르가 그의 일상의 중심을 채우는 인간관계의 전부다. 똑같은 일상의 궤도 - 그 한복판을 채우는 가식적 인간관계에서 ‘나’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쥘리앵과 클레르 부부는 나에게 매주 다섯 끼의 식사를 제공했고, 나는 매주 다섯 차례 그 두 사람 중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삶 앞에 그들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는 사막에서 나름대로 초라한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p.16)
“늘 그래 왔듯이 아버지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무관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역할을 말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죽은 닭의 엉덩잇살을 조금씩 음미하는 데 만족하고 계셨다. 동생은 냉동 강낭콩에 대한 불만을 쏟아 놓는 것으로 나를 도우려고 나섰다. 동생은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결국 어머니는 화제를 바꾸셨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오늘 오후에 안나를 만날 거니?” 동생은 닭다리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오후에 만날 거니?” 이 말은 달리 보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오후에도 너는 아무도 안 만나니?” (p.25)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면서, 쥘리앵은 주로 클레르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기보다는 큰 목소리로 정기적인 종합 보고를 한다고 할까. 미치광이로 보이지 않으려면 자신이 떠들어대는 동안 누군가를 앞에 앉혀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p. 31)
인용문에 그은 밑줄 위의 단어들에서 나는 일상적 가식과 그것에서 빚어지는 권태를 본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죽음’이라는 것을. ‘나’의 희곡(연극을 위한 글) 쓰는 행위와 장례식에서의 형식적 슬픔은 일상적 가식(연극적 일상)을, - 소설의 말미에서 ‘나’의 희곡 속 등장인물들이 ‘나’의 현실로 들어오는 설정이 있는데,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진 이러한 설정은 우리의 현실이 곧 연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 장례식과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죽음’은 일상의 허위가 빚어낸 개인의 정체성 상실, 진실(혹은 생의)의 부재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 사람들은 겨자 소스를 곁들인 죽은 토끼요리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 (중략) 사람들은 왜 바스크식 죽은 멧돼지 스튜라고 말하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건 무엇이든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p.13)
*피귀렉이라는 인간파견회사의 직원 - 곧, 배우 -과 ‘나’의 첫 만남을 ‘장례식’에서 이루어지게 한 설정은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의미심장한 것이다. 말한 대로 피귀렉은 인간파견회사의 직원이다. 타인의 생에서 결여된 존재를 대신 연기해주는 자들이다. 허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피귀렉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생의 허위들을 직면하고 자신 또한 허위의 노예였다는 무서운 진실에 도달한다.
“나이가 들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거대한 바위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여, 결국 반쯤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시커먼 잿더미가 되고 만다. (중략) 더 이상 깨질 수 없는 것도 깨질 수 있으며, 가루 역시 더 미세한 가루가 될 수 있고, 다 나았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재발하고 마는 종양처럼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지점에서 기만당할 수도 있다.” (p.190)
“무슨 놀이를 하는 거니?”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골콘드(Golconde,1953)를 모방한 이 책의 표지그림은 ‘플라스틱 피플’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책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똑같은 생김새의 남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서 받는 충격과 혼돈은 생의 허위를 확인한 순간에 받는 충격만큼이나 강렬하다. 생의 ‘허위’와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한편으로는 지켜나가는가. 가식이 반드시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로운 진실보다는 이로운 거짓이 낫다. 나는 착한 거짓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선한 목적에서 비롯되는 가식은 사회적 동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배려다. 각설하고 - 다시 골콘드로 돌아와서, 그림 속 똑같이 보이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일까.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나는 즉각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지나칠 것이다. 진실과 허위, 진짜와 가짜. 그것은 표면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왜 ‘플라스틱 피플’ 속에서 길을 잃었는가.
“매일, 한 노부인이 바게트를 고르고 돈을 지불한 후에 훈제 햄 조각이 들어있는 장바구니에 바게트를 담는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한 경찰관이 자동차들이 정확하게 보이는 시야가 확 트인 덜 혼잡한 교차로에 서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우체국의 한 창구 위에는 ‘잠시 문을 닫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뒤로 대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50대의 남자가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다섯 명의 여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9시부터 9시 40분까지 정문 앞에 모여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p.185,186)
그 스스로가 ‘플라스틱 피플’이었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진실보다는 그럴듯한 허위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쓰디쓴 진실을 삼키기보다 달콤한 허위를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를 통해 당신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사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가장 사치스러운 거울, 가장 값비싼 거울을 즐겼을 뿐입니다.” (p.250)
*프랑스어로 단역배우는 ‘피귀랑(figurant)’ 또는 ‘피귀라시옹(figuration)’이다. ‘피귀렉(figurec)’이란 명칭은 이에 착안하여 만든 조어이다. (역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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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피플]의 역자 후기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영화 '트루먼쇼'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의 입장들에서 차이가 나고, 영화 '트루먼 쇼'가 지극히 진취적인 (할리우드적인?) 결말로 마무리 되는 것에 비해, [플라스틱 피플]의 결말은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며, 그로 인해 자연히 이야기하는 바도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야기 속의 인간관계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계약관계에 의한 외양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따라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가 (트루먼 쇼), 아니면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현실을 잃어버리는가(플라스틱 피플)도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 두 이야기가 관심을 끄는 이유는 오히려 이야기적 장치, 즉 계약에 의한 인간관계에 있다.
[플라스틱 피플]에서 보여주는 부모, 친구, 연인은 오히려 계약관계에서 자연스럽다. 자신의 일을 인정해주고, 또 반대로 스스로의 일을 털어놓으며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친구, 아름다우며 호의적이고 지적인 연인. 극히 자연스러운 이런 일들을 주인공은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다. (독자들 역시도 자신있게 장담하긴 어려울 것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친구, 자신의 연인과 맺는 인간관계는 금전적인 보상을 댓가로 애정을 거래하는 아주 부자연스러운 인간관계이지만, 이들이 겉으로 보여주는 인간관계는 더 이상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계약을 구매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주인공의 가족들은 계약연인에 행복해 하고, 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이 산 거짓 극단 관계자 때문에 친구의 성공을 축하해준다. 주인공 스스로는 변한 것이 없는데 이런 거짓 계약 몇 가지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완연히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묘사들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현실에서 이런 완벽한 관계는 오히려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하니, 이렇게 계약을 통하지 않고서는 진실된 인간관계는 겉흉내조차 내기 힘들게 되어 버렸나 하는 생각과 주인공의 계약을 통해 산 사람들이 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의 관계를 개선시키는 것을 보면서 꼭 주인공처럼 인간관계를 계약하진 않더라도, 우리 역시도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어 인정받기 보다는 가장과 꾸밈을 통해 좀 더 그럴사하게 보이게끔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우리의 경험과 맞물려 설득력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이런 겉모습이 중요한 인간관계 자체에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소개글에는 외로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책에서 외로움은 그렇게 조명되는 대상은 아니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가벼운 거짓에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라도 되는 듯 만족하다가, 장난감을 계속 가질 수 없어 괴로워하고, 끝내는 아예 계약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현실도피를 한다. 짐작컨대 소개글은 주인공의 여러 행동들 이면에 숨은 동기로 외로움을 짚어낸 듯 하다. 이상적인 인간관계, 이런 관계를 믿지만 스스로는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고 어떻게 해야하는 지도 모른다면, 외로움은 당연한 감정일 것이다.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는 키워드라면 이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결혼식에 하객을 사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신랑과 신부 한 측에 하객이 많은데 그에 비교되게 적을 때, 사람을 사서 하객을 연기시킨다는 것이다. 또 그러고 보니 몇 년 전부터 가짜 연인 아르바이트라는 주제로 몇 건의 뉴스를 심심치 않게 접했던 기억도 난다. 대부분은 외양에 치중한다며 그들의 허영을 탓하곤 했다. 남의 일이니 가볍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며 말하곤 했다. [플라스틱 피플]의 주인공을 읽으면서, 이 책의 소재로 직접 연결된 이들을 생각해보니, 이들 역시도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외로워했던 것이 아닌가, 또 가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의 구성으로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전환이 두 번 있다. 첫번째 것은 독자의 '혹시..?' 하는 의혹을 확인하게 되는데, 아주 놀랍진 않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혹시?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순간에 아찔함을 준다. 확인하는 순간 '역시.'라며 스스로 만족하게 하기도 하고... 두번째 전환은 말미에 일어나는데, 흔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반전은 상투적인 것으로 그렇게 큰 의미를 갖는 것 같지는 않다.
*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소설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생각하게 하는 소설인 셈인데, 1984년을 보면서 빅브라더를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시사하는 점이 있는, 소설적 재미도 있는 책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는 소재가 그렇게 낯설진 않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재밌는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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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친구.. 혹은 아끼는 회사동료.. 그들은 날 사랑하고 진심으로 아낀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움을 느끼는 어느순간.. 그들이 날위해 적절한 댓가를 받고..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인간파견업체의 사람들이라면 그사실을 알게 된다면? 난 과연 어떠할까?
플라스틱 피플.. 그들은 인간파견전문업체에서 나온사람들이다. 나의 남자친구역할을 잘수행해낼 전문배우 혹은.. 들러리의 단역배우들 까지..그들은 세상 곳곳에서 자기본분에 충실하며 일할뿐이다.
그는 외롭다..그에게는 사랑하는 부모님 그리고 똑똑한 동생과 동생의 연인 안나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 쥘리앵과클레르 부부가 있다.. 그리고 어느순간 자기삶에 뛰어들어온 한남자..부비에 신문의 부고란에 실린 장례식마다..품평을 하는 소일을 하는 그.. 장례식장 마다 마주치는 남자로 평화롭던 그의 삶은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부비에는 인간파견업체에서 고용된 피귀렉이란 사실을 믿을수가 없다. 어찌 우리 삶에 그런일이..하지만 주위를 둘러볼수록..느껴지는 건 ..피귀렉들이다. 그렇게 피귀렉의 존재를 처음 알게되어 혼란스럽지만.. 평생을 살다 생을 마감하는 장례식장이 썰렁해지는것..그것보단 피귀렉을 고용해서 .. 가는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의 충분하지 않은 인간관계에 피귀렉은 나쁜존재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될 쯤.. 그도 어느순간 피귀렉의 의뢰인이 되어있다. 사랑하는 연인 타니아를 부모님께.. , 그리고 그의 희곡을 완성시켜줄 후원자의 남자를 .. 사랑하는 쥘리앵과 클레르 부부에게 보여준다. 살아오면서 그의 삶이 이토록 충만했던 적이 있을까? 그런 나날중..우연히 주방에서 낯익은 피귀렉 청구서를 보게되고 .. 부비에의 말처럼.. 조부모님혹은 부모님이 고위의뢰인이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 또다시 혼란을 겪는다. 타니아는 단 몇일 만에 가족이라는 이름 깊숙이 박혀진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그리고 다정다감한 어머니.. 그리고 동생과 안나.. 하지만 더이상 타니아를 고용할 돈이 없게되자.. 하루밤의 꿈인냥..모든것은 사라진다. 타니아를 찾아 나선다..여기저기.. 그리고 그녀를 만나게된 어느바.. 그녀또한 피귀렉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라는 충고와 함께 손목을 꽉잡은 그의 손을 뿌리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의 부재가 가져다부는 불행에 비추어 그것의 중요성을 파악할수 있다. 나는 타니아가 그들에게 정말 한줄기 햇살이나 신선한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 몇 주만에 없어서는 안되는 .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상적인 며느리가 된것이다.
크리스마스..타니아의 선물을 건네며..절대로 먼저 열어보지 말라고한다. 어머니는 진정 그녀를 사랑하신 거다.. 하지만.. 정작..그에게는 사랑하는 가족도 ..동생도 안나도.. 겉을 맴돌뿐..그의 공허한 맘을 채워줄수없다. 타니아의 빈자리..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를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을 한다. 하지만.. 쥘리앵의 집에 방문했을때 ..그들은 몇달 사이 너무나 달라져 있다. 그들의 작은 못짓하나.. 말하나하나.. 진정한 친구를 잃는걸까? 크리스마스저녁.. 부모님은 삼촌댁으로.. 그는 다락방으로 추억을 찾아 간다. 이곳만이 헝크러짐이 허용되는 장소다.. 작고 철제상자처럼 작은 상자하나를 발견한다. 직감적으로 열고픈 충동에 잡혀.. 공구박스에 망치와 드라이버를 찾아.. 상자를 연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의 몸은 돌덩이 처럼 굳어버린다. 피귀렉의 계약서와 청구서들.. 세월이 흘러 빛이 바랬다. 아버지의 삶속에 부모님의 삶속에 피귀렉은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던 거다..
종이뭉치를 읽어가는 동안 내 추억은 고통스러운 변화를 겪었고 , 기억 속의 사건들은 장면이나 소리가 완전히 엉키고 뒤틀렸다. 끝없는 나비효과로 나의 뇌는 완전히 뒤죽 박죽 되었다.
갑자기 몇줄의 글이 나를 극심한 고통과 혼란에 빠뜨렸다. 지금까지 발견한 것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들을 한쪽으로 제쳐 두게 만들었다. 그 몇줄 속에 내 1년의 살미 스치고 지나갔다. 속임수와 거짓으로 가득한 혼돈을 여전히 삶이라 부를수있다면 말이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설사 아무 소영 없는 짓이라 할지라도 , 나는 상자를 키치 스타일 항아리를 향해 내던졌다. 항아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연인도 없이.. 사랑하는 친구도 없이 자꾸 외로이 자기혼자만의 삶속으로.. 속으로만 들어가는 아들을 가엽게 생각한 부모님은.. 쥘리앵과 클레르 부부를 그의 친구로써 .. 장기간에 걸친 전문배역의 ..피귀렉으로 의뢰한다. 그리고 타니아라는 아들의 여자친구를 보고 진정으로 아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계약을 만료하고자 한다. 그런 시점에서 크리스마스날.. 그는 쥘리앵을 찾은것이었다. 그들의 당혹스러움엔 .. 언제나 찾아와도 좋다는 말속엔.. 진심이란건 없었을까?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이야기.. 모두가 얽히고 설혀있는.. 거짓과 거짓의 삶속에 물들어 있다. 어쩌면..그도 타니아..아니 실비를 정말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져..타니아 그 이미지의 ..자신을 사랑했는지도.. 실비라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생각해본적은 없으니까 말이다. 처음.. 장례식장에서 부비에를 보고.. 장례식장마다.. 부비에의 존재를 느끼고 .. 삶의 허구를 깨달은 그.. 어쩌면 그도 부비에의 삶에 고용된 피귀렉인지도 모른다..아니.. 부비에의 삶에 고용된 피귀렉이다. 부비에를 통해 그는 자신의 허구를 본것이다. 삶의 거짓을 깨달았다. 부비에는 그를 끝까지 돕고싶어했다. 부비에에게 들은 피귀렉의 얘기는 어쩌면 부비에를 통해 느끼는 자신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따. 피귀렉으로써의 활동들.. 세상의 모든사람들을 속고 속이며 삶을 조작한다. 그럴듯한 이미지를 사는것이다. 삶의 껍데기에만 혈안이 되어버린 우리의 단편적인 모습처럼 말이다. 이런 삶의 허울뿐인 껍데기 뒤로 ..인간들의 모습은 너무나 연약한다. 결국 이들은 서로서로를 속인 것이다. 스스로는 속이지 않는다 .. 할지 모를마음으로. 그의 모습속에서도 ..끊임없는 의심과 고독뿐이다.
플라스틱 피플은 어쩌면 주인공인 그를 내세워.. 남을 속일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도 그 속임을 망각한채 ..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 허구인 삶에 더욱더 깊이 빠짐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거울속의 모습을 보여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나오는 피귀렉처럼.. 인간파견전문업체라는 소재의 드라마가 기억이 난다.. 작년쯤..신인작가의 드라마였었는데.. 불치병에 걸린 사랑하는 딸을 위해 딸이 죽기전에 ..일기장에 쓰여진 대로..죽음을 무릅쓴 사랑을 하고 싶다는 내용을 엄마가 보고.. 자신의 딸에 어울리는 남자친구를 고용한다. 그리고 그들은 열렬히 사랑하고 . 부모님의 반대에 무릅써 도망까지 간다. 느티나무밑.. 그들은 사랑을 맹세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의 독약을 나눠마신다. 여자는 편안히..사랑하는 맘을 안고 떠나간다. 남자는 여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는 한다." 모든 것이 분부하신 대로 끝났습니다.." 그의 계좌로 청구금액이 입금된다. 하지만 그는 연기였다고 생각한 ..그녀와의 사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랑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드라마는 그렇게 여운을 남기고 끝을 맺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나도 모르게.. 남들을 외롭게 할지도 모른다. 플라스틱 피플의 주인공이 ..타니아를 표면적으로 사랑한것 처럼 말이다. 어쩌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나스스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수많은 반전으로.. 와와 하는 탄성을 연발하면서도 알수없는 이 씁쓸함은.. 어쩌면 지금 우리삶 깊숙이 ..피귀렉 아닌 피귀렉이 존재한다는 그 느낌 때문이 아닐까 .. 내가 생을 마감할때..날위해 그럴듯하게 울어줄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의 거짓으로.. 내가 상처받는것을 슬퍼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보다 먼저 내가 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설것이다.
타니아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야 .. 맞아요..아저씨가 옳아요 .. 타니아는 일시적인 사랑이 아니었죠. 타니아는 그보다 못해요 . 타니아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 타니아는 단지 아저씨의 정신을 잃게 만든, 부드럽게 잘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달린 거대한 기계를 고장나게 만든 상상속 인물에 불과해요 . 아저씨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할수 없을거예요 아저씨도 구슬을 본적이 있죠? 구슬과 인간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아저씨가 구슬하나를 다른 구슬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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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축구시합, 친구들과의 식사모임을 위해서 두세 명 정도의 단역배우가 필요한 적이 없었나? 그럼 돈만 내면 돼. 피귀렉,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파견회사야. -51
사회 시간이었나, 학교에 가면 '역할'과 '지위'에 대한 내용을 배웠었다. 사람마다 지니는 역할은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인데 이를테면 A라는 사람은 어떤 남자의 연인이며, 학생, 딸, 언니, 누나, 동생의 여러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 상황에 맡는 역할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는데 당시에 나는 역할 행동을 잘 할수록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학생은 학생답게, 직장인은 직장인 답게, 아빠는 아빠답게. 단순 텍스트였던 '역할'에 대한 정의를 공부하고 본 시험보다 실제 삶에서의 진짜 '역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소설 [플라스틱 피플]은 제목만 보아도 대강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몇겹의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낯짝 두꺼운 사람들의 세계. 플라스틱 피플이 사는 세상은 왠지 가식이 물결칠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이 플라스틱을 지금 나도 두껍게 덧씌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섬뜩하지 않은가? 나는 늘 비인간적인 것에 대해서는 TV나 로봇을 보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았던 것 같다. '저건 남의 얘기야.'라고 강건너 불보듯 했던것일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연극대본을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백수'인 싱글이다. 그의 일상은 매일이 따분하고 대부분의 장기 백수가 그렇듯 무기력이 지나쳐서 좀비같은 삶을 살고 있다.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백수니까 동료도 없다. 그에게는 오직 가족 뿐인데 잘생기고 능력있고 유머러스한 동생의 후광에 가려서 그 안에서도 내내 천덕꾸러기 신세이다. 늘 노처녀에게 시집 언제 가냐고 닥달하는 드라마만 봐서 그런지 백수에 인생 참 지루한 노총각의 일상을 보는 것도 신선하다. 신문에 올라온 장례식 부고를 보고 집들이에 가듯 들르던 주인공은 장례식마다 몇번쯤 마주친 남자를 기억해낸다. 그 남자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때 남자는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급기야 그 남자는 주인공에게 다가와 '너 피귀렉이냐?'라는 알수 없는 말을 주절거리고 간다. *프랑스어로 단역배우는 '피귀랑(figurant)' 또는 '피귀라시옹(figuration)'이다. '피귀렉(figurec)'이란 명칭은 이에 착안하여 만든 조어이다.
얼마전 결혼한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의 하객이 너무 적어서 신랑쪽 하객이 신부 뒤에 서서 단체 사진을 찍는 것을 보면서 내가 결혼할 때는 어떨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조촐한 결혼식을 한다는 외국인들이 부러웠다. 내 인간관계를 되돌아보면서 과연 내가 찍어낼 청첩장과 부페 음식을 먹으러 오는 사람은 얼마나 비례할지 궁금해졌다. 어떤 기사에서는 '가짜 신랑, 신부의 친구 역할을 해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현대인은 늘 '바쁘고' 가족은 계속 '줄고'있다. 정말 축의금의 대부분을 하객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는데 써야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피귀렉은 허무맹랑한 상상의 산물은 아니다. 이미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소설은 한걸음 물러서서 '허구'라고 단정하고 읽기 때문에 피귀렉이 낯설게 느껴질 뿐, 기사에 나온 '가짜 하객'도 이미 피귀렉이 아닌가.
소설의 분위기가 독특하면서도 낯설지 않았는데 이 낯설지 않음은 영화 '트루먼 쇼'때문이었다.(역자후기에서 언급해주어서 상기함.) 역자가 말한대로 트루먼쇼와 플라스틱 피플의 결말은 조금 다르다.(줄거리도 다르고.) 가짜 인생에서 진짜 인생으로 도망치려하던 트루먼이 '과거'가 되고, 진짜 인생에 쩔어서 가짜 인생을 동경하며 무엇이 진짜인지 모르게 된 소설의 주인공이 '현재'가 되어버린 것은 섬뜩하다. 오늘 인터넷 뉴스에는 가상 현실을 배경으로 한 게임에 빠진 남편에게 억장이 무너졌다는 현실의 아내의 사연이 나왔다. [(기사)남편이 사이버 부인을 두고 이중 결혼생활을 한다면?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01&article_id=0001723193§ion_id=104§ion_id2=235&menu_id=104] 우리는 이미 진짜 보다는 가짜에 환호하고 있는 것일까. 환호로 모자라서 아예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지 못할정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소설의 책 표지는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떠올린다.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가 그려낸듯한 건조하고 정이 없는 그림. 재미있게도 그의 그림이 '초현실주의'라니 소설의 내용과도 잘 어울린다.
사는 것은 연극과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연극이 실제 삶보다 더 현실적이고 활기차다는 생각. 그렇기에 우리는 박진감 넘치는 진짜 삶을 뒤로하고 무대 앞 객석으로 모여드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이 연극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 있다. 외줄타기 처럼 현실과 연극(가짜)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면 낭떨어지로 추락하고 만다. 현실주의자도 이상주의자도 완벽한 사람은 될수 없다. 여러가지 역할을 소화해내야 하는 우리들은 모두 플라스틱 피플, 피귀렉이다. 가끔 소설의 주인공 처럼 역할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플라스틱 피플들.
유일한 처방은 현실 뿐이야 -125p
역시 프랑스 소설이다.(매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독) 단순한 스토리지만 생각할꺼리도 많고 무엇보다 매우 재미있다. 만화가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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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목표하는 대학의 이름은 허구이다. 분명 그곳은 어떤 지역에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 학생증을 손에 넣기 전까지는 상상에 불과하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갖고 사는 직장인은 어떤가. 그 손에 쥐어진 청약통장이 몇 년 후 혹은 몇 십 년 후 살게 될 집과 같을 순 없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상상이 실체화되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무엇인가 즉물적인 존재를 획득하기 위해 배우고 일을 한다. 사랑도 마찬가지. 실제가 되기 전 수도 없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역시 ‘상상에서 실제’로의 공식을 철저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플라스틱 피플>(브리즈. 2007)은 그와 반대의 경우다. 목차만을 봐도 알 수 있다. ‘réalité(현실)’에서 시작해 ‘figurec’으로 끝난다. 더욱이 ‘피귀렉(figurec)’이란 단어는 ‘단역배우’라는 뜻의 프랑스어인 ‘피귀랑(figurant)’과 ‘피귀라시옹(figuration)'에서 착안했다니 그 자체가 거짓이다. 결국 이 소설에 담긴 한 남자의 인생은 ‘실제’에서 ‘허구’로 가는 과정이다.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게 유일한 취미로 그곳에서 처음 피귀렉의 실체를 접한다. 알고 보니 피귀렉은 일종의 인간파견회사로 이미 200년 전에 시작돼 수만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사다. 이들이 엑스트라를 파견하는 곳은 참으로 다양하다. 장례식에도 결혼식장에도 이들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좀 더 일상적인 풍경으로 대형마트에 물건을 담고 옆을 스쳐가는 사람도 피귀렉의 일원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 일상적인 풍경과도 같은 사람들이 실제론 고용된 배우에 불과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참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 한 번 생긴 균열은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는 탓이다. 여기에 이 소설을 읽는 재미가 있다. 주인공이 겪는 혼란을 고스란히 읽어내야 하는 의심스런 재미 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현실도 이와 별 다를 바 없다. 체면치레를 위해 하객을 고용하는 결혼식의 진풍경은 종종 기사화되기도 해 익숙하다. 말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진실한 관계에 목말라하면서고 자신의 거짓의 주체가 된다. 아니 가짜로 가득한 자신을 포함한 주변이 진짜라 믿고 눈을 감아버린다.
<플라스틱 피플>이 뜻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들어진 세상의 만들어진 사람들은 공장에서 용도에 맞게 생산된 플라스틱 제품과도 같다. 비단 피귀렉이 곳곳에 배치한 대역배우들 뿐이 아니다. 이들을 가족이나 친구로, 연인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플라스틱 피플이다.
피귀렉의 존재를 알게 된 주인공. 그는 진실을 의심하기 보다는 안주하는 쪽을 택한다. 나아가 직접 피귀렉을 고용해 원하는 삶을 꾸린다. 비록 그 뒤에 남는 게 상처와 고액의 빚일지라도 거짓을 택한다. 그리고 자신 역시 피귀렉이 되어간다.
우리는 흔히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라고 말한다. 자신을 존중할수록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는 곧 자기계발의 채찍질이 되어 나를 다그친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한 삶을 누리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 헌데 이는 무엇을 위함인가.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는 것인가. 혹시 인생은 오디션이고 삶은 주인공 자리를 꿰차기 위한 연기연습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플라스틱 피플>의 주인공이 희곡을 쓰듯 살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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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대행 업체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어제 결혼식장에서 봤던 신랑의 멋진 친구들은 사실 그의 진짜 친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또 심지어 학부모회의에서 뵈었던 ㅇㅇ의 어머니 역시 바쁜 ㅇㅇ의 진짜 어머니를 대행하여 참석한 가짜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소설의 내용이 더 이상 상상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플라스틱 피플은 왜 존재하는가? 피귀렉의 존재는 어쩌면 현대사회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사회는 효율성이란 단일한 가치명제하에서 움직이고 있다.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익이 되지 않는 타인에 일에 사람들은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점점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진심으로 위해주는 관계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플라스틱 피플은 그 빈자리를 파고드는 것이다. 간단히 돈만 지불하면 완전히 비밀이 보장된 상태에서 나의 사회적 위치를, 나의 넓은 인간관계를 자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효율적인 세상인가? 그렇지만 그 가식과 거짓 가운데 존재하는 본질은, 나 자신은 점점 고독해져 가는 것이다. 진실과 마주 대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자기 자신 뿐이기에 더 고독하고 더 괴롭다. 앞으로 점점 더 유사 피귀렉이 확산될 것임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만약 피귀렉의 세상이 온다면 나는 내가 본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를 믿고 어디까지를 부정해야 할까? 플라스틱 피플을 사용함으로써 나 역시 플라스틱 피플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모든 것은 가짜. 진실을 보이지 않고 세상은 혼란 뿐. 현실이 가장 무섭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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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의 작은 선반에는 초콜릿 색깔의 지갑이 놓여 있고, 그 위에 검정 모바일폰이 올려져 있다.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들어오기 위해 만났던 사람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의 얘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상대방이 하는 말에 간단한 대답으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서로의 관계가 더 이상 친숙해지거나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무관심. 어깨보다 약간 긴 머리카락을 고무줄 하나로 묶어 정리한 여자는 사람이 나간 자리의 의자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작은 천 조각으로는 테이블을 닦고 있다. 두 개의 머그잔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든 남자가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아마고 아까부터 혼자 앉아 창 밖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여자에게로 가는 것 같다. 나는 모바일폰을 본다. 이것은 바깥 세상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그런데 전화가 오면 진동을 하게 되어 있는 모바일폰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가만히 있으니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커피잔이 테이블에 놓여지는 소리. 다리를 까닥이다가 테이블 다리에 부딪치는 소리, 남녀의 작은 웃음소리, 구두의 똑깍거림…. 나는 외부와 단절되어 있지만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단순한 음향효과일 뿐이다. 그들의 행위는 그저 상상일 뿐이다.
선반이 흔들린다. 반듯이 놓여 있던 모바일폰이 지갑에서 미끄러진다. 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이곳에 오기 전 외부에서 마주쳤던 그들은 갑자기 사라진 나에 대해 상상을 할 것이다. 내가 들어와 있는 공간이 어떤 곳인지를 경험상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경험일 뿐이다. 누구도 타인이 이 곳에서 하는 개인적인 행동을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을 반드시 그들이 할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지 본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와 같은 행동을 한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 곳에서 무엇을 하세요 내가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시나요 제목 부분을 클릭하면 원 게시물을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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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장례식, 피로연 등의 하객으로 동원되는 아르바이트 인력이 있다고들 한다. 개인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이력과 행사가 되는 일들에, 돈을 주고 인맥을 사는 경우가 일상다반사로 행해지고 있다니, 자연스러운 인간과계를 구축하는 일에 서툰 현대인의 서글픈 초상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 상에서 인맥을 사고파는 사이트마저 성행하고 있다니, 집단 속에서 날로 고독해지는 이들이 택하는 긴급처방전의 약효는 휘발성이 짙지만, 결국은 얽혀들지 않은 채, 쉽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관계성만이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닌가 위기의식이 느껴지기도 한다.
파브리스 카로의 『플라스틱 피플』은 인간관계를 서비스로 제공하는 ‘피귀렉’을 둘러싼 음모론을 모락모락 펼치는 촌철살인의 블랙코미디이다. 한국인과 프랑스인이 느끼는 절대고독감과 그럴듯한 관계를 과시하려는 품위유지의식은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되었달까, 전 세계의 고독과 직면하게 되는 섬뜩한 시간이었다. 과연 피귀렉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피귀렉이 아닌 것은 대체 무엇인지, 처음 만난 작가가 펼쳐 보이는 매트릭스 세상은 불편한 진실을 너무도 많이 담고 있다.
1장에서 멈춰있는 희곡을 만년동안 쓰고 있는 주인공은, 가난한 예술가(라고 분류되는)를 기꺼이 후원해주는 친구부부와 돈독한 애정을 자랑하는 사이좋은 가족이 있다. 신문의 부고란에 실리는 장례식을 참석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데, 장례식의 품평만을 일삼는 나날 속에서 번번이 마주치는 불쾌한 남자를 알게 된다. 그가 입에 담는 “당신도 피귀렉이로군”이란 무슨 말인가, 피귀렉?
피귀렉이란 프리메이슨이 후세들이 만들어낸 인간관계 대행 서비스이다. 그들은 요금을 받고, 장례식의 하객이 되고, 가족의 친구가 되고,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준다. 공공장소의 인파, 가두시위를 벌이는 단체의 대량의 시위인력, 온갖 소소한 목적을 가지고 감쪽같이 곳곳에 투입되어 있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피귀렉은 이미 사회 전반에 암암리에 퍼져있는 거대시스템인 셈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실패자이며 고독한 자신의 일상에 피귀렉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면서, 현실과 허상의 간극 속에 함몰되어간다.
피귀렉의 정체와 주인공의 혼란의 핵심을 밝히는 반전은 놀랄만하고, 교묘하면서도 여운을 남긴다. 아니,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칠 시간이 좀 더 유예되기를 바라는 독자들을 좀체 봐주는 일 없이, 심술 맞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다. 가장 친한 친구들이며,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던 연인이며, 가족들의 지인이며 친척까지, 고용인이었다는 ‘진실’의 무게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중량이 아니다. 거기다 내 정체에 대한 의문점이란, 나 또한 누군가가에게 제공되는 피귀렉의 일원, 피귀렉을 감시하고 설계하는 심장부라는 폭로는 아무리 짐작했던 일일지라도 매섭기만 하다.
감히 고독해지기 두려운 현대인들을 옥죄어 드는 불안이, 인간관계를 설정하도록 만든다. 실체보다는 보여 지는 것이 그럴싸하기만 하다면 궁극의 연기를 주고받으며 공중누각을 쌓아간다. 자신을 온전하게 마주할 자신이 부재한 그네들의 심약함을 비웃어주려다 멈칫하고 만다. 때로는 내 주변의 피귀렉들을 알면서도 용인하고, 나 자신이 피귀렉을 연기한 일이 과연 한 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피귀렉이란 암암리에 묵인되어온 우리네의 자화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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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일화된 인간, 인조 인간을 떠오르게 하는 <플라스틱 피플>이란 제목에서 그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 었지만, 도대체 어떤 인간들의 문제점을 그려내고 있을까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방송에서 본 적이 있는데, 한여인이 거짓인생을 살고 있었던 내용을 재연방송 으로 본 적이 있다. 명문대학의 가짜 졸업장, 돈으로 고용한 가짜 친구들, 가짜 부모님들, 심지어 임신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아이까지 구해와서 자신의 아이로 속인 한 여인.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 여인의 범행이 드러나게 된다. 더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이를 데리고 오는 방법중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던 것인데, 갓난 사내아이를 구할 수 없었던 고용인들이 아이를 빼앗 아 오는 중에 아이의 엄마를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방송을 보면서, 마음이 찹찹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거 짓과 위선으로 덥힌 세상을 욕하며 불편한 심정을 그대로 내비쳤던 씁쓸했던 기억이 책을 보자마자, 스 쳐 지나간다.
'애인이 되어 드립니다.',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 부모님이 되어 드립니다' 필요할 때 돈만 지불하면 그 시간 애인이 되었다가, 친구가 되었다가, 부모님이 되어 주기도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친구가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고민을 하던 기억이 난다. "이럴줄 알았으면 친구라도 많이 사귀어 두는 건데 말이야.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없어서 돈을 지불하고 가짜 친구를 고용하기도 한다더라구" 물론, 그 친구는 가짜친구를 고용하지 않고, 무사히 결혼식을 끝낼 수 있었지만, 친구의 그 이야길 들으 면서 타인의 결혼식장에서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친한 척 하고 친구인 척 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웬지 기분이 묘했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사람들의 역할이 나름 중요하고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친구라고 여겼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 누군가에게 고용된 인물이 라면 어떨까 생각하자, 끔찍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심히 괴로울 것 같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진실이 무엇인지 고민을 할 터이고, 현실과 허상의 경계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나 자신을 보게 되겠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지금껏 내가 보인 진실에 반응했던 사람들의 거짓을 대면하게 될 순간이 아 닐까. 그 모든것이 다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될때의 비참함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게 된다.
여기, 이 소설에서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하게 되었다. 세상을 검게 덮은 피귀렉의 실체가 무엇일지 책을 읽기전부터 궁금했는데, 그 피귀렉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할말을 잃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인걸까? 사기꾼이 난무하는 세상, 가짜가 판을 치는 현 실을 꼬집으며, 작가는 예리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가 과연 소설속 문제라고만 생각되는가? 당신과는 정녕 관계가 없 는 일일까?"
심각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는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 어나가며 나에게 생각할 꺼리를 안겨다 준다.
피귀렉이라는 비밀회사에 돈을 주고 배우를 사서, 자신의 필요와 이상에 위해 조작된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체면차리기, 외로움 달래기의 일시적인 허기를 채우는 것이 과연 자신 을 위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사실을 영원히 모른체 아름다운 추억으로 지니고 있게 될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영화로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듯한 소설이다. 방송을 보면서, 그 여인을 비방하고, 그저 참 문제가 있다 라는 생각만 했었는데, 한발 더 나아가 용기내어 나와 대면해 본다. 너 역시 괴로운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을 원한 적이 있지 않았느냐고.
진실의 문 뒤에 숨어 나오지 못하는 또 다른 나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