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미술과 문학과 달라서,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가 없다. 때문에 평론가의 역할이란 것은, 이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음악이라고 하는 것을 설득력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감상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특히 고전 음악의 경우, 그 어법이나 형식 미학이 정교해서 평론가의 역할이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과 현명한 안목이 평론가에게 요구된다. 평론가도 똑같이 감상자가 되어선 깊이 있는 통찰이 불가능하다. 그 역시 악보를 보고 연구를 하고 필요하면 연주도 하면서 작곡가나 연주자와 근접하게 스스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평론가의 경우, 이런 전문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대개가 예전부터 음악을 사랑하여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보유한 음반이 많고 콘서트도 많이 가봤기 때문에,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감상 이력을 가졌기 때문에 자칭 평론가입네 하면서 펜촉을 마구 휘두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순열의 글을 읽으면서 도대체 이 사람은 무얼 믿고 평론을 하는 것인지, 전문적인 식견은 차치하더라도 최소한의 논거도 없이 비난의 필봉을 휘두르는, 한슬리크의 동양에의 재래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이 무지막지함을 도저히 감내해낼 수가 없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카라얀은 화려하기만 하고 속은 텅텅 빈 사기꾼 같은 녀석이고 아바도는 오디오파일들의 입맛에나 맞는 무능한 지휘자, 번스타인은 아무리 들어도 원숭이 같은 재주꾼, 무터는 프레빈과 블루스나 추면 딱인 한심한 사람이고, 하이페츠와 로스트로포비치는 손오공 류의 묘기 밖에 구사할 줄 모르는 천치이다. 아울러 자신의 심미안(?)에 반발하여 조금이라도 이들을 변호하는 자들은 무식하고 식견없는 도당이요, 자신의 순음악적인 가치관만이 모든 음악을 재단하는 전가의 보도이다.
나는 위에 언급된 음악가들의 팬도 아니고 변호할 이유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남도 똑같이 그러하기를 바라는 건 오만이다. 내가 이순열에게 요구하는 것은 카라얀이나 로스트로포비치를 좋아해달라고 하는게 아니다. 최소한, 그런 평론을 할 때에는 근거를 들어 달라는 말이다. 나는 이순열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관심이 없고 이순열이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가 더 궁금하다. 하지만 이순열은 <음악동아> 편집장으로 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생각에 대한 근거를 말한 적은, 단언하건데 단 한 번도 없다. 그저 자신의 편견을 수십년동안 되풀이, 확대 재생산할 따름이다.
"음악은, 예술은 느끼면 그만인데 근거를 또 들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순열은 평론가이다. 평론가는 대중을 향해 말하는 사람이며(評과 論에는 모두 言자가 들어간다) 자신의 말에 대해선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오랫동안 권위있는 평론가로 군림하면서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질 줄도 모르고 근거없이 무분별한 말만 쏟아내는 이순열은, 평론도 아닌 테러리스트, 낙서꾼에 불과하다. 막연한 느낌을 논리적으로 구현해내서 그것에 설득력을 불어넣는 것이 평론가가 할 일이다. 이순열은 이런 직분에 충실한 적이 있었는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업적이다", "현시적이다" 하는 것이 과연 음악적 논거인가? 아무리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무논리'만큼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나는 이순열과 그를 비롯한 '구세대' 평론가들 때문에 근거도 없이 카라얀과 번스타인을 싫어하던 때가 있었다. 음악을 듣지도 않았는데! 그러다가 우연히 카라얀의 브루크너와 번스타인의 차이코프스키를 듣고 서서히 주입된 편견을 씻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순열에 비해 훨씬 경력이 일천하고 미력한 사람일텐데, 그런 이조차도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이순열에게 근본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뒤로 일절 이순열의 글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함량 미달의 평론이라고 사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순열의 새 책에 대한 궁금증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도서관에서 읽게 되었는데, 역시나 그는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에겐 배울 것도 가져올 것도 없었다. 부디 바라건데 앞으로 나올 신세대 평론가들은 혜안과 탁견을 겸비하여 선배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
* 이순열은 나보다 수십세 많은 어른이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어투에 비추어 '씨'나 '님'같은 존칭은 생략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말해도 할 수 없다. 뉴스에나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전 시장"이지, 평소에는 "노무현이, 이명박이"라고 하듯이. |
|
전보다 경제여건과 생활여건이 전반적으로 나아지는 여파로서 생겨나는 현상이 바로 일반인들의 여행과 음악, 미술 등 예술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한다. 먹는 것이 넘쳐나니 이젠 그 중에서도 더욱 귀하고 몸에 이로운 웰빙 음식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연유이기도 하겠지만, 어릴 적에는 소위 음악과 미술에 대학 작품을 접해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눈에 뵈는 어른들은 모두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늘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고 자란지라 소위 공인된 ‘예술’이란 단어를 접해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한편 이런 이유 때문에 늘 물과 들과 산, 나무, 바람, 여명 등등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체험할 수 있었고, 이는 평생 살아가면서 세포 곳곳에 유전인자처럼 박혀있어 정서와 감성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번엔 이런 책을 추천받았다. 소위 좋은 음악 100여곡을 선정하였고, 한 곡당 세 가지의 연주를 비교하며 음악의 멋을 설명하려 하였다. 문득 문득 생각했던 것이, 나는 언제나 소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과 식견을 가지고 음악을 들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종종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음악은 삶에서 필요한 것임을 생각했다는 말이다. 마침 집에는 최근에 아내가 사둔 클래식 명곡 100선이라는 타이틀의 CD전집이 눈에 띄었고, 책에 언급한 곡이 있을 경우 들어보면서 책을 읽었다. 이미 어디선가 들었던 곡이 많아 안도(?)를 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소위 클래식 음악의 매력은 나를 뒤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골 계곡의 폭포수와 한여름의 매미 소리의 어울림 같은 자연의 음악은 인간이 만든 음악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하는 감동이 있는 것이었고, 때로 잠결에 들었던 소 울음과 동네 아이들의 술래잡기 놀이 소리는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음악이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음악은 정적(靜寂)을 지향한다.”는 말은 참으로 내겐 설득력이 있다. 둘러보면 너무 시끄런 세상이 되었다. 도무지 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마포 어떤 빌딩의 15층 창가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나는 뒤를 돌아보면 자동차의 크락션 소리와 자주 보이는 데모대의 외침 소리, 그 밖에도 문명이 만들어 놓은 소리들은 정말로 인간이라는 것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침묵이 좋았다. 텅하니 영혼과 육체 속에 빈 공간을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안의 한 공간에는 소위 아름다운 악기로 만들어 놓은 음악들을 조금 들여놓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참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책은 대단한 것을 가르쳐 주진 않았다. 그리고 100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으로는 나를 음악의 길을 인도해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를 통해 몇 곡이나마 구체적으로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하였고, 종종 여행 때에 들을 헤드폰을 하나 구입하는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곤 하였다. 소위 예술분야의 대가들을 보면 참으로 그 얼굴과 언행이 맑고 천진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예술이 인간의 근본을 알아가는 연습이라는 것이고, 이것은 종교적으로 해탈이나 구원의 다른 방식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기왕 사는 삶, 천진한 웃음이 자연스레 몸에 벨 수 있을 정도로 삶에 경건했으면 좋겠다. |