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움베르토 에코와 장미의 이름의 팬이라면 몇천원 쯤이야, 별 것 아니긴 하겠지만. 움베르토 에코의 특성상 어떤 '비밀'이라든가 소설 내 내용에 대한 작가의 해석 따위를 붙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뭔가 '밝혀지는 것'은 없다. 주로 장미의 이름 창작시의 작은 일화나 창작에 근거가 된 경위 및 사료들, 그리고 저자의 소설 창작에 대한 일반적 조언(하지만 사실 특별할 건 없다. 다들 알고 있는 것이니까) 등이 쓰여져 있다. 별 건 없지만, 평범하고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움베르토 에코가 쓰면 신기하게도 뇌리에 콱 박힌다. 그런 것을 원한다면 이 책을 사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소설가이거나 소설가 지망생이라면 이 책이 만원이 넘어도 사야 할 것이다. 단, 장미의 이름을 보고 뭔가 궁금해서 이 책을 고른 사람이라면 돌아가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작품이 끝나면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해석을 가로막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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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한마디로 어려운 소설이다. 그렇지만 그냥 어렵다고만 할 수도 없는 소설이다. 어렵다는 얘기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고, 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람은 아는만큼 보인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만약 독자가 많은 지적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자가 주려는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구입했다. 내가 잡지 못한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데, 그런 목적에서 이 책을 보기 시작한 나는 깜짝 놀랐다. 대뜸, 소설의 저자는 자신의 소설을 쓴 후에 죽어야 한다는 식의 말을 하며 소설에 대한 논평은 없고 단지 소설쓰기와 소설 자체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약간의 구조화를 통한 나열을 해 놓은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아마도 내가 뭘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려하는데) 움베르토 에코가 왠지 이중적으로 느껴졌다. 어찌보면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솔직한 일기와도 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자신의 현학적 지식을 내보이기 위한 책이라는 느낌도 자아내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전공을 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무런 설명 없이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많은 현학적 분장들. 글쎄, 만약 내가 우리나라 옛 성인들의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그의 사상들) 예를 들며 '아무개의 논리와는 다르게 또다른 아무개의 의식의 흐름과 같다' 라고 한다면 과연 몇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아무도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만약 단순한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고 남들보다 한단계 높은 의식수준을 가지고 있다면 좀 더 일반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책이 한 박식한 학자의 지적 유희로 보이기 보다는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나의 기호학집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똑똑한 사람은 어려운 말을 쉽게 하고, 멍청한 사람은 쉬운 말을 어렵게 한다"는 사실을 믿고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텐데. |
| "화자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해석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소설을 쓰지 말 일이다. 소설이라는 것은 수많은 해석을 발생시키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작품을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 고결한 원칙을 지키는 데엔 한 가지 장애가 있으니 그것은 모든 소설에는 제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자신이 쓴 <장미의 소설>이라는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과 의문이 난무하자 이에 도움을 주고자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책을 써냈다. 그러나 그가 말했듯이 작가는 자기 작품을 해석해서는 안된다.이미 완결한 소설은 하나의 텍스트로서 독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다. 독자는 내던져진 텍스트를 접하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파악하고 해석한다. 많은 독자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접하기 때문에 내용에서 빚어지는 커다란 견해차이는 없겠지만 이 소설은 충분히 많은 질문을 독자에게 던져놓았고, 독자 스스로 그것을 생각하도록 열어두었다. 논쟁이라고까지 할 건 없지만 해석의 여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유일하게 텍스트에 해석을 가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에코가 지적했듯 소설의 '제목'이다.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많은 의문을 불러왔다. 왜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가. 장미가 가지고 있는 서양 중세의 여러가지 의미와 또 '장미'가 아닌 '이름'에 부여되는 해석학적 문제들. 그것을 도라 이름 불렀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 와 같은 문구도 이름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셰익스피어는 "이름은 별 것이 아니다. 사물의 본질 그 자체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바 있다. 베르나르도 "어떤 사물에 제멋대로 붙여진 딱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며 셰익스피어의 견해와 같이 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 '장미'는 덧없다. "강력하고 매력적이고 마력적인" 이름 '장미'. 그것 역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미의 이름'이란 어쩌면 이름의 덧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런지. 사물은 제 각기 이름을 가지고 있다. 책상은 책상이요, 연필은 연필이요, 하늘은 하늘이지만, 그것은 갓 태어난 개새끼에게 '뚱띠' 와 '아롱이'라고 이름 붙인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하늘을 밥이라 하고, 밥을 똥이라 하며, 똥을 선물이라고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언어소통의 어려움의 문제가 발생하겠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름의 덧없음'과는 또다른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어찌 되었건 이미 '장미의 이름'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그 자체만으로 많은 해석의 문제를 불러왔다. 작가는 벌써 이렇게 제목을 통해 작품에 해석을 가하고 제목에 대한 해석의 논의를 끌어냄으로써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독자에게 던져져야한다. 제목은 어쩔 수 없다해도. 작가의 텍스트에 대한 침묵은 독자에게 텍스트를 잘못 해석할 기회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면 텍스트를 잘못 해석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런지도 모른다. 애초에 '잘' 과 '잘못'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것의 차이가 있다면 이는 이미 텍스트의 해석에 대한 정답이 따로 존재한다는 전제를 바닥에 깔게 된다. 독서란 바로 이것이다. 텍스트의 해석. 하나의 소설이 엄청나게 많은 독자의 손에 쥐어지고 독자는 각자 소설을 읽으며 나름의 의미를 찾는다. 즐긴다.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 그것이 바로 '독서'다. 에코는 그렇게 말한다. "작품이 끝나면 작가는 죽어야 한다. 죽음으로써 그 작품의 해석을 가로막지 않아야 한다"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 대한 <장미의 이름 읽기>라는 책을 내놓았지만, 이것은 해석의 차원에서 낸 것이 아니다.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토록 하기 위해 낸 책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텍스트에 대해 모범 해석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잘'과 '잘못'은 생성된다. 하지만 에코의 이 작업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이해를 '제대로 시키기 위한 것'과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는 정답을 상정한 데 비해 후자는 그저 각자의 해석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할 뿐이다.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을 읽고 난 뒤에 쏟아지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책이다. 그러나 해석은 하지 않고. 제목과 의미, 집필 과정의 기술, 중세, 가면, 누가 말하는가, 행보, 독자, 소설의 재미 등등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나 과정, 그리고 이와 관련된 여러 주제들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장미의 이름>을 다 읽고 난 뒤, 많은 의문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이 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으며, 이 책은 충분한 대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곁가지 이야기들을 제공함으로써 더 깊은 사색의 장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것은 추리소설이자 역사소설이자 철학소설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는 이 책으로 초대한다. |
| 책의 내용을 작가가 해석해 주어서는 안된다는 말은 절대적으로 공감가는 소리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작가는 왜 글을 쓰는가? 독자가 작가에게 무턱대고 "이 책,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은 큰 실례다. 그는 그 의미를 해석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곧 "당신의 책은 그 의미를 이해하려 시간을 들일 가치도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 작가는 자신의 글을 읽고 독자가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을 즐긴다. 틀린 해석을 비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글이 독자의 의식에 파장을 일으키고 상상을 낳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해석에 감탄하는 것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피드백(feedback)-- 작가의 심정을 에코는 시원시원하게 말해주었다. 글이 글을 부른다. 중세풍 말투, 시대 설정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정말 새로운 발견인 부분은 제목결정의 문제이다. 제목으로서 주제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숨길 수도 있고, 작가가 의도하는 또 다른 의미를 넣어둘 수도 있다. 제목설정의 묘미를 처음 깨달았다. 창작노트라는 이름답게, <장미의 이름=""> 집필 뒷 이야기를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장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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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하나가 완성이 되어 우리에게 책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연구와 창작자의 노력이 필요한지를 가늠할 수는 없다. 창작이란 과정에 투여되는 심혈은 어떤 작가에게나 힘든 여정일 것이다. 그러나 심증적으로만 이해할 뿐, 잘 짜여진,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수록 그 과정은 가려지고, 그저 '대단한 작가', '천재 작가'라는 이름으로 위대한 도전은 포장된다. 작가란 작품 안에 자신이 그리는 세계를 투영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작품에 대한 체계가 잘 짜여진 작가일수록 보다 완벽하게 자연스럽게 세계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움베르트 에코의 명석함은 [논문 잘쓰는 방법]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은 우리에게 논문이라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기 위해 어떠한 마인드와 질서가 구비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명증하고 있다. 훌륭한 선생에게 논문 지도 교수를 받는 것처럼, 이 책에서의 그는 학자적인 기질이 본성처럼 묻어 있다. 완전한 세계란, 모든 것이 최고의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의 위치를 현실에 가깝게 배치하는 완급의 조절이야말로, 완전한 세계를 만드는 지침이다. 그런 점에서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는 작품 속에서 드러내지 못했던 에코의 고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한다. [장미의 이름]을 보면서 놀라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시대 배경에서부터 인물의 독창성, 사건의 흥미도는 물론이거니와 주제의 신선함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 무엇 하나 빠져 있는 것이 없이 독자를 완벽하게 흡입하는 이 작품에서 빠져 나와 십여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현실 속에서 [희극론]의 존재가 궁금하다. 긴 여운까지도 이 책은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나면 [다빈치 코드]나 [영원한 제국]과 같은 소설과 영화에 대해 유사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다 [장미의 이름] 덕분인 것 같다.) 그리하여 역사를 보다 생생한 삶으로써 이해하고, 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속내를 드려다 보게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소설에게 큰 도움을 받는다. 책은 [장미의 이름]의 제목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가 어떤 생각의 길을 걸었는지를 보여준다. 애초에 작가는 이 책의 제목을 [멜크의 아드소]로 짓고 싶었다. 제목이란 독자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기능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 도리어 헷갈리게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 작품 자체를 해석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작가의 생각에 그나마 가장 독자를 존중한다고 볼 수 있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작품의 이름으로 내새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제목이 가지는 함축적이고 상징성이 풍부한 가치에 집중하며, 단테의 <신비스러운 장미>라거나 <장미 전쟁>이라거나 <장미 십자단>이라거나 하는 '장미라는 상징'에 집중하는 에피소드는 흥미롭다. 그리고는, 왜 그가 중세에 집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과 집필시의 입장에 대한 에코의 표현 - 나는 중세에 <대해서>쓰고자 결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세 <에서> 쓰기로 결심했다 - 은 그의 작품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까지를 고민하였는지를 말해준다. 중세라는 가면을 쓰고, 중세 사람이 되어 중세를 말했던 것. 또, <우주적인 사건으로서의 소설>에서는 이 책의 주제와 언어에 대한 명확한 구분법과 인식을 설명하며, 하물며 현대인이 아닌 중세의 사람이란 '어떤 언어로 이야기할까'라는 디테일에까지 미치는 그의 고민의 손길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책에 대한 신뢰감을 증폭시키는 데 한 몫 한다. 이 책 [창작노트]는 마치 DVD에서나 볼 수 있는 보너스 트랙이나 비하인드 스토리처럼 읽는 이로 하여금 자잘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 책이 주는 특별한 점은 원문과 원작을 해체하거나 영화 또는 소설이 주는 환상 속에서 빠져 나오도록 하는 역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창작노트]를 통해 [장미의 이름]은 더욱 넓고 큰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움베르트 에코라는 현대를 사는 중세인이 우리에게 던지는 철학과 사상이 담겨 있어, 이 책을 단지 원저의 부속서로써 폄하할 수 없도록 하는 매력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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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코의 창작 노트를 읽으며 가장 놀란 것은 그가 아주 간단한 소재로부터 소설의 기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에코는 1978년 한 수도사를 독살한다는 막연한 아이디어에 자극을 받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간단한 소재에 살을 붙여야 했겠지만. 고백하자면 나는 에코가 유럽 중세의 종교적인 사회상을 통한 인간의 내면을..어쩌고하는 어려운 주제를 먼저 설정해놓고 소재를 찾았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작품을 쓰는 것이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말따위는 없다. 그가 어떻게 준비를 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리얼리티를 위해 어떤 조사를 했으며 어떤 자료를 참고했는지만이 나올 뿐이다. 그는 알아볼 수 있는 모든 루트를 다 이용해 자료를 동원했고 지하실에서 걸어가며 대화하는 부분은 직접 걸어가며 거리와 대화의 시간을 체크해서 대화의 내용을 정리했고 미로를 만들기 위해 중세의 많은 미로그림을 참조했다. 글을 쓸때 어떻게 자료를 준비하는 가에 대해 쉽고도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또 에코는 소설이란 무릇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작품의 다의적인 해석에 작가가 일일이 개입하지 않도록 차라리 죽어야한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때로 영화감독이나 소설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나 어떤 부분에 해해서 해석을 말할 때가 있다. 이 언급은 감상자의 자기해석을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다. 또는 감독이나 작가의 해석과 다를 때는 아예 잘못된 해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에코의 작품관이 맘에 든다. 창작노트는 [장미의 이름]의 뒷이야기이기도 하고 또는 에코의 작품관이 담긴 짧은 노트이기도 하고 글쓰기의 여러 방법에 대한 실례이기도 하다. |
| 장미의 이름을 다 읽는데 거의 일년이 걸렸던 것 같다. 초반부에 밀려 한동안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기 시작한 그책은 예상보다 빨리 그 끝을 보여주었고, 그 여운이 남아있을 때 이 책을 집게 되었다. 단순한 해설서일거라고 짐작해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작가가 직접 쓴,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움베르트 에코라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단순히 책의 내용이나 숨겨진 의미의 주석을 벗어나 글쓰기에 관한 또 다른 문제들을 제시하고 생각해보게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가지는 의미, 내용의 설정, 그리고 간간이 등장하는 사진은 책 속의 부조 묘사등의 실체를 시각화시킴으로써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론 이 책에 대해서 뭔가 상세하고 세부화된 해석이나 창작의도 따위를 기대했다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장미의 이름 이라는 책과 작가 움베르토 에코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
| 시간의 흐름과 사건의 진행을 거꾸로 훑어가는 영화 '메멘토'를 극장에서 보고 머리가 깨질듯이 고민하다가 나중에 비디오로 출시되었을 때 부록으로 첨가된 영화해설을 보고나서야 이해했을 때의 기쁨.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를 접하고 느꼈던 감정이 그때의 기쁨과 비슷했다. 이 책은 '장미의 이름'출간 이후에 쏟아진 독자와 비평가들의 질문을 작가가 직접 설명해놓은 해설서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감독이나 작가들이 자신은 작품으로만 말한다면서 거드름을 피우는데 비해 움베르토 에코는 참 친절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푸코의 진자'도 꼭 창작노트가 출간됐으면 좋겠다. '장미의 이름'보다 더 어렵게 읽은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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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은 그동안 이윤기님이 두번이나 번역하고, 또 장미의 이름에 대해 토론하는 동호회가 생길 정도로 기호학적 가치가 높은 책이다. 우선 책의 제목부터 시작해서 책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관한 정확도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장미의 이름 서두와 작가의 말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작노트에서도 책의 제목이 우선 화두다. [풀섶에 자라는 붉은 장미여/빛에 씻긴 진홍 색깔과/그 농염하고 향기로운 자태를 자랑한다만/아니다. 내 바르게 이르거니와/너의 불행은 목전이다.-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처럼 에코의 글은 에코가 살고있는 사회와 그 시대를 떠나서는 이해가 어렵다. 비록 중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코가 책을 저술하는 시점을 떠나서 중세를 알려고 하면 책의 일부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역시 움베르트 에코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 이탈리아와 세계의 흐름측면에서 본다면 제목과 구성, 그리고 마지막 결말처리방식이 얼마간 이해가능하다. 그러나 창작노트를 보면서 책의 제목을 만들기까지, 그리고 수도원의 배치, 인물들간의 대화의 길이, 인물들의 창조배경을 듣고 있노라면, 학자로서의 에코만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에코에게서 창조자의 존경을 느끼게 된다. 장미의 이름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도 에코의 글쓰기방법에 관해서 알고자 하면 필독을 권한다. 장미의 이름과 따로 읽는다고 해서 본책의 흐름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인상깊은구절] 내 소설에 나오는 대화의 길이는 대화에 허용된 시간과 정확하게 일치하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령 두 사람이 식품 저장고에서 회랑까지 걸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경우, 나는 대화의 길이와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면서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적지에 이를 만한 시각에 그들의 대화도 끝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