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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 들어서서
이전까지 선과 악의 2분법에 너무 억눌러서였을까, 모든 사람들은 상대주의를 부르짖었다.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옛 것을 부정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좀 더 나은 세상이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문화였을 뿐,
사람들의 본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닌,
다른 사람도 옳을 수 있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하자는 취지의 상대주의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궤변에 물들어
선과 악의 구별마저도 모호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없애버렸다.
결국 자기 자신 만이,
아니면 자신이 속한 집단만을 위한 상대주의가 되어,
잘못되고 틀린 것도 상대적으로 보면 옳은 것이라는 궤변으로
다른 사람과 집단에게 주장하기에 이르렀고,
결국엔 테러와 전쟁으로 물든 밀레니엄을 열어버렸다.
9.11이 벌어졌던 때에 뉴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내게,
또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이 책에 대해 기독교도인 내게,
'차이와 존중' 은 꽤 흥미가 당기는 책이었다.
일단 이 '차이와 존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저명한 랍비가 저자라는 점이다.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뿌리가 유대교이긴 하지만,
사실 좁혀질 수 없는 엄청난 차이들이 있다.
저자는 어느 정도는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종교적인 상식에서
훌륭하게 글을 풀어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입장에서 좁게 생각하고 있는 한계도 보였다.
예를 들면,
9.11을 비롯한 테러와 전쟁은,
그 기반이 정치,경제적인 것도 있지만,
기저에는 종교의 갈등도 깔려있다.
저자는 서로의 종교에 대한 차이를 인정하면 된다고 하였으나
유대교의 경우에 비해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전도' 혹은 '포교'의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과연 서로의 차이만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과연 아무 문제가 없을까라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종교를 위해서 목숨도 내어놓은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이슬람 지역인 터키에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허다한데,
자신의 종교 구역 안에서 포교활동을 하거나
혹은 같은 곳에서 함께 포교 활동을 하는 경우에 서로 잘 지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구약에만 집중하고 유대민족만 관심있어서 포교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유대교에게는
그냥 남의 나라 이야기이고 이론적으로만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서 세계화를 비롯하여 제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책임감과 대화 혹은 교육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이는 너무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생각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상대주의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존중해 주기 위해서,
선과 악의 구별과 관계없는 문제에 있어서,
내 생각도 옳을 수 있고, 네 생각도 옳을 수 있다는 것이지,
미국이나 탈레반처럼,
내 입장이 이러이러하니 상대적으로 나도 옳다,
그러니 나는 양보 못 하겠다라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제목에 비해서
종교와 관련된 내용이 꽤 나오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이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좀 당황스러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도 그다지 쉬운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책인 것 같다.
독자에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세계적으로도, 또 한국적으로도...
한국 사람들은 특히 상대주의자인척 하는 사람이 많다.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그것이 과연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도 그럴지는 의문이지만.
게이나 레즈비언에도, 트렌스젠더에도, 때로는 불륜에도,
매우 관대하다. 그러면서도 회식자리에서 술을 안 마시면 병신취급을 한다.
이런 거짓 상대주의자들 때문에 한국사회가 더 병들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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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양자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차이에서 나온다. 동질성은 유대를 강화시키지 대립을 유발하지는 않는 법, 따라서 이 책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차이의 동질화가 아닌, 차이의 존중을 밝혀냈다는 점에 있다. 혹여 동질화를 주장했다면 난 읽다가 집어던졌을 것이다. 역사상 숱한 시도가 있어 왔으나 차이의 동질화에 성공했다는 단 한 번의 사례도 찾아내지 못했으므로. 금슬좋다는 부부 사이에서도, 거대한 땅덩이를 정복하던 제국들에서도... 그러니 동질화를 주장하는 모든 책은 올곧게 구라다. 따라서 서로간의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허나 몇가지 궁금한 것들이 있다.(저자를 만나면 꼭 물어볼테다~) 1. 조너선 랍비님은(이름을 불러드리는 것이 편하시죠? 우리가 읽는 성경대로라면 요나단이시군요^^) 유일신을 믿는 서구인들, 누구보다도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신 것 같네요. 각 장의 말미마다 이 종교들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구약성경 인용을 빈번히 하셨더라구요.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유대교라는 한 뿌리를 가진 것은 인정합니다. 그래서 체데크나 헤세드 같은 히브리어 성경에 등장하는 히브리 개념으로 각 종교 간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주목하신 것이 아닌가 짐작을 해봅니다. 하지만 보다 동편 아시아에 사는 저희들로서는 이 어휘들이 낯설기만 합니다.(심지어는 웬만한 기독교인들조차도요) 얼굴 노란 저희들에겐 자비에 해당하는 헤세드(역자는 영어식으로 케세드라고 표기했더군요)는 오히려 불교의 자비를 떠올리게 됩니다. 나아가 유교식으로 이해하면 측은지심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헤세드와 자비는 엄밀하게 따지면 하나일 수가 없지요. 아믛튼 이 차이도 존중해야 하는거지요? 그런데 랍비님, 플라톤을 버리고 나서 다시 유대교의 전통적인 사상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신다면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물론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했습니다만) 유대교 역시 인류의 유산 중 하나이니까요. 뚜웨이밍 역시 동양 유학이 서구철학의 대안이라고까지 주장하지는 않고 다만 상호보완할 수 있는 철학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더군요. 어찌됐든 동편에 살든, 서편에 살든, 성경을 절대귄위의 텍스트로 받아들이지 않는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라도 대화와 존중이라면 넉넉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2.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성경은 차이를 존중하기는 커녕 혐오하고 정복하라고 가르친 것은 아닌가 의심해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이아 이론을 주장한 제임스 러브록은 서구문명이 환경파괴를 일삼는 것은 바로 창세기의 말씀에 근거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바로 이 본문이지요. 또한 랍비님의 민족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을 건국한 1948년의 일 역시 구약성경에 근거한 정복사상을 시오니스트들이 구체화시켰던 것 아닌가요? 그 옛날 여호수아가 칼로 가나안을 정복하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쳤던 ‘헤렘’, 전멸 혹은 멸절을 뜻하는 히브리어가 바로 그 헤렘이잖아요! 작금에 칼과 코란을 들고 택일하라고 강요하는 이슬람 과격파나 제국주의적 선교를 여전히 신봉하는 한국의 기독교 역시 이러한 구약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랍비님은 성경이 오히려 다양성과 관용을 말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성경박사 랍비님의 이야기니까 더욱 권위적이신데요! 그래서 말인데, 몸조심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유대인 근본주의자들이 흥분을 하지 않을까 싶거든요. 또한 차이의 존중이라는 신학적 해석을 놓고 오히려 유대교나 기독교 내부에서의 다툼과 분열로 비화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오래전에 카톨릭 신학자 한스 큉이 랍비님과 비슷한 주장을 하다가 교황청에 의해 출교당한 적도 있었지요. 한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기독교의 목회자가 이런 주장을 하면 종교다원주의자로 몰리게 되고 심지어는 교단에서 출교당하기까지 하거든요. 어찌되었든 랍비님 덕분에 성경이 열린 텍스트란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어 좋았습니다. 3. ‘차이의 존중’은 계몽주의 시대의 용어 ‘관용’을 떠올리게 합니다. 로크나 볼테르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된 관용은, 그러나 서구의 백인남성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라는 한계가 있었지요. 그리고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의 해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을 떠올리게 하는군요. 자끄 데리다의 로고스 중심주의 해체같은 것 말이예요. 그렇기에 랍비님의 주장은 온전히 해 아래 새 것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만 놀라운 것은 상아탑 철학자가 아닌 랍비가, 그것도 오늘날 유대인 사회에서 영향력있는 지도자 중 한 분이 이러한 주장을 하셨다는 점입니다. 결자해지라고, 작금의 팔레스타인 문제는 2000여년간 자기 땅이 아니었던 곳에 들어가 자기 땅이라고 우긴 시오니스트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풀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랍비님이 “하나님은 다양성을 사랑하신다”라고 말하셨기 때문에 아무래도 동족들이 그 책임을 물을 것만 같군요. 랍비님이 처음은 아니었다지만, 다양성을 용인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기존의 성경해석을 뒤집는 식스센스만큼의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갈등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본 사람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깨달을만한 차이의 존중이라는 진리는, 하지만 실천하기가 더 어렵더군요. 외부에서는 환영받지만 내부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니까요.(랍비님 말씀대로 집단의 정체성은 외부와의 차이를 부각시켜야 형성되잖아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괴리랄까, 차이의 존중이 힘든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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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종교 특히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종교는 불화의 원천으로 지목받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차이의 존중’이라는 이슈는 의미있는 주제가 될 것이다. 조너선 색스(Jonathan Sacks)라는 랍비겸 신학박사이며 종교부문의 노벨상인 그라베마이어상을 수상한 분이 쓴 ‘차이의 존중’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종교의 역할과 사명을 밝힌 책이다. 물론 저자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사람들 또는 세력들에 대해서만 대화를 강조하는 분이 아니다.
보편에 대한 관심과 특수에 대한 존중이라는 키워드를 기치로 내 건 ‘차이의 존중’에서 저자는 성서적인 유일신 신앙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상대주의가 아니라 언약에 바탕을 둔 차이에 대한 존중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의 말대로 세계는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상대할 뿐 자기의 의견을 널러 알리고 싶은 사람들은 대화가 아닌 폭력과 저항이라는 극단적인 형태로 이목을 끌고 있다.
저자는 종교는 오늘날 세계 갈등의 직접적인 원천이 아니라 편을 가르는 단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해답의 일부가 되지 못하는 종교는 문제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래디컬한 말은 우리에게 깊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한다. 저자는 아직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세상에서 평화란 신앙이 다르고 경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신학자이며 종교인임에도 종교 뿐 아니라 정치, 사회학, 경제, 문화, 생물학 등의 개념들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논의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가령 저자는 시장을 차이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는 대단히 심오한 정신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체계라고 규정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장에 부과하는 제약이며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늘날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았다. 저자 역시 세계화를 악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다만 전 인류에 큰 혜택을 주는 반면 지나친 빈부격차, 금융 불안, 자원 고갈, 환경 파괴, 비상근 노동, 문화적 획일화, 소비지향적 가치관의 만연, 정신질환의 증가, 범죄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시장에 대해 규제와 성찰을 요구한다.
저자는 종교가 과학과 이성에 의해 위축되었다가 중요 세력으로 부활한 것을 세계화의 가장 뜻 밖의 현상이라 지목했다. 그렇다면 종교의 부활을 낳은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계화가 낳은 심대한 불안이다. 저자에 의하면 종교는 누구와 왜라는 질문에 답을 준다. 물론 정치의 대체물로서의 종교는 위험의 원천이다.
저자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공간을 내줄 수 있느냐에 따라 21세기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 말한다. 물론 저자는 종교 갈등과 종교 전쟁을 플라톤의 유령이 낳은 결과물로 본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여기서 말하는 플라톤의 유령이란 차이를 동일성으로 용해하고 특수를 보편으로 굴복시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다.
유대교를 보편 종교가 되지 못한 종교로 보는 유대교도인 조너선 색스의 관점은 문제를 일으킬 법도 하다. 저자는 일반적인 순서를 뒤집고 보편에서 특수로 이어지는 여정을 택했다는 점에서 히브리 성경을 반플라톤적 서사를 대표하는 경전으로 보았다. 이때 보편이란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가 표현한 “온 땅의 말이 하나이고 같았더라.”는 구절에서 이끌어낸 개념이다.
특수는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듯 언어의 혼잡으로 인한 민족의 흩어짐으로 인해 도출된 개념이다. 저자에 의하면 보편성(노아 언약)은 단지 해소불가능한 문화적 다양성의 배경이며 서곡이라는 게 히브리 성경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이며, 진리는 보편적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은 과학과 객관 세계의 묘사에 적용될 때는 타당하지만 윤리학, 영성, 의무감에 적용될 때는 타당하지 않다.
저자는 타자성 용인과 차이의 존엄(dignity of difference)에 대한 인정 여부가 세계화 시대의 중요한 이슈라고 말한다. 그런데 제 신앙에 믿음이 확고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다른 신앙에 겁을 먹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대신 자신이 커지고 확장된다고 느낄 것이라고 저자의 말은 이상주의적이다.(저자의 논지는 시종 이상주의적이고 옮긴이의 말대로 '공자님 말씀’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보이는 패권적 선교 욕구를 직시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데 저자는 종교에 관한 한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는 것 같다. 반면 시장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는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족하다. 고도의 소비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부추겨지고 일시적으로 만족되는 욕망의 급속한 변천이라는 말이나 시장 거래의 영역 밖에 있던 인간 관계도 거래되고 있다는 지적은 정확하고 적절하다.
그런가 하면 현대 사회의 개인은 우리가 만날 리가 없고 누군지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제적 선택이나 정치적 결정의 과정이라는 지적 역시 새겨들을 만하다. 저자의 시장론(市場論) 역시 많은 부정적인 점을 지적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만 전망에 있어서는 낙관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종교가 되살아 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종교가 선과 도덕적 가치, 거룩함 등을 현실에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상주의적인 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저자는 물론 종교만이 개별적으로든 집합적으로든 도덕성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종교간 차이는 명백하다. 저자는 이에 논쟁이 아닌 대화를 촉구한다.
저자는 시장 근본주의 또는 시장 방임주의에 반대하는 분이다. 저자는 시장의 작동 메커니즘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질 것을 주문한다. 시장이 인간의 존엄함과 인간 보호, 축복, 연대성 등의 가치를 실현시키느냐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장 경제는 인간관계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두 승리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한다. 시장은 전쟁터와 달리 모두 승리하는 무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 경제에 관한 책임을 운운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궁핍한 자는 우리의 형제, 자매이며 가난은 우리가 뼛속 깊이 느낀 경험이라는 성경의 사상이 정치나 경제의 협소한 개념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또는 히브리 성경에서 인간은 재산의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을 대신한 관리인이기에 가난한 자들과 가진 것의 일부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선: 사회정의라는 장에서 저자는 다양한 성경 구절을 예로 들며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보다는 경제적으로 독립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창세기 18장 17 - 19절에 나오는 자선과 정의를 모두 뜻하는 체다카라는 원어를 예로 들며 저자는 선진국의 잉여를 개발도상국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세계화의 논의는 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안에 집중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교육은 제로섬의 가치가 아니다. 남에게 지식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내 지식을 잃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두 사람이 모두 합리적으로 행동하지만 둘 다에게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로 저자는 이를 각자가 이기심을 추구할 때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결과가 도출된다는 아담 스미스 경제학의 전제조건에 도전하는 것으로 소개했다.
저자가 내세우는 대안은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이다. 잘 알려져 있듯 죄수의 딜레마는 이렇다. 체포된 심각한 범죄 용의자(경미한 범죄를 입증할 증거는 있지만 심각한 범죄를 입증할 증거는 없는) 두 명을 따로 가둔 뒤 밀고자는 자유를 얻게 하고 다른 한명은 10년 형을 언도받게 한다. 둘 다 상대를 밀고하면 5년 형을 받고 둘 다 침묵하면 경미한 범죄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받고 1년만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는 시나리오이다.
이 경우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기에 말 그대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반복적 죄수의 딜레마는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신뢰가 형성되는 것을 뜻한다.(물론 이 경우도 문제가 있지만 상술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시장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킬 덕목으로 신의와 충직함 등을 꼽으며 경쟁만이 난무하는 세상은 창조적으로 출발하지만 결국 자기파괴로 끝이 난다고 말한다. 저자는 종교는 원칙적으로 시장을 반대하지만 유대교는 자유경제를 지지하되 한계도 문제삼는다는 말을 한다.
저자는 지금도 계속되는 종교 및 인종 또는 민족간의 분쟁을 논의하는 장에서 용서만이 악순환을 끝낼 해결책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용서에 대한 논의도 히브리 성경에서 이끌어낸다. 저자에 의하면 용서는 망각도 정의의 포기도 아니다. 그러나 저자의 논의를 다른 종교에서 수용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복잡하게 얽힌 두 세력이 모두 용인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을까, 란 의문도 든다.
실제로 저자가 예로 들었듯 히브리 성경에는 용서에 대한 예가 많이 나온다. 성경을 근거로 용서와 화해를 주장하는 저자의 논의는 타당하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보듯 용서와 화해는 너무 멀게만 보인다. 유대교 경전이 말하는 용서를 이스라엘은 왜 팔레스타인에 대해 베풀지 않는가, 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종국적으로 세계 언약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저자의 논지는 너무 이상주의적이고 교과서적이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저자는 이 책 초판으로 유대교 집단의 공분을 샀다고 한다. 저자의 기획은 너무 낙관주의적이고 이상적이지만 그것은 함께 행복한 세계를 만들려는 열망과 애정이 크다는 증거라고 나는 본다. ‘차이의 존중’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책이었음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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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서품을 받은 저자는 유대교 최고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다. 세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읽고 많은 세상을 배웠지만 저자의 글을 보면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종교는 그것이 해바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그의 말 아프가니스탄은 6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더 잘나가는 경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갈등으로 지금은 갈가리 찢겨진 걸레신세가 되었다. 중세 몽골을 성모상 이슬람의 모스크 샤먼 불교의 파고다등 모든 종교와 사상 문화를 통합하는 포용을 가졌지만 지금은 징기스칸의 사상만을 가지고 산다.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독선에 민족이 치를 떠는 상황을 많이 느낀다 왜 그럴까 큰 산을 태우는데는 작은 불씨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걸 왜 모르는 것일까 우리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이 되는걸 그렇게도 바라는것일까. 종교는 불이며 우리는 그 불의 관리자일 뿐인데. 아프리카 속담에 - 베푸는 손이 으뜸이고 받는 손은 열등하다. 했다. 베푸는것에 우리는 왜 익숙하지 못한걸까 성경에 보면 이민족과 이방인에 대한 추방과 항쟁을 독려한 부분도 있지만 하느님의 이 자애로운 면모는 이스라엘 백성의 커다란 적국이었던 이집트와 앗시리아역시 언젠가는 이스라엘과 더불어 하느님의 선택을 받게된다는 이사야의 예언등 이사야 19장 19-25절등 이민족에게 마음의 한부분을 할애하며 그들을 포용하라는 부분도 상당히 많은데 왜 지금의 목사들은 이민족에게 돌을 던지라는 부분만을 골라서 신자들에게 읽으며 쇠뇌시키는 것일까 자신의 치부를 위한 것일까 신앙의 빛이 희미해지는 만큼 인간의 시야도 좁아지는 것인데 용서는 비극에 맞서는 희망의 이야기란걸 이 책을 읽으며 깊이 느꼈다. 이 책에서 느낀점은 고통에 고통을 추가하거나 슬픔에 슬픔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과거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가 증오에는 사랑으로, 폭력에는 평화로, 원한에는 관대한 마음으로 갈등에는 화해로 응답해야하는 이유가 이 책에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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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내의 충돌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새로운 시대의 주된 갈등은 문명간의 충돌이 아니라, 같은 문명내부에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문명내의 일부는 렉서스를 쫒아가는데, 같은 문명내부의 일부는 올리브 나무를 고집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물론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문명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의 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점령군에 협조하는 세력들과 점령군이 반발하고 있는 세력 사이의 균열이 진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단지 어떤 사회에나 늘 존재하기 마련인 기회주의자와 근본주의자 사이의 단층선일 뿐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은 확실히 빈부의 격차를 일으킨다. 올리브 나무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앞지르고 나아가서 렉스서의 신화를 쫒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균열이 문명권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를 불식시키지는 못한다. 중국의 일부가 자본주의를 받아 자본주의보다 더욱 자본주의적인 나라가 되었지만, 중국은 자본주의가 아닌 중화주의 국가일뿐이다. 세상은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서로 다르다. 다른 존재들 사이의 가까움은 불편함으로 표현이된다. 관용과 이해가 전재되지 않는 가까움은 불편함을 증오와 원한으로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세계화가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될때 그 불편함의 정도는 더욱 심해지기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엉뚱하게도 종교를 들먹인다. 오늘날처럼 세속화된 세상에서 종교라니. 그러나 비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한 서구사회도 명백하게 종교적인 색체를 띄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들이 신을 받아들이든 않든 서구사회라는 것은 자신들의 입장을 바탕으로 세상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서구사회와 부딪히는 단층선에서는 존재하는 사람들은 가장 비종교적인 사람들도 그 갈등의 과정에서 더욱 더 종교적인 세상으로 바뀌어간다. 그들 스스로 자신이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을 할지라도, 다른 문화권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그 감정은 그대로 종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규칙의 변화가 아니라 영적인 곳의 변화에서 와야 하는지도 모른다. 세계화와 그에 대한 불만을 논하는 저서들이 많다. 서점을 뒤덮고 있는 산더미 같은 책들은 사실 다 같은 이야기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다.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그러나 세계화에 따른 불만을 풀어나가기 위한 논의들은 어쩌면 이 책의 바탕위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계화에 대해 남 못지 않은 불만을 가진 내가 이 책을 접하면서 내내 한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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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단일 시장으로 만든다. 세계화에 대한 단적인 말이다. 최근에 우리에게도 방관할 수 마는 없는 세계화에 대한 단적인 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커지는 상권에 비례하는 물질적인 팽창도 좋지만 결국 누군가는 피해를 보아야만 하는 FTA가 대표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한 세계화는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제도적인 장치일까? 부를 획득한자들은 천국과 다름없는 일상을 제공받지만 대다수의 서민들은 그러한 입장을 바라보는 피해자일 가능성이 짙다. 문제는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끊임없이 제기되어온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형상만 바뀌었을 뿐이지 결과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강대국의 논리일 뿐이다. 결국 이는 미래를 예측 하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간의 어리석은 발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요즘 초강대국 미국의 경제정책이 심상치 않다는 뉴스를 접하곤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서 촉발된 미국의 신용경색이 세계 자본시장을 뒤흔들어 놓은 지 불과 며칠 사이를 두고 유럽에서도 같은 경로를 통한 신용경색이 나타난다. 서구 자본의 기조 위에 움직이는 아시아의 펀더멘탈은 여지없이 그 축에서 왔다 갔다를 지속하는 롤로코스터 장을 방불케 한다. 심지어 미국의 이름있는 정치가는 현재의 미국이 몰락하는 로마의 경로를 밟고 있다고 경고성 짙은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의 시작에 불과한 폐단일지도 모른다. 세계화는 이미 전세계 자본을 통해 주식과 부동산에서 도미노 현상을 일으킨다. 인간의 우수성은 문명에 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인간 문명의 반석에는 경계를 분명히 하는 부족이나 민족간의 문화가 있었으며 이는 독립성을 유지해온 인류의 보고로 자리매김을 한다. 하지만 저개발 국가의 급속한 선진 문화의 흡수는 가히 속도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급속히 변화해 가는데 정체성을 잃어가는 나라들에 대한 문제가 새로운 국제 문화의 충돌로 번지고 있다. 각 민족은 고유의 문화에 대한 가치를 잃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문명의 충돌이 불가피한 지경이 이르고 있는 것이다. 자본이나 권력은 단기적인 힘을 상징한다. 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마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장 심오하고 두려운 권력(?)의 힘 중의 하나이다. 종교가 가장 큰 힘을 발휘한 중세시대를 벗어나 인간의 역할론이 대두되기 시작한 이래로 21세기 변화해가는 사회에서 이질감을 느끼는 인간에 대한 종교의 역할론은 다시금 전 지구를 휩쓸고 있다. 초 과학을 넘어선 채 한계 극복을 지속하는 인간의 의지는 상대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은 종교의 전쟁으로 하루도 휴전할 틈이 없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는 믿음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종교를 신앙으로 믿는 신도들에게 광적으로 나타난다. 상대에 대한 어떠한 화해와 용서 배려가 없는 것이다. 차이의 존중은 세계화에 대한 부작용을 필두로 저자가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는 종교의 역할론에 대한 가감 없는 필적을 기록해 놓고 있다. 특히 그는 종교가 지녀야 할 의무로 스스로에 대한 통제, 공헌, 자선, 교육, 협동, 보존, 화해 등을 내세우는데 이는 우리들이 알고 행하는 덕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아닌 누구나가 알고 있는 것을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의미다. 이 부분에 스스로에 대한 양보라는 말이 없는 것이 아쉽기도 하다. 얼마 전 모 사찰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를 방문했다. 불교의 문화를 소개하려 상설적으로 템플 스테이를 운영한다던데 이번엔 꽤 많은 외국인이 포함되어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더군다나 첫날 자신의 종교를 묻는 시간에 과반수 이상의 사람들이 불교 이외의 타 종교를 믿고 그간 알지 못했던 불교의 문화를 체험하러 왔다는 말에 내심 종교의 다양함이 인정되는 우리나라의 정책에 새삼 만족스러움 까지 느꼈다. 우린 자신의 것을 주장하는데 소신은 물론 목숨을 걸기까지 한다. 특히 종교의 차이는 이러한 배경을 더욱 어렵게 만들곤 하는데 종교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가 사랑이라면 타인이 가지는 모순성도 인정함으로 자신의 사랑이 완성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타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서로간의 최소한의 배려라는 생각,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마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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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반 반군에 의한 한국인 인질 사건이 10일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인질 한명인 담당목사가 희생되었다. 이 가운데 아프카니스탄의 남부 지역 곳곳에서 다국적군과 탈레반과의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고잇다. 이런 모든 것들이 역사적으로 종교간 뿌리깊은 갈등으로 인한 충돌인가, 아니면 이 책의 저자가 말했듯이 세계자본주의 라는 보편적인 문화와 이슬람교라는 특수한 문화가 충돌하여 만들어진 갈등인가.
저자는 영국 유대교 최고의 랍비이다. 우리에게는 낯선 유대교 현자의 지혜를 담고있다. 세계화 시대가 만들어낸 불평등의 차이를 지적하고, 세계화 시대를 파괴적인 전쟁으로 물들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와 심각한 충돌을 빚을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을 열어야하며, 때로는 그들의 고통과 모욕감과 원한을 귀담아 들을 줄도 알아야하고,그들이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대화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새삼 일깨워 준다.
정치, 경제와 과학이 지금의 현실을 해결할 수 잇는 대안이 될 수 없다면 종교가 그 대안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차이는 인간 가능성의 영역을 감소 하는게 아니라 확장시킨다. 모든 사람이 동일해야 한다는 바람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을 때에 비로서 우리는 위협과 두려움의 감정에서 생겨나는 문명간의 충돌을 막을 수 있을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너와 나의 차이를 생각하고 지금의 우리를 생각한다. 정치의 힘이든, 경제의 힘이든,아님 종교의 힘이든 인질로 잡혀있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조속히 풀려나기를 두손모아 간절히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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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리뷰어로 선정되어 읽게된 책이다. 신청 동기는 책 제목이 너무 맘에 든 까닭이었는데, 내가 지금 고민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타인과의 소통에 있어 의견이 맞지 않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을 보게될 때 거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편이었다. 물론 드러내놓고 그런 표현은 하지 않지만 맘 속에서는 어느 정도 선을 그어 놓고 생각을 접어 버린다.
아마도 그런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보면서 꼭 내가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필요성을 느낀 것 은, 리뷰어로 선정된 것은 내게 무지 큰 행운이지 싶다. 이렇게 내 손에 들어 오게 된 '차이의 존중'은 사회, 정치, 경제 모든 면을 아우르는 내용의 방 대함과 깊이에 독서력이 짧은 나로서는 당황스럽고 주눅들 수밖에 없기도 했다. 어찌되었는 나는 이 책을 다 읽었고 저자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부분에 대해 전부를 이해하고 공감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나는 내 생활에서 느끼고 내 주변, 내 환경에서 내가 경험 했던 부분과 비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많은 부분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다. 세상은 우리가 변하고 적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우리가 이해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는.. 이른바 세계화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책은 그런 세계화와 세계화가 불러일으킨 도전, 기회, 고통, 그리고 세계화가 초래한 저항 과 분노에 대하여 우리가 대처 해야할 방법과 자세를 역설한다. 그 중에 ‘차이’는 인간 가능성의 영역을 감소하는게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며 자신의 애착이 얼 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다른 사람의 애착도 존중할 줄 안다는 것,,이렇게 생긴 인간에 대한 깊 은 이해는 결국 중재와 갈등 해소, 화해와 평화를 구현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화 시대의 경제와 정치는 도덕적인 차원과 긴밀한 관련이 있으니 세계의 다양한 종교 공동체가 막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종교의 역할이 그 어느 시대보다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너와 나의 차이가 작게 하는 게 아니라 크게 하는 것임을.. 평화의 토대는 통일성이 아닌 다양성이라는...
나는 이 말을 깊이 깊이 이해하고 인정하며 인정하자고 말하고 싶다.
<읽고싶어진 책: 문명의 붕괴, 역사의 종말, 문명의 충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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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무얼 헌팅턴의 책 '문명의 충돌'이 번역되었을 때, 그의 주장에 대해서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세상사를 보는 그의 시각이 너무 인위적이고 단순하다며 비판을 가해 대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억을 새롭게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현재도 진행중인 아프간 인질사태나 이라크 전쟁, 911 사태등을 보고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하기 합니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 자본주의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라는 큰 틀이 세계에 얼마나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외침을 들려준 사건들인데, 많은 사람들이 원인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 하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해결책에 대해서는 귀기울일만한 의견들을 내 놓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단견도 결국은 이 분야에 대한 내 지식이 짧아서 일 겁니다, 아마도.....
이라크에서의 김선일이라는 우리 청년의 죽음, 그리고 두명이 풀려나긴 했지만 두명이 희생되고 여전히 진행중인 아프간에서의 우리 인질 사태를 생각한다면, 굳이 거창한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라는 개념을 뒤적여보지 않더라도 그 의미만큼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결국 그 의미가 살이 찢기고 피가 튀기는 삶과 생존, 그리고 죽음과 투쟁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갈등과 긴장의 현장에 희망의 씨앗 하나를 뿌리는 저자의 노력이라고 해도 될 듯 합니다. 누구나 문명의 충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그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조금 고민하고 있는 그 지점에서 저자는 '차이의 존중'이라는 개념을 통해 모두에게 이득이 되고 풍요로울 수 있는 평화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문명의 충돌을 넘어설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으로 삼는 것은 아마도 종교인 듯 합니다. 저자는 요즈음 많은 비난을 받는 세계화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에 대해서도 방향은 옳다고 말합니다. 즉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만큼 인류를 빈곤에서 벗어나 풍요로 이끈 제도는 이제껏 없었다고 단언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세계화도 인류가 더 풍요로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다만 문제라면 양극화, 즉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 부의 쏠림 현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는 저자도 분명한 이의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현재 세계를 지탱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문제들을 자신의 종교-유대교-를 통해서 새로이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한 노력이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각자 나름대로 세상에 공헌하는 바가 있는 것이고, 또 그렇게 공헌하는 바는 하나같이 소중한 것이다..... 우리의 태고적 본능은 차이를 위협으로 느낀다. .....이상한 이야기지만, 교환(거래)를 통해서 차이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된다는 대단히 심오한 정신적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은 시장이다. 차이가 전쟁으로 이어질 때는 쌍방 모두가 패배한다. 거꾸로 차이가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는 양쪽 모두 승리하는 것이다'
이것이 차이를 존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있는 표현입니다. 나와 같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고 틀리다거나 교정하라고 강요한 데서 온 많은 역사적 오류와 아픔들에 대한 예는 역사책 곳곳에 널려 있는데,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충분히 비극적이지 않을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인류의 풍요를 위해 내달리는 자본주의가 지금 내뿜는 문제는 인간적응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 및 문화적인 현상들의 변화이고, 결국 사람들에게 그것을 극복할 안정감이나 정체성을 붙들어줄 대안은 니체가 죽었다고 했던 신의 영역 즉 종교안에 남아있습니다. 결국 현대로 들어서면서 종교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중요시하는 정치나 경제가 '무엇'이나 '어떻게'에 대한 대답을 줄 수 있지만 '왜'는 알려주지 못하고, 오직 종교만이 그 대답을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종교안에서 제시하는 개념들, 통제, 자선, 창조성, 협동, 보존, 화해 등이 자신과 다른 모든 이들에게 확대되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즉 종교가 추구하는 지향점임을 강조하며 저자는 그것들을 통해서 세계화의 문제점과 문명간의 충돌을 해소시키고 서로 어깨를 마주하고 나설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종교안에 이미 하나님의 차이에 대한 존중이 있었고, 이러한 개념에 대한 열린 마음을 통해서 현재 세계를 전율로 몰아넣고 있는 서구자본주의와 이슬람의 충돌이라는 위험도 화해와 평화의 노래로 바꿀 수 있으리라는 주장이겠지요.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내용들에는 너무 종교적이고, 학구적인, 또한 현실보다는 이상에 치우친 면이 있음을 짧은 나의 소견으로도 느끼게 됩니다. 광야에서, 또는 고독속에서 홀로 외치던 이스라엘의 선지자적인 느낌이 드는 면도 있구요. 그렇지만 그러한 외침 속에,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지혜로운 길 하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어떻게 메꿀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여전히 남기는 하지만, 의외의 곳에서 평화의 빛이 밝혀지기도 했으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